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성경

로마서강해6

제이비젼 2014. 8. 30. 17:41




. 복음 전파의 중요성 10:12-21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점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3:11). 차별이 없음이라(12).


1. 모든 자에게 동일하신 하나님(12)

주께서 모든 삶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들에게 더 친절한 어떤 하나님이 계시고 이방인들에게는 덜 친절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은 '여호화로라 여호화로라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로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는 그 말씀으로써 그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하나님이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찾는 모든 피조물에게 어떤 하나님이시며 또한 앞으로도 어떤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관대하고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행해야 하는 어떤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곧 우리가 그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기도로써만 그의 은혜를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2. 모든 자에게 동일한 약속(13-21)

누구든지…부르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여기서는 실제적인 모든 신앙으로 표현되고 있다. 기도 생활을 제외한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겠는가? 이렇게 그를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저 구하기만 하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는 이 사실을 더 설명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1]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절실한 필요성(14,15):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그처럼 맹렬하게 바울에게 분노를 터뜨렸던 일이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그 약속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14).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서는 그들이 기도로써 그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의 은혜는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의 은혜 없이 올바로 기도할 수 없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11:6).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으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계시가 우리에게 알려져야 한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그 계시를 갖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말해 줘야 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5). 사람이 자기를 보내는 왕으로부터 신임장과 명령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대사로서 활동할 수 있겠는가? 사역자를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하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에게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격과 적성의 문제가 각자의 판단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아주 유능한 판단을 내린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과 그와 같은 자격과 적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따로 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따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설교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2]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환영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5). 이 점에 대해서 그는 이사야 3:7을 인용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평화의 복음이다. 평화란 일반적으로 모든 좋은 것에 대하여 표현되는 말인데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표현된다. 그것은 '좋은 일에 대한 좋은 소식'(한극 개역 성경에는 '좋은 소식'이라고만 되어 있음-역주)이다. 복음의 일이란 좋은 일이며 사실 가장 좋은 것이다. 이제까지 하늘로부터 땅에 전해진 것 중 가장 좋은 소식이다. 사역자들의 활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소식을 저하는'것이다. 평화를 전하는(원문의 뜻은 이렇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설교자들은 복음 전도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일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여져야 하겠는가? 아름답도다…자들의 발이여. 다시 말해서 그들은 참으로 환영 받을 만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들의 발(그들의 생활과 대화)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역자들의 생활의 성결함이 곧 그들의 발을 아름다움이다. 아름답도다.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보기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3] 그는 이 모든 것에 대적하는 반대에 대해 답변한다(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16).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순종치 않았다는 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중 훨씬 더 많은 무리가 여전히 불신앙과 불순종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고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을 전하였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전파된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는 통상적인 수단이라고 가르친다(17). 그러므로 비록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다 믿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일단 믿는 삶들은 그 이전에 이미 들은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17). 믿음의 시작이나 진전, 그리고 능력은 들음에 의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이라고 불린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러나 그 믿음은 말씀에 의해서 생긴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은 사람의 미혹하는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돕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들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용서받을 수 없었다(18-21).


1)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었다(18).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들은 복음을 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단순히 혼잡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른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명령은 이와 같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들이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일하였기 때문에 그 명령에 놀라운 성과가 따랐다.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그처럼 풍성하게 부어졌던 것은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2) 유대인들도 역시 복음을 들었다(19-21). 그는 이 사실에 대해 구약의 두 성경 구절에 호소한다. 이방인들이 부름을 받아 들어오리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그들은 틀림없이 모세와 이사야의 글로부터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먼저 한 구절은 신명기 32:21에서 인용되었다. 내가…너희를 시기나게 하며(19). 그들은 복음을 제공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럴지라도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먼저 제공을 받았고 이방인들은 그저 찌꺼기만을 받았다. 만일 한 쪽이 받지 않으면 다른 쪽이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점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내 백성이 아닌자' '미련한 백성'이라고 불린다. 세상의 기지와 지혜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미련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방 세계의 상태가 그러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신 것이다. 이방인들이 은혜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는 특별히 사도행전 22:22에서 잘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격노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함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들의 죄 자체가 그들에 대한 형벌이 되도록 하신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맹렬한 격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  보다도 더 무서운 재앙은 없다.


다음으로 다른 구절은 이사야 65:1,2에서 인용되는데 이사야는 거기에서 매우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충실하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매우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결심한 사람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지간에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이방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예방적인 은총과 호의에 대해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한다(20). 구하라 그리하면 찾으리라는 이러한 처방은 우리에게나 해당되는 규칙이지, 종종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도 찾은 바 되시는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는 규칙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복음의 빛을 보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황이 아니었는가? 우리가 그를 찾지 아니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종종 무한한 감사와 함께 기억하게 되는 사랑의 때가 아니었는가? 또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강퍅함과 사악에 대해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한다(21). 그들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대한 것이었다.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21). 여기서 하나님의 제의는 이것이다. '내가 내 손을 벌렸노라' 즉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였다는 말이다. 손을 벌리는 행위는 듣기를 요구하거나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몸짓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을 벌린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었다. 화해를 제안하는 표시로서 '내 손을 벌렸노라.' 그러니 와서 악수를 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말씀이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그에게 우리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이러한 제의를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내는 이것이다. '종일' 그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기다리신다. 그는 오래 참으시나 언제까지나 참으시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저지른 악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이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치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스려 말하고 그것에 대하여 다투었다. 유대인들은 그 부르심을 반박하고 모독적인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의 악함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의 정도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자비와 경륜 11:1-32


사도는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반박하고 나설만한 반론을 제의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1). 그 배척은 전체적이고 최종적인 것인가?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백성은 두시지 않는가? 사도는 가혹하게 보이는 이러한 처사에도 하나님의 많은 자비와 선하심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유대인들 중 얼마가 버려졌을지라도 그들 전부가 다 버려지지는 않았다. 둘째, 유대인이라는 줄기는 버려졌을지라도 이방인들이 대신 들어왔다. 셋째, 지금은 유대인들이 버려졌을지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기한이 차면 그들이 다시 그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1. 유대인들의 상태(1-10)

유대인들 중 많은 수가 버려진 것은 사실이나 전부가 다 버려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을 얻은, 믿는 유대인이라는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 있었다(1-7). 사도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2) 자들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그가 미리 알고 예정하신 자들이다. 여기에 구별의 근거가 있다. 그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7)라고 불린다. 신자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누구나 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신 자들만이 그렇게 불릴 수 있다. 사도는 그 자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밝힌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1). 바울은 선택된 그릇이었고( 9:15) 게다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였다. 사도는 엘리야 시대처럼 당시도 이 선택된 남은 자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훨씬 더 많았다고 암시한다. 여기서 엘리야에 관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1) 이스라엘에 관한 그의 오해를 생각해 보자.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라고는 자기 혼자 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사도는 열왕기상 19:14을 인용하는데 거기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고 있다. 중재치고는 묘한 중재였다! 이 구절은 "그는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편에 서서 하나님을 상대하였다"고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상대한다. 엘리야에 관한 말 중에 저가 '간절히 기도하였다'( 5:17)는 말이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는 사람처럼, 기도할 때는 그와 같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엘리야는 이 기도 가운데서 마치 이스라엘에 충성된 자라고는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하였다. 때때로 신앙의 고백이 얼마나 저조해질 수 있는가를 주의해 보라. 그 당시 이스라엘의 권세자들은 핍박하는 권세자들이었다.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내 목숨도 찾나이다(3). 그때 이스라엘의 많은 무리들은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나만 남았는데. 이처럼 하나님께 충성스러웠던 극히 소수의 사람들마저 우상숭배자들의 무리 가운데 숨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핍박을 받아 궁지에 몰렸었다.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바알을 위한 제단들이 세워지자 하나님의 제단들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를 항의하며 서있는 그 증거품을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송사한 이유였다. 어떤 한 개인이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그들을 송사하는 기도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기 백성의 소송을 지지하시고 조만간에 그것을 명백하게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오해를 바로 잡아주심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4). 내가…남겨 두었다. 종종 하나님의 교회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다. 배교가 만연해 있는 시대에도 보통은 자기의 순결을 지키고 있는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배교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순결을 지키는 남은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자신에게 남겨 두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구별을 두시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로우심과 전능하신 은혜에 따른 것이다. 칠천 그 자체로는 상당한 수이지만 이스라엘의 수많은 무리에 비교해 볼 때는 지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이 남은 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이다. 궁정에도 도시에도 지방에도 어디나 할 것 없이 바알이 우위를 떨치고 있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다소간에 바알에게 경의를 표했었다. 자신의 순결을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물살이 강할지라도 시내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모습이다. 모두가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때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온전한 정신의 굳건한 의지는 일반적으로 진실함의 상징이다.  (3) 이 실례를 오늘날에 적용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5-7).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남은 자들이 있다. 여기서 남은 자란 많은 무리들 중 소수에 불과한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다(5). 사실 그대로(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그들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 남은 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생긴다면 그 차별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이 남은 자에 관해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이들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6) 곧 행위를 배척하는 은혜에 있다. 선택은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1:5).바울의 마음은 온통 하나님 은혜의 값없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는 잠시 본 강론을 접어두고 이렇게 외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6). 다음으로 이들은 무엇을 얻는가? 이스라엘이 헛되이 구한 그것을 얻는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7). 즉 칭의와 하나님의 영접을 얻지 못하였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고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옛적의 자비가 기억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의 지혜가운데서 주목하신 자들이었다.


[2]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7). 어떤 사람들은 선택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신앙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내버려졌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였다. 같은 태양이라도 밀랍은 무르게 만들고 진흙은 단단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들은 눈이 멀게 되었다. 즉 그들은 완악하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은혜의 빛 도 볼 수 없었고 그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맹목이나 완악함은 똑같이 영의 무감각과 어리석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견 이 사실은 매우 가혹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은 매우 가혹한 교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은 누그러뜨리기 위해 구약으로부터 두 증인을 앞세워 말한다.


1)자기가 살던 시대의 그와 같은 심판을 말한 이사야( 19:10; 6:9): 혼미한 심령(8). 그들은 꾸벅꾸벅 졸며 잠에 취해 있는 사람들처럼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 그들은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그들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보는데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았으나 그를 믿지 않았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상태는 마치 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과 같았다. 오늘날까지. 이사야가 예언한 이대로 이같이 완악해지는 일이 지금기지 계속 되어 왔다는 말이다. 그들 중 얼마가 눈이 멀고 무감각해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 중 많은 무리에 관해서는 여전히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다윗(9,10): 시편 69:22,23로부터 인용된 그의 글에서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고난을 예언하는데 특별히 그들이 그에게 '초를 마시우는'( 69:21) 고난을 말하며 그 때문에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예고한다. 저희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옵시고(9). 사도는 여기서 이 예언을 오늘날의 유대인들의 맹목과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발한 화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먼저 그들의 즐거움이 파멸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희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옵시고' 즉 시편 기자가 설명하는 대로하자면 그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올가미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음식물이 독약이 되게 할 것이다. 그들을 살지게 할 그 음식이 오히려 그들을 숨막히게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여기서 그들의 능력과 기능이 파멸할 것을 말하고 있다.(10). 그들의 눈은 흐려지고 등은 굽어져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없고 설혹 찾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행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일에 쏠려 있다면 우리의 눈은 흐려진 것이다.


2. 이방인들의 영접과 경고(11-22)

이 유대인의 배척의 교리를 완화시킨 또 다른 사실은 비록 유대인들은 버려졌을지라도 이방인들은 영접되었다는 점이었다(11-14). 그는 이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경고로써 언급한다(17-22).


[1] 유대인들의 찌꺼기가 이방인들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11).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11). 하나님께서 그들은 배척하신 것은 순전히 그들의 파멸만을 위한 것인가? 그는 통례적으로 하나님의 지혜나 의, 선하심을 헐뜯는 무엇인가가 암시될 때마다 취하는 행동과 같이 이러한 생각에 펄쩍 뛰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기는커녕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하나님의 거룩한 지시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정해졌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도 사실이 그러했다( 13:46).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므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공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 무한하신 지혜자가 어떻게 어둠으로부터 빛을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시는가를 보라! 같은 의미로 그는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다'고 말한다(12). 이방인의 부요함이란 그들 중에 있는 많은 무리의 개종자들이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보석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의미로 그는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된다'고 말한다(15).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쾌는 그의 은총이 이방인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고' 계셨다(고후 5:19). 어떤 민족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2] 사도가 이 교리를 가지고 사용하는 용도.

1)같은 유대인의 혈육으로서 그는 여기서 그들을 자극하여 복음의 제공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그들에 대하여 권고의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의도하신 바는 바로 유대인들로 시기나게 하려는(11)이것이었다. 따라서 바울도 그 점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하여(14). "멸시받는 이방인들이 복음의 모든 위로와 특권들을 가지고 달아나는데 우리도 복음을 거절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그 몫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말 속에는 우리의 영혼에 관한 일에 있어서 칭찬할 만한 경쟁의식이 있다. 우리가 우리 이웃 가운데 어떤 사람들처럼 거룩하고 행복하게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 축복은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줄어드는 법이 결코 없다.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이 평생을 두고 하는 일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최대한도로 약속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얼마의 사람들만을 구원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상대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지 몇 명만을 구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만일 자기들이 몇 명을 구원하는 일에 도구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자기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잘 쓰여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2)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는 여기서 그들에게 경고의 말을 한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13). 믿는 로마 사람들인 너희는 구원의 부요함이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이르렀다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을 잃어버릴 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때를 기회로 삼아 이방인들에게 강론을 시작한다. 이것이 그의 특별한 사명의 목적이었다( 2:21).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우리는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에 중대하고 특별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방 세계는 유대인의 세계보다 범위가 더 넓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일하는데는 매우 유능하고 용기 있는 일군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일에 적합하다고 여기시거나 그 일을 위해 잘 준비시킨 자들을 특별한 일에로 부르신다. 내가…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그 당시 그 직분을 헐뜯거나 그 직분 때문에 그를 헐뜯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이 경멸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진정 영광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참된 사랑을 품고 있다는 표시이다. 목회 사역이란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직분이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로서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사랑 안에서 높이 존경받아야 하는 자들이다. '내 직분'이란 나의 사역, 나의 봉사를 말한다. 바울이 그렇게 깊이 애착을 두었던 것은 사도의 존엄성이 아니라 사도의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두 가지 사실은 훈계한다.


①유대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회개를 바라도록 훈계한다. 이점은 그들의 회개가 교회에 가져올 유익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볼 수 있다.(12,15). 그것은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그들이 다시 영접되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한다.

②그들이 유대인들처럼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것을 훈계한다(17-22).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서 받은 특전을 살펴보자. 그들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지듯이 접붙여졌다(17). 그런데 이것은 참감람나무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이는 농부들의 일반적인 방법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교회에 접붙이는 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생 나무로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사람은 나무를 개선하기 위해 접붙이나 하나님은 가지를 개선하기 위해 접붙이신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돌감람나무처럼 쓸모 없을 뿐만 아니라 맛없고 시큼한 열매만 맺는다. '원 돌감람나무(24, 흠정역에는 '본래 야생의'로 되어 있음-역주) 본래 야생적인 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선천적인 상태이다. 개심이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을 뜻한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자들은 그 나무의 뿌리와 기름짐을 공유한다.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자들은 누구나 그 뿌리의 가지로서 그를 함께 받는다. 교회에 접붙여진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특전들 즉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다. 그리스도만이 그 뿌리이시다. 이제 믿는 이방인들이 이 뿌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특전들은 오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살펴보자. 첫째, 자랑하지 말라(18). 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다. 믿음의 법은 스스로 자랑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랑하든지 간에 일체의 자랑을 배격한다. '가지들이 꺽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박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지 말라(18). 즉 네가 그들보다 하나님께서 더 받으실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지 말라. 오히려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비록 네가 접붙여졌을지라도 너는 여전히 뿌리에 의해 보전되는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접붙여진 가지는 '본성을 거스려'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졌는데(24) 이는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은혜의 행위로 말이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임'을 알라(그 의미를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말이 보충되어야 한다). 둘째,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 하라(20). "안심하지 말라. 네 자신의 힘과 현재의 위치를 지나치게 확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높은 마음을 방지할 수 있는 거룩한 예방약이다. 그러면 이처럼 언제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행복한가?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것인가? "당연한 얘기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전들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특전들을 잃지 않도록 두려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악을 우리에 대한 경고로 받아 들여야 한다. 교회가 그들의 특전으로서 갖는 특허증은 어떤 일정 기간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바른 자세를 갖는 한 계속 유효하다. 그러면 그들은 어째서 꺽어졌는가? 그것은 그들이 받을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불신앙으로써 스스로를 꺽은 것이다. 그들이 '원 가지들'(21)이었을지라도 불신앙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규례도 오랜 관습도 그들 조상의 신실함도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하였다. 비록 그들이 자주 주장하는 바였지만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변호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었다. 이것이 여기서는 엄위라고 불린다(22). 엄위라는 단어는 호되게 들리는 말이다. 나는 그 단어가 성경에서 여기 말고 다른 어디에서고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신앙 고백상 자기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어 오더 사람들이 그를 반항한다면 다른 누구에게 보다도 그들에게 가장 엄하게 대하신다. 모든 심판 가운데서 영적 심판이 가장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그 심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8). 다음으로"너희 접붙여진 자들은 어떻게  하여 섰는가?""어떤 수단을 이용하여 섰는가? 의지하는 은혜인 믿음으로 섰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너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들을 파멸시킨 것은 불신앙이었고 반면에 너희는 믿음으로 섰다." 어떤 조건에서 섰는가?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22). 즉 너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 자신을 간직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의 온전한 사용: 한편으로 우리가 자신의 재능들을 자랑해서는 안되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 재능들을 땅에 묻어서도 안 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할 수 있는 한 힘껏 노력하겠다." 받은 은사가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자. 은사가 각각 다르니(6). 비록 모든 은사의 궁극적인 취지는 같을지라도 직접적인 목적은 다르다. 은혜대로. 직분을 명하고 사람에게 자격을 구비시키며 할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은혜가 한다.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일곱 가지 은사를 일일이 언급하고 있다(6-8).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맡고 있었던 여러 가지의 직분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예언과 섬기는 직분이 있는데 전자는 감독들의 일을 말하고 후자는 집사들의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뒤에 나오는 다섯 가지 직분들은 전자의 이 두 가지 직분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예언: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할 것이니라(6). 이것은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특별한 은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보통의 직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일이란 장래 일을 예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에 관해서 백성들에게 경고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곧 선지자인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믿음의 분수대로 전해야 한다. 즉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뜻을 지닌다.   ①우리의 예언의 태도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의 은혜의 분량에 따라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믿음을 동원하여 먼저 자기가 전하는 진리를 자기 마음속에 새기는 일을 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이 잘 듣지 못하는 것처럼 사역자들도 잘 전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 비록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외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다면 네 스스로 간직하고 있으라. 너는 단지 네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마라."   ②우리의 예언의 내용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 교리의 분량을 따라야 한다. 성경에서 한결같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들이 있는데 진리들은 설교의 시금석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살전 5:20,21)한다. 좀 모호한 진리들은 좀더 명확한 진리들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진리가 또 다른 진리와 모순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해야 할 일이 다름이 아니라 오직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언은 믿음의 분수를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믿음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언하는 사람이 유의해야 할 두 가지 특별한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치는 일과 권위하는 일이다. 첫째,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7). 가르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실제적인 응용 없이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입증하는 일이다. 이제 가르칠 능력이 있고 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자는 그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은 좋은 은사이므로 그것을 사용하고 그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둘째, 권위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을 해야 한다(8). 이일을 맡은 사람은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이것은 사역자가 하는 일로서 복음의 진리와 규범들을 사람들에게 더욱 밀접하게 적용시키며 그들에게 좀더 실제적인 것을 강조하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아주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 권위하는 일에는 냉담하고 미숙할 수가 있다. 또 그와 반대의 겨우도 있을 수 있다. 전자의 일은 좀더 명석한 두뇌를 요구하고 후자의 일은 좀더 따뜻한 심정을 요구한다. 우리의 일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일에 가장 많은 시간과 생각을 쏟는 것이며 그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2)섬기는 일:'집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그 직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이 일에는 교회 즉 하나님 전의 바깥 일( 11:16)에 관계되는 모든 직분이 포함된다. 공궤를 일삼는 것( 6:2). 이러한 섬기는 일에 자질을 보이는 사람은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그 일에 임해야 한다. 특별히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한다. 그러한 교회의 직원들은 교회의 헌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이었다. 그러한 직분을 맡은 자들은 성실하고 정당하게 그 일을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선을 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목적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재물이 있는 자는 구제하되 풍성하고 후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에 사역자를 돕던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부지런히 그 일을 해야 한다. 이 말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데 좋지 못한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근면과 관심을 표시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의무로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자비를 베풀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교회에서 특별히 병든 자와 나그네를 보살피는 일을 직분으로 맡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러한 일은 즐거움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즐거워하는 얼굴로 긍휼을 베푸는 모습은 불행을 당한 자들에게 큰 안심과 위안을 준다. 그들이 마지못해 억지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볼 때 큰 위로를 얻는 것이다. 병들어 고통을 하는 사람과 대체로 까다롭고 성급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들은 인내심을 지녀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즐거워하는 마음도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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