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유대종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의종교였다. 그러므로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되자 새로운 방식의 신앙생활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성전시대가 끝나자 곧바로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회당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회당은 성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모임이었다. 성전이 제의중심적이라면 회당은 말씀중심적이다. 비록 포로회복 시대에 성전이 회복되고 제사가 다시 드려졌지만 시대의 흐름은 성전에서 회당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성립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회당의 성격은 교회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고,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 경외잔들'(God fearers)이 기독교를 수용하기에 용이하도록 배경을 제공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역사 안에서 차근히 자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셨다.
여기서 회당 시대라고 하는 것은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 역사로서 말라기서가 완성된 때부터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시기까지를 말한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정치·종교적 자치권을 얻기 위하여 투쟁했다. 회당 시대의 유대교는 예언의 시대가 끝났다고 단정짓고 이미 주어진 예언과 계시의 해석, 즉 규약을 올바르게 해설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1. 페르시아와 희랍 시대
1) 페르시아 시대
페르시아는 바벨론 제국을 병합하고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성전을 짓는 것도 허락했다. 다윗 가문의 스룹바벨이 예루살렘 총독이 되고 페르시아의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유대인들은 다윗 왕국의 회복을 기대하였고,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요청하였다. 이때 라리우스 히스타시스가 왕이 되어 페르시아 제국을 회복하였으나 성전 건축은 계속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페르시아 왕에게 이 공사를 중단시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성전 재건의 허가를 받아내어 주전 516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했고(B.C.444),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협력하여 영적인 개혁에 힘썼다.
2) 희랍 시대
알렉산더가 일어나면서 유대인들은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팔레스틴은 식민지가 되어 희랍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또한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생기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사망 후 프톨레미 왕국과 셀류커스 왕국이 팔레스틴 지역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유대는 처음에 프톨레미 1세 치하에 속하였으나 주전 198년의 파네이온 전쟁 후 셀류커스 왕국으로 넘어갔다. 지배 왕국은 희랍 문화를 전파시키며 동방 문화와 접붙이려 하였다. 그런데 파급되어 오는 희랍 문화를 환영하는 유대인도 있었고 에스라가 유대교에 깊이 심어 놓은 대로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은 정치적 관심사와 종교적 관심사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게 된 것이다.
2. 마카비 시대
1) 안티오쿠스의 통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고 예루살렘에 당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복잡한 유대의 상황을 목격하고 유대 통치 방법을 바꾸게 된다. 대제사장이던 오니아스가 유대인 내분으로 물러나 자결한 뒤 대제사장직이 돈으로 매매되었다. 이것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는 분열이 거듭되었다. 안티오쿠스(Antiochus Epiphanes 175-164)는 유대교를 말살하기로 하고 희랍 문화를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비록 종교적 사태와 정치적 관계가 얽혀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뿌리가 뽑히면 자신에 대한 반대가 없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모든 의식이 금지되고 성전도 제우스의 신전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의 부정하다고 규정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우상에게 제물을 드려야 했다.
2) 마카비의 반란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에 유다 마카비가 반란을 주도했다. 반란군들은 안티오쿠스가 보낸 군대를 격퇴시키고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성전을 회복하여 재봉헌하였다. 이것은 그의 형제 요나단과 시몬에 의해 계속 이어져 갔다. 반란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민들은 일시적으로나마 귀중한 자유를 획득하였다. 이것은 시몬의 지도 아래 그들이 조세 의무로부터 면제되었을 때 그리고 실질적으로 셀류커스의 지배권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절정에 달하였다. 이때 대제사장직이 성경에 규정된 세습제를 무시하고 시몬에게 주어졌는데, 이것을 경건한 전통주의자들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요한 히르카누스의 치세 동안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명백하게 구별지어졌다.
3. 로마 시대
1) 로마의 통치
주전 63년의 폴페이우스의 유대 개입으로 유대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로마의 시리아 주로 편입되었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박 아래서 편안할 날이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갔고 시리아의 집성관인 크라수스는 주전 54년에 성전의 기물들을 약탈해 갔다. 로마 총독의 꼭두각시였던 히르카누스 2세는 형식상의 통치를 맡고 있었는데 자기가 가진 실권마저 에돔 사람 안티파테르에게 위임하곤 하였다. 안티파테르가 에돔 사람이라는 사실이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고 히르카누스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뒤를 이은 안티고누스도 오래가지 못하여 하스몬 가계는 끝이 났다.
2) 헤롯의 통치
주전 40년 헤롯은 로마의 후원을 얻어 3년 후 팔레스틴에 대한 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그는 로마에 대해서 유능했고 충성스러웠으며 팔레스틴 통치도 잘 해내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이방신에 대해서도 관대하였다. 이외에도 친로마 정책, 에돔 출신, 열 명의 아내를 가진 것들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헤롯은 마태복음의 유아 살해에 관한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어서 그가 죽은 주전 4년이라는 연대는 예수 탄생 연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주후 66년경 막13:14에 기록된 예언 때문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피신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교 회당의 분열의 시작이었다. 얼마 안 있어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70년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성전이 파괴되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중간기, 즉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말씀도 주어지지 않은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개념들을 발전시켰다. 문학을 통하여 악한 충동과 선한 충동,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를 발전시켰고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한 묵시론적 사상을 형성하였다. 천사론이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지혜에 대한 신학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회는 점차 다가왔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1. 다윗 가문의 스룹바벨
스룹바벨은 유다 왕 여호야김의 증손으로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다(대상3:17-19). 마1:12, 눅3:27에 의하면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가계에 속한다. 특히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지인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의 민족적 희망이 사라졌을 때 성전을 재건축함으로써 메시아의 예표로 인식된 점이 특이하다. 스룹바벨은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에 자극받은 백성들을 독려하여 대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을 시도하였다(스3:2-13; 스5:1-2; 학1:1-2; 슥4:9). 그러나 인근의 많은 적들의 방해와 유대인들의 의기소침으로 성전 건축이 늦어져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한지 23년이 지나서야(B.C.515년경) 비로소 완성되었다.
2.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틴 이외의 지역에 분산되어 정착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 특히 이러한 명칭으로 불렸던 것은, 그들이 비록 고국을 떠나 있었으나 자신들의 유대교적 종교의 계율과 관습을 유지했던 특징 때문이었다. 신약성서에 이 용례가 나타나는 것으로는 요7:34,35가 있는데 여기서 '흩어져 사는 자들'이 바로 디아스포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벧전1:1에도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산의 원인을 구약학자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사실로 추정하고 있다.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가의 항구와 여러 지역에 이주시켰던 것이다(왕하17:5 이하). 또한 이집트의 프톨레미 1세(B.C.322-285)도 팔레스틴을 정복한 후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3.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
이 두 왕조는 팔레스틴에 영향을 미친 왕조로 전자는 B.C.323-30년 사이에 이집트를 통치한 그리스계 왕조이고 후자는 시리아계 왕조이다. 이들 왕가는 이스라엘의 400년 침묵기 동안에 지속적으로 팔레스틴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각각 전자는 이집트가 로마의 통치에 들어간 B.C.30년, 후자는 폼페이에 의해 멸망당한 B.C.63년까지였고, 그 이후에는 로마에 그 역할을 넘겨주었다. 따라서 이 왕조들은 팔레스틴 지방의 마카비 왕조나 하스몬 왕조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4. 유다 마카비
유다의 지배자 안티오쿠스에 대한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이후 유대인 저항운동가의 대명사격이 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인 마타디아(Mattathias)의 아들들 중 하나였는데, 마카비의 가족이 시리아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시리아의 관리가 이들 가족이 사는 모데인(Modein)에 와서 이교의 제사를 강요하였는데, 이때 마타디아 가족은 그 제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낸 유대인 배교자와 관리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후 지속적인 저항운동은 마타디아의 세 아들인 유다(166-160)와 요나단(160-143), 시몬(142-134)에 의해 차례로 주도되었다. 이들의 저항운동은 차례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B.C.165년 12월 25일에는 유다의 지휘 아래 더럽혀진 성전이 청소되고 재봉헌되었다(마카비상4:36 이하). 이 일이 바로 하누카, 즉 수전절(요10:22)이라 불리는 절기가 되었다.
5. 묵시론적 사상
묵시(默示)라는 것은 '드러내 보임', '계시' 등의 의미를 가진 용어로 B.C.200년과 A.D.100년 사이에 산출된 모든 유대교 문학양식들에 적용되었다. 묵시문학은 특히 신구약 중간기에 크게 발전했는데 고난의 시기에 현실을 풍자하고 미래를 조명함으로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묵시문학의 특징으로는 ① 계시적 특징, ② 모방적·인위적 특징, ③ 필명의 사용, ④ 거짓예언의 위험, ⑤ 상징의 사용, ⑥ 이원론, ⑦ 염세주의, ⑧ 결정론, ⑨ 윤리적 수동성 등을 들 수 있다. 정경에 속한 묵시서로는 다니엘서, 스가랴서, 요한계시록 등이 있다. 그외에는 외경의 바룩서, 에녹서 그리고 위경 중의 몇 편들이 있다.
6. 사두개파
부유한 귀족층과 제사장 계급의 종파로서 특수층이었다. 사두개파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었고, 돈 많은 상인이나 정부관리들, 귀족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종교단체라기보다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들 역시 토라를 최고권위를 믿었다. 하지만 바리새파와 다르게 구전율법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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