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성경

로마서강해3

제이비젼 2014. 8. 30. 17:39




.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및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5:6-21


사도는 여기서 주 예수 죽으심 속에 놓여 있는 칭의의 원천과 근거를 기술한다. 그는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사실을 상술하는데, 첫 번째는 예수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에 대해서(6-3), 두 번째는 그의 죽으심의 귀한 열매들에 대해서(9-11) 기술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첫째 아담으로 인한 죽음과 죄의 전달과 둘째 아담으로 인한 생명과 의의 전달 사이의 대비를 설명한다(12-21)


1. 이전의 우리의 상태(6-9)

[1] 우리는 슬픈 상태 가운데서 연약하게 있었다(6). 우리 스스로는 결코 그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구원이 '기약대로' 이르렀다고 하였다. 구원받을 자들이 연약한 상태가운데 있을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돕고 구원하시는 때이다. 소망이 다 끊긴 데서 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2] 그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즉 스스로 어떻게 도리가 없어 멸망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죄가 있으므로 멸망 받아 마땅한 피조물을 위해 죽으셨다. 그들은 경건치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비할 데 없는 사랑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7,8). 이점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 사람들은 좀처럼 '의인' 즉 부당하게 정죄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자를 동정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려고 하지는 않는다.(2) 사람들이 혹시 의인보다 조금 더 낳은 선인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다. 자기 스스로는 선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다. 그럴지라도 사도는 이 사실마저도 제한을 둔다. 즉 그렇게 선인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도 극히 소수이며 그것도 결국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3) 그리스도께서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8). 그처럼 무익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즉 그 사랑을 입증 하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확대하여 빛나게 하셨다. 그 사랑을 논의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놀라운 경이와 찬미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으시기 위하여 그 성령을 권하셨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하셨다. 그는 우리를 그냥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밖으로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이었었다.  (4)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원수이었다(10). 즉 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역자이며 모반자이였다. 이 같은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 했다는 것은 하나의 신비이며,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그 사랑에 놀라고 그것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의 예이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분께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그의 나라의 한 법률로 삼으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2. 그의 죽으심의 귀한 열매들(9-11)


[1] 칭의와 화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맺어진 열매이다. 우리가 그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9).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10). 즉 죄게 용서되고 적대감은 사라지며 불법은 끝이 났고 대신에 영원한 의가 들어왔다. 우리는 믿는 즉시로 칭의와 화목 상태에 실제로 들어간다.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9:22). 모든 화목 제물에 있어서 피뿌림은 불가결한 요소였다.


[2]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이 발생한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수로 있었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셨다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와 화목되었을 때는 더욱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원수인 우리를 친구로 삼으실 정도로 큰 일을 행하신 분께서, 우리가 친구 되었을 때 우리를 친구처럼 대하시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정도의 작은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는 몇번이고 더욱이라는 말과 함께 그 사실을 얘기한다. 우리가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지옥의 불이 곧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화목되었고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의 살으심은 육체로 계셨을 때의 생명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생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낮아지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 되고 높아지신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다. 죽어가는 예수께서 죄를 보상하시고 적대감을 없애는 일에 기초를 놓으셨으나 그 일을 완성하신 분은 살아 계신 예수이시다. 죽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유산을 남기신 유언자이셨으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그 유산을 나눠주시는 실행자이시다.


[3] 이 모든 것은 더욱 귀한 특혜로서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11).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전혀 두려움이 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즐거움'이시다. "우리는 화목되었고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뿐 아니라' 그 안에는 아직도 끊임없이 흐르는 은총의 시내가 더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항구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모든 돛을 다 달고서 의기양양하게 질주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위로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속죄의 공로로 이루어진다(이것은 바울이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주장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속죄함을 받는다는 것은  (1) 그 속죄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의 방법으로 그리고 복음의 조건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2) 그 속죄를 통하여 위로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우리는 참된 속죄를 받았으므로 그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3.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12-21)


이 대비는 우리의 타락과 회복사이의 대응점을 보여 준다.

[1]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는 일반적인 진리가 바울의 강론의 기초로 깔려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나님은 아담을 그의 모든 후손을 대신하는 자로 그리고 그들 공동의 시초로 대하셨고 아담은 그런 자로서 행동하였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모든 자들의 머리로서 행동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고 그들을 대신하여 살아나시며 그들을 대신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시는 등의 행동을 한 그리스도를 그들의 시조로 대하셨다.


[2] 대비의 상세한 설명.

1)아담이 어떻게 죄와 죽음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하였는가?(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왔나니. 우리는 죄와 죽음이 범람하며 불의와 재난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고 있다. 그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고 그는 곧 첫 사람이었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그로 말미암아 ''가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선하다고 선언하셨을 때( 1:31) 세상에 죄라고는 전혀 없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그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가되었고 또 일반적인 본성이 되어버린 타락도 함께 전가되었다. 그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한 그릇 안에서처럼 아담 안에 전 인류의 본성이 저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하자 그 본성이 죄에 물들고 부패하여졌다. 이리하여 그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둘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왔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이다. 죄가 들어오자 당연히 그와 더불어 죽음도 들어왔다. 셋째, 전염병이 마을을 온통 휩쓸며 통과하듯이 '사망이' 이르러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그래서 아무도 사망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보편적인 운명으로서 결코 예외가 없다.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14). 아무도 죽음의 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망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이다(고전 15:26). 사도는 죄가 모세의 율법과 함께 시작되지 않고 율법이 있기 전에도 줄곧 세상에 있었음을 가르친다. 죄는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 가인의 살인, 옛 세상의 패역함, 소돔의 사악함 등이 이 사실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실로부터 율법이 있기 전에도 어떤 법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원죄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이 결핍된 것이요 실제적인 죄란 그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어떤 법 아래 있었다. 그 사실에 대한 사도의 증거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하였다'는 것이다(14). 이 말은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고 그것은 곧 원죄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사망이 실제적인 어떤 죄도 짓지 아니한 자들 곧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왕노릇을 하였기 때문이다.


2)이 사실에 대응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참된 모든 신자들에게 의와 생명을 전달하시는가? 사도는 여기서 유사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사랑의 전달이 아담으로 인한 죄책과 진노의 전달을 '능가한다' 는 사실도 보여준다.

유사점(18,19): 첫째, 하나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았다. 아담의 죄는 불순종이었다. 그는 금지되었던 행동을 함으로써 죄를 범했다. 그런데 이 죄는 다른 죄들에게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그가 행한 일은 악한 것이 되었다. 죄의 악성과 독은 매우 강하고 잘 퍼진다. 그렇지 않으면 아담의 죄책이 그렇게까지 멀리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죄가 그렇게 심한 해악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담의 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란 곧 모든 후손을 가리킨다. 죄인 된 것(19). 이 말은 사법적인 행위에 의해 우리를 그런 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모든 자들이 정죄함을 받았다. 인류의 모든 종족이 한 가정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 같은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둘째, 첫째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의와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고 그래서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여기서 먼저 그리스도의 의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어떻게 그 의가 주어졌는가? 그의 순종하심에 의해서 주어졌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은 우리를 파멸시켰고 둘째 아담의 순종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종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를 위한 한 의를 성취하셨다. 다음으로는 그 의의 열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값없는 선물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은 일반적 구원 곧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구원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생명수를 마실 수 있다. 이 값 없는 선물이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18).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칭의뿐만 아니라 생명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선물이다.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 마치 특허증을 받은 것처럼 의롭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혜와 사랑은 아담이 가져온 죄책과 진노를 능가한다는 점(15-17): 바울이 이 사실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크게 돋보이게 하고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첫째, 만일 죄책과 진노가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있다면 은혜와 사랑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욱 하나님은 은혜와 그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넘쳤으리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다른 어떤 속성보다도 그의 영광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싫어하시고 자비를 보이시기를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둘째, 만일 우리를 정죄하는 한 사람의 죄 속에 그만큼의 힘과 효력이 있다면 우리를 의롭다 하고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 안에는 더욱더 큰 힘과 세력이 있을 것이다. 아담이 뿌리는 독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리는 해독만큼 강할 수 없다 해독제가 더욱 강하다. 셋째, 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단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한 죄책뿐이다. '한 사람을 인하여' 즉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다(16,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17) 받는다. 은혜와 의의 시내는 죄책의 시내보다 더 넓고 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범죄를 용서하신다. 넷째,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왕노릇'할 특권을 받는다(17).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잃은 것보다 더 크고 많은 특권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고 그 안에 놓여졌다. 치료 연고가 상처보다 더 넓게 발라지며 치료가 상처보다 더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4. 율법이 하는 일(20-21)

율법이 하는 일은 죄 자체를 더욱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가지고 있는 많은 죄악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경이 얼룩진 점들을 보여주지만 점 자체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과 같다. 방에 좀더 밝은 빛을 비추면 전부터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을 뿐인 먼지와 오물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즉 율법의 공포는 복음의 위로를 더욱 더 달콤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적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복자의 영광은 더욱더 위대해진다. 사도는 이 은혜의 풍성함을 21절에서 설명한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그것은 잔인한 유혈 통치였다. 그러나 은혜도 또한 왕노릇하여 생명 곧 영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통해서' 즉 그리스도의 능력과 효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6


.칭의의 열매로서의 성화 6:1-23


사도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1)라는 말로써 주제가 다른 본 강론을 앞의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용서하시는 가운데서 더욱더 크게 드러날 것이니 우리가 용기를 내어 죄를 지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사도는 그러한 생각을 해선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조금이라도 은근히 죄를 장려하는 견해들은 철저히 혐오를 받고 물리쳐야 한다. 사도는 본 장에서 매우 절실하게 성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본장은 두 가지 즉 성화에 대한 권고와 그 권고를 뒷받침하는 논증으로 나눌 수 있다.


1. 성화의 특성(1-19)

성화에는 죽음의 소생의 두 가지 특성 즉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사는 면이 있다.


[1] 성화는 죽음 곧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1) 죄에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아무도 죄 없이 살수는 없을지라도 죄 가운데서 살지 않을 수는 있다.  (2) 죄의 몸이 멸하여(6). 죄의 몸이란 우리 속에 들어있는 부패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도끼로 찍어내야 하는 뿌리이다. 우리는 죄의 행위들을 그만 두어야 할뿐만 아니라 악한 습관과 성향을 약화시키고 없애야 한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7).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의 몸이다. 그러니 이것을 부셔버리라. 그러면 그 명예가 깨어지고 말 것이다.  (3)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11). 압제자의 죽음이 해방을 의미하는 것처럼 압제받는 자의 죽음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즉 더 이상 죄의 뜻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는 살았을 때의 친구들과 헤어지기 마련이다. 죽음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성화는 그와 같은 변화를 심령에 일으키며 죄와의 모든 왕래를 단절시킨다.  (4) 그러므로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 비록 죄가 법의 방치자처럼 잔존할 수 있을지라도 왕처럼 군림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죄가 법이 되도록 하여 우리가 그것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때때로 죄에 기습을 당하고 압도될지라도 결코 죄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몸의 사욕을. 많은 죄가 육신을 만족시키는데서 생긴다. '너희 죽을 몸' 이라는 말속에는 한 가지 뜻이 담겨 있다. 곧 우리의 몸을 죽게 만든 것이 바로 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와 같은 원수에게 복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5)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려서는 안 된다(13). 몸의 지체는 타락한 본성에 의해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오용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기 마련이다. 죄란 마치 밀어닥치는 파도와 같아. 그러므로 거기에 휩쓸리기 전에 먼저 피해야 한다. 혹시 몸의 지체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 거기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곧 성화의 한 면이다.


[2] 소생이란 즉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4). 생활의 새로움이란 마음의 새로움을 전제로 한다. 샘을 깨끗하게 하지 않고서는 시내물을 맑게 할 도리가 없다. 새 법칙을 따라 행하라. 방향을 새로 잡으라. 걸어 갈 새로운 길을, 쫓아 갈 새로운 지도자를 함께 갈 새로운 벗을 택하라. 그것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다(11).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를 존중하며 그를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애정과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다"(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생활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하여 살며 그의 말씀과 뜻을 우리의 법칙으로 삼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생명이시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길이란 없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다. 주 예수의 중재에 의하지 않고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영혼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는'것이다(13). 성화의 생명과 본질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데 있다. 즉 그 본질은 자신을 주께 드리는 데(고후 8:5)있다. "그에게 너의 재산이 아니라 네 자신을 드려라. 참으로 너의 전체를 드려라. 그에게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를 좇으라. 언제든지 그를 섬길 준비를 하고 있으라. 도장의 어떠한 자국이든지 받아들이는 밀랍(wax)처럼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갖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죽은 시체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조롱하는 행위이다. "너희 자신을 살아서 무슨 일인가에 유익한 자로 즉 '산 제물'( 12:1)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은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몸의 지체는 죄를 섬기는 데서 물러난 지금 게으르게 누워 있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히 사용되어야 한다. 몸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영혼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19).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는 지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명령과 지도 아래 복종시키라는 말씀이다." '의에게거룩함에'라는 말은 기초가 잡히고 성장하며 전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죄악적인 행동이 죄악적인 습관을 굳히고 본성으로 하여금 더욱더 죄를 짓기 쉽게 만드는 것처럼 모든 은혜로운 행동은 은혜로운 습관을 굳힌다. 한 가지 의무의 이행은 또 다른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 일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많이 얻게 된다.


2. 성화의 필요성(1-23)

우리의 마음속에는 날 때부터 거룩함에 대한 반감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거룩함에 복종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1] 세례는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를 그 속에 담고 있다. 다음의 추론을 살펴보자.

1)일반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2). 세례는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끊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죄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 안에서 행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이미 죽었던 데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났기'(7)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풀려 나온 노예상태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하겠는가?

2)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3) 것이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세례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 고백에 부응하지 않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잘 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접붙여진 줄기가 접붙은 나무와 연합하여 어린 가지의 모양과 그 나무의 성질을 이어 받듯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다(5).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포도원에 심겨졌다. 우리는 우리가 그를 본받아 간다는 것을 성화를 통하여 증거해 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선조는 여러 가지 내용들 중에서 특히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상 세례란 이상의 각각의 경우에서 그리스도와의 성례전적인 연합을 말한다. 첫째,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란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철저하게 죽는 죽음이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죄의 죽음도 그와 같다. 그것은 저주받은 죽음이었다. 죄는 파괴만을 일삼는 악인처럼 비참하게 죽는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8). 그리스도는 죽음에 복종하셨다. 그가 죽으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의미하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죽되 그리스도께서 죄와 함께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함께 죽은 것이다. 셋째, 우리가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완전하다. 우리는 신앙을 고백함으로 죄와의 모든 거래와 교제에서 끊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죄와 죄인들로부터 구별되어야한다. 우리는 주의 것이므로 죄에서 끊어졌다는 보증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더욱 거룩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시기 위해 장사된 것처럼 우리도 믿음과 사랑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세례 안에서 장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하고(5). 그와 함께 사는(8) 이 모본을 따르게 된다. 회심은 죄의 죽음으로부터 의의 생명에로 살아나는 첫 번째 부활이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야 한다. 첫째, 그는 다시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나셨다(9). 이제 다시는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할 수 없다. 그는 실제로 죽으셨으나 살아나셨고 그렇게 영원히 사신다. 그와 같이 우리도 죄의 무덤에서 살아나 다시는 그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하여(10). 하늘의 삶을 살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니'( 17:11).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하여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새 생명(4)으로서, 우리가 이전에 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다른 법칙을 따라사는 삶이다. 하나님께 헌신한 삶이 곧 새 생명이다. 전에는 자기가 가장 중요한 최고의 목적이었으나 이제는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신 것이다.


[2] 사도는 새 언약의 귀중한 약속에 대해 언급한다(14). 죄가 우리에게 너무 힘든 상대이므로 우리가 죄를 이길 수는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는 "너희는 지금 쉽게 다룰 수 있고 복종시킬 수 있는 적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적은 이미 싸움에 실패하고 좌절당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죄가 산자의 마음속에서 버둥거리며 그에게 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를 괴롭힐 수가 있다. 그러나 그를 주관하지는 못한다. '이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즉 죽음과 죄의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 주인과 새 법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짚은 주지 않으면서 벽돌을 요구하는 행위언약 아래 있지 않고 우리의 진심을 복음의 완전으로서 받아주며 이 언약이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약속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은혜언약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은혜언약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 손에 맡겨두지 아니하고,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책임지시며 친히 그 죄를 저주하고 파괴하신 중보자의 손에 맡겨 둔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의 자발적인 마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여지를 남겨두며 회개를 근거로 하여 용서를 약속하는 은혜아래 있다. 그런 우리가 그처럼 풍성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스리고 죄를 지으며 그러한 사랑을 악용할 수 있겠는가? 사도는 그 같은 생각에 얼마나 경악을 금치 못하는가를 보라(15).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3] 이것은 우리에게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간에 우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증거가 될 것이다(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종으로 있든지 아니면 죄의 종으로 있다. 우리는 이 주인들 중에 누구에게 우리의 순종을 바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 곧 우리가 필연적으로 죽음이 따르는 가문에 속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복종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4] 사도는 사람들의 이전 죄악상에 대해 언급한다(17-21).

1)그의 이전의 상태와 행했던 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 스스로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기 위하여 그들이 죄의 종으로 있었던 때를 기억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봉사하기를 그만 두었으며, 일단 진정으로 그 일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들 중 아무도 다시는 옛날 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죄를 섬기는 일이 큰 수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 그랬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즉 우리가 그것을 과거의 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19). 몸이 끊임없이 힘들게 죄를 짓는 일에 사용된다는 것이야말로 죄에 빠진 상태의 비참함이다. 너희가드려. 죄인들은 자발적으로 죄를 섬긴다. 만일 그들이 죄를 섬기는 일에 자신들 드리지 않았다면 마귀가 억지로 그들을 그 일에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행위로서의 불법에서 삯으로서의 불법에 이른다는 말이다. 악을 행하고서 그 몇 배의 재앙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지고 더욱더 강팍해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사람의 예대로 말하고 있다. 너희가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 이것은 조금이라도 누구에게서 받은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취한 자유로서 곧 방종이다. 그러나 의로부터의 자유란 실상은 최악의 노예상태이다.


2)어떻게 복스러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변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너희가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7). 이것은 우리의 회심 즉 복음에 대한 우리의 복종과 순응을 묘사하는 말씀이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교훈의 본'이란 곧 은혜의 법칙을 말한다. 복음은 도장이고 은혜는 그 도장의 날인이다. 둘째, 그 법칙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이란 복종하되 마음으로 복종해야 할 교훈이다. 다시 말해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능력으로 즉 우리를 지배하는 부분인 마음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복종한다는 것은 밀랍이 주조를 안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밀랍이 도장에 찍혀져 그 새겨진 모양을 따라 그대로 들어내는 것과 같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즉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22). 회심은 첫째, 죄를 섬기는 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거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과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3)그들이 이제는 그들의 이전 행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과거에 죄를 섬긴 일이 무익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를 그들 자신에게 물어본다(21). 너희가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는 대체 너희가 그 일로 무엇이라도 얻은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장차 겪게 될 엄청난 손실 외에도 현재 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는 것 또한 언급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21). 사실 열매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음으로 그는 그들이 그 일이 부당한 것을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를 그들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는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부끄러움은 죄와 함께 세상에 들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죄로부터 생겨난다. 조만간에 틀림없이 부끄러워할 일을 누가 굳이 하려고 하겠는가?


[5] 사도는 모든 일의 결국을 말한다. 그는 우리를 죄로부터 거룩함에 이르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죄의 결국은 사망이다(21).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비록 그 길이 즐겁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고통스럽게 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23). 삯이 종에게 당연한 것처럼 죽음은 죄인에게 마땅한 것이다. 죄의 종으로서 죄의 일을 하는 자들은 누구나 그와 같은 삯을 받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 열매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라면 그 결국은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이는 참으로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길이 힘들지라도 그것은 마침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23). 천국이 곧 생명이다. 그것은 어떠한 병도 따르지 않고 어떤 죽음도 그 생명을 종식시키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죽음은 죄의 삯이나 생명은 선물이다. 죄인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자기의 죄과 때문이지만 성도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자기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이를지라도 우리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선물을 마련해 놓으시고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그것을 얻기까지 우리를 보존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7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7:1-6


죄를 반대하고 거룩함에 이르도록 우리를 설득하는 논증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 6:14)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논증이 여기서는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6)는 말로 더욱도 강조된다. 이 사실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 율법은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 둘째,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일으키는 율법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 사도는 특별히 이 사실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5)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율법은 치료를 위한 아무런 은혜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을 위협함으로써 더욱더 부패를 불러 일으켜 놓았을 뿐이다. 율법은 타락으로 인해 불구가 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명령할 뿐 우리의 불구를 고치거나 도울 수 있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율법이 명령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힘과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회개를 근거로 하는 용서를 약속하는 은혜 아래 있다. 사도는 앞에서 새 주인을 섬기는 비유를 가지고서 설명한 율법 아래의 상태와 복음 아래의 상태의 차이점을 여기서는 새 남편에게 결혼하는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1.우리의 첫 번째 결혼은 율법과의 결혼(1-5)

결혼법은 어느 쪽이든지 간데 둘 중의 어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만 유효하고 그 이상은 유효하지 않다. 그는 이 사실을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1).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수가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율법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데 특별히 결혼법이 그렇다. 율법의 의무나 율법의 정죄가 죽음 후에까지 계속 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죽음의 율법의 끝이다. 아무리 가혹한 율법이라도 몸은 죽일수 있을지언정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결혼법도 그와 같다(2). 여자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어 있어서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다. 만일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그녀는 음부가 될 것이다(3). 이같이 우리도 처음에는 율법과 결혼하였다(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즉 우리는 죄의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고 있었고 율법은 한낮 불완전한 둑에 지나지 않아 그 물살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물만 더 높이 불어나게 만들었다. 우리의 욕망이 죄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였다. 우리는 아내가 결혼법 아래 매여 있는 것처럼 죄와 죽음의 법 아래 매여있었다. 이 결혼의 산물은 죽음에 이르는 열매였다. 율법에 의해서 잉태된 정욕은 죄를 낳고 죄는 장성하여 사망을 낳았다( 1:15). 죽음은 죄와 율법의 결혼으로부터 태어나는 자손이다. 죽음은 우리 지체 가운데 역사하는 죄의 정욕 때문에 생겨난다.


2. 우리의 두 번째 결혼은 그리스도와의 결혼(3-6)

[1] 우리는 죽음에 의해서 하나의 계약인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서 자유케 된다(3). 너희도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 바울은 "율법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너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한다(6). 이렇게 하여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마치 남편이 사라진 것처럼 없어졌다. 그때 그는, 그것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율법이었다는 사실에 한해서 그 율법이 죽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율법이 죽었다. 즉 그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4) 즉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당하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의 연합에 의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죽은 종이 주인의 명예와 상관이 없듯이 율법과 상관이 없다.


[2]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였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를 의지하는 생활과 그에 대한 의무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일치하는 것처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일치한다. 우리는 부활하여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결혼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결혼하였다(4). 이 결혼의 한 가지 목적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한 중대한 목적은 사랑과 은혜와 선한 모든 행실 가운데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죄와의 결혼 생활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두 번째로 갖는 그리스도와의 결혼 생활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한다. 선한 행실은 새로운 성품의 산물이다. 우리가 어떤 신앙 고백과 주장을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 일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서 행해졌다는 이 사실이 신자의 선한 행실과 위선자와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의 선한 행실을 구별짓는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의문은 묵은 것으로 아니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결혼하였다(6). 이전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여전히 누군가를 섬겨야 하지만 죄를 섬기는 일이 몹시 고된 것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섬김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행하는 섬김이다. 먼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발생한 우리 영혼의 혁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의문은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즉 우리는 단순한 외적 봉사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의문은 속박과 두려움을 가지고 죽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위하여( 1:74,75) 그 멍에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휘장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더 이상 뜰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 율법의 탁월함과 유용성 7:7-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7). 바울은 앞부분에서 죄의 지배에 대하여 말하면서 율법의 작용을 아주 여러 번 언급하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것이 율법에 대한 비난으로 오해를 살만한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안내자로서의 율법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


1. 율법 자체의 탁월성(12-14)

바울은 결코 율법을 비난하지 않는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12). 법은 입법자와 같은 성격을 띤다. 위대한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시므로 그의 율법도 또한 틀림없이 그러하다. 주의 길은 바르고 율법의 목적은 선하다. 율법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졌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참된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율법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사실에 대한 동의가 따른다. 율법은 그 효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치는 범위에 있어서도 신령하다(14). 율법은 우리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율법은 영적인 것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다. 영혼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은 반드시 그 영혼에 주어진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법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다른 모든 법보다 뛰어나다. 하나님의 법은 마음속에 품은 죄악을 주목한다. 우리가신령한 줄 알거니와. 참된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법의 영성을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


2.사도가 율법에 의해서 얻은 큰 유익(7-9)

(1)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7). 곧은 것이 굽은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율법에 비교하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회개에 반드시 필요한 죄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란 없다. 특별히 사도는 율법에 의해 탐심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탐심이라는 말로써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나타낸다. 그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율법은 이 명령을 영적인 의미로 말하였다. 바울은 이 사실 때문에 탐심이 죄로되 아주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전부터 아주 민감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령께서 율법을 가지고서 탐심을 그에게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결코 내주하는 죄에 대하여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였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으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최초의 타락에 관해서 가장 무지하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이와 같이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드러난다.(13). 즉 죄가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심히 죄되게 된다. 즉 죄가 죄로 보이는 것이다.  (2) 율법은 겸손하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9). 내가 살았더니. 그는 자신이 매우 선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상태가 선하다고 확신하였다. 그가 전에, 즉 과거에 바리새인으로 있었던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가 전에는 율법의 글자를 가졌으나 그것의 영적 의미는 알지 못하였다. 알맹이는 가지지 못한 채 껍질만 가졌던 것이다. 그가 율법을 손과 머리에 가지고 있었으나 마음에는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방 안의 먼지가 햇빛이 비치자 드러나듯이 죄가 살아났다. 바울은 그때 이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죄 속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죄를 보되 그 결과와 함께 보았다. 즉 바로 그 뒤를 따르는 죽음과 함께 죄를 보았고, 죄와 그에 따르는 저주를 보았다. "성령께서는 계명을 가지고서 내가 죄 가운데 빠져 있고 죄로 인해 죽음의 상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내게 깨우쳐 주셨다." 율법은 이와 같이 탁월한 용도를 지니고 있다. 율법은 등불이요 빛이다. 율법은 눈을 열며 주의 길을 예비한다.


3. 사람의 타락한 본성이 율법을 악하게 사용함(8-14)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8).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음속에 각양 탐심을 가지고 있었다. 각양 탐심을 일으킨 주범은 죄, 곧 내주하는 죄였다. 죄가 계명을 구실로 탐심을 일으킬 기회를 만들었다. 율법의 억제가 없었다면 타락한 본성이 그렇게 심하게 부풀어오르거나 날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은 이래로 우리 모든 사람은 금지된 길을 가기를 좋아해 왔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마치 한겨울의 뱀처럼 죽은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광선이 그 뱀을 자극시키고 살린다. 죄가나를 속이고(11). 죄는 죄인에게 치명적인 속임수를 쓴다.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즉 죄가 그를 속이고 죽인 것이다. 죄가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다(13). 타락하고 사악한 본성만큼 효과적으로 계명을 곡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10).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는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된다. 꽃밭을 더욱 향기롭게 만드는 태양이 오물더미에 대해서는 더욱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해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 율법의 명령하는 권위에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 은혜와 타락 사이의 갈등 7:14-25


여기에서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은혜와 타락 사이의 갈등이 묘사된다. 이 갈등은 다음 두 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첫째는 바울이 말하는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직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자각한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투쟁에 적용될 수 있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 거듭나고 성화되었지만 아직 불완전한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투쟁에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사도가 이 두 입장 중 어느 쪽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1] 먼저 이 갈등을, 자각은 했지만 아직 죄의 상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행치 못하며 계속해서 노예처럼 정욕의 지배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느낀 것으로 생각해 보자. 사도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고 말하였는데( 6:14), 그 증거로서 그는 여기서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고 법 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죄를 밝히 드러내고 깨닫게 할 수는 있으나 죄를 정복하거나 억제할 수는 없다. 율법은 더러움을 드러내 보이지만 그것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율법은 사람을 몹시 괴롭고 지치게 만들며( 11:28), 자기의 죄짐을 지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 짐을 벗어버리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이러한 도움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24)고 외치게 만들면서도 여전히 그를 그렇게 속박된 채로 내버려둔다. 그런데 사실 율법에 의해 여기에까지 이른 영혼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얻게 되는 자유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순조로운 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눈을 뜬 채로 지옥에 갈 수도 있고 마귀를 섬기면서도 자책하는 양심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사람은 율법이 선하다고 시인할 수 있으며 자기 속에 죄를 반대하고 거룩함을 편들어 증거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죄의 지배적인 애착에 압도되고 만다. 그 때문에 술주정뱅이들과 부정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그만두고 싶은 희미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이 견해를 이해하고 옹호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만일 사도가 이러한 견해를 의도했다면 왜 그가 모든 일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말해야 하며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재 시제로 써야 하는지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2] 이 갈등은 오히려 성화 된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와 타락의 계속적인 투쟁으로 보는 것이 낳을 것이다. 은혜의 원칙이 살아 있는 곳에도 내주하는 타락의 잔재가 있다는 것은 의논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요일 1:8,10). 참된 은혜는 이러한 죄와 타락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7).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성화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성화의 특성을 보다 자세하게 진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것이 우리의 죄과로 돌려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은혜를 통하여 마침내 승리가 확실해진다.


1)그는 내주하는 타락의 잔재를 한탄한다. 율법은 거듭난 사람이라도 의롭게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율법의 책임이 아니라 율법을 이행할 수 없는 타락한 우리 본성의 결점 때문이다. 그가 한탄하는 내용을 하나 하나 살펴보자.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14). 영적 생명이 있는 곳에도 육신적인 애착의 잔재가 있다. 이점까지는 사람이 죄 아래 팔릴 수 있다.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 19,21절의 말씀도 이와 똑같은 의미이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그는 완전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이미 도달하지도 않았고 완전해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3:12).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려고 했지만 그의 타락한 본성이 그를 다른 길로 끌고 간 것이다. 그것은 똑바로 던져졌지만 옆으로 빗나가게 만드는, 한쪽으로 불거져 나온 공의 혹과 같은 것이었다.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18). 사람이 바위 위에서 좋은 곡식이 자라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선도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본성이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처럼(요일 3:9) 육신 곧 옛 본성은 선한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기기 때문이다(25).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오는 것을 보는 도다(23).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보좌를 세워 두셨기 때문에 죄의 도구 노릇을 한 것은 단지 그의 육신의 지체뿐이었다. 아니면 그 지체란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좀더 정교한 정욕들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타락한 본성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마음의 법 곧 새로운 본성을 대적하여 싸우는 타락한 성향과 기질은 최악의 포로상태와 노역만큼이나 영혼에게 무거운 짐이며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한 다른 법이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25절의 말씀도 같은 의미이다.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즉 거듭나지 않은 부분은 계속해서 죄를 향하여 활동한다는 말이다.우리는 24절에서 그의 전체적인 한탄을 대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그가 한탄하고 있는 것은 사망의 몸으로, 이것은 죽어가고 있는 썩을 몸인 육신의 몸을 가리키거나 죄의 몸 곧 죽음으로 향하는 타락한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바울이 죽은 몸을 달고 다니는 것처럼 그에게 귀찮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만일 내가 바울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도록 요청을 받았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 그대는 복 있는 자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평가해 볼 때 타락한 본성 때문에 곤고한 사람이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타락한 본성에 넌더리가 난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내주 하는 죄의 잔재들은 은혜로운 영혼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짐이다.


2)그는 세 가지 사실로써 자신을 위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이 그의 속에 유력하고 지배적인 선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증거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이 선한 원칙의 규범은 하나님의 법이었다. 그는 여기서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법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 이 말에는 판단에 의한 시인이 들어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율법의 엄격함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율법의 선함에 대한 시인도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율법이 마음에 기록되었다는 표시이다. 성화된 판단은 율법의 공정성뿐만 아니라 탁월성도 인정한다. 둘째,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2). 그는 말씀의 약속뿐만 아니라 말씀의 교훈과 금령도 즐거워하였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마음과 생활이 하나님의 법과 뜻에 완전하게 일치할 때만큼 그들이 즐거워하는 때란 없다. 내 속 사람으로는(22). 이 말은 우선 지성 혹은 이성적인 기능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혼이 곧 속 사람이다. 그것은 은혜로운 기쁨이 좌정하는 곳이며 그러므로 거짓이 없고 진지하면서도 은밀한 곳이다. 다음으로 이 말은 새로운 본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새 사람이 '속 사람'( 3:16)이라고도 불렸다. 셋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섬기노라(25). 하나님의 법을 시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그 법을 섬겨야 한다. 바울의 마음의 상태가 이와 같았고, 거듭나고 성화된 모든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다.


잘못은 그가 진심으로 슬퍼하여 대적하여 싸운 그의 본성의 타락에 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그는 이 사실을 두 번 언급하는데(17,20). 그것은 죄책에 대한 핑계로서가 아니라 그가 실망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자원하는 심령을 받아들이며 육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용서를 마련해 놓은 은혜 언약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증거의 구실로서 언급한 말씀이다. 그는 여기서 죄의 법에 대해서는 이의를 표명한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일이 행해진 것은 내 마음과는 반대되는 처사이다."


그가 받을 수 있는 큰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는 한참 한탄을 하는 중에 갑자기 찬양을 드리기 시작한다. 찬양은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는 특별한 치료제이다. 가난하고 실의에 찬 많은 영혼들이 이 사실을 발견하였다. 도움을 받을 길이 없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한다.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이 충분한 친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없었더라면 우리 속에 거하는 이 죄악이 틀림없이 우리를 파멸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기약대로 우리를 위해 구원을 확보해 두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러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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