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민족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들의 발전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발원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그들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 축복에 대한 의무로 이방 문화를 거부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타락된 문화와 우상들을 수용함으로써 영적 혼란과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기 가운데 있는 선택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사들을 보내신다.
이렇듯 부패와 징계, 그리고 구원에 대한 순환적 도식은 왕정(王政)과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 걸쳐서 전개된다. 이러한 흥망성쇠의 도식은 역사 속에 등장했던 어떤한 민족이나 국가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순환론적 역사관은 동서양에 팽배해 왔으며, 이의 극복은 역사와 세계 속에 그리스도의 구체적 임재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후의 광야 생활은 신앙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만큼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사 시대는 당시의 주변 국가가 왕제(王制)를 택하고 있는데 비하여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의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유능하고 능력 있는 사사가 등장하는 파격성을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가 가나안 정복과 사사 시대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1. 가나안 정복
1) 가나안의 지역적 상황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고자 했을 때에 그곳에는 다른 민족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다. 그 민족은 야훼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창조의 신 엘(El), 폭풍의 신인 바알, 바알의 여신(女神) 동반자들인 아나트, 아스다롯, 아세라 등 여러 종류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가나안 종교는 농작물, 짐승, 다산(多産)을 보증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과 화합하거나 공동으로 평화를 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하면 필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신앙을 잃어버리고 동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이 지역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언급하고(민14:8),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하여 주어진 땅임을 밝히고 있다.
2) 두려워하는 백성
요단 강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는다. 그리고 모세는 이 땅의 거민이 어떤 상태에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낸다. 정탐꾼을 보내면서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 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오라"(민13:18,19)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들 정탐꾼이 보고한 내용은 일치된 것이 아니었다. 즉 갈렙과 여호수아 이외의 정탐꾼들은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하면서 "거민을 삼키는 땅". "신장이 장대한 자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민13:30-33)라는 악평을 한다. 이에 대해 백성은 밤새도록 원망하며 부르짖는다. 그들의 이러한 인간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그들은 신앙적인 안목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상실한 것이다.
3) 하나님이 함께하신 정복
팔레스틴 지역에서 얻어지는 고고학적 자료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신속하고도 맹렬하게 팔레스틴의 전지역을 정복했다는 성서의 묘사를 뒷받침해 준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옥과 그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신3:3)고 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움으로 가나안 백성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시편은 더욱 구체적으로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44:3)라고 함으로써 가나안 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예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정착했다.
2. 사사 시대
1) 영적으로 쇠퇴함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은 무기력한 통치 공백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이 있었지만 행정이나 권력적인 통치 기구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17:6).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이방신을 섬기고 야훼 하나님을 배신했다.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삿2:17)고 지적한 것처럼 방종하는 행동을 보였다. 백성은 영적인 어두움과 공백 상태를 맞이한 것이다.
2) 왕이 없었음
가나안 정복을 지나 사사들의 통치 기간이었던 당시에도 주변 국가들의 왕의 폐해는 드러나고 있었다. 주변 국가는 백성의 통치를 견고하고 원활히 하기 위하여 왕권 제도를 선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왕정(王政)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백성이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백성이 왕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하자 왕권 제도에 대하여 경고했던 것이다(삼상8:9-19). 왕은 결코 백성의 복지를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왕권 제도는 하나님을 신뢰치 못하고 불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죄악으로 간주되었다(삼상12:17-20).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국가를 보고서 부러워했지만 왕이 없는 사사 제도야말로 백성의 권리와 만족을 적절하게 채워줄 수 있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사 제도 역시 백성을 적절히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기에 백성은 왕정을 사무엘에게 요구했다.
3) 사사를 세워 다스림
사사는 하나님께 받은 영감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범인(凡人)에 불과했다. 어떤 독특한 지식을 갖추거나 지도적 위치의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 때는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침공이나 도덕·윤리적으로 백성이 방탕할 때였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역은 이럴 때 요구되었다. 평소 평범하게 개인적 삶을 유지하던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민족 구원을 위해 나섰던 것이다. 이들에게 민족 구원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민족 구원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피할 수 없는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사사의 사역은 하나님의 전적 섭리와 사랑이 나타난 시기였다. 이 기간에 백성은 모든 일에 불안해했지만 결코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였다. 특별히 사사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딛고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바르게 집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요구한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사람들인 것이다.
1. 가나안의 문화·종교
팔레스틴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문화·종교와 접하면서 마찰을 일으킨다. 일정한 체계의 문화와 종교를 가진 가나안인들에게 이스라엘의 문화·종교는 위협받게 되었다. 우가리트(Ugarit)에서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가나안의 신들 가운데 지도급 신은 엘(El)과 바알이었다. 또한 메소보다미아에서 청동기 시대에 숭배되었던 아세라 여신상도 많이 발견되었다. 즉 가나안에서 수많은 신전과 성소 그리소 승려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아무런 형성도 없는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다. 극적인 종교 의식·술·노래와 같은 심미적 쾌락도 없이 도덕적 요구만 힝T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예배가 위협을 당한 것이다. 히브리어도 가나안의 방언에서 발전한 것을 보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에 상당 부문 침투 당했음을 알 수 있다.
2. 가나안 정복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서와 달리 모든 지파들이 통합된 지휘 체제하에서 단결된 군사 행동을 해서 팔레스틴을 점령한 것이 아님을 밝혀 준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 주는 성경의 증언과 관련하여 고고학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역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언급하고 있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도 '정복'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해되지 않는 점이나 모순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여러 독립 집단들은 후기 이스라엘 지파의 기본이 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간과 다른 처지에서 사막 지역으로부터 가나안에 들어가 그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각 집단들은 이러한 진입(進入)에 대한 각자의 전승들을 갖고 있었다. 즉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이러한 지파들의 회상들을 모아놓은 집합물인 것이다. 둘째, 여호수아 24장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세겜에 모여 집회를 갖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하나님 '야훼'를 전이스라엘이 섬기도록 설득하는 장면이 있다. 전에는 관련이 없었던 집단들의 개별적인 역사들이 여기서 출애굽 전승과 출애굽의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다. 이와 같이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대한 전승들은 구약성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통합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은 여러 민족이 혼합해서 살던 곳으로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사람이 살고 있었다(수9:1).
3. 사사 시대의 사회·문화성
당시 이스라엘의 생활은 유목에서 농경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엉성한 지파 동맹의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아직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생각대로 행하였다. 비적(匪賊)들 때문에 삼갈의 시대에는 대상들이 끊어졌고, 여행자들은 샛길로 다녔다. 고통을 당하던 이스라엘 농부들은 미디안 낙타병들의 기습이 무서워 동굴과 산으로 숨었다. 지파들간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원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파간의 질투, 불화로 한시도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공동의 적 가나안을 치기 위해서 드보라와 바락이 병합했을 때도 대부분의 지파들은 구경만 했다. 입다나 기드온의 승리에 찼던 인기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공동체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고대의 표준으로 보더라도 당시의 도덕 수준은 저급했다.
4. 사사들의 특징
사사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통로로 또한 계시의 방편으로 쓰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사들뿐만 아니라 직업 마술가 발람이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 등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기에는 부적합한 자들도 택하여 사용하셨다. 그러나 삼손이나 다른 사사들은 모세의 율법에 계시되었던 도덕적 수준까지 도달했어야만 했다. 삼손의 경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별(聖別)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무책임한 태도로 채우려 했었다. 그 밖에 입다는 산적 두목으로 지냈으며, 에훗은 암살자였고, 야엘은 시스라에 대한 반역 행위에도 도리어 칭찬을 받았다.
이러한 사사들의 존경스럽지 못한 공적과는 별도로 그들은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다. 적들로부터 압제를 직접 당했던 사람들은 확실히 적을 쳐부술 때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사사들은 집단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오랫동안 활동을 계속하지도 않았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해서 자기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내 놓고 다시 원래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다. 그들은 '야훼의 영'에 사로잡혀 소명을 받는다. 그럼으로써 위대한 무공(武功)을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charis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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