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믿음 (2)
기복신앙과 성경적인 신앙을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은 참 종교적이었다. 작고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탓에 힘세고 강한 이웃국가의 공격과 수탈 대상이었기에, 더욱 초자연적인 전능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거대한 자연의 위력과 막강한 사회제도 속에서 봉건적인 신분차별을 겪으며 힘없이 살아가야하는 민초들이 의지해야하는 대상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네 조상들은 불교나 유교 뿐 아니라 도교나 각종 미신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열심히 믿고 섬겨왔다. 그 뿌리 깊은 신앙의 유산이 자손인 우리에게 전해 내려왔기에, 세계 역사상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부흥을 이룬 결과이기도하다. 그렇지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초창기에 전도의 목적으로 전통적인 신앙관을 차입해서 사용했던 후유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이란 말 그대로 복(福)을 비는(祈) 신앙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희생적인 기복(祈福), 혹은 치성(致誠)행위의 강도를 더할수록 천지신명이 내리는 복을 더 많이, 빨리 받게 된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행한 일을 당해 고심 끝에 무당을 찾아가면 성대한 굿을 하여 귀신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하거나, 아들을 낳거나 질병을 치유하는 등의 소원을 이루려면 영험한 산에서 목욕제계하고 백일기도나 천일기도를 하며 치성을 들여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 이유이다. 즉 기복신앙은 자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통해 신을 감동시켜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복을 얻는 신앙방법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방법이 교회에 찾아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새벽기도를 작정하거나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수가 많을수록, 혹은 십일조나 각종 헌금을 아낌없이 드린다면 기도응답이 신속하게 내려온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생각은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설교단상에서 전파하는 내용이기에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성경에 근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나들복으로 유명한 구약성경의 신명기에는 이와 비슷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이다.(신28:1~14)
그렇지만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은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통해 세상적인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희생적인 신앙행위 이전에 마음의 속내와 내면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나 의를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구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성실하게 일을 한다면 충분히 먹고 살만한 환경을 마련해주셨다.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아무런 걱정과 염려 없이,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신다.
자족과 절제, 오래 참음의 성품을 방치한 채, 탐욕과 방탕에 휩싸여 끝 모른 욕망을 채우려는 태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 게다가 기도하며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렇지만 기복신앙은 복을 비는 자의 성품이나 동기에 대한 조건이 필요 없다. 평소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도 검증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소원하는 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희생강도를 더하는 신앙행위만을 보고 있는 게 확연하게 다르다.
또한 세상에서 잘 살며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건장하게 오래 사는 것이 축복으로만 생각하는 전통적인 축복관도 성경과 다르다. 산상수훈으로 유명한 예수님의 축복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마5:3~12) 예수님이 선포하신 축복의 조건은 물론, 그 결과에는 우리가 원하는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축복의 내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오히려 가난하고, 애통해하고, 온유하고, 불쌍히 여기고, 의에 목말라하고, 마음이 깨끗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나 예배, 봉사, 헌금 등의 희생적인 신앙행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에 대한 축복의 결과도, 천국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인 축복만을 말씀하시고 있다. 배부르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내용도,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서 얻게 되는 축복을 말하고 있다.
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현세적인 축복은 한 마디 언급도 없으셨을까? 이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서 살게 되는 영적인 축복에 비해 우리가 소원하는 현세적인 축복은 구할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축복은 굳이 소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안에 살면 충분히 받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관심이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영적인 열매에 관심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을 추구하기를 바라고 계시다. 이같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채, 육체적인 욕심만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에 힘이 없고 삶에 능력이 임하지 않는 이유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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