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의 형제에 관한 의무(8-21)
서로에 대한 우리 모든 의무는 달콤한 이 한마디 곧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말을 제일 먼저 언급한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9절). 진정한 사랑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아첨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에는 우리 친구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과 우리 원수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이 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 우리 친구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가 빚지고 있고 갚아야 하는 상호간의 사랑이 있다.
1)다정한 사랑(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이 말은 단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하려는 마음의 준비와 성향 곧 샘에서 물이 넘쳐 나오듯이 흘러나오는 애정을 또한 의미한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같은 것이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성품이 있고 마음에 사랑의 법이 새겨진 곳에는 이와 같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서로. 이 말은 우리에게 사랑의 은혜를 권고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듯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하늘나라 이쪽 편에서 더 있을 수 있겠는가?
2)존경하는 사랑: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10절). 다른 형제들을 높이기에 앞장서자.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은사와 장점을 그리고 그들의 업적들을 주의하여 정당하게 평가해 주고 자신보다는 다른 형제가 칭찬 받는 것을 듣기를 더 기뻐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존경하는 일에 서로 먼저 가거나 앞지른다"고 읽는다. 존경을 취하는 일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을 하는 일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우리 자신보다 더 유능하고 더 낫게 여겨야 하지만(우리의 번역대로 하자면 이런 뜻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핑계삼아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을 존경한다는 구실아래 안일과 나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는 이 말에 이어서 바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11절).
3)풍성한 사랑: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13절). 우리의 형제가 곤궁에 처해 실제적인 도움을 바라고 있으며 그들을 도울만한 힘이 우리에게 충분히 있는데도 말로만 사랑과 존경을 얘기한다는 것은 사랑을 조롱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 필수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세상의 것들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런 것들이 가장 좋은 것이었다면 성도들이 그것을 그렇게 조금 밖에 가질 리가 만무한 것이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것 혹은 전달하는 것(이것이 더 적절한 뜻일 수가 있다)은 재물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다. 배고픈 자들에게 영혼을 꺼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돈지갑도 꺼내야 한다. 전달한다는 말은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일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을 구제하는 우리의 행동은 그들의 궁핍을 동정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베푼 자비로운 동정은 그들이 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교제)한 것으로 말해진다(빌 4:14). 우리는 성도들과는 특별한 방법으로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동료 사람들에게 갚아야 하는 일반적인 사랑이 있지만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갚아야 하는 특별한 사랑도 있다. 바울은 이 같은 풍성한 사랑의 또 다른 예를 언급한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라는 말은 긍휼을 얻을 자들의 긍휼히 행함을 보여주는 한 예로서 언급되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우리가 지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회를 애써 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동정하는 사랑(15절):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진정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슬픔과 기쁨에 관여하도록 하고 그들을 우리 자신처럼 여기도록 우리를 가르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받은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받은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시련 때문에 운다. 따라서 이 사람들에게는 형제애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동정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 말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죄악적인 기쁨이나 슬픔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공하는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 또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지 말고 그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도우려고 생각해야 한다.
5)연합된 사랑(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애정을 같이 하라. 모두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라. 네가 네 자신에게 행하는 대로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를 바라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렇게 이해한다. 이것은 우리의 형제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태도이다.
6)겸손한 사랑(16절):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겸손함이 없이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서로 바르게 사랑하려면 서로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낮추고 친절을 베푸는 아주 보잘것없는 적을 떠맡아야 한다. 사랑은 겸손해지는 은혜이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높은 것을 마음에 품지 말라-역주) 우리는 명예와 우월을 열망해서는 안 된다. 로마인들은 어쩌면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을 더 낫게 여길 소지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 교인들에게 거듭거듭 높은 마음을 품지 않도록 경고한다. 10:20을 대조해 보라. 낮은데 처하며. 이 말은 우리가 보잘것없는 것들에로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세상에서 우리의 형편이 가난하고 비천할 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두고 그 사실을 잠잠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난외주(한글 개역에는 없음-역주)에서는 "보잘것없는 것들로 만족하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처하게 하신 그 위치를 만족히 여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 말고는 무엇이든지 달갑게 여겨야 한다. 또한 이 구절은 낮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가 있다(필자는 두 가지 다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낮은데 처하며(흠정역에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로 낮아지며'-역주). 크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두루 감찰하사 그런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낮은 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예복을 입은 사람뿐만 아니라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받은 은혜도 소중히 여긴다. 비록 보석이 오물 속에 있을지라도 보석은 보석이다. 낮아지라 즉 그들과 어울려라.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에게로 몸을 굽히라는 말이다. 바울은 여기에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3절의 말씀도 이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자만심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다른 형제들에게로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만심은 억제되어야 한다. "너 혼자 지혜 있는체 말라, 즉 네 자신의 지혜면 충분하다고 생각지 마라.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마라.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지혜라는 상품이며 상품은 상거래에서처럼 주고받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7)'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도록'하는 사랑(18절):우리는 친밀하고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평화를 보호하는데 애써야 하며 깨졌을 때는 다시 잇도록 애써야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하라는 말이다. '할 수 있거든' 하나님께 죄를 지으며 양심을 해치지 않고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성결함이 없는 평화는 사단의 궁정에나 있는 평화이다. '너희로서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툼에 휘말려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흠이 없도록 애써야 한다.
[2]우리의 원수에 대해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마땅히 세상에서 좀처럼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함께 웃지 않는 원수들을 만날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들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승리와 지배를 꾀하는 다른 모든 규칙과 방법들과는 매우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평화를 꾀한다. 누가 우리의 원수가 되었든지 간에 우리의 원칙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을 그들에게 하는 것이다.
1)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이다(17절).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 원수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마5:45) 배웠고 더욱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으로 배웠다(5:8,10). "아무에게도…하지 마라. 네 친구로 있는 사람에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으로써너는 그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절도 같은 뜻으로 쓰인 말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그는 화가 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이같이 애정 어린 말투로 말을 걸고 있다. 사랑을 얘기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혈기를 누그러뜨린다. 화가 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이같이 애정 어린 말투로 말을 걸고 있다. 사랑을 얘기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혈기를 누그러뜨린다. 화가 난 형제를 달래고 싶은가? 그를 사랑하는 자라고 불러보라. 그처럼 부드러운 말은 화를 돌이키는데 유효할 수가 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이 말씀은 성냄과 악으로부터 나오는 사사로운 보복을 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이 이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라(마 5:38-40).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은 것뿐만 아니라 비록 법이 허용하는 경우일지라도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재판하기를 멸망하는 것 또한 금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타락한 본성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교훈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의 두 가지 말씀을 덧붙인다. ①개인적인 보복을 극복할 수 있는 치료제: 진노하심에 맡기라. 우리 자신의 진노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내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사로운 복수심을 거절하고 억제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진노하심이란 말을 먼저 우리 원수의 진노에 대한 것으로 생각해 보자. 이 말대로 하자면 "원수의 진노에 자리를 양보하라 즉 진노를 진노로 갚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갚으라"는 뜻이다. 사람의 감정이 격앙되고 그 흐름이 거세어졌을 때는 그것이 더불어 오르거나 사나와지지 않도록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화가 났을 때 우리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하나님께서 네 원수를 상대하시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②사사로운 보복을 반대하는 이유: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인 내게 있으니.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공의를 시행하는 것은 그에게 속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권세의 일부를 치안 판사들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그들의 법적 처벌은 하나님이 원수 갚으시는 한 방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일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면 우리가 그 일을 행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그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보좌에 우리가 대신 앉는 셈이 된다. 우리가 그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그 일을 온순하게 하나님께 맡기면 그가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을 그들에게 베풀어야 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말씀은 기독교 특유의 명령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①말로써: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대체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핍박을 받아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들을 축복하라는 말은 "그들을 좋게 얘기하라. 그들에 대해 공손하게 말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잘되기를 빌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그러한 소원을 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선의를 증명할 수 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 말은 끝까지 선의를 보이라는 말이다. 기도할 때는 축복하다가 다른 때는 저주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언제나 축복하고 결코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입에 합당치 못한 것이다.
②행위로써(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곧 그에게 어떠한 친절이든지 베풀고 그가 네 원수였다는 이유로 결코 뒤로 물러서지 마라. 그러면 너는 그 행위로써 네가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의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주리거든,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에게 원수를 갚고 계시는구나 라고 말하지 말고 그를 먹이라. 더욱이 그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네가 그를 굶겨 죽일 수도 있을 때에 그를 먹이라.(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먹이되 풍성하게 먹이라. 마치 우리가 아이들과 병든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듯이 그를 먹이라. 네 사랑을 보일 수 있도록 애써 그 일을 하라. 네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화해와 우호의 표시로서 그를 마시우라. 그렇게 하여 네 사랑을 그에게 확증하라." 둘째, 우리가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즉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그의 마음을 녹여 회개와 친교에 이르게 할 것이다."(이 말은 쇠를 녹일 때 사람들이 불을 쇠 아래만 놓는 것이 아니라 위에도 놓는 경우를 암시하고 있다). "만일 너의 친절이 아무 효과가 없다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친구 하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너의 친절은 너를 대적하는 자의 악의를 더욱 변명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우리의 목적이 결코 아니다. 다만 친절을 베푸는 결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원수를 갚는 자는 지는 자이고 용서하는 자가이기는 자다. "악에게 지지 말고(21절). 즉 너희를 성나게 만드는 어떤 악이든지 그것이 너희를 지배하여 너희의 평화를 방해하고 너희의 사랑을 깨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원수를 갚으려고 하거나 그러한 생각을 품게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자기에게 가해지는 손상을 묵묵히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완전히 그것에게 지고 마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즉 인내와 관용의 선으로, 아니 네게 잘못하는 자들에게 친절과 덕행의 선을 보임으로써 이기라"는 것이다. 이 원칙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강한 용사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3] 그 자체로서 선한 것과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권하는 두 가지 권고가 있다.
1)그 자체로서 선한 권고(9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우리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싫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에 집착해야 한다. 이 말은 선한 것에 대한 신중한 선택과 진지한 애착 그리고 그 안에서의 부단한 인내를 표시한다.
2)좋은 평판을 위한 권고(17절):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즉 네가 교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하도록 주의하고 연구하라"는 것이다.
Ⅰ.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 13:1-6
우리는 여기서 관원들과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대해서 배운다. 그런데 그들이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불리는데 이 말은 그들의 권위(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와 위엄(그들은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을 암시한다. 우리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1. 부과된 의무(1)
각 사람은…굴복하라(1절). 각 사람이란 곧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도 포함되며 여기에 성직자도 제외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양심이 어떠한 사람에게나 혹은 그의 의지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복종은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진실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여기서 요구하고 있는 영혼의 복종은 그들에게 말하거나 그들에 대해서 말할 때 보이는 내적인 경의와 외적인 존경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위에 있는 권세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렇게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하게 복종하라. 바울이 이 의무를 강조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공공의 평화와 질서, 통치를 저해하는 원수라는 비난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자기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난을 받으셨다.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예나 이제나 익살스럽다, 선동적이다, 난폭하다는 등의 비방을 들어왔다는 사실이 놀랄만한 일은 못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관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 가운데 하나이며, 그를 믿는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훌륭한 국민이 되도록 돕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는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관원들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기 쉬운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국가의 통치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데 그것은 관원들이 이방인이며 불신자들이었고 아직까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과 권한을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더 강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이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이유(1-6)
[1] 진노하심을 위하여(4절). 권세자들은 칼을 쥐고 있다. 칼을 가지고 있는 자와 다투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미를 보이면 그것이 사회 전체에 큰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복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결론을 위해서 다음의 논의가 언급되어야 한다.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2절). 즉 그들은 자기들의 저항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불려갈 것이다. 하나님은 저항으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그들과 셈을 하실 것이다. 그래서 관원들은 두려움이 된다는 말이 뒤따른다(3절). 이것이 유익한 논의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저급한 것이다.
[2] 우리는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양심을 인하여' 복종해야 한다. 형벌이 두려워서보다 미덕을 사랑해서 복종해야 한다. 사도는 양심으로 하여금 이러한 복종을 하도록 이끌기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1-4, 6절).
1)권력의 제정에 있어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1절).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권세자들의 법령을 제정하셨으므로 모든 권력은 그에게서 나온다. 권력의 침해나 남용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권력 자체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주 불의하고 압제적인 군주들일지라도 위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어떠한 권세도 없다(요 19:11).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로 구별되는 상태 가운데 있게 하시면서도 그들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바다의 고기처럼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류를 경영하심에 있어서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모든 권세는 다(1절). 즉 통치의 형태와 방법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받아들여지고 복종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2절).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법령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법이며 축복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권세를 무시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여기서 권세자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의 사자들로 불리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이다(4,6절). 권세자들은 좀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니는 위엄은 우리의 존경을 요구한다. 비록 그들이 우리에게는 군주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종이다.
2)권력의 의도에 있어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3절). 관원이 존재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①관원들은 악한 행위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이 된다. 권세자들은 칼을 쥐고 있는데 전쟁의 칼뿐만 아니라 공의의 칼도 쥐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법으로 억제할 수 없는 죄와 타락에 대한 욕망일지라도 현실적인 처벌을 가하면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법률이 기독교 국가 안에서도 제정되어 마땅하고(딤전 1:9) 또 그것은 복음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원은 하나님의 사자이다(4절).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재판에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4절). 아무리 주의 깊고 성실한 판사들의 사법적인 처리라도 하나님의 심판에는 훨씬 못미친다. 그들은 다만 악한 행위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만 손을 뻗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4절). 하나님께서 아무런 목적 없이 권세자들의 손에 그러한 권력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권세자들의 눈은 재빠르고 그들의 팔은 길기 때문이다." 행악자의 처벌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시행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열방의 왕이시고 평화와 질서의 하나님으로서, 선을 보호하시는 자로서, 몇몇 사람들을 처벌하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그렇게 하여 그와같은 악들을 예방하시는 자로서 드러나시게 된다.
②관원들은 선을 행하는 자들을 칭찬한다. 선을 행하라(3절). 그러면 권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권세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권력을 제정하신 의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적인 선을 위하여 제정된 제도인 권세에 양심을 위해서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러운 일은 이러한 은혜로운 의도가 언제나 왜곡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에라도 일반적인 보호라는 축복과 유익이 있고 외형적으로나마 통치와 질서가 있는 만큼 불법적이고 무질서한 어떤 행동으로써 그것을 시정하려고 하기보다는 선행을 위하여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우리가 할 본분이다.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쁜 정부라도 있는 것이 낫다.
3)권력에서 우리가 얻는 유익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4절). 보호는 충성을 요구한다. 우리는 정부를 지지해 줌으로써 우리의 울타리를 든든히 한다. 우리는 세금을 통해서 이러한 복종을 표시하기도 한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6절). 즉 그것은 우리의 복종의 증거이며 우리가 양심적으로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승인의 표시이다. 우리는 세금을 바침으로써 권세자들의 권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세가 우리 자신에게 베푸는 축복을 인정하는 것이다. 명예는 곧 짐이다. 만일 권세자가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고 있는 것'이며(6절), 우리는 그 노고를 생각하여 세금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는 그것을 의연금으로서 내라"고 하지 않고 "마땅한 빚으로 알고 내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 점을 배우고 실천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간에 땅에 거하는 경건한 자들은 이땅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이라는 평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Ⅱ. 공의와 사랑 13:7-10
우리는 여기서 공의와 사랑을 배운다.
1. 공의에 대해서(7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7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청지기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권리가 있으므로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법에 의해서 강제로 내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주라. 사도는 세목을 일일이 열거한다. ①마땅한 세금: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7절). 사도는 부유하기 때문에 그만큼 세금과 기타 공과금으로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편지하여 정직하고 바른 세금을 내라고 강조하였다. 우리 주께서도 그의 모친이 호적하고 세금을 내러 갔을 때 태어나셨으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일들에는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왕을 속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는 거짓되고 저속한 처세훈을 가지고서 그 문제를 그럭저럭 모면하려고 한다. ②마땅한 존경: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절). 이 말은 우리가 권세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 계명을 따라 주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모든 자들에게 표시해야 할 존경을 요약하고 있다. 우리보다 위에 있는 자들에게 이같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이 없으면 다른 아무 의무도 제대로 행할 수가 없다. ③마땅히 갚아야 할 빚(8절):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즉 이 말은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에는 누구의 빚이든지 계속해서 지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빚을 지는 것이 폐가 된다고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죄라고는 거의 생각지 않는다.
2. 사랑에 대해서(8-10)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무슨 빚을 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은 현저하게 이 사랑의 빚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은 언제나 갚아야 하고 언제나 지고 있는 빚이다. 사랑은 빚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절).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완성을 향한 진일보인 것이다. 사랑은 9절에서 일일이 열거되는 십계명의 둘째판에 있는 모든 의무들을 포함하며 이 의무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만일 그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무를 짧지만 감미로운 한 마디로 요약한 '사랑'이라는 훌륭한 선생을 모시고 있다. 사랑 그것은 곧 우주의 아름다움이며 조화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이성을 가진 모든 존재의 즐거움이요 기쁨이요 행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그러므로 사랑은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도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개개의 계명들을 끌어들임(9절): 그는 십계명 중 후반부 다섯 계명을 일일이 열거하고 나서 이 모든 계명들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큰 강령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도 이 강령 위에 세워져 있다. 만일 이런 일들에 있어서 인간의 법의 제지가 없다면 사랑의 법이 스스로 의리 가운데 효과적으로 평화와 훌륭한 질서를 유지시켜 줄 것이다. 사도는 7계명을 6계명 앞에 두며 이것을 먼저 언급한다. 간음하지 말라(9절). 왜냐하면 비록 이러한 일이 대개는 사랑이라는 이름(그처럼 좋은 말이 그렇게 형편 없이 오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래 저질러질지라도 그것은 사실 살인이나 도적질만큼 크게 계명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자는 비록 그가 아주 열렬한 사랑을 품고 있는 체 할 수 있을지라도 사실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형제애의 성격에 관한 일반적인 척도: 사랑은…악을 행치 아니하나니(10절).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즉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라도 전혀 악을 행치 아니한다는 말이다. 사랑은 아무에게든지 악을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기는커녕 품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악을 행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을 행한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살아있는 행동 원리이다. 만일 사랑의 법이 마음에 있다면 온 율법이 마음에 기록된 것이나 다름없다.
Ⅲ. 그리스도의 단정한 생활과 경건 13:11-14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의 단정한 생활과 경건에 대해서 배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세대에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 네 가지 점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곧 언제 일어날 것인가, 어떻게 옷 입을 것인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들이다.
1. 언제 일어날 것인가(11)
자다가 일어날 때가 벌써 되었으니(11절). 우리는 자주 깨어나도록 자극 받고 고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향하신 명령의 말씀은 '깨어있으라'는 것이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곧 너희의 영혼과 너희 영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뜻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깨어 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처해 있는 시기: 이 시기를 알거니와. 즉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시기가 어느 때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희는 깰 때가 벌써 된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복음 시대로, 하나님께서 간과하셨던 알지 못하던 때, 그래서 백성들이 흑암 가운데 앉아 있던 때보다는 더욱 더 많은 것이 기대되는 때이다. 지금은 깨어나야 할 때이다. 해가 이미 중천에 높이 떠 우리 얼굴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 우리 곁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삐 서둘러야 할 때임을 알아라.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지금이 위험한 때임을 알아라. 우리는 지금 적과 함정들 가운데 있다. 지금은 깨어야할 시간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잤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에게 임박한 구원: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우리가 우리의 분깃으로 선택한 영원한 행복이 이제는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에 주의를 기울이고 걸음걸이를 더욱 빨리하자. 우리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만큼 더 우리의 동작도 빨라지기 마련이다. 우리와 하늘나라 사이에 한 걸음 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그처럼 느리고 활기 없게 걸어야 하겠는가?
2. 어떻게 옷 입을 것인가(12)
이것은 우리가 깨어 일어난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이제는 옷을 입어야 할 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빛이 땅에 미칠 때처럼 전보다는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살펴보자.
[1] 우리가 벗어버려야 하는 것: 입고 밖으로 나오기에는 부끄러운 밤의 옷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죄악적인 행위들이 곧 어두움의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런 일들을 벗어버리고 다시는 그 일에 상관말자.
[2]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즉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옷 입힐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첫째, 빛의 갑옷을 입자(12절). 그리스도인들은 적들의 한 복판에서 싸우는 군인들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복장은 갑옷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이 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옷 입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곧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갑옷이다. 이것을 빛의 갑옷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은혜들은 갑옷에 잘 어울리는 빛나는 장신구들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14절). 이 말씀은 13절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천박한 정욕들에 대립하는 것이다. 방탕과 술취함을 마땅히 벗어버려야 한다(13절).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빌 3:9), 사람이 옷을 입으면 그가 옷안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이다.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과 은혜를 입어라. '새 사람'을 옷입으라는 것이다(엡 4:24).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치장하고 무장해야 할 최상의 옷이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함으로 받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 이제 우리는 진리와 성실함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자. 주 예수 그리스도. 사도가 이렇게 쓴 것은 "너희를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를 옷 입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예수로서 그를 옷 입으라.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임명되신 그리스도로서 그를 옷 입으라"는 뜻이다.
3. 어떻게 행할 것인가(13)
우리가 일어나서 옷을 입은 다음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좋은 옷을 입는가? 그것을 입고 밖으로 나가고자 함이 아닌가? 행하고.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우리의 대화는 복음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단정히 행하고. 즉 점잖고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일들을 조심해서 잘 처시하여 그들로부터 유쾌하고 좋은 평판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방탕과 술취함' 가운데서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흥청거리며 노는 일을 은근히 장려해서는 안 된다.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육신의 정욕들과 어두움의 일들은 조금이라도 행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순결과 정숙의 순수하고 신성한 법을 어기는 것이다.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이것 또한 어두움의 일들이다. 왜냐하면 비록 다투고 시기하는 일들이 아주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아무도 자신들이 시기심이 있고 다투기 좋아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쟁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평화를 좋아하며 겸손하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방탕과 술취함이 있는 곳에는 보통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가 따르기 마련이다.
4.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14)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즉 몸을 소중히 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영혼을 준비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 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 여기서는 다음 두 가지 일이 금지되고 있다. 첫째, 지나친 염려로 고민하는 것. 양식을 마련하는 일로 고민하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라. 즉 마음을 졸이며 번민하는 염려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부정한 욕망에 빠지는 것, 몸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마땅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몸의 정욕들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자연스런 욕구는 충족되어야 하지만 부정한 욕망들은 억제되고 거절되어야 한다.
Ⅰ. 그리스도인의 신앙 태도 14:1-23
1. 음식과 날에 대한 다툼(1-12)
[1] 교인들 간에 음식과 날짜를 구별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로마에 있는 교회의 구성원들 중 얼마는 본래 이방인이었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 사실 유대인이었던 사람들은 음식과 날짜에 관한 의식적인 규례들을 지키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식적인 관례를 그대로 실행하였던 반면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구별을 두지 않았다. ①음식에 관해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2절).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거절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 것도 스스로 속된 것은 없다(14절).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앞에 놓여진 것을 의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 반면에 '믿음이 연약한 자'는 이 점을 불쾌하게 여긴다. 그는 고기는 전혀 먹지 않고 오직 땅에서 나오는 열매에만 만족하여 채소만 먹는다.②날짜에 관하여(5절): 자기들이 여전히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긴다. 즉 계속해서 유월절이나 오순절, 월삭, 장막절 같은 날을 더 중시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날을 같게 여겼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만장일치로 지키는 주일을 제외하고는 그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사도는 의식법이 점차로 사라져 명예롭게 매장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2] 해를 끼친 원인은 의견의 차이 자체보다는 그것을 잘못 다루어 다툼의 소재로 삼은데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알고 있는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믿음이 약한 신자들을 멸시하였다. 사실 그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동정하고 도와주어야 했다. 지식이 있는 자들은 자칫 그 지식으로 우쭐해져서 자기 형제들을 오만하고 경멸적인 태도로 바라보기가 쉽다. 그런가하면 믿음이 약하여 감히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강한 자들을 마치 해이해진 그리스도인들로 판단하고 비난하였다. 사실 이것은 그 당시 큰 병폐였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이것이 교회 안에 남아있는 것을 알고 있다.
2. 다툼을 가라앉히기 위한 적절한 제안들(1-23)
사도는 어느 한 쪽을 파문하거나 특권을 일시 정지시키거나 잠잠히 있도록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양 쪽 따 서로를 관용하도록 설득함으로써 다툼을 진정시킨다. 즉 강한 자들에게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그처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고 연약한 자들에게는 믿음이 강한 자들을 그처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였다. 그가 제시하는 원칙들이 강한 자들에게는 어떠하고 약한 자들에게는 어떠하며 둘 다에게는 어떠한지를 살펴보자.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1절). 너희의 열심을 너희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일들에 쏟으라. 그를 받고 그를 네게로 끌어 들여 그에게 손을 내밀어 도우라. 그를 네 동무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를 받으라. 즉 그와 다투지 말라. 말다툼의 여지가 있는 불확실한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너희의 사귐이 그와 같이 헛된 싸움이나 말다툼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그를 받으라. 즉 그의 의심하는 바를 드러내지 말고 도리어 그를 가르치고 그의 믿음을 강하게 하라.
[2] 강한 자들은 결코 약한 자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또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3절). 이것은 직접적으로 양쪽의 잘못을 다 지적하는 말이다. 어떤 다툼이고 어느 한쪽에만 잘못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형제들을 멸시해서도 안되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왜 그런가?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그들이 진실한 신자라면 모두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세우시기까지 하신다(4절). 만일 그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모두가 세움을 받을 것인데 한 사람은 자기의 정직으로,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위로로 세움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해 있다. 그 이유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기 때문이다.
2)그들은 저희 주인의 하인이기 때문이다(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우리는 다른 집 하인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행동을 좋지 못한 태도로 간주한다. 약한 자나 강한 자 할 것 없이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우리의 형제이지 종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 형제들을 판단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의 주인행세를 하게 되어 실질상 하나님의 보좌를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판단하는 일을 꼭 해야 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판단을 하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4절).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서로 간의 판단에 의해 세우고 넘어뜨리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그 일은 다만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3)그들이 모두 진정한 신자라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들이 행하는 일로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러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6절). 이것도 좋은 일이다. 다른 일들에 있어서는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주를 위하여' 날을 중히 여긴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직한 의도를 받으실 것이다. 마음의 진실함과 바름이 머리가 부족하고 약하다고 해서 거절된 일이란 결코 없었다. 우리는 그처럼 선하신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날을 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자는 자기 형제를 반대하거나 멸시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도 주를 위하여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관대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아무런 구별을 두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처럼 날에다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날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애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기 앞에 놓여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를 위하여 먹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유를 알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한다. 그는 자기가 받은 다양한 음식들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반면에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을 위하여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그 외에도 먹을 것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처럼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정직히 행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들 중 어느 한 쪽이 판단을 받거나 멸시되어야 하겠는가? 우리가 고기를 먹든 채소를 먹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내리는 모든 자비의 주인이시고 수여자이시며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고 향기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식사 전이나 후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 당시 교회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음식물을 들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감사하든지 들고난 후에 하든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사도가 그들의 목적과 목표(7,8절) 그리고 그 동기로부터(9절) 묘사하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펴보자.
①우리의 목적과 목표: 자기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가 향해서 걷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첫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 중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다른 일들에 있어서는 서로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여기서만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 자기를 드린 자는 분명코 자기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에 근본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거나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죽어서도 안된다. 우리 생활의 관심사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니 그로써 우리는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 둘째, 주를 위해서다(8절). 그리스도는 우리가 죽으나 사나 따라야 할 분이시다. 우리는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살며 또한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와 함께 영화로워지기 위하여 죽는다.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의 중심이 되신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비록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약하고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강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주의 것이며 따라서 주에게 인정과 용납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치 그들의 주인인 것처럼 그들을 판단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겠는가?
②이 목적과 목표의 동기(9절): 이 동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이자 목표인 그의 절대 주권에 근거해 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9절). 그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는 산 자들의 주로서 그들을 다스리시며 죽은자들의 주로서 그들을 받으시고 일으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산 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의 주도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만일 죽었다면 그들의 계산은 이미 끝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판단하거나 멸시하는 일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4)이 쪽이나 저 쪽이나 모두가 머지않아 하나님께 직고해야 하기 때문이다(10-12절). 약한 '네가 어찌하여' 강한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그리고 강한 '네가 어찌하여' 약한 '네 형제들 업신여기느냐'(10절). 어찌하여 그리스도인들끼리 이와 같이 서로 충돌하고 반대하며 비난하는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1절).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이 되시고 우리는 재판에 회부된 죄수처럼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사도는 이 점을 예증하기 위해 구약에서 맹세로써 확립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권과 통치를 말하고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11절). 이것은 대체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하는 예언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따라서 신적인 명예가 그에게 합당하고 마땅히 그에게 돌려져야 한다. 모든 무릎이 그에 꿇는 것이나 모든 혀가 그에게 자백하는 것은 단지 내적인 경배와 찬양이 밖으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가 자유로든지 강제로든지 무릎을 꿇고 자백할 것이다.
①그리스도의 모든 친구들은 자유로이 그렇게 한다. 그에게 무릎꿇는다는 것은 지각이 그리스도의 진리에, 의지가 그리스도의 법에 , 전인간이 그리스도의 권위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경배와 기도의 자세인 무릎을 꿇는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에게 자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 위대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비천함과 악함을 인정하며 우리의 죄를 그에게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②그리스도의 모든 적들은 부득이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결론을 내린다(12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이야기해서도 안되고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각인이 자기 일을 고해야 한다. 우리가 조금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없고 우리도 그들에 대해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 주인에게 고해야 하지 우리에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 그들의 기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들의 신앙을 다스릴 지배권은 없는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더 판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평가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이 점에 온통 생각을 집중하라.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 엄격한 사람이라면 쉽게 자기 형제를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5)기독교 신앙에서 강조하는 바가 이런 문제들이 아니며 또 그 문제들이 신앙에 본질적인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신앙상의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들을 반대하거나 위하는 일에 열심을 허비하느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17절).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관찰해 보자.
①참된 기독교 신앙의 성격: 여기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우리를 다스리기 위하여 계획된 종교이다. 첫째, 이것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또는 그와 같은 것들을 사용하거나 삼가하는 일에 있지 않다. 기독교는 그와 같은 일에 아무런 법칙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문제는 각자의 자유에 맡겨진 것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이다(딤전 4:4). 우리를 하나님께 천거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들에 있어서 이쪽편이나 종파를 편들거나 이 견해나 저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했으며 누가 행치 않았느냐?"는 것이 물어질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열심을 내어 추구해야 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들이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매우 포괄적인 말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의'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주께서는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에 대해서 그것은 '평강'이다. 이는 그와 함께 평화와 사랑과 자비 가운데서 살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는 '성령 안에서의 희락'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주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평강과 희락을 우리 신앙에 본질적인 것으로 삼으실 만큼 선하신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18절). 곧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고 그의 뜻을 우리의 법칙으로, 그의 영광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말고 무엇이 기독교이겠는가?
②참된 기독교 신앙의 혜택: 이런 것들을 제대로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사랑과 은총을 받는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가장 기뻐하는 자들을 가장 기쁘게 여기신다. 또한 이런 것들을 제대로 지키는 자들은 사람들에게서 곧 지혜롭고 선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고려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정직한 일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정이다.
[3] 이와 같이 확실치 않은 문제들에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비춰주신 빛에 따라서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행해야 한다. 그래서 5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규정되었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즉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는 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도록 내버려 두라. 만일 너의 순수한 생각이 다르다면 그들의 관습을 너의 법칙으로 삼지 말고 그와 마찬가지로 너의 관습을 그들의 법칙으로 규정하지 말라. 먼저 행동에 옮기기 전에 네가 행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확실히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의심스러운 문제들에 있어서는 확실한 쪽에 자리를 잡는 것이 유익하다. 사도는 이 목적을 위해 14, 23절에서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제시한다.
1)잘못 알고 있는 양심의 명령에 거스려 행동하지 말라(14절). 만일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행위가 우리에게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비록 잘못 알고 있고 오해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양심을 거스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①이러한 문제에 사도 자신의 확신. 내가…알고 확신하는 것은(14절). 즉 내가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 곧 무슨 음식이든지 어떤 의식에 빠졌다고 해서 속되거나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로 인해 온 우주 만물에 저주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제거하셨으므로 다시 물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확신의 장본인이실 뿐만 아니라 그 근거가 되시는 주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가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 스스로 속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선하다. 아무 것도 비속한 것이란 없다. 아무 것도 더럽혀진 것이란 없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의미로 '비속하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바울 자신이 확신하는 바였고 따라서 그는 그대로 행하였다.
②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절). 그 문제 자체로서는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가 진심으로 합당치 못하다고 믿는 바를 행하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행동이 죄가 된다. 선택을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는 우리 지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 지각이(비록 오도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그러한 일은 죄가 된다고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행한다면 이러한 질서가 깨뜨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악을 행하고자하는 의지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에는 마치 그것이 실제로 죄였던 것처럼 알고 행하는 의지와 똑같은 의지의 타락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점을 이해하면서 또한 다음의 사실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즉 비록 사람들의 판단과 견해가 그 본질이 선한 것을 자기들에게 악한 것이 되게 할 수는 있을 지라도 그들이 그 본질이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2)우리는 의심하는 양심의 명령을 거스려서 행해서는 안 된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23절). 즉 먹는 그 행위가 자기에게 죄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가 자기 양심의 정죄를 받은 것은 그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합당하게 행할 수 있다고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에 자신의 마음이 자기를 범법자로 정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일의 합법성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지 못하면서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거스리는 죄가 된다. 사실 그 자체로는 부당한 것이 아닐지라도 자기 양심이 자기에게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흔히 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시험으로써, 사실상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고 자기 양심도 자기에게 부당하다고 말하는 경우에 가서도 그 일을 행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양심이 잘못 알고 있는 경우일지라도 양심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과 판단으로 잘못이라고 정죄하는 일을 스스로 행한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자기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하며 자신의 양심은 그것 때문에 자기를 정죄한다. 자기 양심의 비난을 받지 않을 만큼 자신의 대화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마음에 평안과 평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4] 여기서 규정되고 있는 또 다른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으로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 자유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규정이 13절에 진술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남의 행동을 비난하지 말고 '도리어…을 주의하라'(한글 개역 성경 난외주에는 '판단하라'로 되어 있다-역주)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신을 살피자." 우리는 우리 형제로 하여금 부딪히거나 넘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조심해서 말하고 행해야 한다.
1)그러한 것이 우리의 형제에게 고통을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믿음이 약하여 그러한 음식을 먹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네가 그런 것들을 먹는 것을 보고 몹시 괴로워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그러한 것이 우리 형제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앞의 것은 우리 형제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부딪힐 것'이지만 이것은 '거칠 것'이다. "만일 네 연약한 형제가 순전히 너의 본보기에 영향을 받아 자기 양심에 거스리는 행동을 하고 자기가 받은 빛에 어긋나게 행하여 자기 영혼에 죄책을 끼치게 되었다면 너는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한다." 같은 취지로 그는 정당한 것이라도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누구든지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권고한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일이…아름다우니라(21절). 이런 것들이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실족케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것들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일은 아름답다. 즉 그러한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형제에게는 유익을 주며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이 원칙은 죄를 짓거나 근심케 하는 일을 포함하여 형제를 넘어지게 하거나 거리끼게 하는 것 혹은 약하게 하는 모든 일에까지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약하게 한다는 것은 곧 그의 은혜를 약하게 하고 그의 위로와 결심을 약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제 여기서 이러한 주의를 주게 된 동기들을 살펴보자.
①이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법을 생각해보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절). 어쩌면 너는 금방 "참 그는 어리석고 약한 말만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경우에 우리는 자칫 모든 책임을 형제의 편에 뒤집어 씌우기가 쉽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망이 강한 자에게 돌려진다.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사도는 이렇게 약한자의 편을 들며 약한 편의 지식의 결핍보다는 강한 편의 사랑의 결핍을 더 책망한다. 우리 형제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 가장 훌륭한 사랑이며, 참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평안과 순결을 돌보도록 만들고 우리 자신의 양심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양심도 존중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은혜를 받은 자들이 비록 연약할 지라도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신다.
②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15절). 첫째, 한 영혼을 죄에로 이끄는 것은 곧 그 영혼의 파멸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철저한 파멸을 표시하고 있다. 둘째,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면서 까지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에 매우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처럼 귀중한 생명을 버리셨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고기 한 점을 버리지 못하겠는가? 그는 그들을 위하여 죽으실 만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셨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그렇게 조금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겠는가? 네 식물로. 너는 그것이 네 식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점을 명심하라. 비록 그 식물이 네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실족하는 그 형제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네가 네 형제를 망하게 하는 한 너는 사탄의 계획을 진척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한 편으로는 있는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너는 네 형제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죽은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망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들이 멸망하지 않을지라도 네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너는 그들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심각한 적대 행위를 보인 것이다.
③하나님의 사업을 생각해 보라.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20절). 하나님께서 이뤄 놓으신 일을 망치지 말라. 너는 마땅히 하나님과 더불어 일을 하고 그의 일을 파괴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업이란 곧 은혜와 평화의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일을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업이라고 말한다(15절).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일 외에도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 성도는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이든 다른 사람의 일이든 간에 이 일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조금도 행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혹 다른 사람의 은혜와 평안을 방해하거나 손상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때문에 자기들 안에서와 또한 그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린다. 네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 그리고 네가 그것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단지 배만을 위하고 배는 그것을 위하는 '식물'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④실족케 하는 악을 생각해보라. 사도는 '만물이 다 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자유를 오용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된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20절). 정당한 일들이 부당한 것으로 처리될 수 도 있다. 사도가 주로 실족케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가 강한 자들에게 얘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책망을 잘 견디며 잘 시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법칙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두 가지 지침을 보게 된다. 첫째,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절). 즉 다른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나 특별히 너희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비방할 계기를 줄 수 있는 어떤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조심하라는 말이다. 재갈을 물리지 않은 혀가 우리를 비방하고 우리가 지닌 가장 훌륭한 점들을 악평하는 것은 막을 재간이 없다. 그러나 결코 그런 계기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용과 평판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즉 다시 말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일지라도 그 일을 행함으로써 우리의 선한 이름을 손상시킬 수 있는 때에는 참고 그 일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제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남들이 비방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선한 모든 의무들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고 실천하는 선한 일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만큼 그 일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자. 둘째,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22절). "너는 네가 모든 식물을 먹일 수 있고 모든 날을(주일을 제외하고) 똑같이 여길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스스로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이같이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에 있어서는 비록 우리가 자신의 신념을 결코 반대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그 신념을 공언하는 것이 득보다는 해가 많을 때는 때때로 그것을 감출 수도 있는 법이다. 네 법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그들의 원칙으로 삼지 말고 너 혼자 가지고 있으며 네 기쁨을 너 혼자 간직하고 있으라. 바울은 이런 일들에 있어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14절).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자기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반드시 필요한 일들에 있어서는 통일을 이루고 필요치 않은 일들에서는 자유롭게 행하되 두 가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22절). 이러한 지식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기 위함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자들이 실로 바른 사람들이다.
[5] 여기에 한 가지 규칙이 더 규정되어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19절). 우리는 서로 간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화평을 바라고 그것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정작 화평을 이루는 일은 추구하지 않는다. 온유함과 겸손, 자기 부정과 사랑 속에서 화평이 솟아 나오며 화평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화평할 만큼 행복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는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화평케 하는 일들을 따른다면 화평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간에 덕을 세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우리가 다투고 경쟁하고 있는 한에는 서로를 성장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물이요 성전이므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자는 아무도 없으며 가르칠 수 없을 만큼 약한 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