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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마지막 설교는 죽음

제이비젼 2014. 10. 4. 08:10

목사의 마지막 설교는 죽음<야곱 신부의 편지>, 어떻게 죽어야 하나? 


김기대 | gilbert@newsm.com 

몇해전 원로목사께서 요즘 수명으로 보면 다소 아깝다고 할 수 있는 7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과 이별했다. 그런데 병상에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마지막 투병을 하면서 가족 이외에 어떤 이도 병실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의식이 있는 동안에 단속을 시켜놓았다. 나도 들어갈 수 없었다. 예외는 있었는데 당시 교회를 이미 떠난 일부 옛 교인들에게는 병실 방문이 허락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금방 수긍이 되었다. 내 부임과 함께 교회를 떠난 점잖은 분이었는데 그것은 나와는 별 교제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원로목사라는 제도가 없는 미국 장로교의 기준으로 보면 엄격하게 말해서 원로 목사는 아니었고 명예 목사(emeritus)였다. 살갑지 않은 성격의 나 역시 그분을 찾아가 목회 자문을 구하는 따위의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 분에게는 당연히 나보다 옛 교인들이 더 기억나는 대상들이다. 내 마음이 잠시라도 편치 않았던 이유는 내가 그분의 목회자라고 생각한 오만 때문이었다. 나는 그분을 위하여 아무 목회를 하지 않고서도 그분의 마지막을 꼭 내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실수로부터 빨리 벗어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소 꼿꼿한 품성을 가진 그분의 입장에서는 별로 친하지도 젊은 목사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이후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모든 순서를 유가족의 뜻에 맡길만큼 여유로워 졌다. 내 순서가 별로 없어도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목회하던 시절에 교감하던 사람들을 보고 싶어했고, 꼿꼿한 모습이 무너질 수도 있는 장면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즉 마지막까지 목회를 했던 분이다. 그 일을 경험하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적당한 때가 되면 나 역시 병실에 사람을 들이지 말라는 유언을 해 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찾아가 기도하고 장례식을 집전하며 많은 죽음을 경험하던 종교인들은 자신 인생의 마지막까지 목회를 해야 한다는 슬픈 직업적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중년이 되면 얼굴에 모든 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망자의 곱게 꾸며진 얼굴로 생전의 교인들과 조우해야 하는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목회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미사 집전을 하는 신부를 레일라가 측은한 듯 쳐다 보고 있다. 그의 마지막 교인이 될 수도 있는 레일라를 제쳐두고 많은 교인들을 망상한다. 

눈먼 신부의 마지막 사역 

<야곱신부의 편지> (클라우스 해로 감독, 2007년)는 지루하면서도 감동적인 핀란드 영화다.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되는 핀란드 영화 ‘블랙 아이스’(페트리 코트비카 감독, 2007년)를 원작으로 하는 한국 영화 ‘두 여자’(정윤수 감독, 2010년) 는 원작을 훼손하는 낯뜨거운 성인 영화로 만들어져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핀란드 영화에 대한 묘한 선입견이 있었다. <야곱 신부의 편지>는 이러한 나의 선입견을 바꾸어 주었다. 

어느 시골의 오래된 성당을 지키는 야곱은 앞도 보이지 않는 늙은 신부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성당은 낡을대로 낡았고, 주변은 잡초만 무성하다. 이미 교인들은 모두 떠났을 터이지만 그가 젊은 시절에도 화려했던 성당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 많은 교인들이 찾아왔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숲속 위치며 외양이다. 유일한 방문객은 야곱 신부에게 편지를 배달해주는 우체부다. 

디지틀 시대에(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편지는 늙은 신부, 낡은 성당만큼이나 오래된 전달 방법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아날로그 시대라고 해도 편지가 낡아 보이는 것은 그것이 친지의 안부를 묻는 편지라기 보다는 마치 라디오 상담가에게 보내는 듯한 내용을 담은 편지이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켜면 명망있는 상담가들이 넘쳐나는데 늙은 신부 만큼이나 낡아 버린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애잔한 사연이 신부에게 전달되고 눈먼 신부는 이웃의 도움을 얻어 편지를 읽고, 하나 하나 답장해 주었다. 

그 역할을 하던 이웃마저 도시로 이사 나가고, 신부의 외로움을 달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인죄로 종신형을 복역중이던 레일라가 사면을 받게 되고 신부의 비서로 성당에서 살게 된다. 삶이 즐겁지 않은 레일라에게는 교도소 밖이나 안이나 차이가 없다. 더구나 시골의 낡은 성당은 교도소보다 문화적으로 더 낙후되어 있고, 앞 못보는 신부의 편지를 읽어 주는 일은 그녀의 취향에 맞지 않아 떠날 궁리만 한다. 

읽는 것도 귀찮은 레일라는 배달된 편지의 일부를 버린다. 노신부의 질문도 귀찮아 대충 얼버무리려 해도 야곱은 내용만 듣고도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안다. 꾸어준 돈이 요긴했다며 돈을 동봉한 편지도 배달된다. 레일라는 편지 발신자에게 자신의 돈 모두를 꾸어주는 야곱신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번 경우에는 돈을 돌려 받았지만 그동안 많은 돈도 떼였을 것이다. 레일라는 그곳을 떠나고 싶어 비오는 밤, 택시를 부르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가 결국은 낡은 것을 지켜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서는 자살도 시도해 본다. 

의미없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레일라의 태업(?)으로 인해 사람들의 편지도 줄어들다 마침내 모든 편지가 끊긴다. 그동안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야곱 신부와 레일라 두 사람으로 늘었다. 편지는 늙고 낡아 의미없는 존재로 스스로 여기고 있는 야곱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레일라는 함께 편지를 기다리다 야곱 신부를 위해 스스로 편지를 창작한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오늘은 또 어떤 마음의 짐들이 있을지 기대되는군요.”라고 말하던 야곱 신부는 짐이라고 표현하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편지가 끊긴 뒤 절망에 빠져들던 신부는 생의 마지막 고백을 사면된 살인범 앞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 놓는다.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게 제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보니 편지로 인해 위로 받은 건 제 자신이었습니다.”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는 일은 십자가 짐이 아니라 은총이요 선물이었다라는 고백이다. 

거짓 편지를 읽어 주던 레일라는 소재가 딸리자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처럼 늘어 놓는다. 어린 시절 엄마로 부터 이유없는 폭행을 당할 때 언니가 막아주곤 했다. 고마운 언니가 결혼을 하자 이번에는 형부의 매질이 계속되었다. 자신을 위해 대신 맞던 언니가 어른이 된 뒤에도 왜 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레일라는 언니에 가해지는 폭력을 막아낼 힘이 생겼다. 결국 형부를 죽이고 종신 복역수가 된 것이었다. 

 

▲ 멀리 도시를 등뒤로 하고 낡은 사제관을 찾는 레일라. 교도소라는 현대시설에서 낡은 곳을 향하는 그녀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레일라는 언니를 포함한 모든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았는데 언니는 편지조차 거부하는 동생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편지에 담아 야곱신부에게 보냈고 그로부터 위로를 받아왔다. 사면을 요청한 것도 야곱 신부였다. 

존재의미를 찾지 못하던, 자신을 위한 누구의 보살핌도 받아 보지 못했던 레일라가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을 때, 세상은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돕고 도움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때, 야곱 신부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마지막 목회는 레일라에게 세상을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일로 끝났다. 야곱 신부에게도 레일라는 말씀(편지)이 육신(레일라)이 된 것 같은 은총의 사건이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게 해주신다(누가 2:29) 는 늙은 시므온의 고백처럼 그는 종이에 쓰여진 감사의 답장이 아니라 레일라라는 진정한 선물을 받는다. 편지 속에서 느껴지는 감사가 아니라 레일라의 흐느낌에서 전해오는 감사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쁘게 했다. 죽음이라는 야곱의 마지막 설교는 레일라에게는 용서를 가르쳐주었고, 자신에게는 그의 초라한 사역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었다. 비로서 남루하고 지루했던 그의 사역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