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예언자(豫言者) 또는 선지자(先知者)라고 할 때 갖게 되는 개념은 그들이 미래의 일들을 미리 알고 예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예언자가 갖는 성격의 한 부분만을 본 것이고 전체는 보지 못한 평가이다. 성경에서 예언자 또는 선지자라고 할 때, 그들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 즉 대언자(對言者)를 가리킨다. 특히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율법)에 근거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에 비추어 현재를 평가 또는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의 잘못들에 대한 대안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 되돌아갈 것을 권고하면서 미래의 회복된 모습, 또는 징계받은 모습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사역에 있어서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예언자들의 통찰력을 배워 말씀으로 미래를 조명할 수 있어야 하겠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부어 그들을 왕으로 즉위시키기도 하였고, 나단은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그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예언자들은 모두 왕과 밀접히 관련을 가지고 그들이 선조들의 여호와 신앙을 되새기도록 하였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와 정치에 관여하여 그것을 이끄신다고 하는 것을 확신있게 선포하였다.
1.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1) 엘리야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함께 아합 왕의 통치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는 몇 가지 큰 사건 속에서 백성들에게 야훼 신앙을 심어 주었다.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계속되자 아합은 이것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죽이려 했으나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일대 격전을 벌인다. 여기서 엘리야는 승리하여 이교 선지자들을 다 죽인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종교적 의미가 크다. 이것은 기업을 지키려는 언약의 가정과 개인의 권리를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엘리야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깊이 인식되어 끝날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말4:5).
2) 호세아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의 전 통치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여로보암 때는 북이스라엘이 옛 판도를 회복하고 번영을 누리던 호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때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심히 타락하여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섬기며 여로보암의 송아지에게 제사하였으며 지도자들은 더욱 부패해져 갔다. 호세아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번영과 풍요로움은 여호와께서 주신 것인데 누구에게 제사하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할 것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의 결과는 멸망임을 경고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반역하는 이스라엘이라도 그와 맺은 사랑의 언약 때문에 결단코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아모스와 함께 그는 이스라엘의 사치, 음란, 착취와 학대를 슬퍼하며 공격하였다.
3) 아모스
아모스 역시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여로보암 2세 때의 예언자였다. 그는 남유다 출신으로 북이스라엘에 와서 활동하였다. 뽕나무 재배자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는 국력이 신당됨에 따라 안일에 빠지고 불의와 부정이 만연하던 이스라엘로 보냄을 받았다. 아모스는 주위의 열국이 사회적 불의와 부정의 악 때문에 패망했다고 하면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가 도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으면 살 것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모스가 계속 반복하여 한 말은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였다. 호세아가 개인적 죄를 지적하였다면 아모스는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을 지적하였다.
2. 남유다의 예언자
1) 이사야
이사야는 옷시야 왕이 죽던 해로부터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에 이르는 위태로운 시기의 예언자였다. 남유다에서 이사야의 활동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는 아하스 왕 때 앗수르와 유다가 동맹하는 것을 경고와 더불어 반대하였다. 또한 히스기야 때에는 반대로 유다가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하여 애굽과 동맹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사야는 왕들이 도움을 구할 때에는 언제나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유다 왕들이 앗수르와 애굽을 번갈아가며 의지할 때에 이사야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호소하였다. 이사야는 특히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 역사는 '고난의 종'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다.
2) 미가
미가는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다. 유다 히스기야 왕 때에는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부패해 있었고 공의와 정의는 사라져 갔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이 호세아와 아모스의 경고를 배척한 데 반하여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회개하였다. 그는 미가의 경고를 받자 하나님께 회개하고 간구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히스기야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앗수르를 잘 이겨냈고 유다 왕국의 주권을 견고히 하였다. 이것 때문에 유다는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도 멸망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러한 히스기야 왕의 배후에 미가와 이사야가 있었던 것이다.
3)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운명적 기간인 주전 626년에서 587년까지의 40년간 활동한 예언자였다. 그는 '눈물의 예언자' 또는 '고독의 예언자'라고 불린다. 그는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 자기 개인의 생활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의 생애는 예루살렘의 비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였다. 그는 백성들의 맹신과 헛된 희망을 공격하고 민족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선포하였다. 또한 언젠가는 파멸에서 벗어나 개인적 차원에서 온전히 신앙을 회복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세워질 것이라고 하였다. 예레미야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음의 위협도 받고,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하나님 나라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였던 예언자 몇 사람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모두 왕과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갈 때 현실을 비판하고 여호와를 그 소망으로 제시하였다. 이들은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살려 줄 것이라고 하면서 종말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다. 또한 주목할 것은 그들의 윤리적 엄격성이다. 사회 상황이 변하면 사람들은 상황에 따른 윤리와 도덕을 따르기 쉽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율법에 근거한 절대적 기준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그 윤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완전한 것을 원하시고 계신다.
1. 갈멜 산
갈멜 산은 갈멜 산맥들 중에 가장 높은 산으로 지중해에 돌출하여 위치하고 있다. 갈멜 산은 딱딱하고 구멍이 많은 세노마니아 석회석으로 형성되었고, 남동쪽으로 약 20.8㎞의 길이로 뻗어 있다. 이 산맥은 갑(岬)의 높이가 143m이고 가장 높은 곳이 에스피아 근처인데 그 높이가 531m이다. 남서쪽의 경사만들은 완만하여 지중해 해안까지 이르는 길이 나 있다. 아직도 이 산의 경사면들에서는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식물들이 잘 자라기로 유명하다. 갈멜 산은 고립된 지역이어서 역사 시대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그러나 석기 시대에는 고대인이 갈멜 산의 서쪽 경사면에 있는 동굴들에서 살았다. 성서 시대에 이르러 갈멜 산이 특별한 신앙적 중요성을 갖게 된 상황이 왕상18:19-40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성서기자들은 갈멜산의 아름다움(아7:5)과 비옥함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들은 자주 갈멜 산을 사론 평야와 레바논과 바산과 길르앗과 함께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하였다(사35:2; 렘50:19; 미7:14).
2. 뽕나무
뽕나무의 열매에 대한 언급은 외경 마카비상 6:34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오디의 피같이 붉은 즙은 마카비 군대와의 전투에서 안티오쿠스 군대의 코끼리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눅17:6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에 관한 비유 속에서 '쉬카미노스'라고 불리는 나무의 종류를 언급한다. 검붉은 뽕나무는 팔레스틴에 흔하며, 즙이 많은 그 열매는 가격이 비싸다. 근동지방의 양잠업에 매우 필수적인 흰 뽕나무는 성서 시대 이후까지 팔레스틴에 도입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검은 뽕나무는 팔레스틴에 많으며, 무화과나무는 이 뽕나무과에 속한다. 아모스서의 '뽕나무를 배앙하는 자'라는 표현(암7:14)은 과실을 더 잘 가꾸기 위해 과수를 전지해 주는 일에 고용된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다. 아모스는 자신이 예언자의 계열에 속하지 않고 평민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3. 고난(고난의 종)
고난의 개념을 담고 있는 성경의 용어들은 히브리어 12개, 헬라어 21개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난은 정신적 고통을 말하며, 이 용어에 육체적 고통이란 뜻이 포함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고뇌는 격렬한 고통을 말한다. 성경의 본문들은 세상에 고난이 많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해답을 제시한다. 죄에 대한 심판,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감정이입, 아른 사람의 형벌에 대한 대속적인 담당, 지극한 회개와 신앙, 보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경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하는 훈련 등이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죄를 위해 대속적으로 고난을 당할 분이다(사40-55장). 기독교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구속하는 고난의 종으로 인식되었다.
4. 이스라엘 공동체
오직 하나뿐이며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이 처음으로 가장 선명하게 제시된 곳은 제2 이사야서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의 거룩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택함받은 백성으로 언급된다.
그 후의 시대에도 이러한 선민의식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존되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특별한 의무를 지게 되었다는 개념은 이스라엘 사상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패역함으로써 수난을 당하게 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계속되어 훗날에 보다 완전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희망으로 발전된다.
5. 이스라엘의 종말론
야훼는 구원하시는 긍휼의 주님이시지만, 동시에 죄를 벌하시는 거룩한 주님이시다(출20:5,6; 사6:3,5). 따라서 야훼의 종말론적인 행위는 그 내용상 심판과 구원의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역사와 세계의 주(主)요 지시자로 나타내셨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가 세계를 창조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점이 또한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의 출발점이다. 즉 야훼는 끊임없이 역사를 움직이시며, 분명히 자신의 통치권을 확립함으로 그리고 그의 백성에게 자신과의 완전한 친교를 허락함으로써 역사를 완성하신다. 역사 과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에 따라 성취하시는 약속의 말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함으로써 종말론은 끊임없이 지향되면서 급박하게 실현을 서두르는 구속사의 일부분이 되며, 궁극적으로 야훼의 주권은 적대 세력을 기적적으로 이겨 승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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