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세움을
받음 1:1-7
1. 편지를 쓰는 사람(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이것은 그의 명예로운 칭호로서, 그는 종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는 그를 사도로 세우기 위해 찾으셨다(행 9:15).바울은 여기서 그의 권위를 이 부르심에 두고 있다.그는 보내심을 받지 않은 채 달리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그렇게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임을 인정하였지만(고전 15:9) 마치 그것이 제 본명인 것처럼부름 받은 사도로 불려지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바리세인이란 말은 분리라는 뜻에 그 이름의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의 연구를 위하여 자신들을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전에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이제 그는 그의 연구를 바꾸었다.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태로부터'택정함을 입은(갈 1:15) 복음의 바리새인이었다.그는 하나님의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다.
2. 하나님의 복음을 언급함(2-6)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을 찬미하기 위하여 잠시 동안 본래의 주제를 벗어난다.
[1] 복음의 역사성: 복음은 구약의 예언과 약속 속에서 계속 있어왔다.
[2] 복음의 주제: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3,4절).
선지자와 사도들 모두가 그를 증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같이 그의 이름과 호칭들을 잔뜩 나열한다. 그는 사랑과 존경을 조금이라도 표현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지 못한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이 두 가지 본성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1) 그리스도의 인성: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3절, 한글 개역 성경에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난외주를 참조하라-역주). 즉 다윗의 가문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눅1:27)
2)그리스도의 신성: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4절). 육신으로는 즉 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성결의 영으로는 즉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보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인격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복음 교리의 요약을 대하게 된다.
[3] 복음의 결실(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맡아.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은혜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한 어떤 봉사나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큰 은혜로 여겨야 한다. 이 사도의 직분은 '믿어 순종케'하기 위하여, 즉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바울의 사도직은 '모든 이방인 중에서' 이러한 순종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그것은 믿어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관념적인 지식에 있지 않으며, 고집스러운 논쟁들 속에는 더욱 있지 않고 다만 순종에 있을 뿐이다.
믿음의 행위는 계시하는 하나님께 대한 의지의 순종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 정신을 순종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멍에를 메셨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6절).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너희 로마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가난하고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이방 민족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너희가 모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별로 차별하심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누구나 믿음으로 순종하게 되어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게 된다.
3. 편지를 받는 사람들(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종이거나 자유자거나, 학식이 있거나 무식하거나 간에 로마에 살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데 모인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특전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일반적인 사랑을 베푸시지만 진실한 신자들에게는 특별한 사랑을 베푸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거룩해져야 한다. 성도들, 오직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특별하고 고유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을 받는다. 부름을 받은 성도란 곧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말한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가 참된 성도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가 아니라면, 마지막 날에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4. 사도의 축복(7)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에는 좋은 소원을 비는 애정뿐만 아니라 복을 빌 수 있는 권위도 담겨 있다. 여기서 빌어지는 은총은 '은혜와 평강'이다.
구약 시대의 인사말은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 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은혜'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 앞에 온다. 복음의 모든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라는 이 단어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와 같은 은총들의 근원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 모든 선한 것이 또한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즉 우리는 그의 충만한 공로로부터 평강을 얻고 또 그의 충만한 영으로부터 은혜를 받는다.
Ⅱ.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 1:8-15
1. 그들에 대한 바울의 감사(8)
첫째는…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으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임무와 행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도뿐만 아니라 찬송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우리는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후에 바울이 로마에 있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을 때 그는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용기를 얻었다(행 28:15). 여기서 그는 그의 관대한 사랑의 범위를 넓혀 그들'모두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너희 믿음이 전파됨이로다. 어디를 가든지 그는 로마 교인들이 크게 칭찬 받는 것을 들었다. 바울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대체적으로 듣고 있는 평판에 맞게 살도록 일깨워주기 위하여 그 사실을 언급한다. 신앙이 훌륭하다는 평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더 조심스럽게 그 신앙을 지키도록 애써야 한다. 온 세상에. 온 세상이란 곧 로마 전역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그의 선한 백성들이 행한 선한 일이 좋은 평판을 얻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인하여 유명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로마는 구릉위에 세워진 도시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목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가 좋은 나쁘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9 10)
비록 번성하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었을지라도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기도로써 형제들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친절 가운데 하나이며 또 때로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친절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모범으로부터 끊임없이 기도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는 것'은 기도로 사랑을 베푸는 행위이다. 바울은 기도 속에서 그들을 언급하였다. 때때로 기도 중에 하나님께 알려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애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특정한 교회나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열심히 기도해 주는 형제들에게서 가장 큰 위로를 얻기가 쉽다.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에게 엄숙히 호소한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의 은밀한 기도에 대한 증인이 되신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겉모양만 꾸미는 외식하는 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바울이 특별히 기도하는 바는 그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10절). 어떠하든지…구하노라. 여기서 사용된 '어떠하든지'라는 표현은 그가 그런 기회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럴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좋은 길 얻기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기회를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여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순조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편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3. 그들을 보고자 하는 바울의 간절한 열망과 그 이유들(11-15)
열매 없는 무익한 신자들이 신실한 목회자에게 슬픔을 주는 것처럼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준다. 그가 '여러 번 가고자' 하였으나 지금까지 막혔다(13절). 그 이유는 사람이 일을 계획할지라도 항상 그 일을 성취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먼저하지 않고(그랬다면 그는 벌써 로마에 갔을 것이다) 가장 필요한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그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1]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11절): 내가 너희에게…나눠주어. 그는 전하여 주기 위하여 받았다.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 말은 그들의 가지가 위로 잘 자란 것처럼 그들의 뿌리도 아래로 잘 뻗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들이라도 계속해서 더욱더 견고해져야 한다. 뿌리가 약하면 넘어지기 쉽다.
[2] 자신이 위로를 받기 위하여(12절): 그들이 은혜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기쁨을 얻은 것으로 보아 그가 그 소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경우 훨씬 더 큰 기쁨을 얻을 것이 틀림없다.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인하여.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신뢰하면 큰 위로가 된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은 목회자를 그리고 또한 목회자는 교인들을 신뢰할 때 그들은 서로 간에 큰 위로를 얻는다.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의 영적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 보는 것은 매우 새롭고도 유익한 일이다. 내가 열매를 맺게 함이로다(13절). 선을 많이 행하면 행할수록 그 보상도 더욱 더 많이 받을 것이다.
[3]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기 위하여(14절): 내가 빚진 자라. 그는 받은 것들로 인해서 빚진 자가 되었다. 큰 것들을 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는 받은 것들로 말미암아 빚진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 주님의 물건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맡은 임무가 그를 빚진 자로 만들었다. 바울은 자기의 달란트를 자기가 하는 일에 아주 잘 이용하고 또 수고로이 일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제까지 일해온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럴지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빚진 자로 말하고 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헬라인은 자기들만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 모두 빚진 자였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을 이들 모두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자기의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는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다(15절). 바울은 부름받기만 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로마에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원하노라. 이말은 마음의 철저한 준비를 나타낸다. 그는 부당이득을 얻기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일을 했다.
Ⅲ.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음 1:16-18
바울은 여기에서 이방 세계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면서 칭의에 관한 긴 강론을 시작한다. 그는 로마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6절). 복음에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부끄러워 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 특별히 그것이 나무에 달려 죽은 자의 복음이기 때문에 사실상 부끄러워 할 만하다. 그럴지라도 바울에 대해 복음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참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복음에 부끄럽지도 않은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겠다.
1. 복음의 명제(16,17)
[1] 복음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구원이 그 목적임을 보여 준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이 구원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능력이 없다면 복음은 죽은 글에 불과하다. 복음의 구원은 믿는 자들,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아무리 잘 조제된 약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복용되지 않는다면 환자를 낫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이 먼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였다(행 13:46). 이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똑같이 구세주께 환영을 받는다.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메시야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도 되신다.
[2] 복음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칭의를 그 방법으로 보여준다(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칭의의 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의로운 것을 나타낸다. '복음에는' 그와 같은 의가 '나타나' 있다.
1)이 같은 복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이다. 그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한 공로로부터 나오는 의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끊어버린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2)이 같은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우리로 의롭다함을 얻게 해 주는 믿음에서 우리로 살게 해 주는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게 하는 믿음에서 우리의 뿌리이신 그로부터 덕행을 끌어내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 두 믿음이 다음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란 말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란 말은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 믿음은 증가하고 계속되며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새로운 교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잘 알려진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영광의 삶을 살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2. 이 명제의 증거(18)
칭의는 반드시 믿음 아니면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행위로는 의로와 질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반드시 믿음으로 의로와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고약을 바르기 전에 상처를 살피는 노련한 의사처럼 먼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납득시키고 그 다음에 구원의 길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이렇게 함으로써 복음이 더욱더 환영받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진노가…나타나나니(18절). 인간 본성의 빛과 율법의 빛이 모두 죄로부터 죄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다. 그런데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의 곧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기쁜 일이다. 바울의 진술 내용을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보자.
[1] 인간의 죄성이 묘사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두 마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2] 이 죄성의 원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데 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구분을 그릇되게 받아 들였다. 사람들은 진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진리를 포로나 죄수처럼 묶어두었다. 불의하고 악한 마음은 유익이 되는 많은 진리를 가두고 묻어 버리는 지하감옥과 같다.
[3]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기록된 말씀 안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도 시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의 계시이다.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그 진노는 우리 사람들의 진노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진노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두려운 것이다.
Ⅳ.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심판 1:19-32
1.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방법들(19,20)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다(행 14:17).
[1]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19절). 다시 말해서 그들 속에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알만한 것'이라는 말은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감지될 수는 있으나 파악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무한한 존재를 알만한 것이 있다.
[2] 이러한 지식들의 출처.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개념들은 자연의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에 새겨두신 것이다.
[3] 이러한 지식들이 창조된 만물에 의해 확증되었다(20절).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1)그들은 무엇을 알았는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았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다. 그럴지라도 그것들은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행하시지만 그가 행하신 것은 밖으로 나타내며 그 속에서 그의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적어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불의로 막은 그 진리였다.
2)그들이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았는가? 그들은 그 진리를 '그 만드신 만물'에 의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제 일 원인이나 지적인 행위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제 일 원인이란 능력이 많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일수 없다. 작품을 보면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모든 부분이 연합하여 전체의 선과 아름다움을 이루는 모습은 가히 창조주와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둠 속에서 빛이 비쳤다. 그리고 그 빛은 '창세로부터' 비춰진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창조의 위대한 작품인 사람을 예로 든다. 그 진리를 알게 된 연대는 창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어 온 아주 오래된 선한 길이다. 진리는 오류가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2. 사람들의 심각한 우상숭배(21-25)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마저 그토록 쉽사리 우상숭배에 빠져든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자연적인 인식들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막는데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는 사실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감각의 수렁에 빠져든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그처럼 비참하다.
[1] 그들의 우상숭배의 내적 원인(21,22절).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떤 핑계를 댈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지식의 빛과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였다(21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오직 그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많은 신들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렇게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를 영적으로 예배한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형상으로 바꾸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그를 전혀 영화롭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지 못함이 우리가 그를 떠나는 죄의 주된 원인이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그들은 일반적인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나(19절) 그 진리를 개별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사려분별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내 허망하고 미련한 수많은 공상들에 빠졌다. 진리를 버리자 오류가 증가하였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마음이 어리석음과 실제적인 악함이 지적 기능과 능력을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22절). 어떤 신에 대한 개념을 조작함에 있어 가장 화려한 상상을 했던 사람들은 가장 심각하고 터무니없는 자만에 빠졌다. 이와 같이 세상이 자기 지혜에 빠져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지혜로 인한 자만이 많은 어리석음을 빚어내는 원인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만하는 유식한 아덴 사람들 가운데서 바울의 설교는 어디를 가나 매우 비웃음을 사고 조롱당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평범한 진리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이상의 것을 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아주 심각한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2] 그들의 우상숭배의 외적 행위들(23-25절).
1)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었다(23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가장 큰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행하는 가장 큰 치욕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상이 거짓 것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영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몸을 가지신 것처럼 믿기 때문이다.
2)피조물에게도 신적 경외를 행함.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그들은 피조물에게 경배를 드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창조주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최고의 신으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이 피조물을 경배하였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러나 그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였다는 이 사실이 그 죄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이것은 이방세계에서는 널리 행해지고 있는 악이었다. 최고의 신을 알고 인정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확신하는 지혜있는 이방인들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했다. 여기서(18절) 사도가 말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란 말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고 하겠다. 이방인들의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행한 치욕이라고 언급한 바울은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칭송하며 하나님께 경외에 찬 찬미를 드린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을 듣거나 볼 때 우리는 그를 높이고 영광스러우신 분으로 말해야 한다.
3.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4,26-32)
이것은 현세적인 심판이 아니라 그들을 아주 야만적이고 괴상한 정욕에 내버려두는 영적인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저희를…내어 버려두셨으니'라는 말이 여기서 세 번 거듭되고 있다(24,26,28절). 영적인 심판이야말로 모든 심판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의 한 방법으로 그들을 포기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의 것이므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거절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죄의 장본인은 아니시다. 왜냐하면 비록 이 내어버림으로 인해서 아주 심각한 악이 발생한다 해도 그 악의 책임은 죄인의 악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의사의 처방대로 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면 의사는 그 책임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환자에게서 발생되는 치명적인 증상은 의사의 탓으로 돌려져서는 안되고 질병 자체와 환자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상태로 내버려졌는가?
[1]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졌다(24,26,27절).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24절). 모든 잘못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만든 자들이 자신들을 치욕스럽게 하는 일에 내버려졌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노예상태에 빠질 수는 없다. 그들의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서 나오는 행위들은 비정상적인 정욕들이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은 물론 그들 가운데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마저도 그런 일들에 악명이 높았다. 아마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그들의 우상숭배를 통해 저질러진 혐오스러운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추악한 신들에게 드려지는 추악한 예배이다. 인간의 본성에 어떠한 악이 있는가를 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약한 본성을 억제하는 은혜를 얼마나 베푼지 생각해보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이런 악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단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어진 인간이 자신을 마귀보다 더 형편없이 낮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다'고 말한다.
[2] 상실한 마음으로 이 가증스러운 일들을 하도록 내버려졌다(28절).
1)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들의 맹목적인 지식은 그들의 완악한 의지와 감정에 의해 야기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 지식 안에 하나님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하게 되면 그들의 정욕이 방해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이교도들도 하나님을 알지만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2)하나님은 이와 같은 그들의 완강한 태도에 대한 보응으로, 그들을 여기서 '상실한 마음'이라고 불리는 아주 무서운 죄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셨다. 죄가 어디까지 발전되며 마침내 죄인을 어떤 구렁텅이에 빠뜨리는가를 보라! 이 상실한 마음이란 감각이 없고(엡 4:19) 무분별하며 마비된 양심을 말한다. 이와 같이 완악한 굳은 마음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엄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써 그들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하신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들이 짓는 합당치 못한 일들의 죄목들을 덧붙인다. 상실한 마음이 악을 좇을 때만큼 본성의 빛에 어긋나는 악은 없다. 그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여기에 언급된 죄들은 로마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던 죄들이다. 자그만치 스물 세 가지 종류의 죄와 죄인들이 여기에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29-31절). 그 당시야말로 로마가 개혁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였다.
먼저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거스리는 죄들이 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30절). 여기에서 마귀의 본성이 드러나며 죄가 죄로써 명백히 나타난다. 모든 죄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다. '교만한 자'와 '자랑하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야 할 면류관을 자기들의 머리에 쓴다.
다음으로는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계명들을 거스리는 죄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여기에는 불의에 대한 비난이 있는데, 이 죄과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모든 죄가 불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과 '무정한' 것은 다섯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불순종하는 자녀들은 당연히 무정한 부모들에 의해서 그리고 부정한 부모들은 불순종하는 자녀들에 의해서 형벌을 받는다. '악의'(악을 위하여 악을 행하는 마음),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무자비' 등은 여섯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이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 대한 미움 즉 마음의 살인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추악'(간음)은 일곱째 계명을, '불의, 탐욕'은 여덟째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사기, 수근수근하는 자, 비방하는 자, 배약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우매한 자'들은 아홉째 계명을 거스리는 자들로서, 그들은 악을 행하는데는 지혜로우나 선을 행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죄를 꾸미는 일에는 아주 영리하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는 우매하다(그것도 거의 백치에 가깝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부터 그 속에 이모든 죄들의 씨앗과 알을 품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사도는 그들의 죄가 더욱 악화된 상태를 언급한다(32절).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또한 형벌도 알았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알고도. 그들의 양심이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면서도 죄를 지을 때 그 죄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기들만 행할 뿐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 다른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순전히 죄 그 자체를 위하여 죄를 사랑하는 처사이다. 그것은 마귀의 왕국을 위하여 마귀와 동맹하는 짓이다. 다른 사람들의 죄를 옳다고 하고 그 죄에 협력할 때 우리의 죄는 더욱 무거워진다.
이제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함 2:1-16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세계의 상태에 대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악하게 묘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유대인들의 상태 역시 매우 암담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은 똑같은 공의의 조건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다루신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한다.
1. 유대인들의 판단하는 행위를 규탄함(1)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사도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말을 한다. 바울은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는 말로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비난을 그들에게 돌린다. 유대인들은 불쌍한 이방인들을 아주 형편없이 무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은 비록 우상숭배자들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악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핑계치 못하리라. 본성의 빛밖에 가지지 못한 이방인이 핑계할 수 없다면 율법의 빛을 가진 유대인들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2,3)
그는 여기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의로우신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2절). 즉 외모에 따라 되지 않고 행실에 따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범하고 있는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죄를 성토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매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그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마치 죄를 반대하는 설교가 그 죄책을 보상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가 보라.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이것을 피할줄로 생각하느냐. 그 문제는 아주 명백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죄인들의 양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호소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할 수 있느냐?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형식적인 겉치레에 속으시며 가장 의로우신 재판관이 그렇게 매수되겠느냐?"
3. 유대인들에 대한 바사의 비난(4,5)
[1]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곧 '그의 인자하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고 있다(4절). 우리가 빛에 대해서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그만큼 사랑에 대해서도 더욱 죄를 범하게 된다. 고의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선하심. 특히 사람의 악을 참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멸한 다음 더욱더 대담한 죄를 범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한다. 길이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방법이다. 그는 죄인들을 짐승처럼 몰지 않으시고 인도하시며 위로하신다. 사랑의 끈으로 이끄시는 것이 곧 그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 곧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베푸시는 그의 선하심을 생각한다면 우리모두는 틀림없이 회개하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다(5절). 이러한 진노를 일으키는 것은 '회개치 아니하는' 고집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회개치 아니하는 고집스러운 마음이라면 그 진로가 얼마나 절망적이겠는가! 하나님을 성나게 한다는 것이 진노를 쌓는 다는 말에는 많다는 의미가 있다. 영원히 써도 없어지지 않을 만큼 많이 쌓였는데도 죄인들은 여전히 거기에다 진노를 더 쌓고 있다. 쌓는다는 말에는 비밀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어떤 경우에는 은닉이란 뜻도 나타낸다. 언젠가는 이 비축물들이 터져 쏟아지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죄인들에게 길이 참으시는 날이지만 머지않아 진노의 날이 올 것이다. 그 진노의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성냄과 같이 흥분하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로운 심판 곧 죄를 벌하시는 그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지금은 종종 죄인들의 번영으로 인해 감추어지지만 머지 않아 그것이 온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4. 하나님의 판단의 의로움(6-11)
[1]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다(6절).
1)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이 사실이 여기서 두 번 언급되는데(7,10절). 이는 그가 기꺼이 자비를 베풀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은혜를 베푸시는 대상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다(7절).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상해 주실 자들은 첫째로 '의로운 목적에 굳게 선 자들이다. 실제적인 모든 신앙의 밑바닥에는 거룩한 대망이 깔려 있는데, 이 대망은 하늘처럼 높은 소망과 목표를 견지하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구하는 데는 손실이 따르며 또 그것을 구하려는 열망과 그 열망에 일치하는 노력과 추구가 수반되다. 둘째로 하나님은 의로운 목적에 굳게 서서 의로운 길을 고수하는 사람들 즉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은 반드시 선을 행한 사람이어야 한다(10절). 선을 알고 있고 선을 약속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벽이슬이나 아침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일시적인 기분이나 첫 걸음에 보상해 주지 않는다. 면류관을 얻게 하는 것은 바로 인내이다. 즉 참고 계속해서 행함이다. 이 인내는 선행의 오랜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일의 어려움도 참는 것이다. 선을 행하되 계속해서 행하려고 하는 자들은 상당히 인내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은혜의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천국이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며 여기서 말한 대로하자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다(10절). 흔히 이 지상의 헛된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들은 그것들을 얻되 '영광과 존귀'뿐 아니라 '평강'도 얻을 것이다.
2)화를 나타내심에 있어서(8,9절): 하나님의 화를 당할 대상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당을 짓는 자들이다. 고의적인 죄는 모두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다.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신앙의 진리는 알뿐만 아니라 지켜져야 한다. 진리에 불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불의를 좇는' 것이다. 진리의 종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곧 불의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화의 결과는 '노와 분'과 환난과 곤고이다. 이런 것들이 죄의 삯이다. 그리고 이것이 '영에게' 쏟아지는데, 그것은 영혼이 그 진노를 받을 그릇이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영혼이 이 진노를 받는다. 지옥은 노와 분이 결과로서 영원한 화란과 공고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다툼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황금홀에 절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그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다(11절).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실 때 그의 외적인 특권들을 고려하시지 않고 그의 진정한 상태와 성향을 보신다. 은총을 베풀거나 화를 내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큰 특권을 받은 '유대인'이 먼저(첫째)라면 다음(또한)은 그러한 특권은 받지 못했지만 자기의 악행에 대한 형벌을 결코 면제받지도 않고 자기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결코 잃지도 않을 이방인이다.
5. 하나님의 공의로움(12-16)
정도가 다른 세 빛이 사람들에게 비치었다.
[1] 본성의 빛: 이방인들에게는 이 빛이 있으며 그들은 이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즉 본성적인 양심 외에 달리 어떤 지침이 없는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들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율법을 어긴 죄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성의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본성의 빛이 이방인들에게는 기록된 율법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 없이 범죄'하였다고 모순처럼 들리는 말을 하였다(12절).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죄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들이 비록 기록된 율법은 갖지 못하였지만 그와 같은 것을 가졌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율법의 행위란 우리에게 해야 할 바를 가르치고 우리가 한 일을 판단하는 것이다.
1)그들에게는 본성의 빛에 의해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선과 악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였다(14절). 그들에게는 정의, 공평, 명예, 순결, 사랑 그리고 자비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되었다.
2)그들에게는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있었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들의 마음속에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는 것이 있었다. 양심이 곧 증인이 되어 일시적으로 압제 당할지라도 머지 않아 가장 은밀한 일까지도 증거할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양심의 증거에 판결을 내릴 것이다. 양심은 이방인 세계에 켜둔 완전히 꺼지지 않는, 아니 전혀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촛불이다. 그들의 '생각이 서로' 송사하거나 변명한다. 그들이 이러한 본성의 법과 명령을 지키거나 혹은 어김에 따라서 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거나 무죄를 판결하게 된다. 이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을 대신해서 율법 노릇을 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제 범죄한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해도 의로우시며 또 그들은 무지를 이유로 내세울 수도 없다.
[2] 율법의 빛: 이 빛은 유대인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12절).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그들은 아주 순전하고 분명한 율법의 빛을 받았으면서도 범죄한 자들이다. 이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율법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죄가 훨씬 더 무겁듯이 그들의 형벌도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첫째는 유대인에게'(9절)돌아가는 이다.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율법을 갖고 있고 율법을 들으며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의롭게 되지 못하고 오직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13절). 그들이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그들이 받은 율법대로 살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구원받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은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들음이 아니라 행함이다.
[3] 복음의 빛: 복음을 받은 자들은 복음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16절). 내 복음에. 복음이 대체로 바울의 복음이라고 불려졌는데, 이는 그가 그 복음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을 그가 심판의 날에 관하여 한 말로 생각한다. 마지막 날에 관하여 계시된 바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온 세상의 심판을 위하여 정해진 날이 있다. 그 날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날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사실만큼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없다. 그때에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일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밝혀지는 위대한 날이다.
Ⅱ. 유대인들의 죄 2:17-29
사도는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하였는데, 이제 그는 여기서 그 위대한 진리를 유대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1. 그들의 고백을 인정함(17-20)
바울은 그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고백을 인정한다. 바울은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바를 알았다.
[1] 그들은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히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는 특별한 백성이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그것은 아주 명예로운 칭호였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다는 이 사실을 그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칭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악하였다. 가장 악한 행실들이 가장 훌륭한 이름 아래 감추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율법을 의지하며, 그들은 이 특권을 가지고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그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았을지라도 이 특권이 얼마든지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외적인 특권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턱대고 의지만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 기뻐하는 것은 모든 신앙의 요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랑하되 겉으로만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은 모든 외식의 요약이다. 영적인 교만처럼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
[2] 그들은 지식이 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들이었다(18절). 하나님의 뜻만이 유일하게 서고 다른 모든 뜻은 그 안에서 녹아 합쳐질 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바로 잡힐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시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신다. 지극히 선한 것은 좋게 여기며.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잘 안다는 말은 "서로 다른 것을 분변한다"즉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안다는 말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8절 난외주를 참조하라-역주). 때로는 선과 악이 아주 밀접하게 붙어있어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적어도 자신들은 아무리 모호한 경우에라도 털끝 만한 차이를 가려내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논쟁에는 정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란 종교적 논쟁에 아주 능숙하면서도 경건의 능력에는 아주 문외한일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해 호의를 가졌다. 여기서 말하는 대로하자면 그들은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겼다'고 하겠다.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는 실제로 동의하지만 그 동의가 그만 육신과 마음의 정욕에 압도되어 버릴 수가 있다. "더 나은 것을 바라보면서 더 악한 것을 좇아가노라".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율법'에서 그들의 모든 교훈을 끌어내는데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들을 복음으로 가르치는 데 그만큼 열심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20절에서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라고 불린다. 지식의 모양은 단지 경건의 모양만 산출 할뿐이다(딤후3:5). 지식의 모양이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3]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백성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였다(19,20절).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스스로 믿으니. 이 말은 먼저 유대인들 전체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둠 속에 갇혀 앞을 못 보는 불쌍한 이방인들의 안내자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그들에게 배우기 위해 즉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그들에게 와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이 말은 그들의 랍비와 선생들에게 적용된다. 바울은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는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교만한 자부심을 보다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즐겨 되뇌이는 말이었다. 아무리 잘한 일이라도 떠벌이고 자랑하면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이러한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