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생애”는 “희생의 생애”입니다.
희생이란 말의 뜻은 짐승을 산 채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산 제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희생의 생애란,그 삶의 주체가 인간에 대한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생애입니다.
인간을 안중에 두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내 몸과 내 재산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내가 마땅히 드려야 할 제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꺼이 그것을 결행하는 것,그것이 곧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희생의 생애”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간조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단지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만
몸을 바치는 생애는 희생의 생애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름다운 희생을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
희생은 산 제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제물로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그 제단에 바치고,
그리고 난 다음에서야 그러한 희생의 삶을 바탕으로
또 다른 봉사를 성실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divinity)이 먼저요
사람의 일(humanity)은 나중이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먼저요 도덕은 나중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는
사람을 깊이 그리고 순수하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필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밝혀 주며,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만들어, 그 결과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화목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지 않는
생애는 참된 희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척도는 희생의 척도와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의 발자취를 보십시오.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의 길이며 자기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동화 속에 있는 이야기 입니다.
옛날에 고슴도치가 살았습니다.
그 고슴도치는 다른 고슴도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모든 것이 다른 다람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람쥐는 고슴도치의 생김새랑 가시가 너무 싫어서 그 사랑을 늘
거부했는데,
고슴도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다람쥐도 어느새 고슴도치를
사랑해 버렸습니다. 둘은 정말 행복했었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고슴도치는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다람쥐를 안을 때마다 고슴도치의 몸에 붙어있는 가시로 인하여
다람쥐의 몸에 베어나는 상처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거든요.
고민 고민 하다가 드디어 고슴도치는
자신의 몸의 가시를 모두 뽑아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뽑기 시작했습니다
고슴도치의 몸은 붉은 피로 뒤 덮이고 아무리 심한 고통이 찾아왔으나
다람쥐를 위해 아픔을 참고 가시를 모두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고슴도치는 가시가 하나도 없는 몸으로 다람쥐를 안았습니다.
이젠 다람쥐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람쥐의 가슴엔 또 다른 감당할 수 없는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다람쥐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의 가시를 뽑느라고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그만 생명을 잃고 다람쥐의 품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고슴도치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통을 받았을까? 또한 고슴도치가 죽고 난 후 에야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던
다람쥐의 뒤늦은 후회와 아쉬움의 삶은 어떠했을까?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을 인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가시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도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가시를 제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신 죽어주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제거하지 못한 죄의 가시를
뽑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많은 피를 흘리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우리의 죄 값을 치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희생이고 거룩한 산 제사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프루드는 “희생” 이란 단어를
기독교의 제1요소로서, 그것을 신학 용어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은 인류 최대의 사건입니다. 누구를 위한 희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통째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한 사람 한 영혼을 사랑하고 용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살리기 위하여 가시면류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탕감 받기 위하여 채찍에 피를 흘리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희롱과 멸시천대를 감수하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당신을 위해 흘리셨습니다.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기독교를 탄압하는
로마를 상대로 저들이 오해하고 있는 예수님을 전하다가
베드로는 로마에서
로마군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진 후 매맞아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는 숨이 끊어질 때가지 복음을 증거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나무에 매달렸고
마가는 알랙산드리아에서 길바닥에 글려 다니다가 죽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 하였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에 맞아 순교 하였다
바울은 네로에 의하여 로마에서 교수형을 받기 전에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갔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고귀한 생명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천하를 주고도 바꾸지 않으시는 귀한 영혼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그 귀한 당신의 영혼이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감사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주님과 주님의 재단을 위하여 당신의 몸을 거룩한 희생의 제물로
드려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거룩한 희생을 감수하며 심는 당신의 기도는
즉시 응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누구를 위함인가
1.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찌해 쓰셨는가/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를 위함인가/희롱과 멸시 천대 어찌해 받았는가/고난과 죽음의 길을 어찌해 가셨는가
2. 골고다 험한 길을 어찌해 가셨는가 /십자가 못박히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어린양 보혈의 피 누구를 위함인가/끝없는 용서의 그물 그 사랑 잊었는가
예수 오 예수 나의 죄를 대속하신 주/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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