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위하여 네 이성을 제한하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해주시기 위하여 인생을 부르시는 은혜의 수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두 번째는 성령을 통하여 인생들을 부르십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인생들을 부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통하여 인생들을 불러 주십니다.
이러한 '특별한 섭리'는 주로 '삶의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는 예가 많습니다.
이제 등장할 회당장 야히로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사건]의 은혜수단입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부르심의 사역을 쉬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참예케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맛보게 해 주시고, 또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누리게 해 주시며, 영생의 소망으로 옷 입혀 주시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도 동참하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회당장 야히로라는 사람은 요즘 말로 목사와 장로 정도의 권한을 가졌고, 율법에 관한 한은 내가 관할하는 구역 안에서는 판검사 정도의 권력의 힘도 가진 소위 잘 나가는 회당장입니다. 당시 회당장은 매우 권위가 있고 책임도 막중했습니다. 회당장은 유대교 공동체를 잘 통솔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 줘야 했습니다. 매사에 어떻게 사는 것이 성경적인지 그 여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유대교에 출입하는 성도들 가운데 거만하거나 불경건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징계해야할 책임도 있었습니다. 유대교 신앙을 모독하는 자와 배교자를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과 책임도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 공동체의 결혼식을 엄숙하게 치러야 했고. 혹 이혼자가 있을 경우 그들의 소송도 원만하게 처리해야 할 책임이 회당장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 공동체에서 회당장은 막중한 책임을지닌자 였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 서른 살밖에 안 되는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발아래 엎드려 무릎을 꿇었습니다.참으로 이변입니다왜 이렇게 당당했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겠습니까? 죽어 가는 그의 12살 된 외동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병들었다는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 사람이 결코 예수님 앞에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무릎을 꿇을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히로를 외동딸이 병에 걸리는 사건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도록 만듭니다. 바로 이러한 사건 속에서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는 깨닫지 못할 진리가 있습니다.
망하지 않고는 부르지 못할 찬송이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고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습니다.
이 원치 않는 사건이 야히로를 겸손하게 만들고 진실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예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도록 만들었습니다. 야히로는 새로운 의미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 축복의 길. 성공의 발판입니다. 그런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험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자기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노상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딸이 죽었습니다. 아까는 병들었지만 지금은 죽었습니다.그런고로 예수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세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순간, 야이로는 대단히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됩니다. 신앙의 흔들림입니다. 믿음이 흔들립니다. 조금 전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희망이 무너져갑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이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고 있는데 왜 딸이 죽습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행진 속에 넘어지고 절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왜 일이 잘 안 되는 것인가요?
왜 기도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요? 왜 예수님을 믿어도 시험 당하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겁니까?
왜 하나님을 믿어도 이런 어려움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박국 선지자와 욥도 제기했던 질문입니다.
주님을 믿노라 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4장에서도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배을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때 가는 도중에 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바다 물결이 세지고 배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 배에도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외치는 소리에 예수님은 “왜 믿음이 없느냐”고 꾸짖으시면서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해지고 고요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면 반드시 세워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야히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며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왔을 때 야히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야히로에게 소망 찬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야이로로서는 끝났으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작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끝났으나, 하나님으로서는 시작입니다.
야히로가 보았던 의사로서의 예수, 기적의 사람으로서의 예수에서 이제부터는 메시아로서의 예수, 생명의 주로서의 예수, 생명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예수로 신앙의 차원을 높여야 하는 바로 그런 순간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Don't be afraid; just believe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명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위하여 네 이성을 제한하라."
네 이성을 제한하라는 말, 자신의 이성이 대단한 것 같아도 그것을 제한하라는 것입니다. 칸트가 누굽니까? 순수이성비평을 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이성적 판단, 자기 판단, 자기경험 자기지식, 과학적 능력, 다 버려야 됩니다. 마가복음11장에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 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시며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십니다. 질병이라고 하는 사건은 분명히 불행한 것이요 원치 않는 사건이지만 그 사건 속에는 하나님만 아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병과 죽음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의 사건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원치 않는 사건들이 임했을 때 두려워 말고 주님의 전능하심을 끝까지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승화시키고 우리의 믿음을 격상시키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십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 계속 슬퍼하면 일평생을 슬픔 속에 살아야 합니다. 절망을 당했을 때 계속 절망만 하고 있으면 절망의 부피가 커집니다. 결국은 절망으로 인해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고 믿으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 인생의 절망에 빠진 사람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제물로 피 흘리게 하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셨으며 이 대속적 희생의 피에 의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유하시고 죄인을 용납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유의 원리가 역사 속에 구현된 영원한 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구원 받은 인간들로부터 그 은혜로운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동기이며 목적입니다. 주님이 손을 대고 일어나라 하시면 모든 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그렀습니까? 그사건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계시기때문입니다.
1. 너 근심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2.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3.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4.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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