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 비교 -다원주의시대,
기독교 변증학의 새로운 노력을 기대하면서
박혜정
20세기 후반 한국 기독 지성계 전반에 많은 영향을 준 사상가로서 프란시스 쉐퍼를 들 수 있다. '이성에서의 도피', '존재하시는 하나님', '거기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등 라브리 사역과 함께 발간된 20여권의 책을 통해서 다소 소외되어 왔던 지성의 영역에 자신감을 세워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질문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모델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또 한 명의 20세기 기독 변증학의 거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쉐퍼에 필적할 만한 오히려 영향력에 있어서는 그 이상이라고 평가받는 옥스포드 영문학 교수 C. S. 루이스이다. 그의 업적과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그는 한국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동화책으로 씌여진 '나르니아 연대기' 7권을 포함하여 '내가 믿는 기독교(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마귀의 지령)', '네 가지 사랑' 등 십 여권 이상이 번역 출간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몇 년 전 그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된 '쉐도우 랜드'라는 영화는 상영 며칠만에 막을 내려야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이미 많은 기독인 독자들에게 깊이 다가 서 있다고 생각된다. 많은 신앙서적에서 그의 글이 인용되는 것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접하고 그의 삶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꿈과 희망에 가득찬 문체에서부터 그의 사상의 명쾌함에 이르기까지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는 C. S. 루이스 탄생 백주년이다. 이 일환으로 미국 IVP 에서는 아주 흥미있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것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독교 변증학자들인 루이스와 쉐퍼를 동일 지면에 올려 놓은 것이다{{) 실제로 루이스와 쉐퍼는 옥스퍼드 학생들에 의해서 함께 토론할 기회가 있었으나 쉐퍼의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 "C.S.Lewis & Francis Schaeffer: Lessons for a New Century From the Most Influential Apologists of Our Time"(1998년) 이란 제목으로 두 변증학자의 입장에서 공통점과 차이점 및 한계점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포스트 모던, 다원주의의 시대 속에서 변증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저자들(Scott R. Burson & Jerry L. Walls){{)Scott R. Bursons는 애스버리(Asbury) 신학교의 방송학 이사 이다. Walls 박사는 애스베리 신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아래의 이 신학교 홈페이지에서 이들의 신앙 고백이 웨슬리-알미니안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취하는 웨슬리-알미니안주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루이스와 쉐퍼를 동일한 선상에서 이들의 사상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이들에 대해 보다 명료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을 바탕으로 본 글에서는 루이스와 쉐퍼가 서로 견해를 다르게 하고 있는 몇 가지 변증학적인 주제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구원의 본질과 성육신에 대한 부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부분, 성경의 권위와 영감설에 대한 부분, 악과 고통의 문제, 그리고 비 신앙인의 운명에 대한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이러한 사상적 차이에 앞서 이들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은 이들의 변증학적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1. 루이스와 쉐퍼의 생애
루이스는 어렸을 때부터 학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환경이 주어졌고 그러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결국 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교제권은 대부분 지식인층이었으며 삶의 대부분을 글을 쓰며 가르치는데 보내었다. 그의 명쾌한 합리성 외에도 명료하고 살아 있는 심상과 자주 사용되는 유비는 그의 문학자로서의 탁월함을 보여 준다.
반면, 쉐퍼는 어린시절을 양친의 뜻에 따라 엔지니어 노동자로 준비해 가고 있었다. 회심하고 난 십대 후반에서야 그의 지적 훈련이 시작되었는데 육체적 노동에 익숙했던 것은 일상 사람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갖게 했고, 라브리가 노동을 중요시 여기는 성향에 반영되었다. 그는 출판에 뜻이 없었고 오히려 그의 열정은 각종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작의 대부분은 그의 강연 자료와 라브리에 모여든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 내용들에 기초하고 있다.
루이스는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 다양한 철학적 입장에 있었으나 쉐퍼는 처음부터 자유주의 신학과 그리이스 철학을 배격하였다. 신학적으로는 루이스가 앵글로 알미니안 입장에 있었고 쉐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한 칼빈주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추구와 열정은 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창의성과 미(美)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다는 점 외에도 이들을 묶어 주는 공통된 점은 암과의 실존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아홉 살의 나이에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서 암과 마주쳤고 나중에는 암이 자신의 아버지와 아내 조이를 뺏어가는 것을 보았다. 반면 쉐퍼는 인생의 마지막 육년을 암으로 고통을 받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2. 구원의 본질 문제
쉐퍼는 구원을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으로 이해하는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 과정은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칭의'와 현재 과정으로서의 '성화', 그리고 미래적 사건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때의 '영화'로 구성되어진다고 보았다. '칭의'는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갈보리 십자가 죽음으로 대신 받게 되고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는 법적 선언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반면 루이스는 칭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속죄는 용서, 죄의 전가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닮은 피조물로 실제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self-will) 곧 교만이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완전한 회개만이 구원을 가져온다. 완전한 회개는 교만에 차있는 타락한 사람에게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필요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가진 완전하고 선한 인간이 우리를 위해 완전한 겸손으로 회개하고 항복하고 죽으셔서 우리로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한 것이 속죄의 의미이다. 속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성을 극복하게 하며 하늘에 대한 새로운 기호(taste)를 얻게 하고 그 삶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도록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도덕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데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신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쉐퍼와 루이스는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속죄이고 구원을 위해서는 개인적 믿음이 필요하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한다. 하지만 속죄가 어떻게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거룩한 하나님과 화해케 하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랐다. 쉐퍼는 법적 측면에서 대속의 개념으로 이해 한 반면 루이스는 관계적 측면에서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쉐퍼는 칭의, 용서, 전가된 의, 죽음과 동시에 단회적인 변형을 강조한 반면 루이스는 회개, 재생, 분배된 의, 심지어 죽음 이후까지도 지속되는 신인(神人) 협동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 쉐퍼는 구원을 결정짓는 것을 칭의라고 본 반면 루이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회심에서 영화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중요성(significance), 예정 택함의 교리와 자유의지
쉐퍼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는 '무조건적인 선택'과 '무조건적인 완전한 예정'의 개혁주의 전통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입장과는 달리 역사와 인간은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로운, 제일 원인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의 자유에 대한 개념은 '자유의지론자의 자유{{) '자유의지론자의 자유'는 물리적인 세상에서 인과 원리의 자연법칙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람의 어떠한 행동들은 수행자의 행동이전의 충분한 조건이나 원인 없이도 대행자인 사람에 의해 선택되고 수행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완전한 예정'과 '자유의지론자의 자유'는 논리적으로 배타적이어서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해 쉐퍼는 성서가 두 원리를 동시에 가르치고 있고 성경 저자는 이 두 사실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평행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믿었다. 의식에 따라 자유로운 존재로서 의미 있는 선택을 하는 반면 의식 아래에서는 성령이 성부의 주권적 의지를 수행하는 완전히 균형잡인 모빌과 같은데, 이러한 자유의지와 예정의 패러독스(paradox)는 우리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와 겸손으로 경배하도록 한다고 믿었다.
루이스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상반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자유의지론자의 자유'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예지 예정 개념을 믿지 않았다. 예지나 예정은 우리의 시간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밖에 계시므로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의 시점으로 모든 실재를 동시에 인지하신다는 것이다. 다만 모든 일에 하나님은 섭리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 계획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관계를 세밀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하나님의 풀 수 없는 '신비(mystery)'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와 결정론 양자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에 이를 때까지 긴장을 가지고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이스는 주관적이고 비공식적이고 개별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시적인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철학적 영역에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신비'로 간주하였다.
4. 성경의 권위와 영감설
쉐퍼는 '성경의 무오설'과 '명제적 계시', '영감'에 대한 논쟁은 결국 전제(presupposition)의 문제로 생각했다. 일단 기독교 전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무한한 인격체인 우주의 창조자와의 언어적 교통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의 무오설은 쉽게 입증된다고 보았다.
기독교 전제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지어졌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의사소통에 충분한 능력이 있으시며 인격적으로 그의 피조물과 연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뿐 아니라 그 수단으로써 사람을 사용하여 언어로 기록하시기를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종교적인 진리를 주실 때 역사적 과학적 측면에서 명백하게 오류가 섞인 진리를 주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루이스는 성경의 무오설과 영감설을 기독교 본질에 있어서 부차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성경의 내적 일치성을 완전히 신뢰하고 모순적으로 대치되는 부분에서는 지속적으로 간구하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지옥 교리와 자유의지와 예정 교리 등에 대한 자신이 지닌 정서적인 불편함을 희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이스는 성경 전체가 기계적이고 획일적으로 과학적 수준의 무오함으로 압축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성서는 하나님 말씀 자체이기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되고 높여진 수송 수단으로서 활자 너머에 있는 실재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대적 기준, 즉 과학적 수준에 의해 성경이 판단되지 않도록 하고 원 저자들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성경의 문장 하나 하나의 정확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의 필수적인 신뢰성에 관심을 두셨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원 저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세세히 결정하기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합법적인 자유를 허용하면서 필수적인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과 자기 계시가 상호 지지하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는 구약의 어떠한 부분은 초기의 신성한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신화라고 보기도 했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해 오셨는데 완전히 발전된 신화와 완전히 발전된 역사의 결혼이 성육신이라고 보았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명백한 형태의 계시였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5. 악과 고통의 문제, 이방인의 문제
(1)악과 고통의 문제{{) 하나님의 공의와 죄악의 문제를 다루는 신정학에는 어거스틴 신정학과 이레네우스(Irenaeus) 신정학이 있다. 어거스틴 신정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였지만 타락이 있었고 배반에 대한 형벌 곧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는데 타락이 고통과 죄악을 가져온 원인이며 모든 죄악은 자유의지의 오용에 대한 직, 간접적인 결과로 설명한다. 이레네우스 신정학은 이 세상을 인격을 성숙시켜 영혼을 만들어 가기 위해 고안된 과정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원래 창조 때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성장이 필요한 상태로 지어졌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 고통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으로서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만들고 주형하는 도구라고 본다.
루이스는 사탄의 타락으로 인한 자연 세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경향성 없이 사람은 순전하게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하나님과 자율적인 교제를 위한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의 자기 주장으로 반역하게 되고 실제적인 죄의 책임을 가진다. 하나님은 원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고통의 재료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고치신다는 입장에 선 루이스는 어거스틴 입장과 이레네우스 입장을 혼합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고통은 하나님의 신성한 메가폰으로서 부유하고 만족스럽고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을 즐길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건강한 존재로 만드는 도구로 보았다. 하나님은 무작정 손자에 대해 자상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픈 상처를 도려내는 외과의사로 보았다.
쉐퍼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도 이 세상의 자연적인 해악에 대해 슬퍼하시고 심지어 분노하신다고 믿었다. 세상은 비정상적인 세계로 자연적인 해악과 함께 도덕적인 해악이 존재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어긋나며 그의 지속적인 바램에도 어긋난다. 그는 어거스틴 입장에서 죄악과 고통의 문제를 설명하였는데 고통의 대부분은 타락한 세상에 기인하지만 하나님은 죄악을 통해서 선하게 이용하시기도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해 배울 수는 있지만 고통 자체가 궁극적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2) 비복음화된 자들의 운명
쉐퍼와 루이스 모두 그리스도가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었다. 하지만 비 복음화 된 자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랐다.
쉐퍼는 모든 이들이 복음을 듣든 안 듣든 죄 가운데 있다고 보고 하나님은 비 복음화된 자에게 성경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도덕적 기준에 의해 판단을 하신다고 믿었다. 살아있을 동안 믿음에 대한 명백한 고백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모든 비 복음화된 사람들의 운명은 영원한 형벌이라고 보았다. 반면 루이스는 하나님은 다양한 형태로 은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모든 인간들을 자신에게로 접근시켜 인도하시는 아버지라고 이해했다.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마음의 정결함이지 인식의 세밀함이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빛과 진리는 하나님께로 나오므로 진실되게 빛을 찾는 자는 발광원을 찾게 될 것인데 이생에서의 신앙 고백 외에도 비 복음화된 이들이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해하였다.
6. 결론
본 글에서는 20세기 복음주의 기독교의 위대한 변증학자였던 루이스와 쉐퍼를 몇 가지 중요 신학적 주제에 근거하여 그들의 사상을 대략적으로 소개하였다. 책의 저자들의 비평은 배제하였는데 저자들은 쉐퍼 보다는 루이스의 변증학적 입장에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저자들 자신의 신학적 배경(웨슬리-알미니안 주의)에 의한 비평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루이스는 비본질적이라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극단을 피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다양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자들 모두에게 관심을 받기도 하고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합리성을 통한 기독교 본질에 대한 증거는 수많은 대중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C. S. Lewis가 국내 상황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 중에는 진리에 대한 배타성에 있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두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어느 한편을 선택하고 상대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소박한 분파주의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쉐퍼와 루이스가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포스트 모던, 다원주의 사회에 처하였다. 절대적인 실재와 가치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이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합리성을 변호하는 기독교 변증학 역시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반세기 전의 루이스와 쉐퍼를 오늘날 교조적인 자세로만 이해한다는 것은 순박한 일이 될 것이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듯이 변화하는 상황에도 당당히 복음으로 맞설 수 있는 기독교 변증학의 새로운 노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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