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성경을 읽어왔지만 사탄과 귀신 등의 사악한 존재에 대해 무지했었다. 성경에는 그들의 존재와 행적이 기록되어있고 설교시간에도 빠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성경속의 사건으로만 치부하였기에 현장의 삶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하나님은 과거의 신앙 위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살아계셔서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신 것처럼, 사악한 영도 똑같이 우리의 삶에 깊숙이 간여하고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들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끼고 경계하며 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불행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성령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성령의 시대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분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무지하기에, 무기력한 삶과 능력이 없는 신앙을 보이고 있는 이유이다.
성령의 존재감에 무지하다.
행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은 제자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를 먼저 물어보는 게 관례였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존재하는 성령의 유무가 복음전파와 신앙생활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시작으로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이 되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들의 전도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드러내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예수님이 공생애 시절에 보여주었던 것처럼, 귀신을 쫒아내며 질병을 낫게 하며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였으니, 이들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복음전파에 얼마나 중요하게 적용했었는지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새로운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는지 확인해보고, 성령에 대해 무지했다면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의 복음전파를 기록한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앞세워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차게 했던 것이다.
이렇듯 초대교회 시절의 사도들에게는 신앙이 삶의 전부였으며 그 중심에 성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존재를 늘 확인하는 간절한 기도가 평상시 기도의 목적이었으며, 마음의 상태 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성령의 내주와 동행함이 필수적이었다. 성령이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면 성령의 존재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성령 충만은 설교의 마무리에 적용하는 흔히 듣는 교훈이나, 통성기도 시간에 열정적인 기도를 격려하는 구호(?) 쯤으로 여기고 있다. 필자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교단의 교회에서 이십여 년의 평신도 시절을 보냈기에, 교인들이 받아들이는 성령 충만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잘 알고 있다. 부흥회나 금요기도회 등의 통성기도시간에 시작되는 웅장한 악기소리와 뜨거운 찬양에 이어지는 통성기도시간은, 이미 열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이 격앙되어 있고 들떠있기에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기도가 교회를 떠나가게 만든다. 그런 곳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뜨거워져 열정적인 기도를 하게 마련이며 이런 상태를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의 성령 충만은 감정의 격앙과 혼동되어 오해하기 십상이다. 감정이 격앙된 상태와 성령 충만한 상태는 분명 다르다.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 등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노래를 할 때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정이 격앙되어 기분이 좋지 않은가? 그렇지만 단순히 감정이 격앙된 상태와 성령 충만한 상태는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그러한 요인을 제공한 환경이 사라지면 격앙된 감정도 급속도로 식어지며 곧 예전의 냉랭하고 건조한 상태로 되돌아오게 된다. 필자가 교회의 통성기도시간에 경험했던 성령 충만한 마음의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 문을 나서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사라지곤 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또 다시 체험하려면 교회의 통성기도회에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갈증을 잘 아는 교회의 기도시간에서는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하는 법이 없다. 늘 여러 대의 악기를 동원하며 웅장한 음악과 뜨거운 찬양을 곁들이는 통성기도를 당연히 여기곤 한다.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필자가 오랜 세월이 흘러 쉼 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고 난 후에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그 때 느꼈던 감정의 느낌은 주변의 열정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감정이 혼합된 상태였으며, 그런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은 진정한 성령 충만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령 충만은 격앙된 마음의 상태로 느껴지는 게 전부가 아니다. 성령이 내주하여 생기는 마음의 상태는 쉽게 사라지는 격앙된 감정이라기보다 잔잔하고 평안한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의 느낌은 통성으로 기도할 때보다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때 더 잘 느끼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의 내주는 평안한 느낌이 전부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귀신을 쫒아내고 질병을 낫게 하며 새 방언은 말하는 이적과 기적의 행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신령한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며, 집중력과 창의력, 통찰력과 분별력 등의 총명함으로 지혜로워져서 하는 일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또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배가가 되어 절제와 자족 오래 참음 등의 성품을 습관으로 들이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는, 기도응답이 신속하게 내려오는 놀라운 체험도 어렵지 않다. 성령 충만한 상태는 기도를 하지 않을 때에도 늘 마음이 잔잔한 평안과 기쁨으로 넘쳐나며, 하나님 생각으로 가득차서 시도 때도 없이 찬양과 감사가 입에서 튀어나오며 마음으로 영으로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령 충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든지 간에, 삶의 현장에서 성령이 충만한 상태를 누리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성령을 오해하였으며 성령의 임재에 무지했음을 고백해야할 것이다. 성령은 전지전능한 하나님과동일한 분이시다. 성경에 약속한 대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일상의 삶에서 체험하려면 성령이 누구신지, 어떻게 임하시는 지, 어떤 능력을 얻게 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이 아닌 사악한 미혹의 영에 휘둘리기 십상이며, 성령 충만을 자신의 생각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상태로 착각하기 일쑤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약속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성령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그분에 대해 다시 배우고 깊이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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