날마다 죽는 삶이 개혁이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껍질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뱀은 1년에 한 번씩 허물을 벗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상처를 입거나 병에 걸려서 그 해에 껍질을 못 벗게 되면 자기 껍질에 자기가 갇혀서 그 다음 해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에도 이처럼 개혁의 껍질을 벗지 못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성장주의와 대형화 그리고 세속화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본질추구 보다는 외적인 성장과 교세확장이 더 중요한 목표가 되었고, 점차 성장하는 것이 능력이며 커지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복음의 본질은 사라지고 긍정의 힘만 난무하는 모습으로 신앙은 점차 변형되어 갔습니다. 3박자 4박자 5박자 구원과 같은 기복신앙과 인본주의적인 복음이 마침내 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변두리로 밀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비극적 현실입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많이 성장하고 화려해졌지만 복음은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의해 뒷전에 밀려 그 위에 먼지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제2의 혹은 제3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높은 적도 없을 것입니다. 예배갱신, 목회자 의식 개혁, 기독교제도개혁 등등 ----. 오늘도 많은 사람이 개혁을 하겠다고 저마다 외치고는 있지만 노력하는 만큼 결과는 미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혁은 먼저 자신의 병들고 부패한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아무리 제도개혁이 있어도 그 제도를 운영할 사람의 개혁이 없으면 그것은 개악(改惡)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개혁은 상대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나로부터의 개혁입니다. 이슬람의 성자 ‘수퍼 바야지드’라는 사람은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바야지드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 먼저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변하면 주변이 변하고, 세상도 변화하는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루터가 처음부터 천주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진리를 향한 그의 폭발적인 열정에 불을 지피는 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 건축완공을 위해 현금을 모을 목적으로 면죄부 판매를 허락했고, 테첼(J. Tetzel)이란 수도사가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돈 궤짝에 ‘땡그랑’ 하고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그대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루터는 격노했습니다.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모르나 그것을 깨달은 이상 테첼의 주장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다. 그래서 그는 면죄부 판매인과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와 논쟁을 벌일 논제 ‘95가지’를 분노에 차서 써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단지 면죄부에 대한 테첼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을 뿐인데, 결과는 전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루터의 주장은 당시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술의 도움으로 독일을 넘어 전 유럽으로 들 불처럼 확산되었습니다. 아무튼 중세 천 년의 천주교 아성에 도전하는 종교개혁은 루터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루터라는 개인의 신앙적 변화가 없었던들 종교개혁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희생과 피를 흘려 귀하게 얻은 개혁의 결과인 오늘의 교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현대교회는 부자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일만악의 근원이 되는 돈을 교회안에 너무 많이 쌓아둡니다. 은과 금이 많은 교회안에는 예수님이 계실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건물 짓는데 너무 돈을 많이 써서 가난한자와 소외된 계층을 구제하지못하고 오히려 헌금액수에따라 성도를 구별하고 차등하여 헌금의 열심을 경쟁시킵니다. 뿐만아니라 복음을 “인스턴트” 싸구려 복음으로 전락 시켰고 예수님의 권위를 초등학교 선생님정도로 신적권위를 떨어뜨려놓았습니다. 이모든 현상을 신학적단어로 심판한다면 사이비입니다.
부끄러운 이 현실을 드러내놓는 필자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힘들지만 상처를 드러내 놓아야합니다. 저 자신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두가 책임져야하는 현실입니다. 설교를 할땐 하나님을 위하여 목회에 충성하는것이라 열변을 토하지만 돌아선 자신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팔아 생긴 권력과 재정으로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세속경영의 극치인 교회를 세습의 도구로도 사용합니다.
카톨릭은 오히려 위장개혁이라도 하는데 개혁된 개신교회는 오히려 카톨릭으로 다시 돌아가고있는 분위기 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처럼 곧 개혁이 개신교회의 중요한 ‘아젠다’(agenda)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패한 개혁의 특징을 보면 개혁의 대상은 항상 상대방이고, 제도나 구조와 같은 환경이고, 특히 자기가 모든 것을 고치겠다고 호언합니다. 그러나. 개혁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제도나 구조와 같은 환경이 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이 아니고 ‘나’입니다. 나로부터 개혁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상대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세상도 변합니다. 그리고 개혁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이순신 장군도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 (必生卽死)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죽여야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심, 교만, 욕심, 부정직함, 참지 못함, 질투심을 십자가에 스스로 못박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 나라의 모형이 지상(地上)에 현시된 공동체적(共同體的) 기구로서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爲)한 열정과 영혼(靈魂)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성령(聖靈)의 인도를 따라 행(行)하여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존재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믿음의 길이요, 날마다 죽는 방식입니다. 죽으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매일 삶에서 죽으면 열매맺는 삶, 풍성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죽지 않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자신을 죽이면서 교회에 충성하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날마다 죽어야합니다. 죽으십시오. 주님께서 살리십니다. 자신을 죽이십시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외치십시오.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맛봅니다. 참 기쁨이 있습니다. 영혼이 살고 영육간이 강건해 짐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죽음만이 진정한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이기는 개혁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joh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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