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학은 성서를 매우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으로 고찰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성서학에서 그 기초가 되는 구약학과 신약학의 제1차 작업은 성서의 원본에 충실한 사본들을 추적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작업은 수많은 성경의 사본들을 비교 검토해 보면서 실제했을 원본에 가장 가깝도록 본문을 유도하는 매우 까다로운 노력을 요구하는데, 이러한 성서학이 커다란 진전을 이루게 된 사건이 있었다. 1940년대에 사해의 동굴에서 어느 목동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된 두루마리 사본들은 지금까지 성서학이 추적해 왔던 성서의 이상적 원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대단한 자료들이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성서와 외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자료들까지도 제공해 주었다. 이로써 성서의 역사적 진실성뿐 아니라 신적 권위가 매우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합리성으로 성서를 판단하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매우 겸손하게 성서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을 주도해 온 두 가지 사상적 조류가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이다. 이 두 사조는 서로 격이 맞지 않는 듯하지만 서로 보완적인 측면을 갖기도 한다. 이 두 사조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으로 인한 헬라 문화의 팔레스틴 유입에 있었다. 그 후 이 두 사조는 서로 맞닥뜨려 피를 보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us Ephipanes B. C. 175-163년경 재위)의 유대교 박해와 그에 대한 항전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두 사상은 서로 공존의 길을 걷게 되는데 주전 50년경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양상이 매우 뚜렷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 히브리줌과 헬레니즘의 사상적 기반과 발전
1) 히브리즘(Hebraism)
히브리즘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계시를 사상적 근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 사상에선는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이 강조되고 인간의 구성 또한 영육일체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념은 헬레니즘의 세계관과 대립되는 측면을 가진다. 헬라 신화에서는 우주가 신들로부터 타락 또는 유출되었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여기는 반면 히브리즘은 우주가 유일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의의와 가치를 가지기에 인간의 운명도 필연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적 결단고 책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여긴다. 한마디로 히브리즘은 신 중심의 철학이지만 인간 존중의 관념이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이러한 히브리즘은 주전 15세기 말경 시대 산에서의 율법 수여 이후 구체화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 이르러 완전하여져서 기독교를 탄생시키게 된다.
2) 헬레니즘(Hellenism)
헬레니즘이라 함은 세계사상(世界史上)의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이 기도 하며 그리스의 문화와 사상을 가리킴이기도 하다. 특히 사상적 측면에서의 헬레니즘적 요소는 현대의 철학들과 학문 속에까지 깊숙히 뿌리박고 있다. 그 요소는 바로 인본주의(人本主義)인데 인간본위를 외치며 이성으로 돌아가려 했던 르네상스 및 기타 인본주의 철학들과 그 격을 같이한다.
그런데 이러한 헬레니즘은 신 중심 사싱인 히브리즘과 현격한 차이를 가지는데 그것은 신 이해와 인간 이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헬레니즘적인 신 이해는 신도 인간과 별다를 바 없고 인간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관념을 배경에 깔고 있다. 또한 인간 이해에 있어서도 히브리즘과 달리 명쾌한 해답이 나와 있지 않으며 여러모로 견해차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을 주류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적 사상은 알렉산더의 동방세계 정복과 아울러 세계 각지에 심어졌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전하였다.
2. 주전 50년경의 히브리즘
1) 헬레니즘과의 융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의 융화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자료로서 칠십인역 성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히브리어 성서를 헬라의 언어인 희랍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헬라 사람인 애굽 왕 프톨레미 2세(Ptolemy II B. C. 285-247년경 재위)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 성서는 번역된 이후 유대 사회에도 보급되었고 특히 디아스포라(diaspora)들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주전 50년경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중화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 독특성의 유지
아무리 헬레니즘의 영향이 강렬하고 그 문화에 노출된 기간이 길었다 할지라도 유대 사회에서의 히브리즘의 독창성과 특색을 변화시키거나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히브리즘은 유대 사회의 저변에 깔려서 유대 민중들의 전반적인 가치관과 사상을 주도해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주전 50년대에는 물론 그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A. D. 70년경)까지 지속되었던 성전예배와 절기의 준수였다. 또 한편으로 히브리즘의 독특성은 소종파들의 수도 생활 속에서도 잘 보존되었다. 특히 쿰란 공동체나 엣센파의 생활은 경건생활과 성경연구, 그리고 경전의 보존과 유대적 신앙과 관습의 준수를 주목적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활동은 히브리즘의 독특성과 독창성 유지에 크게 기여하였다.
3. 주전 50년경의 헬레니즘
1) 헬레니즘 문화의 정착
주전 50년대는 헬라 세력이 물러나고 로마가 팔레스틴을 포함한 당시 세계의 지배권을 확립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헬라의 정치적 세력이 물러갔다고 해서 헬레니즘적 문화마저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요소는 로마 제국의 후원을 입은 팔레스틴 지방의 분봉왕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 C. 37-4년경 재위)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헤롯 대왕은 팔레스틴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감행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실용적이고 견고한 그레코 로만(Graeco-Roman, 헬라식 로마)적이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는 헤롯 이후 팔레스틴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는데 그것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건축물로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을 새롭게 보수한 헤롯 성전을 들 수 있다. 현대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헤롯은 성전을 크게 확대 보수하였고 그 주위에 헬라식 행각들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2) 히브리즘 전파에 공헌
헬레니즘이 히브리줌에 악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히브리즘의 우월성과 가치의 전파에 기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주전 50년대 이후의 세계는 로마라는 정치 세력과 헬레니즘이라는 문화 아래 통일 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다음 세대인 신약 시대의 복음 전파에 적잖은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 연구에서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이 주전 50년대의 팔레스틴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발전해 나아갔는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헬레니즘도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히브리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부분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류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측면이라도 긍정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발견하게 된다.
1. 로마 통치하의 이스라엘
히르카누스(Hyrcanus)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사이에 벌어진 내란의 중재자로서, 또한 그 두 유대인 통치자들에 맞서고 있는 바리새파의 투쟁의 중재자로서 폼페이우스(Pompeius)가 B. C. 63년에 성전에 진입하게 되자, 유대는 결과적으로 로마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폼페이우스와 줄리어스시이저(J. Caeser)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이 두매인 안티파터(Antipater)는 시이저의 편에 가담하여 그의 비위를 맞춤으로써 유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에게 유리한 수많은 칙령들이 반포되었는데, 이러한 칙령들은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의 황제들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안티파터의 아들인 헤롯은 유대의 왕으로서 헬라문명을 흠모하던 자였는데 그는 황제 숭배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도시가 아닌 다른 도시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황제에게 봉헌된 신전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이 이두매였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외국인으로 간주하였다. 헤롯의 통치가 끝난 후에도 바리새파의 대표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헤롯 왕조의 정통성을 빌미삼고 무효화시키기 위해 로마 당국이 이 정부를 종식시킬 것을 청원하고 있었다.
2. B. C. 50년대의 팔레스틴에서의 헬레미즘
B. C. 50년대의 팔레스틴을 살펴볼 때 언제나처럼 거론되는 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헤롯이다. 헤롯은 로마의 후언을 받아 유대를 통치했으며(B. C. 37-4). 희랍양식의 고전적인 형태를 채택하였다. 가이사랴, 헤브론, 헤로디움 등은 어마어마한 건축공사를 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은 로마의 팔라틴 궁전과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비교할 만하였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양식의 건축가이면서 동시에 지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헬라와 로마의 방식에 대한 관심은 이것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의 측근들 중에는 역사가이자 소요학파의 철학자였던 다마스커스의 니콜라우스라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그는 다마스커스 출신의 헬라화된 아랍인으로서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보면 헤롯이 그의 건축에서 보여 주는 것과 같이 그가 헬라적인 양식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인종적 출신과 관계없이 니콜라우스는 근동지방의 많은 선배들 및 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아테네·에베소·안디옥·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헬라적인 교육을 경험한 사람들을 위해 희랍어로 저술했다.
이와 같이 당시의 팔레스틴 거주자들은 차츰 차츰 그리스-로마의 헬라문화를 수용해 나갔다.
3. 칠십인역(Septuagint)이란?
전통적으로 이 명칭은 구약에서 가장 오래된 희랍어 역본에 적용되고 있다. 분명히 이 명칭은 '70인의 장로들에 의한 해석'(Interpretatio secundum septuaginta seniores)이라는 명칭을 간략히 표현한 형태이다. 따라서 '칠십'이라는 용어는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간 장로들의 수가 칠십이었다는 성서적 사실과 결부된 의미라 볼 수 있다(출24:1, 9).
칠십인역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LXX'라고 간략히 기록되어진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 용어는 희랍어 오경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이 명칭은 희랍어 역본 구약 전체를 포함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고대 헬라 기자들은 흔히 칠십인역을 해 코이네(에크도시스, ekdosis)또는 헤 엑클레시아시티케 에크도시스(he ekklesiastike ekdosis)라고 불렀다.
번역 연대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칠십인역이 프톨레미우스 II세 필라델푸스(Ptolemius II Philadelpus B. C. 285-247년)의 통치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이 견해는 필로크라테스(Philocrates)라는 친구에게 써 보낸 아라스테아스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아라스테아스 필로크라테이> 라는 제목의 이 기록은 '유대인의 율법 번역'을 다루는 설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의 목적은 왕의 요청에 따라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72인(히브리 지파로부터 각각 6명씩)을 보내어 토라를 희랍어로 번역한 일에 대해서 필라텔푸스의 궁전에 있던 고위 관리가 기록한 목격담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구약정경의 번역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사본들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통상 아래와 같은 외경이 포함되어 있다. 에스드라상·지혜서·집회서·유딧서·토빗서·바룩서·예레미야 서신· 네권의 마카베오서이다. 많은 초서체 사본들 가운데에 솔로몬 시편도 포함되어 있으며, 어떤 정경들에는 맛소라 사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본문들이 많이 첨가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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