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설교하지 말라
설교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
청년부 시절 어느 교회의 한 젊은 목사님을 주강사로 초빙하여 한 주간 동안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작은 교회의 집회이다보니 참석자는 약 15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록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그래도 간만에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 교회에 가서 모두들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구나 설교자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분이 얼마나 달변이신지 웬만한 희극 배우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웃기는 짜장면' J목사님이 출현하기 전인지라 그야말로 새로운 스타목사의 등장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튼 아무리 길게 설교해도 누구도 지루하다고 불평하는 회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음 설교 시간을 은근히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겁없는 설교
그런데 날이 갈수록 설교가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야곱의 아들인 '시므온'의 일생에 대한 설교였는데 필자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매우 '감동적'인 내용을 전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 자체로만 놓고 보자면 정말 은혜를 받아야 마땅한 기발한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시므온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헌데 그 어떤 영화가 이 정도로 드라마틱할까 감탄할 정도로 시므온의 행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길게 서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좋은 이야기였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식사 후 사석에서 강사 목사님께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해 주신 그 시므온의 삶이 성경 어느 부분에 있는지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아니면 다른 역사적 참고 자료가 있는지요?"
그분의 대답은 충격이었습니다. "본래 성경이나 다른 참고 자료에는 없고, 내가 깊히 연구하고 묵상해서 설교한 것입니다." 당시 필자는 하도 하도 기가 막혀서 그냥 그분의 얼굴만 멍청히 쳐다보았을 뿐입니다. 그 설교가 모두 그분이 직접 창작한 '감동소설'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후 혼자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성경을 왜곡하여 저런 설교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저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이분은 정말 큰일을 내겠구나!"
필자의 불길한 예감대로, 후일 그 무명의 목사님은 아주 대단한 거물급 인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 들어 한국 개신교를 아작낸 다섯 명의 '오적'을 거론할 때 이분이 빠지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도대체 이 양반이 가는 곳마다 대형 사고가 안 일어난 데가 없습니다. 교단, 연합단체, 그리고 신학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선거 부정, 금품 수수, 공금 유용, 그리고 패거리 작당하며 그 놀라운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가업이 된 교회를 기발한 방법으로 대형화하여 아들 목사에게 세습시킨 정도야 그분에겐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설교의 사유화
설교 사유화란 교회에서 목회자가 설교를 개인의 목적과 욕심에 따라 인위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가 요즘 '기복주의'니 '성장주의'니 하며 신랄한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데 사실 그런 영적 타락을 주도적으로 선도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설교의 타락 때문입니다.
설교 내용을 들어보면 딱히 명확하게 지적할만한 신학적 오류가 그다지 없는데, 나중에 종합해 보면 결국 목회자의 종교적 야심과 개인적 야망에 교회가 이용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수법이 워낙 교묘하고 고상해서 보통의 경우 일반 교인들은 그 내막을 알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직을 맡아 사업, 선교, 행정, 인사, 그리고 재정 등에 깊숙히 관계된 장로쯤 되어서야 겨우 눈치채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그분이 가깝게 지내고 있는 어느 장로님들 두 분이 그동안 출석하던 교회를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회 운영에 깊히 접하게 될수록 '불편한 진실'을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입니다. 설교는 청산유수인데 설교자의 삶이 엉망이었던 것입니다.
나쁜 설교는 사람을 상하게 하지만, 반면에 좋은 설교는 생명을 살립니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며 찾아간 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의 유익에 대해서는 구태여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경우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분도 많습니다.
설교란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잘 가르쳐주는 귀한 사역입니다. 세례요한과 바울과 베드로와 스데반과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가 그러했습니다. 거기에 무슨 요즘같은 군더더기가 그리 많았던가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마음을 뜨겁게 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사도들의 복음은 단순했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옆의 그 강도도 복잡한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직 진실한 회개가 있었을 뿐입니다.
성경 어디에 목사 말 잘 듣고, 교회에 십일조 잘 바치고, 주일 잘 지키고, 직분 잘 받고 충성하면 큰 복을 받아 호의호식에 만수무강하고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본질이 아니라 그저 당연히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도적들이 교회의 안방을 차지하고 껍데기가 알맹이를 삼켜도 마냥 태평한 것이 지금 우리의 슬픈 모습은 아닌지요.
'설교'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
필자는 단지 설교의 기법이나 내용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입니다. 목자는 반드시 양에게 양식을 주지만, 이리는 제 아무리 경건한 척 위장을 해도 결국은 양을 약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설교가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그 덕분에 강단에서 거짓 복음이 활개치고 달콤한 미사여구가 춤을 춥니다. 컴퓨터만 켜면 난다긴다 하는 유명 목회자자들의 설교를 얼마든지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좋은 설교'는 드뭅니다. '열심히 모이자, 돈 바쳐라, 건물 짓자, 사업하자, 그리고 복 받으라'는 설교는 넘치지만, 성경이 말하는 대로 약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고 서로 섬기는 진정한 십자가 복음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피곤한 십자가는 소위 대형 교회의 목회자란 분들일수록 더욱 회피하고 있습니다. 심할 경우 그들은 양을 위한 고난은 커녕, 도리어 지나친 고액 연봉에 고급차를 굴리며 양의 고혈을 빨고 있습니다. 십일조 받는 것은 좋은데 십자가 지기는 싫은 것입니다.
2010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여론조사 기관인 GH코리아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목사님의 설교와 행동에 믿음이 간다'는 데 대해서는 겨우 16.5%만이 그렇다고 답하여 낙제점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교회는 다분히 먹자판이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는 먹기를 탐하고, 목사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아는 맹신도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것을 당연시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타락을 동조하고 방관하는 것이지요. 그 덕분에 일부 용감한 목사님들은 교인들의 눈을 가리며 헌금을 떼어 먹고, 십일조를 드시고, 그리고 마침내 교회 재산까지 열심히 잡수십니다. 그러다가 급체에 걸려 엉뚱하게 의사가 아닌 판사에게 가기도 합니다. 이게 안타깝게도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한심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양을 먹이기 위한 사역입니다. 자신이 잘 먹기 위한 설교는 잡설일 뿐입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설교하지 말고 성경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개인의 욕심으로 사유화된 설교는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 그저 교권주의자들의 잔치상에 잘 차려진 '볶음'이 될 뿐입니다.
바로 이 점이 공교회의 설교가 제대로 회복되려면 먼저 설교자부터 바르게 서야 하는 절박한 이유입니다. 양털을 뒤집어 쓴 이리를 강단에 세워놓고 매주 좋은 설교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면, 과연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처신일까요.
종교 개혁자 칼뱅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적 근거없이 함부로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개혁교회의 목사직은 과거의 (중세) 사제보다 백배나 더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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