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성경

로마서강해4

제이비젼 2014. 8. 30. 17:40




3. 유대인 배척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23-32)

 이 유대인 배척의 교리를 완화시키는 또 한 가지의 사실은 그 배척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 이 유대인들의 개심이 여기서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저희의 충만함(12)이라고 말해지는데 그것은 곧 그들이 교회에 덧붙여짐을 말한다. 이것은 세상을 많은 빛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부요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영접이라고 불리어진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영접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기이하고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기꺼이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것을 '그들이 다시 접붙여지는'(23) 일이라고 말한다. 접붙여진 가지는 뿌리로부터 수액과 힘을 공급받는다. 그와 같이 진정으로 교회에 접붙여진 영혼은 소생시키는 뿌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힘과 은혜를 받는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누려 왔으나 이제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빼앗겨 버린 그 특권들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여질'(24)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도 한다(26). 그들이 교회에 덧붙여진다는 것은 곧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2] 그 일은 무엇에 근거해서 발생하며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 일을 기다려야 하는가?

   1)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이다(16). 좋은 시작은 좋은 끝을 약속한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를 뿌리와 동일한 것으로,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로 이해한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거룩하였다면, 다시 말해 그들이 언약 안에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의 몸인 떡덩이와 그 지체들인 가지에게 은혜를 보이셨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지혜로운 자식을 낳지는 못할지라도 자유민은 자유민을 낳는다. 은혜가 유전되지는 않을지라도 외적인 특전들은(몰수되기 전까지는) 유전된다. 유대인 가지들은 그 뿌리가 거룩하였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간주된다.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좀더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28). 저희가…조상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자라(28). 여전히 옛적의 자비가 기억되는 동안에는 그 사랑이 그들의 특권들을 회복시킬 것이다. 비록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그처럼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복음에 원수가 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 일은 점차로 사라지고 그들의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기억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들 때문에 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가 그들에게 자기 감람나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옛 정을 인하여 그들이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격려가 된다.


   2)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23).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버려져 시들어 버린 자들을 접붙이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므로 불신앙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제거하실 수 있다. 사실 전능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불신앙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3)이방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본래 돌감람나무인 네가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 참감람나무의 가지들인 이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것은 배척된 유대인들을 경멸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만을 저지하기에 아주 적절한 제언이다. 또한 그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30). 하나님께 자비를 얻은 사람들이 종종 과거에 그들이 어떤 존재였으며 어떻게 그 자비를 얻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이방인을 부르신 이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너희가…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그렇다면 하물며 그들이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을 얻지 않겠느냐?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 즉 너희가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것처럼 그들이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려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어느 한 쪽이 독점할 수 없는 법이다. 자비를 얻은 사람들은 친히 자기가 받은 자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비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4)구약의 예언과 약속 때문이다. 그는 이사야 59:20,21로부터 매우 주목할만한 예언을 인용한다(26).   ①약속된 그리스도의 오심: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26).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원자이시다. 이사야를 보면 그 사실에 대해 '구속자가 시온에 오시리라'고 되어 있다. 거기에서는 그리스도가 구속자라고 불리고 여기 로마서에서는 구원자라고 불린다. 그는 그 속의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하신다. 이사야서에서는 그가 시온에 오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을 때 그는 아직 세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가 이 예언을 기록할 때는 이미 그가 오신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온에서 오리라고 한 그의 나타나심의 열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②이 오심의 목적: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파멸하지 않도록, 그리고 죄악이 우리를 주장하지 않도록 경건치 않음을 제거하시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는 야곱에게서 그것을 돌이키시기 위해 오셨다. 그가 그들에게서 불경건을 돌이키시고 모든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 말고 더 큰 어떤 친절을 그들에게 베푸실 수 있었겠는가? 이사야서를 보면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여 야곱 중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오직 자기의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에게,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 오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란 구원자가 그들에게 오리라는 것이며 나의 영이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사도는 여기서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라는 말을 덧붙인다. 죄의 용서가 그 기초로서 놓여진 것이다. '내가…긍휼히 여기고'( 8:12). 사도는 이 모든 사실들로부터 하나님은 확실히 그 백성을 위해 많은 긍휼을 준비해 두셨다고 결론을 내리며 이 진리로써 그의 결론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 그러한 은사와 부르심들은 변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나 그를 유효하게 부르신 사실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3] 유대인들의 개심의 시기와 범위: 그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 사도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하는데(25) 그 이유는 그것이 분명치 않았고 그 백성의 현재 상태를 보아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척된 유대인들의 상황은 과거에 이방인들의 상황이 그랬던 것처럼 나쁘게 보였다. 이제 그는 이방인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늘 겸손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실로서 이 비밀을 잘 알게 하려고 하였다.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25). 무지는 자만의 원인이 된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그들의 현재 상태: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5). 단지 일부분만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평화에 관한 일을 알고 있는 남은 자가 있다(7,8).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32). 즉 감옥에 가두듯이 그들을 가두어 두셨다는 말도 그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서서 불신앙의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다 그러면 믿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다.  (2) 이 복된 변화가 언제 일어날 것인가? 그 때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때로서 복음이 본래의 의도된 성과를 거두고 이방 세계에까지 이른 때를 말한다.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의 모든 사역을 마치실 때까지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완악한 상태로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은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값없는 은혜 때문이었다.  (3) 그들의 개심의 범위: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26). 그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32).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참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큰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 이방인들과 함께 한 양우리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즉 로마임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전과 그 기간동안 그리고 그 후에 유대인들 중 많은 무리가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 끝에 가서야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대한 찬양 11:33-36

 

 사도는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유대인의 배척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나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인정하며 찬양하는 글로써 끝을 맺는다.


 1.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33,34)

 깊도다(33). 일반적으로 우리는 복음의 모든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할 만큼 심오한 것이다(벧전 1:12). 그러니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더욱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다. 사도는 자신이 그 깊이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을 실토하며 그 바닥을 헤아리기를 단념하고서 겸손히 앉아 그 깊이를 찬미한다. 대부분의 사실들을 이러한 불완전의 상태 속에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근시함을 깊이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깊도다…부요함이여. 사람의 부요함이란 얄팍해서 이내 바닥이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요함은 깊다. 하나님의 지혜는 심오할 뿐만 아니라 부요하기도 한데 그 정도는 지식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 앞에서는 벌거벗은 듯이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배열하여 일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이것이 그의 지혜이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판단이란 곧 그의 지혜와 목적을 말하며 그의 길이란 이러한 지혜와 목적의 수행을 말한다. 우리는 그의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찾지 못할 것이다. 비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한다(13:7).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그의 행위의 판단과 그의 섭리의 길은 심오하고 신비스럽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캐내어 알려고 하지 말고 잠잠히 찬미해야만 한다. 사도는 이점을 특별히 그 묘한 변화 즉 적당한 시기가 이르면 다시 유대인들을 받아들일 목적을 가지고서 유대인들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영접한 이 사실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그 까닭을 다 알 수 없는 방법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점들에 관해서 '깊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찾지 못할 것이로다.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뒤에 어떤 흔적이나 발자취도 남기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의 섭리의 길은 매일 아침마다 새롭다. 그는 그 흔적이 나타날 만큼 그렇게 자주 한 길을 가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는(34) 질문이 따른다. 대체 그의 각의(cabinet- council)가 된 어떤 피조물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혜를 나누어 주셔서 그가 취하시는 길을 아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있느냐? 사도는 동일한 도전을 제기한다(고전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34). 그는 또한 거기에다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주의 마음을 안 자는 그를 나타내었다( 1:18).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지시하거나 가르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2. 하나님의 지혜의 주권(35,36)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일들에 있어서 자기가 하시고자 하는 것을 행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고 그에게는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1] 사도는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진 자인 것을 증명할 테면 해보라고 도전한다(35) "누가 주께 먼저 드렸느뇨".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께 자기에게 신세지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우리가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의무들은 보답이 아니라 단지 반환일 뿐이다. 사도는 여기서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 보상이 치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그것이 다시 그에게 갚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자기 때문에 손해보게 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결코 감히 이러한 요구를 하지 못한다. 사도는 먼저 여기서 유대인들의 불평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말을 꺼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는 교회의 특권들을 빼앗아 가셨을 때 그는 단지 자기의 것을 가져가신 것뿐이다. 다음으로 그는 이방인들의 무례한 말들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말을 꺼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복음을 보내셨을 때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그처럼 많은 호의를 빚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 자신의 선하신 즐거움 때문이었다.


 [2]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해결한다(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만물의 샘이자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전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궁극 목적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만일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는다면 세상에서 모든 것이 그에게로 돌아가야 하고 그를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만사가 마침내는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여기서 짤막한 송영과 함께 글을 끝맺는다. 영광이 그에게서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바울은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를 광범위하게 강론해 왔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 모든 문제들이 그 안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함으로써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행위를 얘기할 때는 우리의 논쟁을 경외로 가득찬 찬미로 끝을 맺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 그리스도인의 의무 12:1-21

 

 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1, 2, 11, 12)

 [1] 경건이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그럼으로 해서 튼튼한 기초를 놓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는 모든 의무와 복종의 원천으로 강조된다(1,2).


   1)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 사도는 여기서 매우 간절하게 권고를 시작한다. 형제들아 내가…너희를 권하노니. 자신이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애정과 관심을 나타내는 말투로 '형제'라고 부른다. 그는 간절한 부탁을 사용한다. 이것이 복음의 방법이다. 이것은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침투하도록 은근하게 권고를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대개가 친절하게 말하면 이내 영향을 받아 끌어당기는 것보다도 더 쉽게 앞으로 나아간다.


   ①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하는 의무가 강조된다. 너희 몸이란 너희의 전체를 말한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사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 그에게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리키는 말이다. 일찍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바쳐진 그리스도는 유일한 속죄 제물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린 우리의 몸과 행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물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들을 바친다는 것은 자발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발적인 제공이 되어야 한다.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몸을 가지고 짓거나 몸을 거스려 짓는 죄들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몸을 영혼의 종으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 몸의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다( 6:13). 비록 육체의 연습 그 자체만으로는 별 유익이 없지만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바친 증거가 된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 곧 산 제물이다. 몸을 산 제물로 만드시는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속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거룩한 사랑이 제물을 불태우며 의무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즉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말이다(11). 둘째, 너희 몸은 거룩해야 한다. 온 마음과 생활의 올바름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몸도 죄와 불의의 병기가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여져야 한다. 거룩함의 올바른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나 성화된 영혼을 거룩함을 몸에 전달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것이 곧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몸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그 몸은 거룩하다.


   ②이 의무를 강조하기 위한 세 가지 논증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것은 가장 호감이 가는 유력한 논증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비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자비가 있는데 그것은 곧 샘 안에 있는 자비와 흐르는 물결에 있는 자비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비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된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니 우리 몸을 그에게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의 몸을 기꺼이 사용하실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에게서 그의 자비의 열매를, 특별히 우리 몸에 대한 그의 자비의 열매를 받는다. 즉 그는 우리의 몸을 받으셨고 현재 유지하고 계시며 대가를 지불하고 사셨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자비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속죄 제물로 바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우리 자신을 드리자. 곧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자. 사실 그것은 아주 보잘것 없는 반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이니 드리자. 둘째,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산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다. 우리자신을 드리는 것이 그를 기쁘시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 낫게 우리 자신을 이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다. 셋째, 그것은 우리의 '합당한 예배'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이성의 행동이 따른다. 우리의 몸을 바치는 일은 영혼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각을 가지고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까다롭거나 불합리한 어떤 일도 부과하시지 않고 전적으로 바른 이성의 원칙에 맞는 일을 부과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고 또한 언제든지 그 이유를 댈 수 있는 합당한 예배이다.


   2)마음은 하나님을 위하여 새롭게 되어야 한다. 사도는 이점을 강조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2). 회심이나 성화나 모두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성질이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과거의 그가 아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이다. 마음의 새로워짐은 곧 전인의 새로워짐이다.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는 더욱더 죽고 의에 대하여는 더욱더 사는 성화의 전진은 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를 변화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단어가 고린도후서 3:18에도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 스스로가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떤 능력으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세상도 새롭게 할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고 명령하신 수단을 사용하라.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변화 받는다. 그러므로 "네 영혼이 복되신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영향을 받도록 하라." 비록 하나님에 의해 새 사람이 지음을 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하고( 4:24) 완전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다음 몇 가지를 더 살펴보자.


   ①이 새로워짐을 방해하는 큰 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을 본받는 행위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따라 네 자신을 형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일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곧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죄인들이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들을 반대하는 증거를 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참된 기독교는 건전한 외고집을 보인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곧잘 빠지는, 짐짓 꾸미는 극단적인 무례와 까다로움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복음의 규칙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규칙이지 모순을 일으키는 규칙이 아니다.


   ②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 새로워짐의 중대한 효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으로서 우리가 천사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처럼 지키기를 기도하는 그러한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것이다. 이것은 곧 율법의 탁월한 세 가지 특성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자체로 선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선하다. 그것은 받으실 만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의 은총을 목표로서 얻는 유일한 길은 그의 뜻을 규칙적으로 삼고 거기에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여 아무 것도 거기에 덧붙여질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즉 실험을 통해 그것을 알아야 하며 그것을 따르는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 뜻의 우수성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곧 '지극히 선한 것'( 1:10)을 분별하는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아는데 민첩해지는'( 11:3) 것이다. 셋째, 다른 누구보다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가장 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은혜의 살아 있는 원칙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들을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인지 알리라'( 7:17)는 약속이 있다. 아주 지혜가 있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논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직하고 겸손한 심령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한다.


 [2]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고 나서 그를 섬기는 것이다(11,12). 주를 섬기라(11). 경건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그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천천히 행동해서는 안 된다. 게으른 종은 악한 종으로 간주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 아래 영으로써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영의 열심히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영혼으로써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자들처럼 거룩한 열심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제물을 불태워 하늘에 상달하여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하는 거룩한 분이다. 셋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12).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우리의 소망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는데 특별히 우리가 그 소망 안에서 기뻐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 넷째, 환난 중에 참으며. 하나님은 이렇게도 섬김을 받으신다. 곧 그가 일하도록 우리를 부르실 때 그를 위해 일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고난을 받도록 우리를 부르실 때도 우리가 여전히 조용하게 고난을 견딤으로써도 섬김을 받으신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은 또한 환난 중에 참 인내의 친구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섬긴다.

   

 2. 우리 자신에 관한 의무(3-8)

 그것은 곧 온전한 정신이다.

 [1] 자신에 대한 온전한 평가(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말하노니.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교만은 우리 모든 사람들 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죄이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자만해서도 안되고 우리 자신의 지혜를 과대 평가해서도 안 된다. 물론 우리 자신을 죄의 노예나 이 세상의 고달픈 종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훌륭한 점들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높은 평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능력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대로 겸손하게 생각해야지 달리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구절은 충분히 뜻에 맞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원문에는 "자신을"(흠정역에는 이말이 삽입되어 있음-역주)이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 이상으로 알아서는 안되고 온전하게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우쭐대게 만드는 지식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조심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이끄는 지식을 추구하도록 애써야 한다. 사도는 이러한 지혜를 위해 '스스로 지혜 있는체말라'(16)는 권고를 하고 있다. 지혜롭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쁘다. 왜냐하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에게 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가 자신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능력 및 업적에 대해 온전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1)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하고 유용한 사람도 단지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 그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가 얼마나 애써 그것을 얻었는가 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친절을 베푸셨는가 하고 생각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사를 어떤 분량대로 나눠주시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분량대로 나눠주신다. 사도는 영적 은사의 분량을 믿음의 분량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기본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거나 우리가 행하는 선한 것은 그것이 믿음에 기초할 때만이 바르고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 3:34). 그러나 성도들은 분량을 따라 성령을 받는다. 은사를 한량없이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셨는데 분량대로 받은 우리가 교만하고 우쭐댈 수 있겠는가?


   3)하나님께서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사를 나눠주셨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만일 우리만 성령을 받았다면 이렇게 우리 자신에 대해 자만할 구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몫의 성령을 받는다. 그러므로 마치 우리만 하늘나라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인양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사도는 이 논리를 우리 몸의 지체들로부터 이끌어 낸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4,5).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①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가 되신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는 덩어리처럼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②특별히 신자들은 이 몸의 지체들이며 그 머리로부터 생명과 영을 이어받는다. 이 몸의 어떤 지체들은 다른 지체들보다 더 크고 유용하다. 그리고 각각의 지체는 자기의 분수대로 머리로부터 영을 받는다. 만일 작은 손가락이 다리와 같이 많은 자양을 공급받는다면 그 모양이 얼마나 볼상 사납고 오히려 자기에게 해가 되겠는가!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전체가 아니라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③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4). 각 자체는 자기에게 할당된 각각의 위치와 일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신비한 몸 안에서 어떤 신자들은 이 일에로 다른 신자들은 저 일에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④각 지체는 전체와 다른 모든 지체의 유익을 위해 각각의 위치와 직분을 갖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지체'도 된다(5).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을 서로에게 행하도록 묶여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받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의 온전한 사용: 한편으로 우리가 자신의 재능들을 자랑해서는 안되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 재능들을 땅에 묻어서도 안 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할 수 있는 한 힘껏 노력하겠다." 받은 은사가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자. 은사가 각각 다르니(6). 비록 모든 은사의 궁극적인 취지는 같을지라도 직접적인 목적은 다르다. 은혜대로. 직분을 명하고 사람에게 자격을 구비시키며 할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은혜가 한다.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일곱 가지 은사를 일일이 언급하고 있다(6-8).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맡고 있었던 여러 가지의 직분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예언과 섬기는 직분이 있는데 전자는 감독들의 일을 말하고 후자는 집사들의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뒤에 나오는 다섯 가지 직분들은 전자의 이 두 가지 직분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1)예언: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할 것이니라(6). 이것은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특별한 은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보통의 직분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일이란 장래 일을 예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에 관해서 백성들에게 경고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곧 선지자인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믿음의 분수대로 전해야 한다. 즉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뜻을 지닌다.   ①우리의 예언의 태도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의 은혜의 분량에 따라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믿음을 동원하여 먼저 자기가 전하는 진리를 자기 마음속에 새기는 일을 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이 잘 듣지 못하는 것처럼 사역자들도 잘 전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 비록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외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다면 네 스스로 간직하고 있으라. 너는 단지 네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마라."   ②우리의 예언의 내용에 있어서 그것은 믿음 교리의 분량을 따라야 한다. 성경에서 한결같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들이 있는데 진리들은 설교의 시금석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살전 5:20,21)한다. 좀 모호한 진리들은 좀더 명확한 진리들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진리가 또 다른 진리와 모순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해야 할 일이 다름이 아니라 오직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언은 믿음의 분수를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믿음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언하는 사람이 유의해야 할 두 가지 특별한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르치는 일과 권위하는 일이다. 첫째,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7). 가르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실제적인 응용 없이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입증하는 일이다. 이제 가르칠 능력이 있고 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자는 그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은 좋은 은사이므로 그것을 사용하고 그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둘째, 권위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을 해야 한다(8). 이일을 맡은 사람은 이 일에 전념해야 한다. 이것은 사역자가 하는 일로서 복음의 진리와 규범들을 사람들에게 더욱 밀접하게 적용시키며 그들에게 좀더 실제적인 것을 강조하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아주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 권위하는 일에는 냉담하고 미숙할 수가 있다. 또 그와 반대의 겨우도 있을 수 있다. 전자의 일은 좀더 명석한 두뇌를 요구하고 후자의 일은 좀더 따뜻한 심정을 요구한다. 우리의 일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일에 가장 많은 시간과 생각을 쏟는 것이며 그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잘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2)섬기는 일:'집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그 직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이 일에는 교회 즉 하나님 전의 바깥 일( 11:16)에 관계되는 모든 직분이 포함된다. 공궤를 일삼는 것( 6:2). 이러한 섬기는 일에 자질을 보이는 사람은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그 일에 임해야 한다. 특별히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한다. 그러한 교회의 직원들은 교회의 헌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이었다. 그러한 직분을 맡은 자들은 성실하고 정당하게 그 일을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선을 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목적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재물이 있는 자는 구제하되 풍성하고 후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에 사역자를 돕던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부지런히 그 일을 해야 한다. 이 말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데 좋지 못한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근면과 관심을 표시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의무로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자비를 베풀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교회에서 특별히 병든 자와 나그네를 보살피는 일을 직분으로 맡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러한 일은 즐거움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즐거워하는 얼굴로 긍휼을 베푸는 모습은 불행을 당한 자들에게 큰 안심과 위안을 준다. 그들이 마지못해 억지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볼 때 큰 위로를 얻는 것이다. 병들어 고통을 하는 사람과 대체로 까다롭고 성급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들은 인내심을 지녀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즐거워하는 마음도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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