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은 선민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항상 중심을 차지했다. 그도 그런 것이 성전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은 성막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잘 상징해 주지는 못하였다. 성막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동하시면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알려졌다. 반면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수동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성전을 절대시하지 않으셨다. 성전은 상대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진정 중요하고 절대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순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시에 그들을 축복하심과 동시에 불순종할시에는 성전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명시하셨던 것이다. 성전은 결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성전은 솔로몬 왕 때에 건축되지만 성전 시대는 사울 왕 때부터 이스라엘 국가의 분열 그리고 멸망까지를 포함한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인간 왕이 다스리는 다른 나라와 같은 조직이 형성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버림받고 다윗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성전과 궁전을 짓고 물러나지만 르호보암의 실정으로 나라는 둘로 분열된다. 분열된 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쫓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각각 멸망하고 말았다.
1. 왕국의 시작과 번영
1) 사울 왕의 통치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위협과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사들에 대한 불만으로 사무엘에게 왕의 제도를 시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무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신정정치를 반대하는 것을 용납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신정정치는 막을 내리고 왕정이 시작되었는데 그 첫 왕이 사울이다. 사울은 암몬의 침입으로부터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여 그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 후 그는 블레셋을 쳐부수고 주의 원수들을 이겼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다음전투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헤렘의 법을 적용하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사무엘은 그를 버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의 패전으로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죽었다.
2) 다윗 왕의 통치
다윗은 혼란했던 이스라엘을 통일되고 부강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12지파를 효과적으로 단결시켜 솔로몬에게 안정된 왕국을 물려주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임금이었던 것이다. 그는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언약궤를 옮겨왔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실 것을 확실히 계시하셨다. 그는 므비보셋에 대한 친절, 요나단과의 우정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온화하고 의리 깊은 성품을 지녔으나 밧세바와의 간음 같은 범죄를 행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말년에 계속되는 반역으로 피해 다녀야 했다. 압살롬의 반역, 세바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으며, 솔로몬 즉위 전에는 아도니야의 반역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다윗 왕의 범죄에 대한 징계였던 것이다.
3) 솔로몬 왕의 통치
솔로몬은 안정된 궁중 생활 가운데서 부왕이 이룩한 것들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치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성전건축과 궁전건축 그리고 그외에 많은 건설을 하였다. 이것을 위해 그는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었고 노역을 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금하고 있는 것이었다. 많은 재료와 은금을 얻기 위하여 외국과의 무역에 힘을 기울였고 국방을 위해서 더 많은 말과 병거를 수입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왕이 될 자에게 경고하신 내용을 위반하는 행위였다(신17:14-17). 이러한 정책으로 국가는 크게 번성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점점 타락하여 분열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 중 솔로몬의 통치 시대만큼 정치·경제·종교적으로 평안하고 번영한 때는 없었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 힘든 노역, 이방신전의 허용 등 잘못된 정책으로 다음 시대에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2. 왕국의 분열
1) 북이스라엘
로호보암의 백성들에 대한 무관심, 역사적인 지파들간의 불화로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이 탄생하였다. 여로보암은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케 함으로 종교적으로 후대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 사가들은 북이스라엘을 비정통적 왕국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렸던 여로보암과 그 죄를 따라 악한 일을 행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로보암을 뒤이어 오므리 왕가, 예후 왕가, 므나헴 왕가 등이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는 혼란한 가운데 역사가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가와 예후 왕가의 통치 때 상당히 번영하였다. 그러나 아함 왕과 이세벨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영적으로는 크게 타락하였다.
2) 남유다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남유다는 주전 586년까지 지속되었다. 역사적 배경은 계속적인 앗수르의 위협, 남북관계 충돌,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두 국가가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뀐 데 반하여 남유다는 다윗 왕조로서 왕가가 임관하였다. 잠시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를 지배한 적도 있었지만 숨어 자라던 요아스가 나타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경 사가들은 유다 왕들 중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깨끗한 통치를 하였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6명은 겨우 비난을 면하였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한 10명의 왕들은 실패자로 평가되었다. 유다 왕국은 웃시야 왕 때 크게 번영하였다.
3) 왕국의 멸망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주전 566년 신흥 바벨론에게 각각 멸망당하였다. 성경사가들은 이것이 백성과 왕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좇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바벨론인들은 4차에 걸쳐 왕족과 귀족, 일반 백성, 기술자들을 끌고 갔다. 한편 유다에 남겨진 백성들은 극히 비천한 자, 즉 토지를 갈고 농사 지을 사람으로 불과 2만 명 이내였다. 그 후 도망갔던 유다인들이 돌아와 형편이 나아지긴 하였으나 황폐해진 시온은 기아와 약탈로 불법천하였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은 집도 짓고 사업도 하였으며 또 비록 성전은 없었으나 종교의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왕정의 발흥부터 왕국의 번영, 왕국의 분열 그리고 멸망 칭 포로기를 살펴보았다. 백성들의 요청으로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허락하였다. 왕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짓고 종교와 국가를 조직화시켰지만 선조들이 가졌던 여호와 신앙을 그들은 차차 잃어갔다. 순수했던 신앙이 점차 의식화되어 가고 이방신의 유입으로 혼합주의화 되어 갔다. 노아 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 국가를 이방 국가들을 통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셨다. 이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찬 역사 개입이신 것이다.
1. 헤렘(!rh)
여호와께 바쳐진 것을 의미하는 헤렘은 성(聖), 분리 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헤렘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경우는 전쟁인데, 여호와께서는 모든 전리품을 바치라고 명령하시며, 이것이 그대로 시행되어질 때 헤렘이 이루어진 것이다(민21:2-4). 보다 완전한 헤렘은 모든 숨쉬는 것들을 죽이고(신20:16), 다른 모든 것들은 파괴하고 불태워야 한다(신7:25,26). 그러나 귀중품들은 여호와께 바쳐지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제사장들의 기업이 되었다. 때로 헤렘이 완화된 모습들도 보이는 데, 민31:7-12,17,18 그리고 신21:10-14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제외되었고 삿21:11,12에서는 어린 처녀들이 제외되었다. 심지어 신2:34에는 소와 양이 제외된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헤렘은 이스라엘의 결속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에서 파문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2. 암몬
B.C.1300-580년경에 중앙 트렌스 요르단 지역에서 자치국가로 번성했던 종족을 일컫는 말이다. 창19:38에 보면 롯의 작은 딸이 그 아비에게서 암몬 족속의 조상인 벤암미를 낳았다고 하였다. 13세기에 라밧 암몬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11세기에는 얍복강 남북단에 이르는 작은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11세기말에는 상당히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이스라엘의 영토까지 침입하였다. 이때 침략을 당한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은 사사 입다의 지휘 아래 전쟁을 치루게 된다. 사울 왕 시대에도 길르맛 야베스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 이때의 승리는 사울 왕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다윗 왕 때에 암몬은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다(삼하11:1,22-24; 삼하12:26; 대상20:1). 솔로몬 시대에도 암몬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데, 솔로몬이 사랑한 이방 여인 중에 암몬 여인이 있었으며(왕상11:1), 예루살렘 맞은 편 산에는 암몬의 주신인 밀곰(몰렉)의 산당이 있었다(왕상11:7). 심지어 르호보암의 어머니 나아마가 암몬 여인으로 알려지고 있다(왕상14:21,31; 대하12:13).
3. 여로보암
여로보암의 이름 뜻은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게 하소서'로 그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시대에 분열된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다. 여로보암은 느밧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 스루아는 과부로 알려졌다(왕상11:26). 솔로몬은 여로보암의 능력을 인정하여,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강제노역을 감시하게 했다. 실로의 예언자 아히야의 예언을 힘입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애굽으로 도망하였으며 거기서 피난처를 제공받았다.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여로보암은 지파 지도자들의 대표단을 이끌고 르호보암에게 가서 노역을 줄여 달라고 청원한다. 이것이 거부당하자 북쪽 10지파들이 지파동맹에서 탈퇴하여 왕국을 세우게 된다. 여로보암은 이들의 청을 받아 초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여호와를 섬기는 데서 떠나게 되고, 그가 왕이 되리라고 예언한 아히야가 오히려 그의 파멸을 예언하게 된다(왕상14:1-6).
4. 성전(聖殿)
성경에는 세 개의 성전이 등장한다.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이 그것이다. 이 세 성전은 시대를 달리할 뿐 그 위치는 동일한 곳이다.
1) 솔로몬 성전 : 다윗 왕이 희망하였던 것이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된 성전으로 B.C.957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성전의 크기는 길이가 60규빗, 너비가 20규빗이며, 높이가 30규빗이었다. 이 치수가 가리키는 것은 건물의 안쪽면이다. 성전의 앞쪽에는 낭실이 있었으며, 낭실을 지나면 성소가 있고, 이 성소를 지나면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의 모양은 정육면체이고 그 길이는 각각 20규빗이다. 성전 건물의 바깥 쪽에는 '결방' 또는 '골방'이 여럿이다. 솔로몬 성전의 내부에는 야긴과 보아스라고 부르는 청동기둥이 있었는데, 그 높이는 23규빗(약 12m)이며, 그 둘레는 12규빗(약 6m)이었다. 성전 벽의 두께는 6규빗이었으며 결방들의 벽 두께는 5규빗이었다. 지성소 안에는 두 개의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감람목으로 만들어졌다. 그 높이는 10규빗이었으며 날개 역시 10규빗이었다.
2) 스룹바벨 성전 :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과 합심하여 솔로몬 성전 터에 다시 성전을 지었다. 이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르며 B.C.516년경에 준공되었다. 이것을 '제2의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성전은 거의 500년간 존속된다. 솔로몬 성전과 유사한 양식이었으나 그 화려함은 덜했던 것 같다.
3) 헤롯 성전 : 솔로몬 성전의 터위에 세운 성전으로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B.C.20년경에 착공되어 A.D.70년에 멸망되기까지 지속되었다. 성경에는 자세한 언급 없이 그 명칭들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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