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니케아 회의시대/신8:10,11

제이비젼 2017. 5. 16. 21:05





  니케아 회의 시대야말로 숱한 부패로 점철된 카톨릭이 전무후무한 발전 가운데 가장 순수했던 시기였다고 보여진다. 극심한 박해 속에서 교권의 자유를 획득한 카톨릭은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교회를 제도적으로 공고히 하며, 동시에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교리의 일치와 정립을 서둘러야 했다. 그리하여 이 당시에는 많은 종교 논쟁과 종교 회의가 잇달아 열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성은 갈수록 나약한 기미를 보였으며, 카톨릭의 정신은 세속적인 것들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극심한 박해를 극복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은 그들의 역사관은 매우 낙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 카톨릭 교회의 추구하는 것은 이 세속 세계 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되었으며, 그 시작은 기존해 있는 교황제도를 더욱 공고히 함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그토록 대적관계에 있던 세속 문화와 우상 문화까지도 수용함으로써 그 영성이 극도로 비복음적인 것으로 치닫게 되었다. 

 


  니케아 회의 시대는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313년부터 그레고리 1세가 교황직에 오른 59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밀라노 칙령으로 이제까지 박해받던 기독교회는 점점 그 세력을 키워 나갔고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교리적인 논쟁이 계속되어 신학이 정립되었고, 교황권이 점점 강화되었으며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데 많은 이교적 요소들의 유입과 교회의 타락 등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은 더욱 극대화되어 중세교회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수도원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1. 신학의 정립


 1) 동서방의 교부들

 이 시기에는 많은 교부들이 등장했다. 대체적으로 동방의 교부들은 주지적(主知的) 성향을 띠었고 서방의 교부들은 주의적(主義的) 성향을 띠었다. 동방의 가장 대표적인 교부로는 아다나시우스(Athjanasius 296-373)가 있다. 그는 특히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외의 동방 교부들로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ia 260?-339), 시릴(Cyril of Alexandria 375-444)이 있다. 또한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들-바실(Basil the Great 330-379),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issa 332-395),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89)-은 아다나시우스의 사후 동방에서의 니케아 신앙을 수호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us 347-407)은 설교자로 유명했다. 한편 서방의 교부들로는 아리우스파와 결전을 벌인 힐라리우스(Hilarius 295-368), 교권을 가화시킨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불가타」(Vulgata)를 번역한 제롬(Hieronymus Jerome 346-420) 등이 있다.


 2) 교리 논쟁들

 이 시기에는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니케아 회의 : 이것은 아리우스(Arius)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 벌어진 삼위일체 논쟁이다. 논쟁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나님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유사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교회의 분열이 국가의 분열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325년에 직접 니케아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임을 확인했다. ② 기독론 논쟁 :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간에 계속되는 논쟁으로 그리스도의 '신앙양성'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큰스탄티노플회의(381)는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0-390)의 '인성제한설'을 정리하고 그리스도의 양성 모두가 완전하다고 선언했다. 에베소 회의(431)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주장을 정죄하고 시릴(Cyril 376-444)의 주장대로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성을 확인했다. 칼케돈 회의(451)는 유티케스(Eutyches)의 '일성론'(Monophysitism)을 정죄하고, 기독론의 표준 신앙문서인 '칼케돈 신조'를 작성했다. ③ 펠라기우스 논쟁 :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면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원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에 의한 구원 등을 주장했다.


2. 교황권의 강화


 1)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Constantinus 228-337)은 밀비안(Milvian) 다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를 계기로 하여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라 진정한 기독교인이냐 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지만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기독교의 급성장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그의 '황제교황주의'(caesaropopism)는 기독교를 이제까지 진행해 오던 방향으로부터 많이 틀어 놓았다.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특혜와 권리를 부여했고 이것은 지도자들의 권한 강화와 함께 타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2) 씨프리안과 레오 1세

 감독직에 대한 강조는 이미 2세기부터 있어 왔다. 클레멘트(Clement of Rome)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감독의 사도적 계승설을 주장했다. 그 후 씨프리안(Cyprianus)은 노바투스(Novatus)의 분리주의와 싸우면서 교회의 통일성과 그것을 가늠하는 기준으로서의 감독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는 심지어 교인의 자격을 감독에의 순종에 둘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 감독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후 레오 1세(Leo the Great 390-461)는 이전의 칼릭스투스(Calixtus)와 다마수스(Dama년)의 전례를 따라 마16:18,19에 근거한 로마 감독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주어진 기회들을 모두 교황권 강화를 위해 사용했다.


3. 이단적 요소의 유입


 교회의 급성장은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부정적인 현상들도 나타내 보였는데, 그것은 기독교도에게 주어지는 특혜를 누리기 위해 교회로 유입해 들어온 이교도들과 그들을 무조건 수용해 버린 지도자들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이다. 순교자를 존경하던 아름다운 풍속은 이교의 영웅 숭배와 결탁하여 성인 숭배 및 성품 숭배로 화(化)했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존경은 이교의 모신(母神) 숭배와 결탁하여 '영구처녀설', '하늘의 여왕' 등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천사 숭배는 성경이 분명히 금지하는 것임에도 결국에는 '공교회의 교리'(doctrina publica)가 되었다. 이외에도 구신축출(exorcism) 의식, 화상(畵像)과 성상 숭배, 연옥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수많은 이교적 요소와 의식들이 기독교 내에 유입되었다. 결국 중세로 들어가면서 이런 미신적 요소는 더욱 강화되어 수많은 교인들을 미신적인 신앙 수준에 붙잡아 두었다.


 큰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래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리고 문화낙관주의(文化樂觀主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박해받던 입장에서 박해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평화로움 속에서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남한의 1/4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주장이 자랑스럽게 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있어서도 세속 권력과 결탁하고 세상 물욕과 결탁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음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양적인 것에의 추구에서 벗어나 진정한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는 질적인 것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ity)를 회복하는 길이다.

 



 1. 니케아(Nicaea)

 터키 북부에 있는 이즈니크(Iznik)의 옛 이름. 이 고대 도시는 B.C.1000년경에 트라키아 이민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하는 고대 역사가도 있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알렉산더 대왕의 무장 안티고노스에 의해서 B.C.4세기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B.C.333년의 이소스 전쟁 후 리시마코스에 의해서 니카이아(Nikaia)라 명명되었으며, B.C.264년까지 비티니아(Bitynia)의 주도(主都)였다. B.C.74년에는 로마의 속주이던 아시아 주에 편입되어 발전을 거듭하였다. 325년에는 아리우스파의 비난에 관한 토의를 위해 제1회 종교회의가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다. 787년에도 성상파괴파의 비난에 관한 제7회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2. 수도원주의


 1) 수도 생활의 유래

 초창기의 기독교의 금욕주의자들은 수도사들의 조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수도 생활의 특징 중 많은 부분이 금욕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청빈, 독신 생활, 고행, 금식, 묵상, 기도 등 금욕주의자들은 사실 이 세상 속에서 살았던 수사들에 불과했다. 기독교인들이 점차 세속적으로 되어 갔을 때 금욕주의자들이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피해 갔던 것은 오리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수도원제도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 신자들이 거룩한 사람이 돼야 하는 사명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세 가지 의무를 지키고 신에게 온전히 헌신하며 공동 생활을 영위했다.


 2) 수도원 제도의 특징

 ① 청빈·순결·겸손·복종 : 초기 수사들은 기독교 금욕주의자들의 모범을 따라 청빈과 순결, 겸손의 덕목을 행했다.

 ② 고행 : 고행은 금욕주의의 실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고행은 감각적인 쾌락을 포기하는 형태를 취한다(순결, 독신, 금식 등). 노동·묵상·기도까지도 고행의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③ 노동 : 게으름이라는 악덕은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이다. 동방 교회에서는 4세기에 벌써 수사들이란 자기 손에 의한 노동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원칙이었다.

 ④ 기도 : 수사의 시간 중 상당한 부분이 항상 기도에 바쳐졌다. 이 기도는 사실상 시편의 명상과 암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주일의 며칠, 하루에 몇 시간씩 이 기도 시간이 분배되었다. 

 ⑤ 묵상 : 수도 생활에서 가장 엄격히 시행된 것 가운데 하나가 묵상이었다.

 ⑥ 독거(solitude) : 독거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묵상의 실천, 어떤 금지적 생활 등으로 이루어졌다.

 ⑦ 정주서원 : 수사가 자기의 전생애를 한 수도원에서 보내겠다고 서약하는 서원은 확정적인 관례는 아니었으나 점차 제도화되었다.


3. 칼케돈 신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의해 이루어진 카톨릭 신앙의 선언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 단성론을 지지하는 교회들을 제외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모두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것은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정통신앙을 충분히 기술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두 신조를 재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새로운 과오들을 공식적으로 거부해야만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데오토코스'(하나님을 낳으신 분)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될 수 있음을 암시한 사람들의 견해와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이러한 혼합에 의해 신성은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견해를 명시적으로 배제하였다. 네스토리우스와 동방 교회에 보낸 키릴루스의 교회회의의 서한들과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레오의 공한에는 이 점이 재강조되어 있다. 즉 아들들의 이원설, 신격의 소멸 가능성, 두 본성의 혼합,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은 천상의 것이거나 다른 어떤 본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는 주장, 성육신 이전에 두 개로 있던 본성이 성육신 때에 하나로 되었다는 주장 등은 모두 배척되었다. 


4. 이그나티우스의 생애

 그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는 몇몇 서신들로부터 모을 수 있는 내용 이외에는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고나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오리게네스는 단 한번 그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누가 복음에 관한 6번째 설교에서 그를 안디옥의 주교로서 베드로를 계승한 인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레나이우스와 동일한 설명을 하고 있다. 유세비우스 역시 이그나티우스를 제2대 주교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헌장(vii.46)은 베드로가 먼저 이그나티우스의 직속 전임자인 유도시우스를 임명했고, 그 다음에 이그나티우스를 임명했다고 밝힘으로써 두 개의 전승을 결합시키고 있다.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케아 회의/빌2:6  (0) 2017.05.16
콘스탄틴시대/요6:26  (0) 2017.05.16
초대교회의 이단들/요일4:1  (0) 2017.05.16
초기의 교부들/요1;1  (0) 2017.05.16
속사도 시대/딤후1:8  (0) 2017.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