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적 문화운동으로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탈현대화운동은 기독교신학에 관하여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창세기 1장 이후 11장 까지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사역 기사를 '창조 설화'로 규정하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죽어간 인류의 비운의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의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생명 없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탈현대주의자들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존재케 하시고 자신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마음껏 욕되게 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사랑하고 계신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관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실존과 생활의 인도하심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야 할 인간이 이 지경으로 타락한 원인 중에 인간의 지성과 사유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본 연구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전통 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은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 더욱 확고히 정립되었다. 그러나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고도의 물질 문명을 이룩한 현대의 다원화된 사상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를 거부한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 불리는 탈현대사조에 휩싸인 일부 신학자들은 기존 진리를 도외시하고 기독교를 포스트 모더니즘에 접목시킴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개념들을 왜곡시켰다.
1. 탈현대와 하나님의 죽음
1) 하나님은 죽었다
탈현대사조가 기존 질서와 정통 원리를 부정하듯 이러한 사상을 수용한 신학자들도 정통 신학을 부정함에 있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신신학(死神神學)을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삼고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시켜 나간다. 이들은 하나님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신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이성(理性)과 지식이 하나님의 진리를 비판하고 기술과 과학의 발달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부인하게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신학은 새로운 형태의 '인본주의적 무신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무리 연구와 학문의 분야라 할지라도 참된 신앙을 훼파하는 악영향으로 인해 이단 사설보다 더 심각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은 이름뿐이다.
탈현대신학에서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신론은 하나님이 하나의 기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언어 놀이(language game)에 많은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던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하나의 씌어진 이름이라고 본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카프만(Gordon D.Kaufmann)은 "하나님, 그것은 사람이 붙인 이유 있는 이름이다"라고 말했다.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누가 인간을 창조했는가? 그런데도 이들은 창조된 인간이 창조주를 부르기 위하여 지어 붙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이라 이름 붙이기 전부터 계셨고,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해서 존재에 이른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있는 자'(출3:14)이다.
이름은 모든 만물이 존재할 때 그 본질 내용과 상징 성격을 전체적으로 드러내어 부를 수 있도록 붙여진다. 어떤 이름의 주인공에 대하여 그 본질을 부정하면서 상징만을 분리하여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이미 존재한 그분 안에 있는 능력과 사랑의 속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 불신을 위한 불신을 선언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결과이다.
2. 탈현대사조와 하나님의 능력
1)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탈현대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세계대전을 그냥 두었으며 또 수백만 인명을 잔혹하게 살상되도록 방치하였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참 공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키 위해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도 그의 '의'를 위해 힘써오셨다. 그 피흘림은 결국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인생들을 위하여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피흘리신 헌신적 사랑의 실천을 믿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다(마19:26).
2) 하나님은 창조주이신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고 천지간의 삼라만상 모두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들을 위해 독생자마저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하도록 내어 주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시14:1)라고 정죄하신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창조주이심과 그의 사랑을 빼어 버리는 탈현대신학은 기독교 신학에 저해가 될 뿐이다.
3) 악의 존재 이유
포스트모던신학자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악(惡)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가 선하고 완전 하다면 어떻게 세상에 악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악의 존재 원인을 알게 되면 곧 하나님의 전능을 부정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악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 안에 있다(잠16:4). 하나님께서는 악의 존재 속에서 인간들을 지키시고 훈련시키시며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해 주는 사랑과 능력의 존재이시다.
3.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
탈현대주의자들의 하나님 이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학문 연구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지금도 우주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1) 성경적인 하나님 이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신앙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기록을 신화나 상징으로 본다. 성경의 능력과 권위(히4:12)를 믿지 않고 고백하지 아니함은 신앙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 선진들의 신앙고백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참 신이며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요 공의로우신 존재이심을 고백하고 있다(시82:1-8). 성경의 기록 가운데서 고백되어 있는 하나님은 오늘날 성도들이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언제나 사랑으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기독교인의 신앙이다.
2) 하나님 앞에 선 인간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도는 성경과 교회와 기독교 전통을 매개로 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가 계시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과 계시의 관계에 대하여 독일의 신학자 하인리히 오토(Heinrich Otto)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대화적 근본 상황', 즉 하나님과의 대화적·상호적 관계를 통하여 인간의 생활과 실존이 인도받고 성취된다고 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창5:24)의 모범은 이 시대 신앙인들의 실존 성취의 자세라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자이고 구속자이신 한 분 하나님과의 대화적 상호 작용을 통해서 스스로의 본연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분은 인간 실존을 지켜 주시는 분(시17:8)이시기 때문이다.
Ⅰ. 용어 해설
1. 정통 신학의 하나님 이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 살아 계시고,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시며 자기에 대하여 홀로 완전히 자족하시다. 하나님은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세 위격이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자기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왕이 되시며 심판자요 인간의 구속자이시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할 유일하고 영원한 길을 허락하신 분이며 성령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영적인 형태로 교통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2.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편재성)
하나님의 고유적 속성 가운데 무한성에서 정의되어지는 속성 중의 하나이다. 이 속성은 무한성에서 공간의 영역에 적용되며 성경에서는 모든 피조 세계 공간 위에 계신 분으로 묘사된다(왕상8:26; 행17:24). 하나님은 우주 공간이 포용할 수 없는 분이며, 오히려 공간을 초월하시므로 시·공간의 법칙은 적용되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고유적 속성을 표현하는 편재 혹은 무소부재하심은 성경에서 직접 사용된 어휘가 아니고 다만 성경에 담겨진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취해진 신학적인 용어이다(시139:7-13; 행17:27,28; 렘23:24). 하나님은 편재하시므로 우주를 초월해 계심과 동시에 이 세상에 내재하시고 계시는 속성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편재하심의 교리는 성도에게 4가지의 유익함을 준다. ① 회개와 고백(시139:1-24) ② 공포로부터의 해방(시23:4) ③ 근심과 돈의 굴레로부터 해방(히13:5) ④ 전도에 대한 열심을 촉구(막16:6).
3. 하나님의 전능성
하나님의 전능성은 의지 중에 표현된 인격성으로서 절대적 속성인 자존성과 관련된다. 전능성은 하나님의 완전성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 이 전능성에 의해서 하나님은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가 있다. 하나님은 전능성을 그의 창조 사역에서 최초로 나타내 보이셨으며 그리스도의 도성인 신 사건을 통하여 그 영원하신 속성을 인간에게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 죄와는 양립할 수가 없는 성질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전능성의 교리는 하나님을 향한 깊고도 항구적인 경건한 예배의 기초가 되고 고요한 신뢰와 확신을 위한 근거와 견고한 토대가 되므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로 용감하게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셨다. 이유는 전능하심을 통하여 그의 구속 사업이 최후의 적이 되는 사망까지도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세세토록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실망과 외견상 패배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이기게 해준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시편 기자,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렘32:17; 시115:3; 시33:8,9; 엡3:20,21).
Ⅱ. 보충 자료
사신신학
사신신학은 고대 교회에서 2세기 말경에 양식론이라고 알려진 학파(성부수난론자)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최근에 와서 몇몇 급진신학자들에 의해 거론되었다.
1. 프락세아스(Prazeas) : 성부 수난파의 한 사람으로 그는 성육신화될 때 하나님의 신격이 남김없이 그리스도의 인격 속으로 흘러들어갔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동정녀의 모태 속에 내려와서 성자 하나님으로 태어난 것은 성부 자신이었으며 고난받아 죽으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2. 알타이저(T.J.J.Altizer) :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도 함께 죽었으며, 그의 죽음은 일종의 자아 절멸, 즉 완전한 자아 비움(Kenosis)의 행위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부활하지도 승천하지도 영화롭게 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알타이저는 하나님의 죽음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믿지는 않았다.
3. 니체(F.W.Nietzche 1844-1900) : 니체는 신은 죽었으며 인간들이 신을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스스로 신들, 즉 초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이제 인간은 신의 시체 위에 역사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신에 대한 인간 승리의 상징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니체의 신상을 잘못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다. 즉 니체가 신이 죽었다는 것은 '목사'와 '성도'가 타락하고 후패하므로 신이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처럼 다시 한번 죽었다는 것이다. 종교인들의 타락성을 혹독히 비판키 위해 역설적으로 신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따라서 사신신학은 니체의 절규하는 신앙의 토로를 곡해한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신에 대해 인간이 내린 가장 어리석은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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