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콘스탄틴시대/요6:26

제이비젼 2017. 5. 16. 22:58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은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아직까지도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의 일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로 부터 교회는 숱한 박해로부터 모면하게 되었으며, 교세의 엄청난 확장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반면에 완전한 기독교인이 아닌 황제의 자유를 표방하는 권한에 예속된 교회는 현저한 영적, 질적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교회가 박해와 순교를 모면하는 대신에 치룬 엄청난 대가였다. 이렇듯 교회가 세상 속에서의 안정을 위하여 세상 권력과 결탁한 경우는 교회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초에는 독일 국가 교회가 나치의 박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히틀러 정부와 결탁한 예도 있었다. 한국의 일반적 교회도 오랜 독재 정권하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 속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결코 세상 속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콘스탄틴의 등장과 밀라노 칙령은 교회와 유럽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전기를 제공했다. 그것은 단순히 이제까지 지속되어 왔던 박해가 끝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콘스탄틴의 칙령은 기독교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기독교회를 지원했고 그것은 교회의 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커다란 그의 영향력 때문에 학자들은 콘스탄틴의 치세(治世) 이후에도 교회는 계속해서 '콘스탄틴 시대'에 속해 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은 단지 긍정적인 면으로만 작용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의 정책은 교회를 더욱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에 들어가게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에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1. 콘스탄틴 대제


 1) 생애

 콘스탄틴(Constantinus 228-337)은 나이수스(Nais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로 디오클레티안 황제 때 서방의 부제(副帝)였으며, 갈릴레이우스 때 서방의 황제(Augustus)가 되었다. 클로루스는 306년에 사망했고 콘스탄틴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군대에 복무하여 무용(武勇)이 뛰어남을 과시했다. 그는 막센티우스와 밀비안 다리에서 전투하여 승리함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많은 호의를 베풀기 시작했다. 그는 323년에 리키니우스(Licinius)를 이기고 로마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323년에는 직접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330년에는 원래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리던 도시를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천도(遷都)했다. 그는 337년에 65세로 사망했는데 사망시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유세비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2) 밀비안 다리 전투

 콘스탄틴은 서방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막센티우스(Maxentius)와 밀비안(Milvian) 다리에서 일전을 치르게 되었다. 전쟁을 앞두고 어느날 정오에 콘스탄틴은 태양 위에 있는 십자가 표지를 보게되었고, 이와 함께 "이 표지로 승리하라"(in hocsignum vinces)는 글자를 보았다. 그날 밤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 표식을 기장(旗章)으로 삼을 것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결국 전략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틴은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믿게 되었다. 한편 콘스탄틴이 사용한 기장은 정확한 '십자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첫 두 문자인 헬라인 '키'(X)와 '로'(P)를 합성시켜 만든 것으로 '십자기'(十字旗, Labarum)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은 제우스신을 상징하는 2개의 도끼를 겹친 것(labrys)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콘스탄틴의 신앙관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가 기장으로 십자가가 아닌 십자기를 사용한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2. 콘스탄틴과 기독교


 1) 밀라노 칙령

 콘스탄틴은 313년에 리키니우스와 협상하여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그것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공인하고 특히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종식시키며 복원시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는 이 칙령을 통하여 박해시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고, 또한 대대적인 후원을 했다. 그러므로 이 칙령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계속해서 로마 국가 내의 모든 종교의 수장임을 가리키는 '대사제'(Pontifex Maximus)의 칭호를 유지했으며, 십자가가 아닌 십자기를 자기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십자기는 그가 원래 가졌던 태양신(Sol Invictus)에 대한 신앙과 기독교가 혼합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323년까지 태양의 상징이 든 동전을 사용했으며, 일반 역사가들은 그의 시대를 태양신 숭배의 극치 시대로 평가한다. 콘스탄틴은 전생애를 통하여 기독교 교사들이나 감독들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이, 자기의 신앙 생활을 스스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감독 중의 감독'이라고 자처했다.

 그는 교회 문제에 간섭하면서도 이교 제전에 참석하기도 하는 등 일관성 없는 태도를 취했다.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때 콘스탄틴은 완전히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의 하나님 숭배를 공존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콘스탄틴의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지, 그리스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2) 기독교적 업적

 그럼에도 그는 교회를 지원했고 기독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①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종식시켰고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허용했다. ② 기독교를 위한 법률들을 제정했는데 그것은 성직자에 대한 토지세 면제, 세속적 의무 면제, 일요일 준수, 박해시 몰수당한 지산의 환원, 교회가 유산 상속의 대상이 되게 한 것들이다. ③ 축첩, 간음, 잔인한 형벌 등 고대 풍습을 개혁하여 기독교적 기준을 제시했다. ④ 교회의 법률에 국가의 공인을 더함으로 교역자의 판결이 법적 효력을 갖게 하였다. ⑤ 예루살렘 성지 등에 교회를 건축하는 등 막대한 규모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⑥ 콘스탄티노플 천도로 기독교적인 수도를 건설했다.


3. 후대에 끼친 영향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지원 및 간섭은 '황제교황주의'(caesaropopism)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세례도 받지 않은 그가 '감독 중의 감독'으로 종교회의를 주관했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특혜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면서 황제의 간섭을 묵과해 버렸다. 그것은 결국 역사상 치명적인 정교유착을 가져왔고 교회 안에 세속적인 지도자들이 등장하며, 그에 대한 반발로 수도원적 금욕주의가 발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에 주어진 특혜를 누리기 위해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이교도들로 인하여 교회 내에 수많은 이교적 요소들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박해의 종식으로 '어용신학'(Official theology)의 등장, ② 향불·예복·성가대 등 예배에 변화가 일어남. ③ 유물이나 유품을 중시하는 미신적 신앙의 발전. ④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비성경적인 구분과 분리가 일어남. 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의 상실 등이다.


 콘스탄틴의 목적은 이전의 데시우스(Decius)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옛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시우스나 디오클레티안이 이교(異敎)를 통해 그것을 시도한 반면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그 주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결국 교회는 콘스탄틴에 동조함으로 양(量)적으로는 많이 얻었으나 질(質)적인 면에서는 손상을 입었다. 이처럼 순수한 복음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곧 타락의 지름길이요,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1.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전투

 당시 로마에는 네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있었는데, 동로마제국의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이다. 이들 네 사람은 각자의 마음속에 로마를 통일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막센티우스는 부제(副帝) 세베루스를 숙청하고 306년 왕위에 오른 후 이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등지를 원정하며 전쟁을 치루었다.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누스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고 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포고를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막센티우스와 밀비안 다리를 뒤로하고 티베르 강 앞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콘스탄티누스는 꿈속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시를 방패 위에 그려 넣도록 계시를 받았다. 결국 전쟁은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로 끝나고 막센티우스는 전사하였다. 


2. 콘스탄티노플

 B.C.7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식민지로 창건된 도시로 비잔티움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시가는 현재의 이스탐불의 동쪽 모퉁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의 돌출부에 있었다. B.C.51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었으나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그리스의 도시 동맹에 가입하고, 곧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벽을 확대하고 시내를 정비하여 330년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하였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395) 후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고, 성벽은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었다.

 그 후 서로마제국이 멸망(476)하자,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장 중요한 기지, 즉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204년 4차 십자군에게 점령되었으나 1261년 미카엘 8세가 다시 탈환했다.


3.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정책

 1) 제1기

 밀라노 칙령으로 전세계적 관용의 원칙을 발표한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회와 사제직을 이교와 동등한 수준에 올려놓기 위해 힘썼다. 그는 사원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했고 유산상속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동일한 특권을 주었으며, 또한 주일을 지키도록 하였다.

 2) 제2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반적으로 이교적인 제사와 전례 의식을 금지시키고, 교회의 확장과 건축을 명령하였다. 이 법으로 인해 기독교인 평신도들에 의하여 이교의 우상들이 파괴되는 등 그와 같은 성격의 열성적인 행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326년 그는 이교 사원을 제외한 모든 미완성된 공공 건물들을 가능한 한 빨리 완공할 것을 법령으로 공포했다.

 3) 제3기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차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건립하여, 수도를 옮긴 후에 더욱 심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니게의 헬리노폴리스에서 행해지던 부도덕한 종교 의식을 억압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또한 신탁과 기적적인 치유로 유명하던 시칠리아의 에게에 있던 아이스 쿨라피우스 신전을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일단의 남녀 사제들에 의하여 전해진 나일 강의 이단 종파들을 폐지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기 몇 년 전에는 이교 제사를 금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4. 일요일 준수에 관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Lord's day)로 정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다.

 이날은 유대교의 안식일 개념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안식 후 첫째 날을 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이날에 하나님께서 어두움과 혼돈을 물리치시고 창조를 시작하였고, 또한 예수께서 이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1년 칙령을 내려서 일요일을 예배드리는 날, 노동을 쉬는 날로 정하고 이를 반포하였다.

 즉 이날에는 공적 업무와 법원 개정을 중단하고 군대의 조련(調練)도 쉬게 하였다. 시골에서는 농업 이외의 모든 영업을 금하게 할 정도로 엄히 지켰다.


5.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국가의 수반이 교회의 수반이며 종교 문제에 있어 최고 재판관이기도 한 정치 제도를 '황제교황주의'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시작되어 로마제국에서 시행되었던 제도가 대표적이다.

 이는 나아가 동로마제국과 러시아에서 영구화되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보편교회의 수호자로 또한 보편교회의 행정적인 문제의 관리자로 행세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 황제교황주의는 러시아에서 보다 더 현실화되었다. 피터 대제는 교회를 국가의 한 기관으로 변형시켰다(1721). 그러나 러시아의 황제들이 자신이 교회의 '수반'이라고, 또는 특별한 교리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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