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의 사회, 문화적인 특징들이 다원적 관점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다원 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떤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구조를 살펴보면 종교의 다양성을 보면 서로가 상대적이고, 주관적 판단 때문에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볼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가 같다는 것을 주장하며, 특히 '욥' 같은 사람은 종교적 신앙의 가치는 기독교나 어느 특정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포스트 모더니즘은 정의하기를 개체화, 관계성, 무법칙성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시고 말한다. 과연 이것이 옳단 말인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시려면 먼저 인간 개개인의 죄성에 대해서 물어야 하지 않은가! 이 연구에서는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적 구조와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탈현대주의(post-modernism)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탈현대의 사회 문화적 특징들이 다원적인 관점을 요구하고 있으며 종교에도 같은 요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종교다원주의와 탈현대화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적 구조
1) 종교의 역사적 상대성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이해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본질적으로 더 훌륭하다고 말하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판단일 뿐이므로 반드시 '나에게' 혹은 '누구에게'라는 말이 덧붙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역사적 상대주의'라 부를 수 있다. 신학자 트뢸취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전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세계의 종교들이란 모든 인류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계시의 구체적이며 다양하고 독립적인 드러냄이라고 말한다. 특정한 시기에 어떤 종교를 통해 나타나는 절대자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일지언정 절대화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신을 만났다고 하는 주관적 체험은 역사 안에서 경험한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며, 절대적이며 영원한 신성의 계시와 노출은 역사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신앙인들은 상대적인 과정을 통하여 궁극적 목표를 향해 가야 한다고 트뢸취는 말한다.
2) 종교의 본질적 동일성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조는 종교의 상대성과 유사하며 근본적으로는 상대성과 다원주의의 관점이다. 모든 종교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제기한 사람은 역사가로 유명한 토인비(Aarnold Toynbee 1889-1975)였다. 토인비는 종교의 본질과 역사 안에서의 역할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각각의 종교 안에 '봉건적인 권고와 진리'가 있으며, 동시에 '비본질적인 의식과 명제'가 있다고 했다. 그는 7개의 중요한 세계 종교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 공통적인 영적 현존을 발견했다. 그리스도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배화교에서 발견한 영적인 실재는 네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1) 우주의 궁극적 신비성은 우주 자체나 인간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경험 내부와 무관한 채로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간과한 연구라고 비평되어야 한다(창1:2).
(2) 이러한 현존은 인간이 알고 있는 진리뿐 아니라 인간이 갈망하는 선도 포함한다고 본다. 그러나 오직 성령만이 온갖 깊은 것들을 통달하시고 신령한 것을 분별하신다(고전2:9-14).
(3) 인간은 절대적 실재와의 조화로운 삶을 위하여 자기 중심성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을 비우고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를 모셔야 구원에 이르며, 자기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버림받은 존재'이다(고후13:5).
이러한 공통점을 통해 토인비가 종교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통합됨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들간의 차이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발견도리 뿐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토인비는 종교의 공동 목적을 서술하는데, 그것은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자기 중심성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방법으로 싸우고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도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에 이를 수 없기에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헛된 것이라고 단정한다(삼상13:21-23).
3) 공동의 심리적 기원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틀은 융(Karl Gustav Jung 1825-1961)이 제공했는데 그는 종교들의 공통된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매개로 신화와 상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아가 개입하여 공동의 실재로서 '무의식의 집단성'을 이루어 내는 것이 종교라고 규정했다. 융은 종교적 신앙의 가치를 기독교나 어느 특정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성 그 자체라고 했다.
2.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의(定義)
1) 개체화
탈현대(post-modernism)는 이전까지 인류를 지배해 온 '커다란 이야기'들을 배격한다. 모든 인간들, 사람들, 사건들을 통권적 기준으로 묶으려는 시도를 불가능하며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반면 각각의 개성과 개체의 존재 의미(개체화 작업)를 중요시한다. 개체, 그것도 더 나눌 수 없을 만큼 작은 개체(파편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 개체성을 억압하는 것은 그것이 구조이든 제도이든 신앙이든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탈현대화 사회에서는 공동의 이익과 목표가 그 의미를 상실하고 개체인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과 존재가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2) 관계성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개체는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 관계성에 충실한 개체이다. 여기에서의 관계는 수직적, 수평적, 대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한 개인에 관계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작은 범위 내의 사람들과 사물들 뿐 아니라 지구 위의 모든 사람, 사물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하는 분이라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 관계는 절대에 대비되는 관계를 뜻한다. 더 이상 고정적이거나 확실하고 절대적인 의미의 존재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식으로든지 서로가 관계를 가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과연 인간이 하나님에게 예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 무법칙성
탈현대화는 법칙의 파기 혹은 포기로 간주된다. 더 이상 일관된 법칙을 바라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문학, 예술에서의 법칙의 파기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파괴가 철학·사회학·심리학 등과 자연과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탈현대화에는 대표적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눈에 드러나는 경우가 건축에 있어서의 법칙 거부이다. 기존의 틀을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기법, 새로운 모습의 건축물들이 이러한 사상의 흐름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적이고도 말초적인 거부 운동은 우주의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과 법칙을 거역하는 큰 죄이다(행17:25).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셨다. 다만 인간의 타락으로 질서가 혼란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려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 개인의 죄성을 없애야 할 것이다. 인간 개체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사회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
Ⅰ. 용어 해설
1. 트뢸취(E.Troeltsch 1865-1923)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며 철학가로 에어랑겐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수학.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는 리츨 학설의 결함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역사철학은 관념학과 사회학을 역사에 의해 결합, 통일하려는 것이며 특히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인하여 많은 반박을 받았다.
2. 소승불교(小乘佛敎)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 석가모니(釋伽 B.C.563?-B.C.483?) 재세(在世)인 B.C.6세기-B.C.5세기의 근본불교와, 석가모니 입멸 후 갠지스강 유역에 교단을 넓히고 원시 경전이 성립된 악 2세기간의 원시 불교 그리고 아쇼카(Asoka)왕의 불교 귀의 등에 의해 불교 교단이 확대되는 동시에 교단의 분열이 일어났던 불교분파를 통칭해 소승불교라 한다. 소승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보살에 대해 성문(聲聞; 석존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 열반에 이르는 성장)과 연각(緣覺; 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성장)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간주한다. 특히 대승 운동의 대상이 되었던 보수적 제부파는 상좌부와 대중부의 두 파로 나뉜다. 상좌부 계통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에 전해져 현재도 민중 속에 확고한 기반을 잡고 있으며, 대중부 계통은 후에 대승불교로 발전하여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에 널리 유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대승불교(大乘佛敎)
대승의 교리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교파의 총칭으로 삼론종·법상종·화엄종·천태종·진언종·율종을 비롯하여 선종 등이 이에 속한다. 대승의 어원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 중생(一切衆生)의 제도를 그 목표로 한다. 석가 입멸 후 500년경(B.C.500년경) 인도에서 일어난 이 운동은 그 때까지 여러 파로 갈라져 자파(自派)의 주장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고집하여 불교의 존재 방식을 맹렬히 비판하고 그 때까지의 재래 불교를 소승이라 하였다. 또한 스스로를 대승이라 칭하면서 이타적(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종래에는 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넓게 일반 민중에게 개방시켰다. 그리고 석가에게만 한정하였던 보살이라는 개념을 넓혀 일체 중생이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아 광범위한 종교 활동을 펴 나갔다. 대승불교 경전으로는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정토삼부경, 승만경 등이 있다. 대승불교는 한(漢)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가 몽고, 티벳, 한국, 일본 등 북방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문자왕 때 용수(龍樹)의 중관론(中觀論)등 삼론(三論)을 비롯하여 천태(天台), 열반(涅槃)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의 대승불교는 길장이다. 삼론을 바타응로 삼론종을 개종하는 등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하였다.
Ⅱ. 보충 자료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오류
현대 세계는 종교다원주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들로는 종교 통합, 혼합 종교, 종교적 상대주의 등을 뽑을 수 있다.
1. 종교 통합 :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는 각기 구원의 방식을 갖는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구원을 갖는다'라는 명제는 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모두 동일한 '구원'이 있으며, 모든 종교는 각각 '바로 그런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듯이 된다. 만약 구원이라고 하는 상태가 같고 거기에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같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종교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며, 이것이 바로 하나된 종교로의 종교 통합이다.
2. 혼합 종교 :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와 장기간 접촉하거나, 다른 종교를 배경으로 한 문화권 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느 정도 변질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와 성격은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변질될 때는 그것을 토착화 또는 적용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만약 그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까지 변질될 만큼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종교는 이미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혼합 종교이다.
3. 종교적 상대주의 :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그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통로라는 절대적인 교리를 2천 년간 지켜온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상대주의를 부정한다. 교리가 배타적인 종교일수록 상대주의는 곧 신앙의 약화 및 소멸이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오늘날 유럽의 기독교가 거의 죽어가는 반면, 또 다른 배타적 종교인 이슬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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