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같이 직접 생활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눈으로 목격하였던 사람들을 우리는 사도라고 부른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들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 이 사도들의 뒤를 이어 사도들에게서 직접 예수의 이야기와 생애 등을 듣고, 그 가르침을 전수한 사람을 속사도 혹은 사도적 교부라고 부른다. 속사도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로마의 클레멘트, 이그나티우스, 폴리갑, 파피아스, 헤르마스 등이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 속사도 시대의 글들을 고찰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연구하고 있다. 서신들, 훈련지침서, 주석적이면서 신학적인 논문들이 속사도들이 남긴 글들의 장르이다. 이들이 남긴 글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8개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신학의 학파까지 진전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다양한 글 가운데에는 다양한 상황과 사상적 체계가 있었다. 그러나 다양성 뒤에는 통일성도 있었다. 서아시아 지역은 기독교가 주로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나 로마에서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경향으로 진전되었다.
속사도를 다른 말로 '사도적 교부'라고도 부른다. 이 명칭은 이들이 사도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속사도들의 글은 모두 8개가 남아 있다. 이 작품들은 서신들, 훈련 지침서, 주석적이면서 신학적인 논문들, 환상과 예언에 대한 묶음집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방어집들로 그것들의 성격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하여 속사도들의 글들은 초대교회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본 연구에서는 이글들을 중심으로 속사도 시대의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클레멘트와 아그나티우스
1) 클레멘트(Clement of Rome)
클레멘트는 제1세기 말엽 로마의 감독이었다. 그는 로마 감독으로 재직하던 96년에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린도 시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다시 분리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염려를 끼칠 정도로 반발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러므로 이 서신의 내용은 실제적으로 분열에서 벗어나 하나 되기를 권면하는 것이다. 기타의 신학적 주제는 최소한도로 취급되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도적 계승에 의한 권위를 주장하는 내용이다. 사도들은 영감을 통하여 교회가 확고하게 정립된 권위를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임을 알았고, 자신들을 계승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들을 지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이그나티우스는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사역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서신은 7개이다. 이 서신들은 그가 로마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죄수로 끌려가는 도중에 쓴 것이다. 그는 서머나에서 마그네시아, 트랄라스, 에베소 그리고 로마에 편지를 썼다. 드로아에서는 서머나인들과 폴리갑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를 썼다.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은 짧은 기간에 억압을 받으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이고 조직적인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주교와 장로를 구분하였으며, 영지주의적 이단을 반대하였다. 그는 117년 트라얀 황제 때 순교했다.
2. 폴리갑과 파피아스
1) 폴리갑(Polycarp)
폴리갑의 활동 시기는 약 69-160년이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에베소 다음 가는 상업도시인 서머나의 감독이었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그에게서 감독임명을 받았다. 폴리갑은 이그나티우스의 부탁을 받고, 「빌립보 서신」을 썼다. 이 서신은 이그나티우스의 서신과 제4복음서의 신학적인 흐름과 유사하며, 좀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구원교리의 중심에 놓으면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실재를 강조함으로써 이그나티우스 서신들의 진정성을 밝혀 주었으며, 또한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모으고 보존하였다. 그는 안토니우스 파피우스 황제 때 순교하였는데, 이 사실은 「폴리갑의 순교」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2) 파피아스(Papias)
파피아스 역시 요한의 제자였는데, 나중에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 되었다. 그의 활동 시기는 약 60-130년이다. 그는 자신이 들었던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을 모두다 수집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생각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그의 저작이다. 이 책은 전5권으로 되어 있으나 다만 몇 가지 단편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전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또한 마태복음이 원래 아람어로 기록되어진 것과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어록」에 기초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두 권의 복음서 저작자를 보증해 주었다. 이 책은 또한 두 사람의 요한, 즉 사도 요한과 장로 요한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3. 헤르마스와 디다케
1) 헤르마스(Hermas)
헤르마스는 1세기말에서 2세기초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로마에서 로다라는 부녀에게 팔렸던 크리스천 노예였다. 로다는 그를 해방시켜 주었고, 헤르마스는 결혼하고 장사하여 부자가 되었으나 박해 때 온 가족이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선지자로 있는 동안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편집하였다. 이것이 곧 「목사서」(The Shepherd of Hermas)이다. 이 책은 환상과 비유에 관한 책으로 5개의 환상과 12개의 명령, 10개의 비유의 3부로 되어 있다. 5개의 환상은 회심을 촉구하는 권면과 박해시 신앙을 굳건히 지킬 것을 권면했다. 12계명은 기독교인의 의무를 요약한 것으로, 헤르마스는 이것들을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확신했다. 10개의 비유는 환상의 가르침과 12개의 명령의 가르침을 한데 묶어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끊임없는 교훈이었다.
2) 디다케(The Didache)
디다케의 본래 이름은 「12사도의 가르침」이다. 이 문서는 1875년 이스탄불에서 발견되기까지 잊혀진 채로 있었다.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기원, 저자, 저작연대 등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다다케는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개의 주요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부분(1:1-6:2)은 '두 길 문서'(Document of the Two Ways)라고 부른다. 이 문서에 따르면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이다. 둘째 부분은(6:3-10:7) 일련의 예배적인 가르침, 즉 세례와 금식, 기도 그리고 성찬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셋째 부분(11-15장)은 일종의 훈련지침이다. 거짓 선지자의 문제, 성찬에 대한 문제, 감독과 집사의 선출, 세상의 마지막과 여기에 대한 준비 등이 다루어진다. 기독교 사상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무엇보다도 신학적 흐름을 따르면서 도덕주의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속사도 교부의 신학은 분명하게 특정한 신학의 학파까지 진전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의 신학적 학파 또는 경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많은 다양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 뒤에는 통일성도 없다. 각종 경향들 가운데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로 연결되는 지역은 주로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유대교 엣센파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로마에서는 이와 다른 유형의 기독교가 싹트고 있었다. 여기서는 기독교가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서 도덕주의나 율법주의로까지 진전되었다.
1. 금식에 대한 디다케의 가르침
세례식을 거행하기 전에 금식을 하도록 디다케는 요구했다. 일반적인 금식을 살펴보면 "그대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외식자들과 같이하지 말지어다. 그대들의 금식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반드시 할 일이다. 또한 외식자들과 같이하지 말고 주님이 그 복음서에서 명령하신 것같이 기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이 뒤에는 주기도문과 같은 원문이 그대로 인용되었고 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그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니다." 하루 세 번씩 이렇게 기도하도록 하라.
이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을 단지 요일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2. 세례 후에 지은 죄(헤르마스의 주장)
초대교인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죄는 성적 범죄였다. 초대교인들은 세례 후에도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은 문제가 대두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에 대한 확신을 경험했던 헤르마스는 세례 후의 범죄는 단지 한 번만 용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헤르마스의 이러한 주장을 방종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이후 좀더 많은 경험을 쌓은 기독교 공동체가 새로운 일상생활 규칙을 마련하므로 성숙된 교리로 발전하였다.
3.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2세기초 이그나티우스는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존경과 특권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서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가는 도중 그는 로마의 신자들이 자기를 구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계획을 반대하면서 로마에 편지를 썼다. 즉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오히려 나를 해치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입게 하라"고 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로마에 간 얼마 후에 순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며 호령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겠다. …나를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다오. …나는 하나님의 한알의 밀알이 되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4. 폴리갑의 순교
당시의 신자들은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도록 강요를 받았는데 모두 완강히 거부하였다. 완강히 거부하는 신자들을 고문과 죽임으로 박해했다. 특히 노령의 게르마니쿠스의 용기 있는 충고에 폭도들이 분노해서 "무신론자들에게 죽음을", "폴리갑을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폴리갑은 숨어 지내다가 발각이 되자 체포가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더 이상의 피신을 거부했다. 당시 재판을 주관하였던 총독은 그를 훈계하여 황제를 예배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만약 폴리갑이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폴리갑은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고 응수하였다. 폴리갑은 곧이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을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5. 엣센파(Essenes)
예수 생존 당시에 팔레스틴에 성행했던 유대인 공동체이다.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엣센파는 초기의 혁명적인 하시딤 사람들 내의 경쟁적인 분파에서 발전한 것들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엣센파는 아리스도불루스 1세(Aristobulus I)의 통치(B.C.105-104년)가 시작하기까지 예루살렘에서 활약한 일파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안네우스(Alezander Janneus)의 통치가 끝날 무렵(B.C.76년경), 엣센파는 하스몬가와 완전히 결별하고 다른 나머지 파들의 타협적인 정책을 신랄히 비판했다. 엣센파가 그들의 본부를 쿰란(Qumran)으로 옮긴 때는 바로 얀네우스의 재임기간중이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헤롯 당원들이 하스몬가를 최후로 패배시킨 B.C.36년까지 있었다. 그때까지 쿰란에 거주한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그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도시의 남부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엣센파들은 자기들이 새 언약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그들은 순결법에 매우 치중했으며, 공동생활을 했다. 또한 그들의 생계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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