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성경

로마서강해8

제이비젼 2014. 8. 30. 17:43



. 강한 자의 의무와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 15:1-4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 교훈은 약한 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다.


1.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것(1)

우리 모두가 각각의 약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약점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들의 약점을 참아내고 그들을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이같이 제자들의 약점을 견디셨다. 우리도 그들을 동정함으로써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다.


2. 이웃을 기쁘게 할 것(2-4)

[1]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자제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방해하는 것을 보다 잘 참아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자신의 비위만을 맞춘다면 우리는 버릇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16:24).


[2]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형제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남을 기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애쓴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얼마나 온화하고 안락한 사회가 되겠는가!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아무 일에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웃의 선을 이루기 위해 특별히 그 영혼의 선을 위해 기쁘게 해야 한다. 덕을 세우도록. 덕을 세운다는 것은 곧 자신의 유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돌들이 밀착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더 서로 잘 맞대어 있는 것이요, 건물도 그만큼 더 튼튼한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3). 우리 주 예수의 자기 부정만큼 강력하게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심을 억제할 수 있는 논리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


1)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자신의 세상적인 영예나 안락함, 안전을 고려하지 않았고 즐거움도 생각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을 비우셨고 스스로 어떠한 명성도 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하시되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 하셨다. 그의 온 생애는 자기를 부정하며 조금도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않는 생애였다.


2)이 점에서 성경이 성취되었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는 일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고 도리어 극도로 자신을 불쾌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되었다. 그의 수욕의 기간중에 본능적인 성향에 대한 만족은 일체 차단되었고 거절되었다. 그는 자신의 안락과 즐거움보다는 우리의 유익을 먼저 택하셨다. 사도는 성경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이 말씀을 선정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방의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하나님께 불명예스러운 일은 무엇이든지 주 예수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스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견디셨다. 그는 고난 중에도 많은 비방을 받으셨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비방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을 때 이러한 비방의 죄책이 그에게 떨어졌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저주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대한 비방이 그에게 떨어지는 것만큼 그에게 모순되고 반대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비방한 자들의 비방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 그는 그로 인한 죄책과 저주를 받으셨지만 우리는 그저 그 수고를 조금만 담당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  뿐이다. 그는 악한 자들의 염치없는 죄들을 지셨지만 우리는 그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우리도 겸손하고 자기를 부정하며 언제고 서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3)그러므로 우리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4).①그리스도께 대하여 기록된 것은 곧 우리의 교훈을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우리의 본받음을 위하여 기록되었다.②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일어난 일은 일종의 예표로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기록된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일상 사용함으로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첫째,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려고 하는 바를 배우려고 애써야 한다. 실제적인 관찰이 비판적인 해설보다 더 필요한 일이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인내와 성경의 안위'를 통해서이다. 인내와 안위는 고통과 슬픔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것이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 둘은 우리 영혼의 생명이 되는 소망의 친구들이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는 소망을 이룬다(5:3-5). 우리가 고통을 받는 가운데 인내를 발휘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고통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조급한 마음만큼 소망에 파괴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성경의 안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위로도 마찬가지로 소망에 대한 튼튼한 지주요, 바라는 좋은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


. 그리스도인의 통일 15:5,6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훈계를 전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이제까지 말한 것이 성취되기를 비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1.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칭호(5)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하나님은 인내와 은혜를 베푸시므로 바울은 하나님을 안위의 하나님이라 확정한 후 기록되고 있다. 사도는 사랑과 통일의 영을 부어달라고 간청할 때 하나님을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알고 말한다. 즉 우리를 참으시고 위로하시며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 말하는데, 이는 우리 형제에 대한 사랑을 내보이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인내와 안위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성경의 인내와 안위를 말하였다(4). 인내와 안위는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통로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나온다. 성급하고 투정을 부리는 우울한 기질만큼 평화를 잘 깨뜨리는 것은 없다.


2. 그가 하나님께 구하는 자비(5)

하나님이 너희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평화의 토대는 뜻을 같이 하는 데 있다. 이같이 뜻을 같이함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서, 사랑의 법칙을 따라서, 그들이 본받도록 그들에게 보여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3). 우리 기도의 순서는 먼저 진리를 구하고 다음에 화평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위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순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 3:17).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뜻이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끼리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뜻이 같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도록 배웠다. 이제 하늘에서는 뜻을 같이 하는 일이 천사들 간에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땅에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


3. 사도가 바라는 목적(6)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우리는 모든 기도에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믿음을 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입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니,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 곳에서 입이 하나가 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7-12


사도는 앞에서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들을 받으시라고 경고하였는데( 14:1) 여기서는 '서로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7). 왜냐하면 강한 그리스도인의 자만심이 약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만큼 약한 그리스도인의 편견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있어서는 이 모두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끼리는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앞에서와 같이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사랑에서 취해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처럼 친절을 베푸셨는데 우리는 그의 사람들에게 그처럼 불친절하게 대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불러 자신과 가장 가깝고 친절한 관계를 갖도록 받아들이셨다. 그는 우리를 불러(비록 우리가 이방인과 원수로서 방탕하게 지내왔을지라도) 자신과의 우정과 교제 속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 이라는 말은 우리의 모범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심과 그 모범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심과 그 모범을 따라 실천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서로를 받음에 모두 관련될 수 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받으심(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는 그와 함께 영화로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원한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17:24).


2.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서로를 받을 것(7-12)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는 이것이 우리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중대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간에 사랑과 친절만큼 효과적으로 이 일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란 없다. 이 말씀을 6절의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받으셨는가를 보여준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나 곧 '한 새 사람'이다( 2:14-16).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서로 간에 일치를 볼 수 있다.


[1] 그는 유대인들을 받으셨다(8).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본래 유대인이었던 자들을 깔보거나 심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의 수종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송자' ''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고 먼저 자신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을 받은 자',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는 자로 간주하셨다(2:16). 말하자면 그는 그들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를 붙잡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사역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그들을 받으셨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을 위하여 쌓아두신 특별한 자비에 관하여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8). 약속에 대한 최고의 확정은 약속의 실행이다. 왕이신 메시야가 때가 차서 할례의 수종자로 나타나셨을 때 이 모든 약속들이 확정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와 아멘이 된다.


[2] 그는 또한 이방인들도 받으셨다. 사도는 이 사실을 9-12절에서 보여준다.

1)이방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한 가지 계획은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로 회개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전에 이방인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9). 그들에게는 찬양할 소재가 있는데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것이다. 이방인 세계가 처해 있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해 보면 그들을 받으심이 유대인들을 받으심보다 더 긍휼의 행위로 나타난다. 어느 백성이든지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은 그들을 자신과의 언약에로 받으시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들은 그 긍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오랫동안 그의 영광을 욕되게 해왔던 이방인들에게서 영광의 수확을 거두려고 하셨다.


2)이 점에 있어서의 성경의 성취: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는 긍휼 뿐만 아니라 또한 진리도 있었다. 비록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약속들은 없었을지라도 그들에 관한 예언은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소명에 관한 것들인데 사도는 이 가운데 몇 구절을 언급하였다.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들을 구약에 관련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움을 완화시키려고 애쓴다.   ①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것이 예언이었다.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9). "당신의 이름이 이방 세계에 알려지고 인정 되리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보내신 사도들과 종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22:22). 다윗의 시편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 읽혀지고 노래되어질 때에 다윗이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감미로운 시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이방인들의 감미로운 시인이 된 것이다. 회개시키는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의 시편을 끔찍히 사랑하게 만든다. 만일 누군가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는 것이다.   ②이방인들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10). 이방인들을 반대하는 편견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유대인들은 결코 그들이 자기들의 즐거운 어떤 축제에도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가로막은 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기꺼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었다.   ③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11). 회개시키는 은혜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 이방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나무나 돌, 우상을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④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리라는 것이 이사야 11:10에서 인용되었다(12). 첫째, 그리스도께서 열방들의 왕으로 계시되었다. 그는 여기서 '이새의 뿌리'라고 불린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였고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었다.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높이 들어 올리우셨을때 그것은 열방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둘째, 이방인들이 그를 의지할 것이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 이사야는 그 구절을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의 순서는 우리에게 구주로 제시된 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가 기꺼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고 또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같이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그를 신뢰하는 결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에게 가지 않을 것이다. 신뢰는 어머니요 노력은 그 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이같이 연합되었는데 그들이 서로의 사랑 안에서 연합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 소망의 하나님께 대한 기도 15:13


여기에는 소망의 하나님께 드리는 또 다른 기도가 있다.

[1] 사도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으로 알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근거하고 있는 기초이시며 친히 그 소망을 세우시는 건축자이시다. 그는 우리 소망의 대상이시자 장본인이시다. 하나님께 매여 있지 않고 그가 우리 속에서 일으키시지 않는 소망은 환상에 불과하다.


[2] 그가 구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것이다.

1)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그들에게 충만케 하시기를 구한다. 기쁨과 평강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는 두 가지이다( 14:17).①이 기쁨과 평강은 참으로 바랄만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육신의 기쁨은 영혼을 의기양양하게 만드나 충만케 하지는 못한다. 참된 하늘의 영적 기쁨이야말로 영혼을 충만케 한다. 이 기쁨은 영혼에 만족을 주고영혼의 심히 크고 정당한 욕구들에 답을 할 수가 있다. 이 기쁨을 가진 영혼은 그것을 더 받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영광 가운데서 그것을 완성하고자 할뿐이다.②그것은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기도로써 얻을 수 있다. 기도는 영적 기쁨과 평강을 가져온다.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실제적인 참된 기쁨은 믿음의 열매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평강과 기쁨을 잃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탓이다. 오직 믿기만 하라.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으라. 그러면 반드시 기쁨과 평강을 얻을 것이다. 기도로서 하나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크게 가져야 한다. 모든 기쁨을 구하라.


2)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것과 비교할 때 형편없이 적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더 기쁨과 평강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럽게 하지 않을 소망의 풍성함을 바라고 구하도록 애써야한다. 이 소망은 성령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그 소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소망이 있고 또한 풍성히 있는 곳에서는 오직 성령께서 모든 영광을 다 받으셔야 한다.


. 사도의 칭찬 15:14-16


1. 로마 교인들을 칭찬함(14)

그는 처음에 그의 편지를 그들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하였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1:8). 그는 때때로 그들을 아주 호되게 책망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들과 작별하기 위해서 칭찬의 말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근거 없는 아첨의 말이 아니라 훌륭한 점과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합당하게 인정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뛰어난 점과 칭찬할만한 좋은 점을 잘 살펴 칭찬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들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말로만 들어서 그들을 알고 있을 지라도 그들의 훌륭한 점들을 확신하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한편으로 모든 말을 다 믿을 만큼 어리석어서도 안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을만큼 의심이 많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선한 점을 믿는데는 앞장서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이 더 낫다. 그들에게는 선함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훨씬 더 사도가 기록한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그것을 친절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데 특별히 그들의 의견 차이를 치료하는데 관련된 교훈을 실천할 것이다. 서로 간의 선한 이해와 서로에 대한 선한 뜻은 이내 다툼을 그치게 한다. 모든 지식이 차서. 선함과 지식을 다 갖추다니! 참으로 드물고 놀라운 결합이다. 이것은 곧 새 사람의 마음과 머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능히 서로 전하는. 선함과 지식이 있는 자들을 마땅히 자기에게 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여러 은사에 뛰어난 너희는 나의 교훈을 조금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교인들이 서로 권할 수 있고 또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목회자가 참으로 기쁘게 그들을 권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있지 않겠는가! 모든 주의 백성이 선지자라면 좋을텐데.


2.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것이 아님을 밝힘(15-16)

그가 얼마나 애정 어린 말투로 그들에게 말하는 가를 보라. 그는 14절에서 '내 형제들아'하고 부른 다음에 15절에 가서 또 '형제들아'(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 말이 번역되지 않았다-역주)하고 부른다. 그는 스스로 공손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담대히 대강' 썼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1] 그는 다시 그들로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흔히 사람들은 목회자가 자기들이 전부터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변명한다. 그럴지라도 그들이 그 말을 더 잘 알고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써 그렇게 하였다. 그것은 그의 직무에 일치하는 행동이었다. 이 은혜는 곧 나를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16).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방인들 가운데 뛰어들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기 위해 받으셨듯이 바울도 그렇게 하였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땅에 묻어서는 안될 재능들이 있다. 바울은 일군이었는데 누구의 일꾼이었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었다. 우리도 그의 일군으로서 그를 섬긴다. 또한 바울이 누구를 위한 일군이었는가 하면 이방인을 위한 일군이었다. 지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 교인들도 이방인들이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내가 주제넘게 너희에게 나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나의 임무가 그 사실에 대한 보증이다." 그가 맡은 것은 하나님의 복음으로서 그는 거룩한 것에 종사하는 자처럼 일하였다(이것이 이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가 하는 일의 목적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받으심직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일을 해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 일은 곧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봉헌을 의미하는데 그 속에서 이방인들은 다음의 둘 중 어느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기도와 찬미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거룩한 민족이요 제사장의 나라로 있어 앞에서 제사장이 되었다. 둘째, 이방인들 자신이 바울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 간주될 수 있다. 바울은 복음 전파로써 많은 사람들을 모았는데 그들을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 받으실만한 제물이다. 그들로 하나님의 제물이 되게끔 만드는 것은 그들의 성화였다. 이것은 바울의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성화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받으실만한 제물이 될 수 없다.


. 사도의 복음 전파 15:17-21


그는 더 나아가서 자기의 직분이 효과를 거둔 사실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급한다. 비록 우상숭배에 빠진 주변의 많은 무리들과 비교할 때는 극히 소수의 무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나라와 인내에 동참한 자들은 많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 그처럼 기이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 또한 기독교 교리의 진실성을 크게 확증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스스로 자랑이라고 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자랑이 아니라 거룩하고 은혜로운 자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는 자랑이다. 그는 이와 같이 그의 모든 자랑을 그리스도 안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이 자랑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라는 말을 나는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있거니와"로 바꾸어 읽고 싶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사역의 효과를 놓고 자기와 함께 기뻐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그 점에 대해 말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을 최대로 존중하여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고 한 그의 말이 진실됨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수고에 대한 칭찬을 가로채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감히 그런 일을 하지 아니하노라고 말한다.


1. 자기 일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열심(19-21)

[1] 그는 도처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전하였노라(19).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전도여행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후에( 13) 실루기아와 구브로, 밤빌리아, 비시디아, 루가오니아에서 수고하였고 그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드로아로 여행하였으며 거기서 마게도니아로 건너오도록 부름을 받아 유럽 지역으로 여행해 들어간 것을 보게 된다( 15,16). 다음에는 그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 그리고 그 인접 지역들에서 매우 분주하게 지내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바울이 그처럼 많은 일을 하였다면 틀림없이 그는 일을 절반쯤만 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안하게 전하였노라. 즉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조건을 충분히 이야기했으며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2] 그는 이전에 복음을 듣지 못했던 곳에서 전하였다(20,21). 그는 묵은 땅을 갈고 오랜 세월 동안 우상 숭배와 점술만이 성행했던 곳에 기독교를 소개하였다. 바울은 개척자 였기 때문에 일하는데 있어서 더욱 더 많은 난관과 실망을 겪어야 했다. 그는 가장 힘든 일에 부름을 받았다. 그는 이방 세계에서 무장한 강한 자의 궁전에 최초로 공격을 감행한 담대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도처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최초의 공격을 시도하고 그 때문에 지독한 고난을 받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그의 사도직에 대한 증거로서 언급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직무란 특별히 밖에 있는 자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어두움 가운데 앉아 있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는 이사야 52:15에서 이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21). 빛이 두 번째 비치어 점차 밝아지는 것보다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욱 밝게 느껴지는 법이다. 대체로 복음의 최대의 성과는 어느 장소에 복음이 처음으로 이르렀을 때 발생한다. 그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교에 면역되고 만다.


2. 자기 일에서 거둔 커다란 성과(17-19)

그것은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에 효력이 있다.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순종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모든 여행을 통해서 항시 이점을 꾀하였다. 그러면 이 중대한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리스도께서 제 1 의 행위자이셨다. 바울은 "내가 그 일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그 일을 이루셨다"고 말한다(18).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그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이 사실을 고백한다. 그는 매우 적극적인 도구였다. 말과 일로(18). 이 말은 곧 그의 복음 전파와 그가 행한 기적들 혹은 그의 가르침과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말과 행실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영혼을 구원하기가 보다 쉽다. 이것은 행함과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하는 태도이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이런 것들이 말씀의 전파를 그처럼 유효하게 하였다. 성령의 능력이 바울의 일을 효과적으로 해냈다(19).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첫째, 다른 사도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서도 성령의 능력이 그러한 기적들을 일으켰다. 기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둘째, 기적을 본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능력이 작용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의 수고에 따르지 않았다면 바울 혼자서는 한 사람도 순종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커다란 약점과 연약함을 알고서 수고하는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이 사실은 적지 않은 격려를 준다. 바울에게 역사 하신 전능하신 그 성령은 종종 연약한 힘을 온전하게 하신다. 회개한 민족들은 바울의 기쁨이요 즐거움의 면류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기와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


. 로마 교우들을 만나 보고 싶은 사도의 열망 15:22-29

바울은 여기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보려는 자신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의 표현방법은 매우 정중하여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마저도 은혜로운 분위기를 띠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로마에서도 바울의 일행을 몹시 기다렸던 것 같다. 이방인의 사도가 이방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그는 곧 가겠다고 약속을 하며 지금은 왜 갈 수 없는지에 대해 충분한 이유를 제시한다.


1. 바울의 사과(22)

[1] 그는 자기가 그들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점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그는 로마를 보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곧 로마에 있는 멸시받는 불쌍한 성도들에게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23). 이들은 바울이 로마에서 알고 지내게 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 보기를 특별히 더 원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교회 가운데서 믿음과 거룩함에 대해서 훌륭한 평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벌써 몇 해 동안 이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하는 종들이라도 자기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다 뜻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2]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에게 일이 너무 많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번 길이 막혔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다른 곳에 문을 넓게 열어 놓으시고 그를 그리로 비켜가게 하신 것이다.(1) 자기 종들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는 그들의 계획에 따라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따라 결정한다. 사람이 뜻을 세우지만 그 뜻을 처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복음이 어디에 이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2)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데서 바울의 지혜가 잘 드러난다. 바울이 자신의 명예만을 생각했다면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로마로 가는 그의 발길을 결코 막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 일 보다는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하였다. 들판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기회는 한번 놓치면 영영 다시 얻지 못한다. 가장 필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충분히 본받아야 할 태도이다. 바울은 이 사실이 충분히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친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꼭 필요한 일을 먼저 하느라고 별로 필요치 않은 방문과 인사치레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욕해서는 안된다.


2. 그의 여행 계획(23,24,29)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23). 이 지방이란 그 당시 그가 체류하고 있던 그리이스를 가리킨다. 그는 복음의 전차를 몰아 그리이스를 정복하고 나서 정복할 또 다른 그리이스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던 참이었다.


[1] 그는 어떤 태도로 자기의 방문 계획을 미리 말하였는가? 그의 계획은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이 말을 볼 때 바울은 스페인으로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대체 뜻을 이루어 스페인으로 갔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그는 실제로 로마에 갔으나 죄수의 몸으로 거기에 가서 2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다. 그 후에 어디로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 실천을 금하는 수가 종종 있다. 이제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에게 가는 뜻을 비춘다. 너희는 그리고 보내줌을 바람이요(24). 그는 "만나보기로 결심했다"고 말하지 않고 "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는 태도로 모든 뜻을 세워야 한다.


[2] 그는 방문을 계획하면서 무엇을 기대하였는가?(1) 그가 그들에게 기대했던 것: 그는 그들이 자기를 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랐다. 바울이 기대한 것은 왕들이 받는 것과 같은 당당한 시중이 아니라 친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사랑이 깃든 보살핌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그리로 여행해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들이 그저 여행길에 어느 정도까지만 동행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계속해서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2) 그가 그들과 함께 갖기를 바란 것: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24). 바울이 바란 것은 그들과의 교제였다. 바울 자신으로 말하자면 지식과 은혜에 크게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럴지라도 그는 그들과의  사귐을 좋은 교제로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그는 그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자 원하였기 때문에 얼마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무르려고 생각하였다. 그들을 마나보고 이내 떠나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약간 만족을 얻는 것뿐이다. 그는 그들과의 사귐을 아쉬워하면서 떠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얻는 만족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는 만족에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후자만이 영혼을 만족시킬 것이다. 또한 우리가 저 세상에서 성도들과 가지리라고 기대하는 그 교제를 통해서 얻는 만족에 비교할 때도 역시 이 세상의 것은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3) 그가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기대한 것(29): 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갈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기대한 것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으로 말한다.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24). 바울은 제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지나치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후에 바로 이 사람들이 그를 떠나간 것이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그 자리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대한 것에 관해서는 그는 확신 있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음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 우리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무리 적어도 지나침이 없고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짊어지워 그들에게로 보내주시기를 바랬다. 이 구절을 '내가…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1:11)는 말씀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 복음의 축복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최상의 축복이다. 교인과 목회자가 모두 충만한 축복을 받고 있을 때에야 그들 간의 즐거운 만남이 있는 법이다.


3. 로마에 갈 수 없는 이유(25-28)

그는 먼저 예루살렘에 가야하기 때문이다(25-28). 그는 당시 교회의 연보를 전달하는 사신으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이었다.


[1] 이 연보 자체에 관해서: 필시 그는 로마 교우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본보기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는데다가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도들을 위해서 도움을 청하는데 매우 재간이 있는 사람이었다.


1) 이 연보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26). 성도가 가난하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가 최상의 것도 아니고 가난 또한 저주가 아니다. 글라우디오 가이사때에 온 세상을 덮쳤던 기근이 유대지방에 특별히 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다른 지역의 성도들보다 더 가난했던 것 같다. 이것이 사도행전 11:28-30에서 언급된 부조의 계기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이 그들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후한 애정을 그들에게까지 뻗쳤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우리도 비록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믿음의 식구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사랑의 손길을 뻗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태양이 광선을 뻗치듯이 우리의 후한 온정을 널리 베풀어야 한다.


2)이 연보는 어떤 사람들이 거두었는가? 마게도냐(그들 중에도 빌립보 교인들이 주로)와 아가야(그들 중에도 주로 고린도 교인들이) 사람들이 거두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가난하고 궁핍하였던 반면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은 부유하고 풍족했던 것 같다. 이처럼 저쪽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이쪽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서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의존성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기쁘게. 이 말은 그들이 연보하는 일에 얼마나 잘 준비된 자세를 갖추고 있으며 그 일에 얼마나 기쁘게 참여했는가를 보여준다.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이 동정의 원 뜻은 성도들 간의 교제의 징표로서 왕래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 몸에서 한 지체가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지체를 돕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주는 입장에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 그들은 구제에 쓰여지도록 사도들의 발 앞에 자기들의 재산을 내놓고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섭리는 천칭의 접시를 바꾸어 놓아 그들로 궁핍하게 하였고 그들은 헬라인들이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긍휼을 얻을 것이다.


3)그들이 이 연보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27)?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27).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크게 신세를 지고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줄기에서 그리스도가 나오셨고 또한 거기에서 선지자와 사도들 그리고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이 나왔다. 유대인들은 살아있는 신탁을 위임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장서지기이다. 그런데 그들이 잘려 나간 것은 헬라인들이 들어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헬라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누어 가졌고 그들로부터 간접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했다.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2] 이 일이 있어서 바울의 임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여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성도를 섬겼다(25). 그와 같은 선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 일을 수행해 나갈 적극적인 사람이 없는 탓으로 정지해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 일 외에도 바울에게는 이번 여행에 교회들을 방문하여 견고하게 세우는 계획이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선생처럼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들의 영혼뿐 아니라 몸에도 유익을 끼치는데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 일을 완전히 마치려고 결심한 것이다(28).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28). 그는 이 연보를 열매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그것이 의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뿌리로부터 돋아난 것이다. 확증하겠다는 그의 말은 그가 그것에 대해서 매우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임을 보이려고 애썼다.


. 바울이 로마 교회에 기도를 부탁함 15:30-33


[1] 로마 교회 교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힘을 다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바울의 열망이 30-32절에서 매우 간절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전에 그들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였으므로 이제는 기도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기도를 주고받는 것은 바로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표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를 위해 갖고 있는 사랑과 간구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참으로 주의해야 한다.


1)그들은 왜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30). "너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를 위하여 내게 이러한 애정을 베풀라.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신자들 서로 간의 마음  속에 일으키시는 사랑의 증거로서 나를 위해 기도하라. 너희가 일찍이 너희에 대한 성령의 사랑을 경험하였고 이제 너희의 사랑을 성령께 보답코자 한다면 이같이 애정을 보이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2)그들은 그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30). 우리는 이 임무를 이행함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힘을 다 발휘해야 한다. 확고함, 믿음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이렇게 해야 한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궁핍을 의식할 때 자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과 같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내 자신과 내 친구들을 위하여 나는 매일같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나와 힘을 같이하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그들이 자기와 함께 부지런히 노를 젓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는 함께 만날 수 있는 법이다.


3)그들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다.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점들에 관해서 그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한다. 첫째, 그가 처해 있는 위험들에 관하여.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31). 그는 이번 여행에서 그들로부터 고난받을 것을 예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했다. 우리는 박해에 대비하여 기도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한다. 둘째, 그의 봉사에 관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아니, 그의 섬기는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한 무슨 위험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 그를 멸시한 것처럼 믿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를 부끄럽게 여겼다. 이 때문에 그는 "그 일이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원수들의 악의가 저지되기를 하나님께 빌어야 하듯이 또한 친구들의 선의가 보존되고 점점 자라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셋째, 그들에게로 가는 여행에 관해서. 그는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다. 나로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라(32). 그는 만일 첫 번째 방문에서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다음 방문 때는 기쁨이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좇을 때는 기쁨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의 모든 기쁨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2] 사도가 그들을 위하여 드리는 또 다른 기도가 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33). 사도는 여기서 그들 가운데 분쟁이 있는 이유로 하나님께 이러한 호칭을 쓴다. 하나님께서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도 평강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샘을 갖고 있는 자들은 다른 어떤 시냇물도 필요치 않다.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강한 자나 약한 자를 막론하고 모두 함께 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하나가 된 자들은 마땅히 서로에 대한 애정에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 사도의 문안 16:1-16


[1] 이 편지를 전달한 사도의 한 친구 뵈뵈에 대한 천거가 기록되어 있다(1,2). 그녀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재산이 있는 사람으로서 로마에 볼일이 있어 갔으나 초행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녀를 맞이해 주도록 부탁하고 있다. 정중한 예의와 기독교는 잘 어울린다.


1)그는 그녀를 칭찬한다. 첫째, 바울에게 있어 자매와 같은 사람으로 칭찬한다. 우리 자매 뵈뵈(1). 물론 혈육으로 된 자매가 아니라 은혜로 된 자매이다. 그리스도나 사도들이나 모두가 경건한(그러기에 존경할만한)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동료들 몇 명을 두고 있었다. 둘째,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서 그녀를 칭찬한다. 그녀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이 일이 여자들에게는 금지되었다) 구제와 손 대접을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다소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한다. 그럴지라도 그녀는 자기가 교회의 종이 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각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도록 애써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에 인접해 있는 조그만 항구도시였다. 셋째, '여러 사람의 보호자'로서, 특별히 바울의 보호자로서 칭찬한다(2). 그녀는 고난과 궁핍에 처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녀의 후한 온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져서 그녀는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었다. 바울이 그녀가 자기에 베풀어준 특별한 애정을 언급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하고 있음을 주의해 보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2).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감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이다.


2)그는 그들에게 그녀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한다. 주안에서…를 영접하라. 즉 그녀를 대접하라. 그리스도의 종과 친구로서 그녀를 환영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를 영접하는 것이 성도들의 합당한 태도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사랑과 존경으로써 그를 영접하는 것이 성도들의 합당한 태도이다.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그녀는 여자요, 로마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녀를 돕도록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서로의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2] 그가 편지에서 안부를 묻고 있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몇몇 사람들에 대한 칭찬이 있다. 그가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중에도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그들 각각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문안하라(3). 이것은 "내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라"는 말과 같다.


1)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관하여: 그들은 바울이 특별히 고맙게 여기고 있던 유명한 부부이다. 그들은 본래 로마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었지만 글라우디오의 칙령으로 인해 거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18:2).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들을 알게 되어 함께 천막 짓는 일을 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은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바울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였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4). 그들은 바울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자기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많은 위험에 빠졌었으나 그들이 그를 보호해 주었다. 그들이 바울에게 이러한 온정을 베푼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일이었지만 그는 마치 그 일이 바로 어제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말한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4). 이들 모두는 이 착한 부부가 이방인의 사도인 그의 생명을 구해준 데 대해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5). 신앙이 한 가정을 지배하면 그 집은 교회로 변할 것이다. 그 가정의 훌륭한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신앙에 있어서 그처럼 뛰어나고 앞섰다는 점으로 보아 필시 그의 가정을 이렇게 만든 데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그녀는 그들 부부의 이름 가운데 그녀의 이름이 종종 먼저 언급될 만큼 뛰어난 데가 있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 있었을 때 거기에서 단지 거류자들로 지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다(고전 16:19).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주의 할 것이다.


2)에배네도에 관하여(5):그는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사랑을 느끼게 하는 말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끌어들이기 위해 통용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그는 암블리아를 '주안에서 사랑하는 자', 스다구를 '사랑하는 자'로 부른다. 에배네도에 대해서 바울은 더욱 자세하게 그를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하였다. 즉 그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그의 사역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린 자였다. 그는 풍성한 수확의 한 보증이었다. 바울이 아시아의 수도인 고린도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거두셨다( 18:10).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과 제일 첫 시간에 일하러 포도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특별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

3)마리아와 그의 사람들에 관하여: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6). 참된 사랑은 수고를 결코 마다하지 않고 도리어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사랑이 많은 곳에는 많은 수고가 따르는 법이다. 그는 드루배나와 드루보사가 주안에서 수고하였다고 말하며(12), 사랑하는 버시에 대해서는 그녀가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여 주의 일에 더욱 풍성하다고 말한다.


4)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 관하여(7):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부부로 간주한다. 그들은 바울의 사촌들로 그의 혈족이었다. 헤로니온도 같은 친척이었다(11). 신앙은 친척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제거해 버리지 않고 오히려 성화시키고 개선하며,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그들을 기뻐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와 함께 갇혔었다. 함께 고난을 당하는 일로 말미암아 영혼이 연합되고 애정이 굳어진다. 그들은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식과 은사와 은혜에 탁월하였는데 그 점이 그들을 사도들 사이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시기적으로 바울보다 앞섰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로든지 자기보다 앞섰으면 언제든지 그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5)아벨레에 관하여: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았다(10). 그는 단련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친구들과 원수들에게서 단련을 받아 정금같이 된 자로써 사람들이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6)아리스도불로와 나깃수에 관하여: 바울은 이들 집안에 대해 안부를 묻는다(10,11). 그는 그들 집안 사람들 중 '주안에 있는' 자들(11)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안한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안부를 묻는 그의 세심함을 보라!


7)루포에 관하여(13). 그는 선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은사와 은혜가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선택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3). 혈육으로는 그의 어머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는 곧 내 어머니이다는 말이다. 이 훌륭한 부인은 때때로 바울에게 어머니처럼 대해 왔으므로 그는 여기서 그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고 있다.


8)나머지 사람들에 관하여: 그는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14) '저희와 함께 있는 성도들'에게(15) 문안한다. 함께 있기를 기뻐하는 것은 성도들의 좋은 특성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같이 그들이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함께 묶어 문안 인사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에는 사랑과 대화로 서로 연결된 보다 작은 사회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문안하도록 권하는 말로써 끝을 맺는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6). 서로간의 인사는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만큼 또한 사랑을 증진시키고 강화한다. 바울은 여기서 서로간의 인사를 장려하면서 단 그 인사가 거룩해야 할 것을 지시한다. 그는 끝에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이름으로 그들 모두에게 전하는 전체적인 인사를 덧붙인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교회들이 내가 너희에게 그들의 애정과 너희를 향한 선한 소원을 알려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성도들 간의 교통을 유지시켜 주는 한 방법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 16:17-20


바울은 여기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파괴적인 원리와 행동을 일삼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주의를 준다.


1. 주의 자체(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17). 그는 의도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사랑을 위하여 권한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 두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 그들의 위험을 알라는 것이다.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17). 우리 주께서도 친히 장차 분쟁과 거치는 것이 일어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비하도록 주의를 받는다. 분쟁과 실족케 하는 일로 교회를 괴롭히는 자들은 너희 교훈과 다르고 어긋나므로 분쟁과 거치는 것을 일으킨다. 일단 진리가 버려지고 나면 통일과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제 이같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살피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당할 위험을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는 눈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진짜 속셈은 매우 유해할지라도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위험이 밝혀지고 나면 절반은 예방한 셈이 된다. 둘째, 그 위험을 피하라는 것이다. 저희에게서 떠나라. "너희가 그들에게 감염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들과의 불필요한 대화나 교제를 일체 피하라. 그들의 말은 암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특별히 그들에게 유대주의 교사들을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2. 이러한 주의를 강조하는 이유(18-20)

[1] 이 유혹자들의 악한 계략 때문이다(18). 그는 그들을 다음 두 가지 사실로 묘사한다. 첫째, 그들이 섬기는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아무리 겉모습을 꾸밀지라도 실상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다.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18).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이런 저런 천한 정욕들뿐이다. '저희의 신은 배다'( 3:19). 그들이 섬기는 주인이 얼마나 비천한가를 생각할 때 그러한 존재를 그리스도에 비긴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둘째, 그들이 자신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은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이다. 그들의 말과 연설은 거룩함과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는 체 가장하며(입으로만 경건한 체 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들의 부패한 교훈을 주입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해 사랑과 호의가 있는 제 가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다해 우리의 마음을 지키도록 애써야 한다.


[2]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 때문이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돌리는 지라(19). "너희는 모든 교회에 자발적이고 유순하여 잘 따르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첫째, 너희가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유혹하는 교사들이 너희를 더욱 공격하려고 할 것이다. "거짓 교사들도 너희가 유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듣고서 너희가 자기들에게도 순종할지 어떨지를 알아보기 위해 너희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둘째, 그들이 그처럼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유혹자들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염려하는 사람으로서 이 말을 꺼낸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19). 바울은 좀더 쉽게 그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그들은 은근히 칭찬한다. 그럴지라도 너희가 안심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 유순한 기질이 잘 통제될 때는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가기가 아주 쉽다. 여기에 두 가지 일반적인 법칙이 제시된다. 하나는 선한데 지혜로우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 중 아무에게도 속지 않기 위해서는 선한 진리와 선한 본분 그리고 선한 사람들에게 붙어 있어야 하는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다음은 악한데 미련하라는 것이다. 속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속이는 자가 되지 않을 만큼 순박하라는 것이다. 뱀의 지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하지만 늙은 뱀의 간교함은 합당치 않다. 조금이라도 진리를 거스리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지혜롭게 미련한 사람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 교회가 사람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교회를 더욱 염려하였다. 로마는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여서 많은 이목이 거기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집중해 있었다.


[3] 우리가 마침내는 승리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저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26).

1)그가 하나님께 붙인 칭호: 평강의 하나님. 우리가 영적 승리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그를 전능하신 만군의 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와 화해하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는 평강의 하나님으로도 보아야 한다. 승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되 전쟁의 하나님으로서보다는 평화의 하나님으로서 그에게서 나온다.

2)그가 하나님에게서 기대하는 축복: 그것은 곧 사단을 이기는 승리이다. 유혹하고 괴롭히며 속이는 자와 파괴하는 자로서 활동하는 사단을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이다. 네 힘과 지혜로서는 그를 이길 수 없을 지라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를 대신하여 그 일을 해내실 것이다. 첫째, 그 승리는 완전할 것이다. '그가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말은 에덴 동산에서 메시야가 약속한 최초의 약속을( 3:15)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다만 그 승리를 따를 뿐이다. 이 사실에 힘입어 우리의 영적 투쟁에 있어서 더욱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자. 둘째, 그 승리는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속히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병사들이 전쟁이 곧 승리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면 더욱더 사기를 얻는 법이다. 이 승리는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완전 승리에 대한 보증으로써 누리고 있는 현재의 승리들과 더불어 장차 하늘나라에 이르렀을 때 사단을 정복하게 되는 승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잠깐 동안만 믿음과 인내를 지켜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0).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리요? 바울은 친구로서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권위를 가지고 이 같이 그들을 축복하여 24절에서 다시 그 축복을 되풀이 한다(한글 개역 성경 본문에는 24절이 생략되어 있다-역주).


. 사도의 동역자들의 문안 16:21-24


바울은 여기서 지금 자기와 함께 있는 몇몇 사람들이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1] 그의 각별한 친구로 있는 사람들: 나의 동역자 디모데(21). 바울은 때때로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나 여기서는 그를 동등한 한 사람으로서 동역자라고 부른다. 누기오. 필시 그는 안디옥 교회의 잘 알려진 구레네 사람 루기오( 13:1)일 것이다. 소시바더. 그는 사도행전 20:4에서 언급된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같은 인물로 생각된다. 바울은 이들을 자기 친척이라고 말한다. 친척들의 거룩함과 유용함을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2] 바울의 대필자였던 사람(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사람 나 더디오(22). 바울은 대필자를 고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친필로 쓸 때에는 용서를 구할 만큼 그의 필체가 나빴기 때문이다( 6:11). 교회에 행해지는 봉사가 아무리 적을지라도 그것이 기억되지 않은 채 지나가는 법은 없다.


[3] 그밖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잘 알려져 있던 사람들(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23). 바울은 그에 대해 자기 뿐만 아니라 온 교회의 식주인으로서 그의 후한 대접을 칭찬한다. 이성의 재무 에라스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명성과 재산이 있었던 것 같다. 권세자들이나 귀족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나 더러는 부름을 받는다. 또한 '구아도'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형제라고 불려진다.


. 복음의 묘사와 송영 16:25-27


사도는 여기서 복되신 하나님께 장엄한 영광을 돌리면서 엄숙하게 그의 편지를 끝맺는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이 로마 교우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토해내고 있는 셈이다.


1. 하나님의 복음의 묘사(25,26)

나의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케 하실(25). 바울이 복음을 자기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그 복음의 전파 자였기 때문이다. 바울의 머리와 마음속에는 온통 복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는 잠시 본론을 떠나 복음의 성격과 탁월함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1]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과 총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심이다. 바울은 우리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전파한다고 말한다. 영혼을 견고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전파하는 것이다.


[2] 복음은 영원 전부터 감취었다가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이다. 복음의 내용은 비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 할 것은 만일 우리가 그 큰 구원을 소홀히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를 하늘나라에 데려가기에 충분할 만큼 이 비밀의 대부분이 명백히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1)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감취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부터 침묵 속에 감싸였다."고 말한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 비밀이 하나님 속에 감취어 있었다(3:9). 혹은 우리는 그 구절을 '영세전부터'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구약시대 내내 이 비밀은 비교적 감취어져 있었다. 이같이 이 비밀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대대로 감취어져 왔으니 이방인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마저도 주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는 구속의 비밀에 관해서 아주 캄캄한 상태에 있었다.


2)이제는 이 비밀이 나타나신 바 되었다.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의의 태양이 세상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비밀이 어떻게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바 되었는가? 그것은 의의 태양이 떠오름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예언들이 가장 잘 설명된 것이다. 구약은 신약의 계시에서 빛을 빌어 올뿐만 아니라 다시 그리고 빛을 돌려준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밭에 숨겨져 왔던 보배였음이 명백하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24:27).


3)이 비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나타내신 바 되었다. 바울은 아무도 "어째서 이 비밀이 그렇게 오랫동안 감취어 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는가?" 하고 반문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26)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게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계시를 찾지 말고 이 비밀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 비밀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4)이 비밀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되었다. 바울은 종종 이 계시의 범위에 주목한다. 이 계시의 목적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 목적은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다. 복음이 계시된 목적은 말거리나 논쟁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이 바른 믿음인가? 그것은 곧 순종을 일으키는 믿음이다. 무엇이 바른 순종인가? 그것은 곧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이다. 그러면 복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송영(27)

바울은 그에게 영원토록 영광을 돌린다(27).

[1] 이 찬양의 주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우리에 대한 그의 은총을 확고하게 붙잡으며 그를 찬양하고 경배할 때는 그의 완전하심을 붙들고 말한다. 하나님의 두 가지 중요한 속성이 여기에서 언급된다. 첫째는 그의 능력(25)이다.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성도들을 견고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 능력의 영광을 돌리면서 이점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고 또한 얻어야 한다. 우리에게 무슨 의심이나, 곤란, 두려움이 있든지 간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둘째는 그의 지혜이다(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지혜 없는 능력이나 능력 없는 지혜는 모두 헛되고 무익할 뿐이다. 그러나 이 둘을 다같이 무한히 가지고 계시는 자만이 완전한 존재이다. 하나님만이 완전하고 결코 틀림이 없이 지혜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의 모든 지혜의 근원이시며 샘이시다. 그에게만 힘과 지혜가 있다.


[2] 이 찬양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로우신 하나님께'라고 읽는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통해서(말미암아)이다. 혹은 우리는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라고 읽을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영광은 반드시 주 예수의 손을 거쳐가야만 한다. 그가 우리의 모든 기도의 중보자이시듯이 또한 그는 영원히 우리의 모든 찬양의 중보자 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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