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찬양생활
예수님은 찬송가를 부르셨을까? 이러한 질문은 거의 듣지 못한다.그러나 이 질문은 교회음악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왜냐하면 교회음악을
논할 때에 이 핵심적인 물음이 제기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이다.예수님께서는 시편을 많이 부르셨거나 익숙하게 잘 알고 계셨다.이러한
것은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서 추측할 수도 있다.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 많이
있다. 다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시편 본문을 서로 비교하여 본 것인데,
어떤 것은 예수게서 인용으로 말씀하셨고, 어떤 것은 내용은 같되 표현이 다른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시편을 자신의 말로 삼아 하신 것도 있다.
(1)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며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심이니이다"(시 8:2).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16).
(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42).
(3)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 118: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 라"(마 23:39).
(4)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때 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마 22:44).
(5)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요 12:27).
(6)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내가 나를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요 13:18).
(7)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8) "내가 나의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 31:5).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시다"(눅 23:46).
위의 예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1, 2, 3, 6),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시면서(4), 하나님께 직접 말씀하시면서(5, 7, 8) 시편의 말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 "읽어본
일이 없느냐?"(1,2)하는 표현이 나오는데,이는
독서에 의한 시편접촉을 뜻하는 것이다.그러나 다른 곳들에서는 그런 말이 없이 그냥 시편이 인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어느 범위까지 시편을 노래로 하셨는지에 관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노래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막 14:26 이다."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여기에서의 저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다. 이들은 방금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주석서들은 이들이 부른 노래를 시 115-118편을 노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유월절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할렐(Hallel) 시편들
의 두번째 부분인 이 시편들을 부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들을 살펴보면, 시편은 예수님의 찬양이었음이 아주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시편은 당시 회당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었다.오늘날 말로 표현하자면,시편은 당시의 '찬송가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위에 열거된 예수님의 시편 인용이 예배적인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의 생활 가운데에서 나왔다는
점이다.특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니라 하는 부분은 예식의 일부로 보다는 생활의
일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생활의 찬양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양 역시 예배의식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행 16:25),생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성격의 것이다. 그 찬양의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신약에서는 이렇게 예배적 성격의 찬양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교회음악의 규범을 제시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되는 엡 5:19과 골 3:16도 공동체 내에서의 찬양을 말하고 있으며 어떤 예배적 틀을 생각하게 하는 면이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 여기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찬양하고"의 말들은 꼭 예배의 용어로서가 아니라 생활 가운데에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권면으로 나와 있다.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노래를 품고 다니느냐 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그러한 노래를 반드시 생활적이고 도무지 다른 것일 수는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이 예배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생활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있다.그것들은
동시에 "생활로 드리는 기도" 또는 "생활로 부르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경계는 항상 뚜렷한 것만은 아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고지를 받고
찬양을 하는데 그것은 예배적 사건이 아니었고,그녀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눅2:46).그녀의 찬양은 시편
113편과 매우 흡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이는 마리아 역시 예수님처럼 시편으로 찬미하고 사고했다는 것을 알게 하며, 시편이 당시에
광범위하게 일반화,생활화된 것을 알게 한다. 시편 113편으로 구약시대의 한나도 노래했다(삼상2:1).그런데 한나의 노래는 "기도"로 명시되어 있다.반면에 마리아의 찬양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로 시작하고 있어서 노래의
성격이 크게 부각되며, 음악사에서 Magnificat (라틴어
번역의 첫단어)라는 제목으로 많은 음악의 가사로 사용된 것이다.
시편 113편이 한나에게는 기도로, 마리아에게는
찬양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기도와 찬양의 정확한 구분은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예배와 생활의 정확한 구분도 불가능한 경우도 있는데, 특히 예배와 생활의 간격이
좁으면 좁을수록 이를 구분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바람직한 것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분을 어렵게 하는 곳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경우에 따라 '예배의 음악', '기도의
음악', '생활의 음악'등으로 분리하는 것은 구분상의 편리를
위한 것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런데 신약은 생활속에서 드러나는 찬양이 많음으로 인해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속의 찬송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측면을 예수님의 찬양을 예로 삼아 강조한 것은 '교회음악'에 관한 논의 자체를 거의 맹목적으로 예배와 결합시키는 것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생활 가운데서 발설한 시편 부분 가운데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모두 기도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 기도들은 모두 죽기 직전의 기도들이다.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마지막
두 부분은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 부분에서 노래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처절한 기도이자 예수님의 마지막 생활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은 생활의 찬양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만든다. 기도와 생활 부분은 예배의식보다 덜 규격적이며 유동적이다.예수님의 시편 인용은 성경에 나타난
상태 그대로와 비교해 보면 단편적인 인용이다. 그것은 때에 따라 선택된 말들이다. 따라서 기도의 음악과 생활의 음악은 더 동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이러한 상태는 완벽성과 거리가 멀 수 있다. 또한
기도와 생활에서는 집단적 성격의 예배음악에서 보다 개인의 표출이 더 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면은
공동체적 정신을 강하게 옹호하는 측면에서 보면 의심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절실함과 간절함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노래쪽이 더 유리하다.
많은 시편들이 개인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담은 것들이다. 이러한 노래들은 그 문법적 구조의
변함이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움으로써 회중의 노래가 된 것들이다. 회중의 노래를 만드는 것은
문법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감이었다.
이러한 찬양의 의미변화와 기능변화는 주목되어야 할 부분임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교회음악'을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 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찬양을 늘 함 께 생각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예배 때에 무슨
노래를 하느냐를 따지기 보다는 생활 가운데에 무슨 노래를 하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더 정확한 답을 가져올 것이다.
홍정수(장신대 교수, 음악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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