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통일왕국시대/삼상8:22

제이비젼 2014. 6. 7. 09:40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의 통치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이방 족속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강력한 왕군통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초대 왕 사울 때부터 이스라엘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때까지 사실상 부요했던 시기는 극히 짧았다. 이스라엘의 왕권체제의 불행한 운명은 이미 초대 왕 사울의 패역함을 통하여 낱낱이 드러났다. 이후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웠던 다윗 왕과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의 통치 시기를 제외하고는언제나 내우외환 속에서 시달렸으며, 솔로몬 왕 이후에는 잠재해 있던 백성들의 원성이 터지고 마침내 남북왕국으로 분열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 공동체의 참된 통일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떠나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속한 교회 공동체의 참된 일치도 오직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사역 속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고대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보다 늦게 출범한 팔레스틴 지방의 이스라엘 국가는 강력한 신왕정정치로 주변 국가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시기에는 다소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다윗 왕의 등장으로 신정정치와 강력한 지도력으로 국가의 조직화를 이루었다. 다윗에 이어 이스라엘 국가의 세 번째 왕이 된 솔로몬은 초기에는 지혜로운 통치로 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나 후기에 이방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한 우상 숭배와 백성의 탄압은 왕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르호보암 시대 때에 통일왕국은 불과 100년(B.C.1020-922)이라는 짧은 역사를 남기고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단되는 비운을 남겼다.


1.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1) 국가 건설의 필요성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지파 동맹을 통해 공동의식을 찾고 있었으나 지파의 조직은 대단히 허술하였다. 이로 인해 지역적인 갈등과 민족성을 상실할 상황에 처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타민족과 같은 군주제도하의 중앙집권적 왕을 필요로 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블레셋 족속의 압박을 받아 고통을 당하던 시대이며, 민족 생활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없었던 암울한 상태였다(삼하4:11).

 따라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당시 민족의 지도자인 사무엘에게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8:5)고 간청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영구적인 군사 지휘자를 세워 그에게 모든 지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해 주는 길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국가의 형성 과정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왕정제도가 성립되었고, 주전 1020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지와 동맹체가 아닌 국가라는 거대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들이 약 1000년 뒤에 완전한 국가로 발전하여 지파간에 갈등과 분쟁이 없는 왕정 시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 국가의 초대 왕으로서 불안정한 상태의 국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블레셋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굼꾸며 "힘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모으므로"(삼상14:52) 지파와 국가의 조직에서 독립하여 사울이 자기에게만 충성하는 정예 부대를 만들려고 했다. 따라서 이 당시는 국가가 조직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부족적 왕국의 유형과 국가적 군주에 유형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임을 알 수 있다.


2. 국가의 조직화


 1) 완전한 국가 형성

 사울은 불안정한 국가의 상태에서 사무엘과의 불화(삼상13:8-15), 사제권(삼상22:11-19), 경쟁자 다윗의 출현으로 인한 상부층의 분열 그리고 사울 성품의 타락 등으로 인해 그의 통치는 실패로 끝났다. 그의 뒤를 이은 다윗 왕은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새로운 국가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짧은 기간에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로 통치했으며, 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의와 사랑으로 선을 베풀며 다스렸다. 이렇게 다윗의 뛰어난 통치력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국가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스라엘은 몇 개의 지파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채로 블레셋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애굽으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는 이스라엘 제국이라는 완전한 국가가 형성되었다.


 2) 이스라엘 국가의 전성기

 다윗은 이스라엘 국가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 더욱이 빼앗겼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서 도로 찾았고, 이 성스러운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었다. 이러한 다윗의 치밀하고 지혜로운 계획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더욱 강력한 결속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서 12년 이상을 통치하며 정치·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아들 솔로몬 역시 다윗의 뒤를 이어 각종 무역 사업과 건축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여 이스라엘은 최대의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했다.


3. 쇠퇴기의 이스라엘 국가


 1) 세분화된 국가조직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외관상으로는 찬란했음에도 불구하고 침체기였으며, 이스라엘이 쇠퇴기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국가 통치자인 왕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야기된 것으로, 솔로몬은 애굽의 막강한 군사력을 의지했으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러한 범죄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서 마음을 돌리셨다(왕상11:4). 결국 국가의 조직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분열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다는 여전히 솔로몬의 국가 조직에 충성을 다했으나 이스라엘의 북부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내세워 반역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 분단된 국가

 솔로몬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르호보암(B.C.922-915)은 즉위하자마자 북부 지파들에게 고된 고역을 시켰다. 또한 북부 지파들의 개혁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해 버렸다. 이로 인해 북부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여로보암을 자기들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웠다(왕상12:1-20). 이렇게 세워진 북왕국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는 달리 독단적인 정치 체제로 왕권을 이어 갔으며, 유다는 다윗 집안에 계속 충성을 다했다. 어쨌든 북부 지파의 반란으로 이스라엘은 남·북 왕국으로 완전히 분단되어 두 나라를 형성하게 되었다.


 초기 이스라엘의 체제는 부족동맹의 시대였다. 가나안을 정복하면서부터 열두 지파의 동맹체로 조직되어 오다가 사울이 초대 왕이 됨으로 불안정한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후 다윗의 통치 기간에 완전한 국가 조직체가 되어 솔로몬의 통치 후기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더니 르호보암 시대에 완전히 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1. 초대 왕 사울

 사울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로 B.C.1030-1010년경에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그가 이스라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한 시기는 B.C.1020년경이다. 그가 즉위할 때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은 매우 암담했다. 외적으로는 블레셋 족속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내적으로는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이든 언약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도 연로하고 그의 후계자인 두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이스라엘 각 지파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열방과 같이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하나님의 허락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다스릴 왕정제도가 성립되었다. 초대 왕으로 즉위한 사울은 성실하고 겸손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권력 유지에 힘을 쏟기 시작하면서 차츰 타락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사무엘과의 불화, 타락된 성품 등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떠났다. 결국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들 요나단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 위대한 왕 다윗

 솔로몬의 뒤를 이은 다윗은 B.C.1010-970년경까지 이스라엘 12지파의 2대 왕으로 치리하였다.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사망으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추대를 받음과 동시에 국가 확립에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성읍 몇 개는 블레셋과 가나안 사람에게 빼앗겼었다. 다윗은 여부스 사람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곳을 수도로 정하였다. 이 성은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 북부 지파들의 경계에 있었으므로 양자의 반목을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국가가 하나의 조직체로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 도성은 남북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왕국의 결합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그 후 블레셋 사람의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을 침범했으나 다윗이 완파하여 나라는 더욱 견고하여졌으며 평화스러웠다. 그리고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찾아왔다. 이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속하여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까지 확장하였다(창15:18). 그는 이스라엘 국가를 든든히 세워 완전한 통일 왕국을 만들었다. 7년 반은 헤브론에서 33년을 예루살렘에서 치리하고 71세에 사망했다(삼하5:4,5).

3. 지혜의 왕 솔로몬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으로 40년간(B.C.973-932) 재위하였다. 그는 다윗과 밧세바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나 20세의 약관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자신의 연약함을 안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가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지혜와 더불어 영광과 부도 함께 받았다. 특히 그는 즉위 제4년 2월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제11년 8월까지 약  년에 걸쳐 완공하였다(왕상6:38). 그리고 성전 헌당식을 거행하여 법궤를 지성소에 이동 안치하였다. 이로써 480년간 성막에 있다가 완전한 성전으로 옮겨졌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착수한 사업을 계승하여 이것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켰다. 나라는 날이 갈수록 부강하였으며 엄청난 부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실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솔로몬은 본처 이외에도 많은 여인들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는데 이들은 이방 여인들이었다. 이들 첩들은 자신들의 우상을 가지고 와서 단을 쌓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에 자연히 그들을 따라 솔로몬과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다.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던 솔로몬은 갈수록 오만해지고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편파적인 정치를 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원망과 지탄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통치 말기에는 여로보암이 대적하여 일어나서 그 아들 로호보암이 즉위하기까지 왕국 분열은 표면화되었다.

4. 왕국의 분열

 솔로몬은 억압정책으로 북부 이스라엘을 반란없이 정치할 수 있었다. 즉 솔로몬 왕의 강경책만이 위험한 반란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죽음 이후 북부지파들이 드디어 폭발하여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B.C.922-915)은 처음에는 왕국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르호보암 자신의 왕위 취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위하여 북쪽 지파들인 이스라엘 지파의 중심지인 세겜에 갔을 때 북부지파의 협상을 거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르호보암의 포용력 없고 분별력 없는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은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