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에는 다양한 부류의 이단들이 성행하였다. 그것은 유대교의 뿌리가 워낙 깊이 박혀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바울의 해석이 여러 모양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방종교에 물들어 있던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 문제나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에 대한 기대와 좌절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이단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나 더욱 경건한 종교성을 강조한 엣센파 유대교에 영향을 입은 에비온파는 율법을 중시하고 바울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할례와 안식일과 예루살렘 성전 사상을 지닌 엘크사이트파는 천사의 계시를 믿고 금욕과 고행을 강조하며, 영지주의자는 복음보다 영지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이 되는 부분들을 다양하게 해석함으로써 복음 그 차체까지도 위협하게 하는 요소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단들은 유대교적 분파, 순전한 이교적 이단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1. 유대교적 분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을 유대적을 이해하려는 집단들이 형성되었다.
1) 에비온파(The Ebionites)
이들의 명칭은 '가난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기원에 있어서 엣센파 유대교와 관계가 있다. 에비온파는 구원론과 기독론에 이단로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보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예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이단적 기독론을 믿고 있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간주하며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2) 엘크사이트파(The Elkesaites)
이들은 유대적 기독교신자들로서 접신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다. 엘카이라는 사람이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시작된 이 집단은 이단적인 기독론과 구원론, 정경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신약은 바울 서신을 빼고 사용했으며,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예루살렘쪽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2. 이교적 이단
초대교회 당시에는 헬라 철학 사상이 이방 세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헬라 사상은 복음을 왜곡시키는 이단들을 발생시켰다.
1) 그노시스파(영지주의)
영지주의는 2세기에 성행했던 각종 종교적 이론들을 총망라한 혼합주의이다. 헬라어로 '지식'이라는 듯에서 유래한 영지주의는 복음 이상의 특별한 지식을 소유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헬라의 이원론에 사상의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부정하여, 영계는 선하고 물질계는 악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원론에서 감각주의나 금욕주의가 파생되었다. 또한 이들은 구약과 유대주의를 배격하고,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들의 이단사상은 성령보다 헬라 철학사상이나 신비주의적 동양사상을 중시한 결과였다.
2) 말시온파
이것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말시온에 의하여 형성된 이단이다.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물질을 죄악시하므로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각각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문제점은 기독론과 성경관에 있었다. 그는 가현설을 주장하였고 성경관에 있어서도 구약과 유대적 색채가 나타나는 신약성서들을 제외시켰다. 이러한 이단사상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진리들을 왜곡시켜 금욕주의적인 신앙형태를 낳았다.
3) 마니교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교주 마니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서 페르시아 성문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은 엄격한 계층제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니교는 창조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즉 빛과 어두움의 투쟁이다. 그리스도는 빛의 대표자이고, 사단은 어두움의 대표자이다. 또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한 반면, 마니는 그 순수한 정신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독론과 구원론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가 아니라 환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기본교리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들은 철저히 금욕주의적이었다.
3. 기독교의 분파
박해의 후유증으로 기독교 내에서는 분파운동이 발생하였다. 313년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배교자들의 처리 문제로 인하여 성별적 분파운동이 일어났다.
1) 몬타누스파(Montanism)
이들은 하나님과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었다. 문제가 된 것은 성령에 대한 부분이었다. 몬타누스는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고, 성령이 몬타누스 자신과 그를 돕는 두 여인,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세 사람의 예언자들은 특별하면서도 최종적인 계시를 받았으므로 기독교권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선지자적 영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렇듯 영적 엘리트의식에 빠져 있었고 말세 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도의 현세적 삶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노바티안주의(Novatians)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출신인 노바티안의 지도를 받은 분파운동이다. 그는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자들의 공동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특별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즉 살인, 우상 숭배, 박해서 배교, 간음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새 감독의 선출을 주장하고 기존교외의 세례도 인정하지 않았다.
3) 도나티즘(Donatism)
이 파의 직접적인 원인은 박해 때의 변절자 처리 문제였다. 당시 카르타고 감독들은 관용정책으로 배교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받아들였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온 운동이 곧 도나티즘이었다. 도나투스를 지도자로 시작한 이들은 기존교회가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선포하고, 오직 자기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는 영적 지도력이 풍부하여 한때는 그를 따르는 감독의 수가 27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7세기경 모슬렘의 침략과 정복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단의 형성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을 계시의 근원으로 두지 않고, 인간의 사상 체계나 문화에 맞추려는 시도나 교만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단의 도전은 오히려 교회가 점점 더 확고하게 발전하고 통일된 조직체로 성장해 가도록 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왜곡시키려는 운동은 교회사상 끊임없이 발생했으나 교회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부흥·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이단은 기성교회의 약점을 들고 나오므로, 우리는 그러한 점을 잘 살펴 보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1. 엣센파 유대교
엣센파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독자적인 유대인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아마도 외부 사람들에 의하여 불려진 것으로 아람어의 하사야, 즉 '경건한 사람들'에서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사두개파 사람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약성서에 언급이 있지만, 엣센파 사람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상세한 보도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요세푸스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엣센파 사람들의 숫자는 4,000명쯤 되었다. 모든 엣센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계명은 전체 공동체와 그 회원들의 의식적인 정결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바로 이스라엘의 순결한 공동체가 되려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2.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 발렌티누스는 영지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교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했으며 기독교 가르침을 헬라사상 및 동양사상과 결합시켰다.
그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이 악과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역사적 기독교 교회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 때문에 영지주의를 거부하였다. 모든 초점을 지고의 하나님(the Su-pre-me God)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현설은 참하나님인 동시에 참인간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인성을 모두 박탈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격을 거부해 버렸다.
3. 가현설
'…처럼 보이다'는 뜻의 헬라어 도케오(dok대)에서 유래한 말이다. 신약 시대를 전후해서 교회의 특정 종파에서 성행하던 교리로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양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가 육체로 오시지 아니했으며 그의 수난도 비실제적인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의 한 분파의 주장이다.
이것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서신, 세라피온(200년경)의 서신에 최초로 나타나 있다. ① 가현설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로서 당시의 동양적 이원론이 반영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신성은 물질적인 육체를 취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②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aninferior deity)의 작품이다. ③ 물질계는 악하다. ④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 ⑤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 ⑥ 부활이 없다.
4. 기독교의 공인(313년)
기독교의 공인은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가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인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공포함으로 이루어졌다. '관용의 칙령'이라 할 수 있는 이 칙령이 종교의 자유를 기독교에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발판을 얻게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가 이 칙령을 발표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년도에 있었던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 때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는데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기독교는 박해받는 지하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바뀌었고, 외형적으로도 상당히 확산되었다. 둘째는 이로 인해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끝으로 콘스탄틴의 등장으로 일련의 회의, 특별히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 신학이 집대성되었다.
5. 이단의 평가기준
초대교회의 이단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공통적인 통일성이 있었다. 복음은 하나님, 은혜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절대적인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므로 구속을 위한 성육신,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출발한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출발한 칭의론은 다른 복음, 즉 이단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사도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성육신이 절대적인 평가기준이었다. 이 기준은 적어도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2세기 이후에야 삼위일체론이 이단의 평가기준이 되었고, 어거스틴에 와서는 칭의론이 이단의 평가기준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적어도 17세기까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와 이단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주의가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면서 이단과 현대주의는 그 기준이 모호해지고 말았다. 이것은 20세기 초엽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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