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성경

로마서강해5

제이비젼 2014. 8. 30. 17:41

 

8

 

.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성과 특권 8:1-9

 

 [1] 사도는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권과 함께 강론을 시작하면서 그 특권을 받은 자들의 특성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 이것은 우울한 한탄과 갈등에 뒤따라오는 그의 승리이다. 그는 한탄은 자기 자신이 취하고 위로는 겸손하게 진실한 모든 신자들에게 돌린다. 이제 그들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말할 수 없이 큰 특권이다. 그는 "이제 그들에게는 비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난이 물리쳐진 것이다. 그는 "이제 그들에게는 정죄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죄 받을 만한 것이 있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들에게는 십자가도 고통도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죄는 없다. 이 특권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서 생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들이 이와 같이 안전한 것이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는다는 것은 그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의심할 수 없는 특성이다. 그 특성은 어떤 특별한 한 가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2] 우리가 어떻게 이 큰 특권을 얻으며 이 특성에 부합할 수 있는가.

   1)우리가 어떻게 이 특권들 즉 칭의와 성화의 특권을 얻는가? 율법은 그 일을 할 수 없다(3).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도 거룩하게도 할 수 없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만들지 못하였다. 율법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그 연약함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결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 곧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였을 때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주지 못하였고 유죄 판결을 내린 채로 우리를 내버려두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일을 한다(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언약은 은혜와 공로의 보고이다. 거기로부터 우리는 사죄함을 받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즉 죄책과 죄의 세력에서 해방된 새로운 본성을 받는다. 우리는 또 다른 언약 아래 있고, 우리에게 성령을, 곧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구비시키는 영적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아래 있다. 이러한 자유의 원천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이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것에 있다. 자기 아들을…보내어. 율법이 실패하자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을 준비하셨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한 가장 훌륭한 주석을 히브리서 10:1-10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 점을 살펴보자.   ①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그는 비록 본성의 타락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타락한 육신을 입으셨다. 하나님이신 그가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는 것은 크나큰 겸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거룩하신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는 것은 더 더욱 큰 겸손이었다. 죄를 인하여(3). 하나님께서는 그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고 죄를 위한 제물로 보내셨다.   ②그리스도의 이러한 육신의 모양에서 어떤 일이 행해졌는가? 죄를 정하사. 이점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죄의 저주와 지배력이 깨뜨려졌다. 비록 죄가 살아서 남아 있을지라도 성도 안에서의 그 생명은 단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생명과 같이 보잘것없을 뿐이다. 죄에 대한 정죄가 죄인을 정죄로부터 구해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정죄 받으셨을 때 죄가 그의 육신 안에 정죄받았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고 죄인의 구원을 위한 길이 마련된 것이다.   ③우리에게 미치는 이 일의 복된 결과(4).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하심이니라. 율법을 어긴 것을 보상할 수 있는 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율법을 순종함으로 얻는 의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므로( 13:10) 성령에 의해서 사랑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질 때 이루어진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우리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 특권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묘사이다.

 

   2)우리가 이 특성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가?(5)

   ①우리의 마음을 살핌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육신의 일을 좇는지 영의 일을 좇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 영혼의 복지, 영원에 대한 관심등이 영의 일이다. 사람은 그 마음과 같다. 마음은 생각의 철공소이다. 어떤 길을 가장 즐겁게 생각하는가? 마음은 지혜가 자리잡는 곳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더 지혜로운가 우리 영혼에 대하여 더 지혜로운가? 그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 이와 같은 표현을 마태복음 16:23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진리 어떤 소식, 어떤 위로를 즐기냐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육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 우리를 경고하기 위하여 그 일의 심각한 불행을 보여주며 또한 그 일을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길의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비교한다. 첫째,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6). 그것은 영혼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혼의 소회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에 있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영혼은 죽은 영혼이다. 죽어도 철저하게 죽은 영혼이다. 죽음에는 모든 비참이 포함되어 있다. 육신적인 영혼은 비참한 영혼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것은 아주 아늑한 삶이다. 영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생명과 평안이다. 영의 일을 생각함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의 시작이다. 둘째,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7). 이것은 전자보다 더 악한 것이다. 앞에서는 육신적인 죄인을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그를 사람 마귀라고 부른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을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대적케 한다. 그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법의 거룩함과 육신적인 마음의 더러움은 빛과 어두움처럼 화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 있지만 육신적인 마음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깨뜨려지고 추방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결론을 내린다(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 목표인데, 육신에 속한 자들은 그 목표에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그를 진노케 할 수밖에 없다.


   ②우리에게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할 수 있다(9).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이 말은 우리가 이 두 원리 중 어느 하나에 정복되고 굴복한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육신에 있느냐 영에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이 중생하지 아니한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시지만 그가 거하시는 곳은 성화된 사람들 안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자신의 마음에 던져 보겠는가? 우리 마음에 누가 거하며 누가 그것을 다스리고 그 살림을 꾸려가는가? 그는 여기에 시험의 총체적인 준칙을 덧붙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특권이요 영광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의 영을 갖지 않은 자는 어느 누구도 그의 사람이 아니다. 그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그처럼 영적이다. 우리 영혼의 틀과 성향은 그리스도의 모본에 일치해야 한다. 그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움직이며 인도 받는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가졌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그들의 규범으로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은 누구나 그들의 모본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 참된 신자에게 속한 탁월한 두 가지 은혜 8:10-16

 

 1. 생명(10-13)

 신자가 누리는 행복은 그저 정죄 받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행복이 아니라 그보다 더 적극적인 것이다(10,11).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10).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의 몸과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듣는다.

 [1] 몸은 죽은 것이다. 몸은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죽어가고 있다. 생명을 누리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죽음 속에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몸은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곧 죄가 몸을 죽이는 것이다. 생각컨데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몸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 몸에 원수이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영은 곧 생명이다. 죄인의 생명은 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성도의 생명은 영혼 속에 있다. 몸이 죽더라도 영은 산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늘에 태어난 영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에 적합하도록 이 몸의 장애와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의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킨다. 성도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의 영혼을 보전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높이어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유업에 참여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든다.


 [3] 마침내 죽을 몸도 생명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마침내는 몸이 영혼에 재연합 될 것이요 그에 어울리는 영광을 덧입을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몸의 부활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확증을 언급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몸도 살리시리라(11).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들의 선두 주자로서 부활하셨다(고전 15:20). 우리가 다시 살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덕분이다.  (2) 성령의 내주: 영혼을 살리신 성령이 머지 않아 몸도 일으키실 것이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죽어 메마른 뼈에 입김을 불어넣어 살리실 것이므로 성도들이 몸을 입고서도 하나님을 뵐 것이다. 사도는 이 사실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고 행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12, 13). 그는 여기서 그렇게 해야 할 두 가지 동인을 말한다. 첫째는 우리가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영의 종으로서 육신을 입히고 먹이고 돌보는 일에 힘쓸 뿐 그 이상 더 나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빚진 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거기에 빚지고 있다(고전 4:19, 20). 둘째는 그 길의 결국은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13). 즉 영원히 죽을 것이다. 여기서의 죽음이란 실로 영혼의 죽음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잠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와는 달리 너희가 살리라고 했다. 이것은 곧 참된 생명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애써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몸을 불만족스럽게 하든가 아니면 영혼을 파괴하든가 해야 하는 궁지에 처해 있는 것이다.


 2. 양자의 영(14-16)


 [1]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에 들어간다(14). 하나님의 자녀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그들의 특성: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즉 짐승처럼 내몰아지지 않고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인도함을 받는다. 참된 모든 신자들의 의심할 수 없는 특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인도에 순종하여 따라가므로 순조롭게 모든 진리와 의무 가운데로 인도된다.  (2) 그들의 특권: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즉 그들은 그의 자녀로 인정되고 그의 사랑을 받는다.


 [2] 하나님의 아들 된 자들에게는 영이 있다.

   1)그 영은 그들 속에 자녀로서의 성향을 일으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15). 먼저 우리는 그 영을 구약의 교회가 그 시대의 암흑 때문에 매여 있던 속박의 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제 너희는 그 시대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그 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 영을 대부분의 성도들이 회심할 당시에는 성령 자신이 성도들에게 속박의 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에게 이 영의 일이 끝이 났다." 이제는 너희가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이다. 양자로 삼고 양자의 영 곧 자녀의 성품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성화 된 영혼은,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모습을 지니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는 기도를 부르짖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르짖음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표현한다. 이제 성령은 기도 가운데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오도록 우리를 가르치신다. 어째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그리스도께서 기도 중에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이다( 14:36). 아바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스럽고 애정어린 끈질김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아주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조를 때 "아빠 아빠"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 말은 웅변 이상으로 충분히 효과가 있다. 이 말은 또한 양자됨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똑같이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2)이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16).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증거하시나니. 흔히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하나님은 자기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는데도 스스로 평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화된 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 증거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에 일치하며 따라서 언제나 성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성령께서는 자녀의 성품과 그 성향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아무에게도 이 자녀의 특권을 증거해 주시지 않는다.

 

. 그리스도인이 누릴 장래의 영광 8:17-25

 

 사도는 여기서 신자의 네 번째 행복 곧 미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요(17). 이 세상의 상속에 있어서는 이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장자만 상속을 받기 때문이다. 천국은 모든 성도들이 상속자로서 누리는 유산이다. 그들은 무슨 공로이든지 자기들의 공로로 천국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상속자로서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 상태란 상속을 받기 위한 교육과 준비의 상태이다. 여기서 이 약속의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의 후사. 하나님 자신이 성도들이 받는 유산의 몫이다. 하나님을 뵙고 그를 누리는 것이 성도들이 후사로서 받는 유업을 이룬다. 둘째,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참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모든 것을 유업으로 얻을 것이다. 현재 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참예한 자들은 장차 그의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 관대 그를 이처럼 높이시나이까! 이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의 보상이며 현재의 소망의 성취이다.


 1. 성도들의 현재의 고난의 보상(17, 18)

 우리가…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 혹은 "우리가 그와 함께…고난을 받기 까닭에".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상태는 언제나 고난을 받는 상태이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으니 또한 틀림없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우리가 그를 위해서 손해를 볼 수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때문에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은 이 사실에 대한 확증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비교하는데 저울을 사용한다(18). 먼저 한쪽 저울에 현재의 고난을 올려 놓는다. 성도들의 고난은 현재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않는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고후4:17)이다 그래서 그는 이 고난에 "중량미달"이라고 기록한다. 저울에 달아보니 가볍다는 것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다른 쪽 저울에는 영광을 올려놓고 보니 엄청나고 영원한 무게가 나가는 것이 보였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18). 현재 상태에서 우리는 그것을 누리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는 면에 있어서도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영광은 우리가 이제까지 보고 알아왔던 모든 영광을 훨씬 능가한다. 커튼 뒤에 숨겨져서 오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나타나면 모든 것을 무색케 할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날.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고난은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이 영광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을리는 만무한 일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공로가 되지 못한다면 그를 위한 우리의 행위야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고난은 가볍고 짧으며 오직 몸에만 관계한다. 그러나 영광은 풍성하고 위대하며 영혼에 관계하고 영원까지 이른다. 그는 계산을 맞추어 보고 있는 회계사처럼 이것을 세어본다. 먼저 그는 현재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출된 것의 총계를 내어본다. 그랬더니 그 액수가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에는 장차 나타날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확보된 것의 총계를 내어보니 무한정의 액수가 나왔다. 그렇다면 누가 고난에 있어서 우리를 앞지르신 것처럼 보상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각을 앞지르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기를 두려워하겠는가. 바울은 계산으로 뿐만 아니라 경험으로도 이것을 평가할 수 있었다. 그가 고난과 영광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이 상주심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값진 것으로 여겨진다( 11:26).


 2. 성도들의 현재의 소망과 기대의 성취(19-25)

 성도들이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는 만큼 그들은 그 영광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지키실 것이다. 소망이 지체되면 애가 타지만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생명 나무가 될 것이다.


 [1] 피조물들의 기대(19-22) : 그것은 위대하고 탁월한 영광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그처럼 열렬하게 그 영광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말을 자연의 전 구조 즉 온 우주 만물로 이해한다. 우리는 이 네 구절에서 사도가 의미하는 바를 다음의 몇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1) 피조물이 사람의 죄 때문에 현재 굴복하고 있는 허무가 있다(20).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땅이 사람을 위해 저주를 받았고 땅과 함께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렇게 해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제 창조계는 훼손되고 더럽혀져서 세상의 많은 아름다움이 사라졌다. 피조물들은 사람에 의해 죄의 도루고서 사용되거나 오용되는 일에 적지 않게 종노릇을 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의 이러한 종노릇은 자기 뜻이 아니며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들의 완성을 바라고 있다. 그들이 죄의 도구 노릇을 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그들 자신의 뜻이 아니다. 그들이 그와 같이 사로잡혀 종노릇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죄 때문이다.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불쌍한 피조물들은 이 멍에를 지되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서 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허무한데 굴복하는 불쌍한 피조물들을 동정하는 것이 옳다.  (2) 피조물들은 이 허무와 썩어짐 아래서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22). 죄는 온 우주 만물에게 있어서 무서운 짐이다. 그러므로 온 피조계가 사람의 죄를 대항하여 소리치고 있다.  (3) 피조물들은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다(21). 그때가 되면 그들은 더 이상 허무와 썩어짐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낮은 세상이 새롭게 될 것이다. 즉 그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다.  (4) 그러므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고대한다(19). 지금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의해 숨겨진 자들이다. 마치 밀이 왕겨더미 속에 감춰진 것과 같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들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의 이 구속은 바로 그때까지 보류된다. 그래서 온 피조계가 이 구속을 열망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째서 이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 자기 짐승에게 자비롭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한다.


 [2]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들의 기대(23-25):  (1) 성도들이 갖는 이러한 기대의 근거: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은혜는 영광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 광야에서 그와 같은 열매 송이들을 받았으므로 하늘의 가나안에서 거두게 될 완전한 수확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뿐 아니라…우리까지도'(23) 더 풍성하고 더 위대한 어떤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음으로 매우 값진 것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빨리 하늘을 뚫고 들어가는 말없는 신음과 함께 속으로 탄식한다. 혹은 우리들끼리 탄식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대는 전 교회가 만장일치로 가결하는 내용이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신음들을 내뱉지만 또한 그에 상응하는 많은 은혜와 위로들을 받는다. 그런데 그 신음은 산고를 치르는 여인의 진통처럼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전조가 되는 신음이다.  (2) 이러한 기대의 대상: 그것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이다. 부활이 여기서는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때 우리의 몸은 죽음과 무덤의 세력으로부터 구하여져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할 것이다( 3:21; 고전 15:42). 이것이 곧 양자 될 것이다. 그것은 온 세상 곧 천사와 만민들 앞에 드러나는 입양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성도들도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될 것이다(1: 4). 그것은 완전히 성취된 입양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혼 뿐 아니라 몸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 몸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까지는 그 입양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3) 우리는 이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재 상태를 즐거이 견딘다(24,25). 우리의 행복은 현재의 소유에 있지 않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24). 우리의 상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상대할 자들은 반드시 믿음 위에서 상대해야 한다. 믿음은 약속을 존중하고 소망은 약속된 것을 존중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요 소망은 그것들에 대한 기대이다. 믿음은 소망의 어머니이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 이 영광을 바라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의 길은 험하고 멀다. 비록 그가 늦는 것 같을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그를 기다려야 한다.

 

. 참된 그리스도인이 갖는 두 가지 특권 8:26-28

 

 1.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26,27)

 [1]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26). 우리는 요청의 내용에 관해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선견지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먹기 좋을 만큼 익기도 전에 열매를 달라고 소리치며 금방이라도 울 기세를 보이는 어리석은 아이들과 같다. 우리는 그 방법에 관해서는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사도는 이 사실을 1인칭을 사용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말한다. 바울같은 위대한 성도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타당치 못한 일인가!


 [2]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 여기서 연약함이란 특별히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결점들을 의미한다. 성령은 말씀 가운데서 도우신다. 성령은 마음속에서 도우신다. 성령은 이 목적을 위해 부어진바 되셨다. 도우신다는 말은 "우리와 반대의 편에 서서 우리와 함께 들어올린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짐을 들어올리려고 하는 사람을 그의 반대편 쪽에 서서 짐을 들어줌으로써 돕듯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고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우리를 앞서 가실 때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 없이 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성령이…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처럼 은혜로운 준비를 마련해 놓으셨다. 성령께서는 먼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이 간구를 드린다. 한 마디의 말도 없는 경우에도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있을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것은 우리 기도의 수사와 웅변이 아니라 기도에 있어서의 믿음과 열정이다. 말할 수 없는.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며 우리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그때 우리는 거룩하고 겸손한 담대함을 가지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성령의 역사이다. 다음으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 하신다(27). 우리 안에서 간구 하시는 성령은 언제나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융합시키신다.


 [3] 이러한 간구의 확실한 결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27). 위선자 곧 그 신앙이 혀에만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그러나 자기의 의무를 진심으로 이행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사실만큼 위로를 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소원들을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면 그가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을 배울것인가? 그것 또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가르쳐 주시지 않겠는가?


 2. 합력하여 선을 이룸(28)

 이 모든 특권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자들이 많은 고난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들의 선을 이룬다는 점에서 성령의 간구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1] 이러한 특권에 관계하고 있는 성도들의 특성: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모든 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곧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나 가치를 따라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운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성도들의 특권: 자비로운 섭리든 고난의 섭리든 간에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성도들의 것이며 그 섭리들은 선을 위한 것이다. 혹시는 현세적인 선을 위한 섭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섭리도 최소한의 영적이고 영원한 선을 위한 것이다. 직접적으로든지 간접적으로든지 간에 모든 섭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영적 선을 위한 의도가 있다. 약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성분들이 약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 것처럼 그 섭리들이 협력한다. 우리는 그 구절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고도(한글 개역 난외주 참조-역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알거니와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참된 신자들의 행복의 기초와 구원의 순서 8:29,30

 

 사도는 참된 신자들이 누리는 행복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낱낱이 헤아리고 나서 여기서는 그 요소들의 기초를 진술한다. 그는 그 기초를 예정에 둔다. 그는 여기서 결코 깨어지지 않는 황금사슬인,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는 동인들의 순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 사슬은 네 개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1]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29). 하나님은 영광과 행복을 베풀어주시기 위하여 예정하신 모든 자들을 그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와 성결에 이르도록 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미리 아셨다는 말은 그가 영원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란 곧 그가 친구요 총아로 예정하신 자들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같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성결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에 있다. 이것이 성화의 전부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른다. 우리가 우리에게 회복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새로워진 하나님의 형상을 갖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재와 간섭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미리 아신 자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미리 정하셨다. 우리 스스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없다. 아무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떠나서는 자신의 선택을 알 길이 없다. 선택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성화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3)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 가운데서 주로 의도된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이다. 즉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모범이 되는 명예를 얻을 수 있고 탁월함을 지닐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형제가 많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한 시기 한 장소 안에서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전부 함께 모이는 날에는 엄청난 수를 이룰 것이다. 흑암의 세력들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많은, 아주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실 것이다.


 [2]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30). 여기서 부르셨다는 것은 외적인 부르심뿐만 아니라 내적이고 유효한 부르심으로써 부르셨다는 말이다. 전자의 부르심은 단지 귀에만 이르는 것이나 후자의 부르심은 마음에까지 이른다. 우리가 이 부르심을 듣게 될 때 그 부르심은 유효하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끌어 당겨 설득하고 약속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한다. 그것은 자아와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로, 죄와 허무로부터 은혜와 거룩함에로 부르는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이것이 곧 복음의 부름이다. 하나님은 선택에 따른 그의 목적이 서도록 그들을 부르셨다.


 [3]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30).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죄인으로 취급되지 않고 친구요 은총을 받은 자로서 인정되고 사랑을 받는다.


 [4]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부패의 세력은 유효한 부르심 가운데서 깨어졌고 죄책은 칭의 안에서 제거되었으므로 이제는 아무 것도 영혼과 영광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그것이 이미 행해진 과거의 일로서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가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하며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화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은 완전히 성취된다.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목적하신 바였다. 그들이 선택을 받았는가? 이는 구원에로 선택을 받은 것이다.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거듭났는가? 이는 썩지 아니하는 유업에로 거듭난 것이다. 고난을 받았는가? 이는 그들에게 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모든 일의 장본인은 동일한 분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떠맡으셨다. 이 사실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에 무한한 격려가 된다.

 

. 그리스도인의 승리 8:31-39

 

 사도는 모든 성도들의 이름을 빌어 신자의 특권에 대한 강론을 거룩한 승리로 끝맺는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31). 즉 이제까지 해온 모든 말로써 우리가 무엇을 말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 넓이와 길이에 놀란 사람처럼 말한다. 다른 것들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덜 놀란다. 그러나 복음의 신비들은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탄복하게 된다. 바울이 일찍이 이 세상에서 승리의 전차를 탄 적이 있었다면 바로 여기서였다. 그는 여기서 제멋대로 행하는 성도들의 모든 원수들에게 도전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이 말은 모든 것을 내포한다. 그가 존재하시고 가지고 계시며 행하시는 모든 것이 그의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수가 많을지라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계속 있는 동안에는 흑암의 모든 세력들을 무시할 수 있다. 사단이 아무리 발악을 할지라도 그는 사슬에 묶여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와 싸우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말하는 바이다.


 [1]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32).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어 주신 이가. 우리에게 샘이 있는 한 누가 우리의 물줄기를 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생각해보자.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우리의 소망을 둔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32). 우리는 그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보다 못한 것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사람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를 내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이 되도록 그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 그는 우리를 아끼시기 위하여 자기를 섬기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2)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해 주실 것이다. 그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실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실 것이라는 말에 모두 함축된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수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모든 선한 것을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주실 것이다. 그것도 은사로 즉 주저함 없이 그리고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실 것이다. 어찌…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원수로 있을 때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주신 이가 그의 친구요 자녀가 된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거절하시겠는가? 우리를 위해 면류관과 왕국을 마련하신 분이 또한 틀림없이 거기에 이르는 길목에서 충분히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2] 우리에게는 모든 비난에 대한 답변이 마련돼 있고 모든 정죄를 물리칠 수 있는 보증이 있다(33,34). "누가 무엇을 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다는 이 사실만 있으면 족하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다면 이것이 모든 비난을 막아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비난을 늘어놓아 보라고 도전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 곧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이 모든 비난을 무너뜨릴 것이다. 누가 정죄하리요(34). 비록 그들이 그 고소에 성공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곧 정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번복될 수 없는 항변이 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가 이처럼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고 우리가 그와 연합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1) 그의 죽으심: 죽으실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의 빚을 갚으셨다.  (2) 그의 부활: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 사실은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격려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사실을 '그 뿐 아니라'라는 말과 함께 언급한다. 만일 그가 죽고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에 있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3) 그가 하나님우편에 앉으심: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사실은 모든 고소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법정에서 그런 친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친구는 바로 재판관 자신이다.  (4) 그가 거기에서 드리는 대언 기도: 그는 거기에서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잊어버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풍성한 위로를 주는 내용이 아닌가? 아직도 의심하고 불안해 할 여지가 남아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송사와 정죄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사람들로부터 겪는 것으로 이해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죄목들을 뒤집어썼었다. 권력자들이 그러한 죄목들로 그들을 정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한 우리가 사람의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 받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3]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 복된 상태 속에서 있을 수 있다는 충분한 보증이 있다(35-39). 혹시 그리스도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성도들의 두려움은 종종 그들을 매우 낙담케하며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곧 아무 것도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이다.


   1)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모든 적들에 대한 성도들의 담대한 도전: 누가…끊으리요(35).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35-37).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는데 다른 어떤 것이 그 사랑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해체시킬 수 있겠는가?


   ①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재난들이 헤아려지고 있다. 그들은 환난을 겪고 곤고에 처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언제나 미워하는 악의가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핍박에 쫓기고 기근으로 쇠약해지며 적신으로 굶주리고 극심한 위험과 그들을 대적하여 뽑아든 관원의 칼에 노출되어있다. 이보다 더 암담하고 무서운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시편44:22에서 인용된 구절이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36). 즉 계속해서 치명적인 타격에 노출되고 그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사람들은 양을 도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살해한다.


   ②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우정의 끈을 끊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만큼 우리를 덜 사랑하시거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사랑을 감소시키는 원인도 증거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다른 친구들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있다. 바울이 네로 앞으로 불려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지만 그때에도 주님은 그 곁에 계셨다(딤후 4:16,17). 핍박하는 원수들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발악을 할지라도 참된 신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둘째, 우리는 이러한 것 때문에 그를 그만큼 덜 사랑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그만큼 덜 사랑하신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라도 결코 그를 덜 사랑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결코 그를 나쁘게 생각지도 않는다.


   ③ 이러한 일에 있어서 신자들의 승리: 그러나 이 모든 일에…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첫째, 우리는 이긴다. 묘한 방법으로이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법이다. 그것은 불과 검보다는 믿음과 인내로 이기는 좀더 확실하고 고귀한 방법이다. 때때로 원수들은 자기들이 순교자들의 꺾을 수 없는 용기와 지조에 의해서 당황하고 압도되었다는 고백을 하였다. 둘째,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성도들은 정복자보다 더 나은 승리자이다. 먼저, 그들에게는 손실이 적다. 많은 경우에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치뤄진다. 그러나 고난받는 성도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도 잃는다. 그러나 그들은 금이 용광로에서 잃어버리는 찌끼 같은 것밖에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그들은 많은 이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명예, 평안, 그리고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등 전리품이 매우 풍성하다. 이러한 점에서 고난받는 성도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난이 많을수록 위로는 더욱 풍성하다(고후 1:5). 웃음을 머금고 화형틀로 가며 불꽃 속에서도 노래하던 이들이야말로 넉넉히 이긴 사람들이었다.


   2)모든 문제의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결론: 내가 확신하노니(38).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떼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를 것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고 나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1)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시 말해 죽음의 공포도 삶에 대한 소망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그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2)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아무도 떼지 못한다. 선한 천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악한 천사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어느 쪽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선한 천사들은 고용된 친구들이고 악한 천사들은 속박된 적들이기 때문이다.  (3)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즉 연재 고통을 느끼는 것이나 장래 당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현재의 시간도 영원도 현재 일과 장래 일 속에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4) 높음이나, 깊음이나(39). 다시 말해서 번영의 절정도 역경의 구렁텅이도 그렇게 하지 못하며, 위로 하늘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아래로 땅에 있는 어떤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5)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즉 이름을 붙일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랑의 중보자이시라는 이 사실이 그 사랑의 불변함의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9

 

. 동족에 대한 바울의 근심과 고통 9:1-5

 

 사도는 여기서 유대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 큰 근심을 보이는 엄숙한 고백을 한다. 즉 그는 유대인들 중 아주 많은 수가 복음에 대하여 원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근심하였다. 이 사실 때문에 그에게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 가혹한 것처럼 들리는 진리들을 부드럽게 완화시켜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가 있다는 얘기이다. 못을 기름에 담궜다 박으면 그만큼 더 잘들어가기 마련인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에 대해 자신이 의기 양양해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애정어린 고백과 함께 그의 강론을 시작한다. 바울은 결코 그들이 배척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주 애처롭게 그 일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1. 바울의 엄숙한 고백(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1).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의 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말한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 그리스도께 간청한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자기 양심에 호소한다. 그가 말하려고 한 것은 은밀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과 그의 양심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충분히 증거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2). 그러므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2. 바울의 더욱 애절한 고백(3)

 …원하는 바로라. 사실 그런 목적을 위해 정해진 어떤 적절한 방법이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정말 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나의 형제를 위해서 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라도 받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열심과 애정에서 나오는 진한 고통의 소리이다. 사랑에는 이같이 대담하고 모험적이며 자기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의 구원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은혜의 영광이 한 사람의 행복과 번영보다 앞서야 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의 모든 행복을 버리려고 하였다.  (1) 그는 저주받은 사람처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도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그의 피를 흘리기를 갈망했고 세상에서 가장 밉살스런 자인 것처럼 그를 핍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내가 기꺼이 이 모든 것을 참고 이보다 더한 것도 참겠다. 너희의 불신앙과 반대는 이 모든 고통들보다 내 마음에 훨씬 더 큰 근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내게는 너희의 이 반대보다는 차라리 그 고통들이 견딜만하고 바랄만한 것이다"고 말한다.  (2) 그는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끼친다면 기꺼이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성도들 가운데서 기억되지 않아도 좋을 듯이 여겼다. 그는 유대인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이름이 비난을 받거나 잊혀져도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3) 그는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구원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받을 모든 행복을 잃어 버려도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하였다.


 3. 자신의 바램의 이유를 설명함(4,5)

 [1] 자신의 그들과의 관계 때문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3). 비록 그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를 몹시 반대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이렇게 그들에 대해 몹시 공손히 말한다. 이 점은 그가 용서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나의 친척.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 우리는 우리 친척들의 영적 유익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염려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한다.


 [2] 특별히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4,5).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4). 즉 보이는 교회의 특권들로 구별되는 자들로서 그 특권들 중 많은 것이 여기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  (1) 양자됨. 이것은 구원하는 특권이 아니라 외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특권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 특권이었다.  (2)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의 많은 증표들, 구름기둥, 쉐키나(shechinah, 속죄소에 나타난 여호와의 모습-역주), 그들에게 수여된 특별한 은총들. 이것들이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3) 언약들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은 때때로 그의 후손들에게 갱신되었다.  (4) 율법을 세우신 것과.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을 갖는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며 또한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5) 예배와.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것으로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들, 곧 성전, 제단, 제사장, 제사, 절기 등을 갖고 있었다. 다른 민족들이 나무나 돌, 귀신들을 예배하고 섬기면서도 자기들 손으로 만든 그 밖의 다른 우상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던 반면에 이스라엘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그를 섬겼었다.  (6) 약속들. 이것은 메시야와 복음의 상태에 관한 약속들을 말한다. 그 약속들의 위로는 율법에 복종하고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7) 조상들(5).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주 높이 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저희 것이었다(5).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에 참여하게 된 것은 조상들 때문이었다.  (8)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이것이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영광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혈육이었다는 이점은 유대인들의 크나큰 특권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는 그에 관한 중대한 말을 삽입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충만하게 증거하는 말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만물 위에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그것도 유대인이 되신 것은 유대인들의 영광이기도 했다.

 

. 약속의 참된 의미와 취지 9:6-13

 

 복음 시대의 확립으로 말미암은 유대인들의 배척이 족장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결코 무효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6).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효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단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든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55:10,11). 이 말씀은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요동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아주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하여지지도 않고 폐하여질 수도 없다.


 사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배척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음의 네 가지 방법으로 해결한다. 첫째, 그 약속의 참된 의미와 취지를 설명함으로써(6-13). 둘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함으로써(14-24). 셋째, 이러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이방인들을 받아들임이 구약에 예언되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25-29). 넷째, 유대인들의 배척의 참된 이유를 확정함으로써(30-33).


 본 단락에서 사도는 그 약속의 참된 의미와 취지를 설명한다. 우리가 그 약속을 오해하면 당장에라도 하나님께 그 성취 문제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품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그 약속을 혈육을 따라 난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그 약속에 제한을 두셨다. 처음부터 그 약속이 이삭에게는 주어졌으나 이스마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고 야곱에게는 주어졌으나 에서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는 않았다. 그와 같이 이제도 동일한 그 약속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많은 무리에게서는 끊겼을지라도 그 사실 때문에 그 약속이 폐하여 지지는 않는다.


 1. 바울의 진술(6,7)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6,7)는 이러한 명제를 주장한다. 이름과 신앙고백에 있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자들이 실제로 모두가 다 이스라엘은 아닌 것이다. 은혜가 혈통을 따라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실례를 들어 이 진술을 증명함(7-13)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선택을 받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선택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그 점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지혜의 뜻을 따라 행하신 것이다. 여기서 다음의 두 실례들을 살펴보자.


 [1] 그는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런데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일지라도 이삭만 하나님과의 언약에 받아들여지고 이스마엘은 거절되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 창세기 21:12의 말씀을 인용한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언약이 이삭과 함께 세워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7:19). 그 큰 약속에 감싸여 있는 축복은 은혜를 베푸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축복을 누구에게 베푸실지를 결정하는 일에 무엇에도 구속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우셨으므로 그 축복을 이삭에게 베푸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좀더 상세히 설명한다(8,9). 그러므로 그와 같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은 믿는 유대인들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였다( 3:3).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과 의로써 칭의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육신의 자녀였다.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느니라(8). 씨로 여김을 받는 행복을 누리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 약속에 의해 그 행복을 얻는 것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다. 그는 이 사실을 9절에서 증명한다. 그는 약속에 의해 잉태되고 또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씨로 여김을 받는 자들 곧 참된 신자들, 즉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의 적절한 표본이 되었다.


 [2] 훨씬 더 강한 증거인 야곱과 에서의 경우가 있다(10-13). 이스마엘이 쫓겨나기 전에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는 사전의 차이점이 있었다. 이스마엘은 난폭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삭을 조롱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그와 다르다. 그들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삭의 아들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그들 사이에 차별이 있었다. 그들이 어머니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자 그때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것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서게 하려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적인 주권적 의지로 어떤 자들은 선택하고 다른 자들은 물리치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가 확립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는 야곱과 에서 사이에 놓인 이러한 차별을 말라기 1:2,3에서 인용한 말씀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 구절은 야곱과 에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에돔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절되었다. 처음에 야곱과 에서 사이에 차별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허리로부터 태어난 두 민족들 사이에 그러한 차별을 두셨다. 여기서 선택과 거절에 대한 다음 세 가지 견해를 살펴보자.  


(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조건이나 자격의 선택과 거절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은 선택하시고 이스마엘과 에서는 거절하셨듯이 구원의 조건이랄 수 있는 믿음은 선택하시고 율법의 행위는 거절하셨다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과 거절로 이해한다. 그래서 영원부터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야곱과 에서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조상으로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공과에 대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이유로 아무나 저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따라서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민족의 선택과 배척이 복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중 완고한 무리들은 계속해서 불신앙 가운데 있도록 내버려두시는 한편 이방인들은 교회로 불러들이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자비 그리고 진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어린 자 야곱을 선택하시고 큰 자에서보다는 그에게 우선권을 주신 것은 유대인들이 비록 아브라함의 타고난 후손들이지만 물리쳐지고 어린 형제와 같은 이방인들이 그들 대신에 받아들여지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였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늘의 은총을 누려왔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된 지금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독교 국가들이) 그들을 이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다.

 

. 하나님의 절대 주권 9:14-24

 

 사도는 여기서 사람들을 다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은밀하고 영원한 뜻 안에서 그리고 그 뜻에 의해서 결정하신 대로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은혜와 은총을 베푸시는 은혜의 소유자요 수여자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그의 강론 중 이 부분은 다음 두 가지 반론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14). 사도는 이러한 생각에 깜짝 놀라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러한 결론을 부정하면서 그 부정을 증명한다.


   1)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이는 자들에 관해서(15,16): 그는 은총을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보이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33:19).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15).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모든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는 우리에게 어떤 이유도 제시하시지 않은채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그 표현은 매우 강한데 반복적인 표현이 더욱더 그 어세를 강하게 만든다.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된다. 왜냐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그는 이 사실로부터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추론해 낸다(16). 그러므로 그 선택의 원인을 사람의 간절한 소원이나 부지런한 노력에 돌려서는 안되고 오직 그리고 순전히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자비하심에 돌려야 한다. 야곱의 경우에 그 택하심이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았다. 유대인들 중 허다한 사람들이 불신앙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진 반면에 부르심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이방인들이 그러한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더 있거나 그럴만한 성향을 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차별을 두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기 때문이다( 65:1).


   2)멸망하는 자들에 관하여(17): 하나님의 주권이 바로의 예에서 밝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 하나님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죄인들을 외적인 번영과 특권들 안에서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그 일을 하셨는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17). 하나님은 이 모든 일로써 자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셨다. 우리는 자비를 베푸시는 일과 멸망케 하시는 일에 관한 바울의 결론을 18절에서 보게 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18).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양한 처사들은 그의 절대적인 주권의 관점에서 해결되어야만 한다. 그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아니하셨으므로 그의 은혜는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것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받을만한 자는 없다. 아니 우리 모두는 그 은혜를 천 번이나 빼앗겨도 마땅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려야 하고 멸망하는 자들은 자신만을 탓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상관하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묶이시지 않으며 묶이는 경우가 있다면 오직 자신의 언약과 약속에 의해 스스로 묶이시는 것뿐이다. 여기서 그의 약속이란 곧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자들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2]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19)라는 반론이 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구원이 제공되는 조건에 응하기를 거절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잘못을 물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구원이 너무도 큰 것에 비해서 그 조건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효과적인 은혜를 주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를 거절하신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 잘못을 물으시냐는 것이다. 그는 이 반문에 대해 상세히 답변한다.


   1)이러한 반문을 제기하는 자를 꾸짖음으로써 답변한다(20. 이 사람아. 이것은 피조물이 자기의 조물주에게, 곧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제기할 수 없는 반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다투려고 할 때 바울이 사람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말하는가를 보라. 네가 뉘기에. 즉 다시 말해서 그처럼 어리석고 무능력한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의 지혜를 판단하느냐? 네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우리에게 마땅한 일은 그를 힐문하며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어 그를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2)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해결함으로써 답변한다. 우리는 지음을 받은 물건이고 그는 지은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이 모양이나 저 모양으로 만드시는데 대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심문하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에 의해 적절하게 설명된다. 예레미야 18:6과 비교해 보라.


   ①그는 비유를 든다(21).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그릇을 만들거나 아니면 하찮은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이때에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②비유의 적용(22-24):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라는 거대한 진흙덩어리를 가지고 두 종류의 그릇을 만드신다. 그 중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이 그릇들에게 자신의 진노를 보이신다. 하나님은 자기가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실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 즉 그들을 향하여 많은 인내를 나타내셨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들이 되었다. , 그들 자신의 죄와 강퍅함에 의해 준비된 것이다. 영혼을 지배하는 타락과 사악함이 지옥에 들어가기 위한 영혼의 준비이다.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다. 구원받는 남은 자에게 수여된 행복은 자신의 공로의 열매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이다. 영광의 그릇들은 영원히 자기들이 긍휼의 그릇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그릇들에게서 무엇을 의도하시는가? 그 영광의, 즉 그의 선하심을 언급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가운데서 그의 영광을 즉 그의 영광의 이러한 선하심을 나타내신다. 땅은 온통 그의 선하심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가 그의 선하심의 부요함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 근 그것을 서도들을 구원하는 가운데서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그 그릇들을 위해 무엇을 행하시는가? 그는 그들이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다(23).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빨리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죄인들은 스스로 지옥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성도들을 천국을 위해 준비시키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긍휼의 그릇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다(24).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들로 예정하신 자들을 또한 유효한 부르심으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이들을 부르신다. 이제 문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이다.

 

. 이 일에 대한 구약의 예언 9:25-29

 

 사도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배척과 이방인들의 영접이 어떻게 구약에 예언되는가를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틀림없이 자진해서 이 문제를 구약에 문의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이 구약에서 어떻게 얘기되었는가를 보여준다.


 1. 호세아의 글을 인용함(25,26)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 즉 그들이 전적으로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내 백성으로 인정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전의 나쁨이 오늘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막지 못한다.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신 자를 또한 사랑한 자라고 부르신다. 그는 자기의 소유가 된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26). 그들이 온 땅에 걸쳐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간에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들을 가지 백성으로 인정하실 것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 사랑인가! 하나님의 성도들은 누구나 다 이러한 영광을 누린다.


 2. 이사야의 글을 인용함(27-29)

 이사야는 두 곳에서 유대인들 중 가장 많은 수가 버려질 것을 말하고 있다.

 [1] 먼저 그는 이사야 10:22,23에서 남은자, 오직 남은 자만의 구원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허다한 무리를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면서도 여전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유지하고 계시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자녀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와 같았다는 생각 속에서 암시된다. 그럴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남은 자의 이러한 구원에 관해서 우리는 선지자로부터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듣는다(28).  (1) 하나님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주께서…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28).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므로 또한 그가 심판의 방법으로든지 자비의 방법으로든지 간에 끝내실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한다면 그가 하시는 일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의 자녀들을 다 헤아리셨다. 그리고 그는 은혜의 선택에 속한 자들을 다 불러들이시고 셈을 마치실 것이다. 그때에야 셈이 끝날 것이다.  (2) 그는 그 일을 신속히 마치실 것이다. 이제 그는 그 일을 속히 이루시되 땅 위에서 속히 이루실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일을 '올바르게' 속히 이루실 것이다. 사람들은 속히 하면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히 하실지라도 그 일은 언제나 올바르다. 그 일(말씀, 율법)이 구약 시대에는 매우 길었다. 이제 복음 시대에 와서 우리의 의무는 율법 시대보다 훨씬 더 간략해졌다. 종교의 범위도 좁아졌다. 우리에게 있어서 단축은 일을 애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 일이 단축될지라도 그것은 명료하고 분명하다. 짧을수록 그만큼 더 쉽기 때문이다.


 [2] 다음으로 그는 이사야 1:9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씨를 보존하려고 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점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 중 많은 무리는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자기에게 오직 소수의 남은 자만을 떼어두시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셨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만군의 주' 곧 수많은 무리의 주이시다. 하나님께서 씨를 자신에게 확보해 두실 때 그는 만군의 주로서 활동하신다. 그것은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한 주권의 행위이다. 그의 백성들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이며 적은 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유용한 수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의 기적이다. 왜냐하면 씨가 되도록 남겨진 자들조차도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대로 그들을 처리하셨다면 그들마저 모두 멸망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이 배척 당한 참된 이유 9:30-33

 

 사도는 마침내 여기서 이방인들의 영접과 유대인들의 배척에 대한 참된 이유를 확정한다. 그들의 추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도 각각 달랐다. 그는 마치 웅변가처럼 결론을 내린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30).

 1. 이방인들에 관하여(30)

  (1) 그들은 어떻게 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 그들은 의를 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신'( 65:1)것이다. 하나님은 이같이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통치 방법으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의에 이르렀는가? '믿음으로' 즉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임으로 얻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라는 지름길을 통해,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헛되이 변죽만 울려왔던 의에 이르렀다.


 2. 유대인들에 관하여(31-33)

  (1)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목표를 놓쳤는가? 그들은 '의의 법을 좇아갔다'(31). 이들은 옛 유대 원칙과 의식들에 집착한 나머지 실체가 온 지금에도 그림자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접 받는 자리에 이르지 못하였다.  (2) 그들은 어떻게 그들의 방법을 잘못 생각하였는가? 이것 때문에 그들은 목표를 놓쳤다(32,33). 그들은 구하되 바른 방법으로 구하지 않았다.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32). 즉 바로 율법의 생명이자 목적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복음의 조건에 복종하는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행위의 법'(한글 개역 성격에는 '행위에') 의지하여 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걸려 넘어진 거침돌'(한극 개역 성경에는 '부딪히는 돌')이었다.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공로를 통해서 의를 기대하도록 만드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결코 달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바울은 이사야 8:14 28:16을 인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의 넘어짐을 위해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2:34).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신다. 그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와 같이 되셨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믿는 남은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그들의 소망과 기대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기대하는 자들의 것처럼 좌절되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거절 받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툴 아무런 이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복음의 조건에 근거한 구원을 공정하게 제공받았으나 그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할지라도 그것은 순전히 자기 탓이다.

 

10

 

.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10:1-11

 

이 부분에서의 사도의 의도는 율법의 의를 능가하는 믿음의 의의 높은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한 바울의 시도이다.

 

 1. 유대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고백함(1,2)

 여기서 그는 그들에 대하여 선한 소원을 품으며 선한 증거를 한다.

 [1] 선한 소원 즉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소원(1): 비록 바울이 그들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는 이것이 '그의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였다고 말한다. 그의 소원의 강도와 진실함은 그것이 '그의 마음의 소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만 비는 좋은 소원들처럼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실한 소원이었다. 기도의 정수는 마음의 소원이다. 냉랭한 소원은 거절을 당할 뿐이다. 그는 이 소원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것은 곧 그의 기도였다. 원하고 바라기만 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2] 그가 선한 소원을 품는 이유가 되는, 유대인들에 대한 선한 증거(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바울에게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이 증거 하는 대로 그들을 칭찬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한 선의로 해석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에게서조차도 그들의 칭찬할만한 점은 후대할 수 있어야 한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들의 복음에 대한 반대는 율법을 존중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맹목적이고 오도된 열심이 있는데 유대인들의 열심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2.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과오(3)

 그들의 열심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열심으로 위하는 그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어야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분명코 메시야라는 충분히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밝은 빛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심이 맹목적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3절에서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1] 그들의 불신앙의 성격: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불신앙이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순종이다.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참 신앙에는 복종이 절실히 요구된다.

 

 [2] 그들의 불신앙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부지이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의를 덧입어야 하는지를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생각했다면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결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자기들의 의에 대한 자만이다.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즉 자기들의 행위의 공로로 만들어내는 의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3. 그러한 잘못의 어리석음(4-11)

 [1] 복음에 대한 율법의 보조역할(4). 그리스도는…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의도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율법의 용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는 의식법의 완성이시기 때문에 그 법의 마침이 되신다.  (2) 그리스도는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기(8:3) 때문에 도덕법의 마침이 되신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한 복종에 이르게 하여 칭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율법을 불이행한데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써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칭의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믿는 모든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다.


 [2] 율법을 능가하는 복음의 탁월성.

   1)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란 어떤 것인가? 그는 이것을 5절에서 설명한다. 그 의의 취지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것이다. 그 의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의로서 다만 완전한 복종에 의한 의 밖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18:5). 여기에서 전제되고 있는 행함이란 약간의 불이행이나 위반이 없는 완전하고 흠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새롭고 산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처럼 끈질기게 이러한 칭의와 구원의 길에 집착한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인가?

   2)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떤 것인가?(6) 그는 이것을 신명기에서 모세가 한 말로 묘사한다. 그는 그 말을 신명기 30:11-14에서 인용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①그 의는 결코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다. 이 칭의와 구원의 길에는 우리를 낙망시킬 구렁텅이나 매듭이 없으며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도 따르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한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가지 않고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모셔오기 위해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겠느냐?"(7).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무덤에 계셨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거 없는 난관들을 생각하고 스스로 당황해 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다. 결코 구원이 우리에게서 그처럼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② 오히려 그 의는 아주 간단하고 쉽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8). 그리스도는 네게 가까이 계신다.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해져야 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져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해야만 했었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18:5). 그러나 복음은 그 일의 대부분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구원이 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즉 구원이 바로 우리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 그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매일 읽고 있다는 말이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 그 말씀을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믿음의 말씀이다. 그러면 무엇이 그 믿음의 말씀인가? 우리는 그 말씀의 대의를 9,10절에서 보게 된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복음이 나타내 보이고 제공하는 것은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이는 그리스도로서 그는 끝까지 구주이시다. 그는 어떠한 조건으로 구원하시는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와의 관계와 그에 대한 신뢰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시인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셨다( 10:32,33). 특별히 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때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와 기독교를 시인하는 것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초대 교회 시대의 상황이 그러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것이다. 만일 마음속에 믿음의 능력이 없다면 입으로 하는 신앙 고백은 흉내에 불과할 뿐이다. 특별히 우리의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조항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진실된 동의를 해야 한다. 이 사실이 10절에서는 순서가 뒤바뀌어 더욱 설명되는데 그 이유는 먼저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다음에 입으로 믿을 만한 시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믿음에 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각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의지의 동의를 포함하는 말이다. 이 믿음이 의에 이르는 것이다. 믿음에는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이 있다. 다음으로는 고백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을 말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약속의 조건을 성취하기( 10:32)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자격에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함으로써 이 기초 위에 구원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구원의 조건을 간단히 요약해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과 몸을 드려야 하는데 마음으로 믿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영혼을 드려야 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에 있어서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이사야 28:16을 인용한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 이런 자는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자는 입으로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자기의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 예수께 그와 같은 신뢰를 둔 자기의 확신을 어떠한 이유로든지간에 결코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로마서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강해7  (0) 2014.08.30
로마서강해6  (0) 2014.08.30
로마서강해4  (0) 2014.08.30
로마서강해3  (0) 2014.08.30
로마서강해2  (0) 2014.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