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틴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고난과 투쟁의 장(場)이 되어 왔다. 알렉산더는 바사제국을 패배시킴으로 팔레스틴의 주인이 되었고, 그는 세계 정복뿐 아니라 세계를 헬라 문명으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은 유일신을 신봉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 반란의 극성기는 B.C. 2세기의 마카비(Maccabees) 가문에 의해 이끌어졌던 투쟁이었다. 마카비 가문은 한때 종교적,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후계자들은 결국 시리앙에서 알렉산더를 계승하였던 셀류커스 왕조의 헬라적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의 결과 로마가 개입하였고, B.C. 63년 폼페이우스는 이 지역을 점령하고, 마지막 마카비의 지도자였던 아리스도불루스 2세를 퇴위시켰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과 구별하여 그들 자신의 성소를 세겜의 그리심 산 위에 소유하게 된 것은 시온주의의 날카로운 배타성과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특권 부여에 따른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훼를 이스라엘의 신으로 믿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과 기도를 드리는 문제를 사마리아 당국이 막고자 바사제국 말기 또는 알렉산더 대왕 통치 초기에 그리심 성소의 건축이 이루어진 것이다.
1. 바사제국의 멸망과 헬라주의의 등장
바사제국(마지막 왕 다리오 3세)이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격파당했다(B.C.333년). 알렉산더 대왕의 승리는 별로 저항받지 않고 시리아, 팔레스틴, 애굽으로 진군할 수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강력한 희랍군대 앞에 평화적으로 항복하였으므로 바사 지배하의 자유로운 권리를 계속 누렸다. 생활 내부에는 헬라문화가 깊이 침투하였고 특히 히브리어와 아람어 이외에 헬라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급사(33세, B.C.323년) 이후 정치적 혼란은 로마와 애굽과 시리아의 세 사령관들의 제국 분열로 후계자 쟁탈전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은 애굽 주둔 사령관 톨레메우스(Ptolemaeus) 총독에 의하여 먼저 점령당하였으나, 시리아의 안티고누스(Antigonus)에 의해 점령되었다(B.C.315년). 그러다가 다시 톨레메우스가 팔레스틴과 시리아 남부 지배권을 확보하여 헬라주의적 영향이 팔레스틴에 깊이 침투했다.
새로운 통치자 곧 헬라주의의 애굽의 군주가 예루살렘의 종교공동체의 내부 문제를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주전 1세기에는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대제사장을 지지하였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형성이 바사제국 시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헬라주의 시대에 비로소 명백히 확인되었다.
2. 시리아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 시대
톨레메우스의 애굽 왕조는 집요하게 공략하는 안태오쿠스 3세(B.C.223-187)의 시리아에게 팔레스틴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전쟁 중 세력판도의 변화를 간파하고 시리아 편에 가당했으므로 승리자 시리아로부터 특혜를 입었다. 예루살렘의 전쟁피해를 복구하고 성전의식의 비용 일부를 국고 부담으로 충당하고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면세특권을 부여했다. 반면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Seleukiden)는 대제사장을 통하여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 대제사장직을 무력으로 찬탈하거나 거액의 뇌물을 시리아에 바쳐 대제사장직을 인계받기도 하였다.
한편 알렉산더 후계 왕조들 중의 하나인 로마인들은 애굽 톨레미 왕조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고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에게는 적대적이었다. 이에 시리아가 애굽으로 진격하려던 시도가 좌절되었다. 안티오쿠스에 의하여 대제사장직을 회복한 메네라우스의 협력으로 성전의 기물들이 시리아의 전쟁비용 충당을 위해 탈취되었다(B.C.169년).
성소에 대하여 만행을 저지른 시리아는 유대인 제의(祭衣)공동체를 강제로 헬라주의화시켰다. 독자적이던 안식일과 할례의 규례는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와 함께 무너졌다. 야훼의 이름 대신 바알이나 제우스를 불렀다. 다니엘서의 위로는 바로 이때의 신앙 공동체를 위해 기록되었다(단11:31; 단12:11; 막13:14). 경건한 시골의 유대인들이 고난과 순교를 무릅쓰고 박해에 저항하였다. 도시인들은 시리아의 헬라주의 문화와 문명에 다소 개방적이었다.
3. 마카비 독립 운동
하스모네어(Hasmonaer)의 손자인 늙은 제사장 마타디아(Mattathias)가 제단을 모독하는 시리아의 관리를 죽인 돌발적 사건 때문에 마타디아와 그 아들 유다('망치와 같다'는 뜻으로 마타비라는 별명을 가졌음)가 도망갔다. 이를 계기로 시리아에 반항하는 독립운동이 이들을 중심하여 게릴라전을 비롯한 대규모 기습 형태로 발발하였다. 그 결과 성소를 탈환하고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예배를 회복하는 일주일간의 축제를 드렸다(B.C.164년 12월 25일). 이 후로 매년 성전봉헌 축제(요10:22, 하눅카-Chanukkah, 암흑과 어둠이 빛에게 쫓겨나야 한다는 표징으로 등불에 점화하는 수전절 축제)를 올리게 되었다. 마카비의 독립운동은 유다 마카비가 죽은 뒤 동생 요나단(B.C.153년)과 작은 동생 시몬(B.C.143년)에 의해 계승되었다.
4. 유대주의의 분열-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형성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의 남북간 격렬한 적대감은 주후 128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Johannes Hyrkanus)의 지도하에 유대인들이 일어나 그리심 성전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느헤미야와 레위인들이 이끄는 유대교 재건 운동 곧 시온주의에 열정적인, 율법에 충실한 모데인(Modein)의 마을의 제사장 가문 하스몬 일가의 가장 마타디아의 아들 유다 또는 별명으로 마카비(Makkabaios)의 후손이었다. 요한네스 히르카누스는 팔레스틴의 패권을 추구하는 시리아에 대항하여 사마리아로 계속 진격하여 주전 107년에 함락, 멸망시켰다. 요한네스 히르카누스는 예수 출생시의 헤롯 대왕의 조상이다.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의 아비 시몬(Simon)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리아의 수비대를 축출하여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쟁취(B.C.142년)하고 최초로 화폐를 주조하는 등 대제사장의 직분과 유대인의 군사령관, 유대국 영도자의 지위를 한 몸에 세습되도록 받음으로써 하스모네어 왕조가 건립되었다(B.C.14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는 그 아비 시몬이 살해(B.C.134년)되자 국민적 세습 합의에 따라 유대공동체의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팔레스틴에의 시리아 영향력을 봉쇄하는 데 성공(B.C.128년)한 요한네스 히르카누스는 사마리아를 함락하였고, 에돔의 영역인 이두매를 정복하여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이는 헬라주의화된 도시들이 주전 107년까지 점령되고 파괴된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열심을 가진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 Chasidim)은 대제사장 직분을 차지하고 유대공동체를 통치하는 그들의 지배자가 레위인 사독의 혈통을 이은 자가 아니며, 또한 전쟁중에 피로 더럽혀진 자이기 때문에 지도자로 거부하고 있었다. 하스모네이(Hasmonaer)의 군사적 노력을 세속적이라고 비판하는 여론 가운데 자연스럽게 바리새파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마카비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자 가운데 율법에 신실한 유대인 무리였다. 바리새파가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에 반대하자 그는 더욱더 현실적 정치를 추구하였으며 이로 인해 헬라주의에 대한 폐쇄정책이 오히려 완화되었다. 결국 사두개파가 형성되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를 지지하였다. 요한네스 히르카누스(Johannes Hyrkanus I, B.C.134-104)가 죽은 뒤 아리스도불루스(Aristobulus I, B.C.104-103)가 유대인 지배자로서 처음으로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1. 셀류커스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품페이가 B.C.63년에 이스라엘을 로마의 한 성으로 삼을 때까지 셀류커스 왕조의 치하에 남아 있었다. 파니아스에서 톨레미 군대와 싸워서 이긴 후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율법에 따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고, 성전을 완성시켜 간수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는 특혜를 주었다. 특히 그는 전쟁에서 포로된 자들을 전원 석방하기도 하였다. 안티오쿠스는 B.C.191년에 데르모필레에서 그리고 B.C.190년에는 소아시아의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B.C.189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의해 안티오쿠스는 타르수스 산맥의 북쪽과 서쪽의 소아시아 지방과 다수의 군사력을 포기했으며, 또한 향후 12년간 막중한 배상금을 물었다. 배상금을 다 지불할 때까지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비롯한 20명의 인질을 로마로 보내야만 했다. B.C.187년에 부왕의 뒤를 이은 둘째 아들 셀류커스 4세는 부왕을 계승하였으나 곧 암살되었고, 로마에 인질로 갔던 안티오쿠스 3세의 셋째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위에 올랐다. 후에 자신에 대한 반역을 눈치챈 안티오쿠스는 메넬라오스와 함께 성전을 더럽히고 값진 성물들과 보물들을 모두 약탈했으며, 부루기아 출신 군지휘관 빌립보를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했다.
2. 산헤드린 공의회
포로기 후기에 예루살렘에 있던 71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최고의 유대교적 평의회로서 사법적 기능은 물론 입법과 행정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A.D.66-70년의 대반란 때까지 기본적인 귀족 단체로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모세를 돕도록 임명된 70인 장로들의 평의회에서 기원되었다. 바벨론 포로 귀환후 에스라에 의해 인정되었다. 산헤드린은 총독의 동의 없이 자체로 사형을 부과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유대교 당국에 의해서 체포되었지만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처형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총독은 질서유지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고,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에 의해 범해진 종교적 범죄들만 취급하였던 것이다.
산헤드린의 성격에 대해서는 헬레니즘과 랍비들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 데, 헬레니즘 자료에서는 왕이 의장을 맡거나 아니면 총독의 통치기에는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던 정치적, 사법적 최고회의로서 나타난다. 랍비 자료는 종교적인 학자들로 구성된 두 개의 산헤드린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전의 가지트(잘라낸 돌들)의 방에서 열린 71명의 의원이 참여하는 '대산헤드린'과 여러 도시들에서 열린 23명의 의원이 참석하는 '소산헤드린'이 있다고 한다.
3. 바리새파
히브리 말 파라슈에서 유래되었는데 '갈린 자', '분리주의 자'란 뜻으로 B.C.2세기에서 A.D.1세기까지 사두개파, 엣센파와 함께 유대교의 3대 종파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 바리새주의의 씨앗은 바벨론 포로기에 뿌려졌다. 바벨론 포로기 동안에 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이 되었던 것은 율법이었다. 그리고 그 율법은 그 후 계속해서 유대인의 정신을 보존해 주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포로기 후에도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우선적 요인이 되었다. 때문에 바리새파의 주요 특징은 '율법주의' 또는 '율법주의적 엄격주의'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의식적 법령들을 포함하여 정교한 율법주의적 전통을 세세하게 모두 준수하는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적인 특성으로부터 유래된 조상의 전통 즉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존경을 중시한다. 바리새인들이 보다 문자주의적인 토라 해석을 따랐던 사두개인들과 달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견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종교로부터의 관념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관념들에 대한 개방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4. 사두개파
유대교 당파 중의 하나로 지도적인 계급에 속하였다. 이들은 제사장적 귀족 집단으로서 B.C.2세기경부터는 그 세력이 점점 커졌다. 사두개파는 현세적으로 헬라 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마카비전쟁 시대에는 그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으나 하스모니안 왕조가 세속화됨에 따라 다시 세력을 펴게 되었다. 정치에 야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던 사두개파의 후에 헤롯 왕조의 친로마 정책과도 영합, 성전을 중심으로 한 대제사장의 직무를 독점하는 등 종교적인 독재를 하게 되었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며 합리주의자들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고 중요시하였을 뿐 그 이외의 것들은 부인하였다.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이들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대교회사/서설 (0) | 2014.06.13 |
---|---|
로마지배하의 팔레스틴/마2:1 (0) | 2014.06.07 |
유배후 이스라엘의회복/말4:5,6, (0) | 2014.06.07 |
회당시대/요1:14 (0) | 2014.06.07 |
예언자들의 활약/암5:6 (0) | 2014.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