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관련

찬양에관한 묵상

제이비젼 2014. 5. 26. 16:50

[세상 노래와 찬송]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노래가 있습니다. 문화에 따라 좀더 발전하고 발전하지 못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노래는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있습니다. 노래로 기쁨을 표시하기도 하고, 사랑을 전하며 슬픔을 나타내며,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노래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요, 시대상을 드러내는 종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에도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노래가 음을 재료로 해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노래는 일반적인 노래와 같이 음을 재료로 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만든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노래를 '찬미' 또는 '찬송'이라고 합니다. 찬송은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령한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흥분이 아닌 영적인 열심으로 불러야 하며, 가사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여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잘 알아 듣도록 불러야 합니다.

세상의 노래가 감정으로 부르는 것이라면 찬송은 영으로 부르는 것이며, 세상의 노래가 멜로디를 중요시한다면 찬송은 가사를 중요시하며, 세상의 노래가 그 시대상을 나타낸다면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찬송은 누구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다 부를 수 있습니다. 슬플 때에도, 기쁠 때에도, 승리의 순간에도, 실패의 순간에도 심지어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부를 수 있으며, 어떤 악기로도 다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무엇보다도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사 43:21).

-이화영 <내가 오늘을 사는 것은>


[참된 찬송을 위한 제안]

참된 찬송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기에 충분하지만 잘못된 찬송은 진노의 포도주틀에 들어가기 알맞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도는 찬송을 부르는 중에도 사단이 틈타지 않도록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럼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만한 참된 찬송을 드리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찬송이 자기도취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벨의 제사처럼 오직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열납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저 자기도취가 되어 흥을 내고 격앙되면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단에게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순수한 음악적 쾌락은 금지되어야 한다. 찬송은 분명히 목적이 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어서 스스로 즐겁고 불러서 스스로 감동을 받는 그런 음악적 쾌락은 금지되어야 한다. 경배하는 마음없이 자기의 음악수준을 뽐내거나 즐거운 마음만을 갖기 원한다면 그것은 사단과 교통하는 행동이 되기 십상이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입술로만 부르는 찬송을 경계하여야 한다. 찬송의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신앙만을 강조하다가 후일 예술성이 가미된 많은 찬송들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찬송에서의 중요성도 처음엔 찬송 가사의 의미에서 후일에는 찬송곡의 아름다움, 가락, 기술 등이 중요시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뜻없이 단지 입술로만 드리는 찬송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로 볼 수 있는 것이 그레고리안 성가라 하여 라틴어로 된 중세의 찬송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찬송이 아니고 단순한 예술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틴어를 모른다. 따라서 찬양대가 그 성가를 부른다면 아무 뜻없이 찬송을 부르는 기계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넷째, 찬송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세상의 노래를 듣기에 더 열심이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어찌 참된 찬양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 속에 사단은 절대로 침입하지 못한다.

지금 내 입술로 드리는 찬양은 과연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찬양이 되고 있는지 돌아보자. 찬양이라는 옷을 입은 나의 노래에 하나님이 아닌 사단이 기뻐하는 두려운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찰스 카우만-


[찬양하는 이유]

언제부턴가 우리 성도들에게 '찬양'이라는 말은 빈 상자처럼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들에게 이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잠깐만! 왜 주님을 찬양합니까?" "그러니까, 음, 아, 저….” 그는 자기가 왜 주님을 찬양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또 다른 교우가 “할렐루야!” 외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왜 ‘할렐루야’라고 하셨죠?” “에, 저, 음, 또….” 우리는 찬양의 이유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다윗은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찬양은 찬양하는 이유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말만 의미 없이 되풀이하면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이유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후안까를로스 오르띠즈 〈제자입니까〉-


[전선의 대향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이야기이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낮이 지나고 밤이 되자 살벌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때 참호 속의 한 프랑스 병사가 휘파람으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 이 노랫소리는 강 건너 독일병사의 진지에도 들려 향수에 젖어 있던 한 독일병으로 하여금 따라 부르게 하였다. 그러자 강 이편과 저편에서 모두 따라 부르더니 마침내는 온 전선이 쉴 줄 모르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대향연을 이루어 내었다. 그 순간만큼은 적군과 아군이 없었다. 양편 대장들은 서로 의논하여, 서로가 적인 이들 병사들이 세 시간 동안 같이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고 파티까지 열게 했다. 찬송은 미움과 적대심을 넘어 총부리를 내리게 하는 평화의 힘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모두 찬송하지 못함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무엇이 기쁘게 손뼉치며 찬송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무엇이 손을 들고 눈물로 찬송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나와 너의 체면이라는 허울로 포장된 교양 때문인가. 아니면 감격을 모르는 삭막한 마음 때문인가. 이제 모든 핑계 물리치고 찬양해야 하리라. 그리하면 가슴은 열리고, 그 열린 가슴에는 아침 햇살 같은 은총이 스며들 것이다.

-오몽근 〈당신의 남편은 집에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셨군요!]

1907년 조선을 잠식해 들어오던 일제의 이등박문이 결국 조선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군인들은 의병을 일으켜 지하로 숨거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었던 당시의 풍습과 달리 서양의 영향을 받아 단발을 한 기독교인들이 일본인들의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르던 때였습니다.

의병들은 기독교인들과 일본의 스파이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일본의 스파이들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나중에는 찬송가를 불러보게 했습니다. 찬송가를 잘 부르면 “기독교인이셨군요!”하고 악수를 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가 불신자들에게도 어찌나 감화를 주었던지 어떤 불교 신자는 찬송가에 매료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찬송이 없다면 날개없는 새와 같아서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없을 것입니다. 경건주의파인 모라비안교도의 신앙 본거지 헤른 후트에트에는 공동묘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육신의 죽음 후에도 다함께 아름다운 찬양을 하나님께 올린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의 찬양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올려지고 있는지요?

기쁠 때나 슬플 때, 감사할 때나 불평이 나올 때, 그리고 기도마저 할 수 없을 때 우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 찬양을 기뻐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영혼이 소생되는 것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김장환-


[삶으로 드리는 찬양]

우리는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고 찬송하면서 하루 10분 기도하는 것도 지겨워하고,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라고 찬송하면서도 패배당한 부상병과 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고,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리라’고 찬송하면서도 그 찬송이 끝나면 자기 자랑에 빠져 버리는 사람들이다.

‘시온성 향해 가는 성도들아’를 찬송하면서도 예배 시간을 지겨워하고,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찬송을 부르고 나서도 걱정 근심 중에 그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신경쇠약에 걸리기까지 하고,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를 부르고 나서도 이웃과 조그만 이익 때문에 다투며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이 과연 이런 찬양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은 단지 입술만의 찬양은 아닐 것이다. 그분은 입술의 고백 그대로 드려지는 우리의 삶 전체의 찬양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런 찬양만이 진정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성춘 〈광야의 식탁〉-


[찬송의 힘]

찬송에는 흔히 세 가지의 힘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위로 올라가는 힘(Up-going Power), 가슴 속으로 파고 드는 힘(In-going Power), 밖으로 뻗어가는 힘(Out-going Pcwer)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를 주님 가까이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찬송은 ‘위로 올라가는 힘’이다. 또한 성도 각자에게 위로와 평화와 회개와 기쁨과 결심과 용기를 일으켜 주는 찬송은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다. 위로 올라가는 힘으로서의 찬송을 신앙의 길잡이라고 한다면, 가슴 속으로 들어와 기쁨과 용기를 주는 찬송은 소망을 향한 길잡이이다.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찬송은 여기에 또 한가지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연합에로의 길잡이 역할인데 이것이 바로 ‘밖으로 뻗어가는 힘’이다.

찬송을 함께 부를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같은 가사, 같은 멜로디를 같은 리듬으로 같이 부를 때 이 힘은 여러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을 연결하여 하나의 큰 공동체를 형성한다. 각 사람의 영혼을 가깝게 해서 한 그리스도 몸의 지체임을 체험하게 한다. 즉, 교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음악이 지니는 이런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히틀러를 위시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음악을 최대한도로 이용했고, 대부분의 저항운동, 독립운동이 애국적 노래를 무기로 썼으며, 작은 클럽부터 큰 국가까지 사람을 단합시키는 데 음악 이상의 좋은 매개체를 발견치 못했던 것이다.

나의 찬송이 나와 하나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감화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힘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찬송을 더 열심히 부르고 정성을 다 기울여 불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다 함께 부르라”고 권고하였다(엡 5:19).

‘메시아’ 작곡으로 유명한 헨델은 오르간 연주자로도 탁월했다. 한번은 연주회가 끝났을 때 한 음악가가 격찬하며 물었다. “당신과 같은 연주는 두 다리와 열 손가락만 가지고 부족할 것 같은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헨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풍금을 연주할 때 내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연주합니다.” 물론 이 말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째 가는 계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막 12:30). 그는 전심전력으로 기울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자기의 생활에 그대로 적용시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만인을 감화하는 위대한 성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힘써 찬송을 부르지도 않고 찬송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 중의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최효섭-


[찬송을 찬송답게 부르려면]

첫째, 찬송가는 그 작가가 만든 그대로 정확하게 불러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찬송가라 할지라도 부르는 사람이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상실케 된다.

둘째, 알맞은 속도로 불러야 한다. 곡의 내용에 알맞은 적당한 빠르기로 불러야 한다. 찬송을 너무 느리게 부르면 예배 분위기를 저하시키며 또 제대로 악구를 끊어서 연주할 수 없어서 찬송의 격을 저하시킨다. 또한 찬송을 너무 빨리 부름으로써 찬송의 정중성과 품격을 격하시켜서도 안된다.

셋째, 바른 자세로 불러야 한다. 자세를 바르게 해서 찬송가를 가슴 앞 위치까지 두 손으로 받쳐서 신체의 중심을 바로 잡고 정성껏 불러야 한다.

넷째, 적당한 크기로 불러야 한다. 이웃 사람과 서로 조화되는 크기의 소리로 찬송을 통하여 교우간의 친교와 아울러 영적으로 한 마음을 이루며 노래함이 좋다. 고함을 지르듯이, 또한 너무 가냘픈 작은 소리로 부르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좋은 목소리로 불러야 할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정성을 다해 불러야 한다.

여섯째, 가사의 뜻을 잘 생각하여 부를 것이다. 찬송가 가사의 내용이 모두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미 영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니 부르는 사람도 가사의 내용을 잘 소화시켜 영적으로 불러야 한다. 결코 건성으로나 습관적으로 불러서는 안된다. 어떤 찬송을 부르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내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김종일-


[그분의 노래]

소년 목동 다윗은 사울왕의 궁중 악사가 되자 곧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하루는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다윗이 사울왕의 옥좌 곁에 놓여 있는 하프를 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이 “쓸모 없는 하프다! 저것을 나에게 만들어준 자가 나를 속였어! 아무도 저 하프를 탈 수가 없다. 엉뚱한 소리만 내거든!” 하고 말했다.

그래도 다윗은 그 악기를 잡았다. 그가 하프 줄에 손가락을 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름다운 음률(音律)이 춤추듯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연주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타지 못한 것을 너는 어떻게 탔느냐?”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노래를 하프로 연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프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저는 하프로 하여금 제 노래를 연주하게 했을 따름입니다. 저는 이 하프가 아직 젊은 나무였을 때 작은 가지 위에서 노래하고 따스한 햇살에 일광욕을 즐기던 기쁨을 회상시켜 주었지요. 하프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는 왕께서도 들으셨습니다. 저는 또 어느 날 사람들이 톱으로 그를 벨 때 얼마나 슬펐던지를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애석하게 여긴다고 속삭여 주었지요. 그러나 그 죽음이 그냥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려진 나무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하프를 만들었으니까요. 하프는 저의 말을 알아듣고 기뻐서 자기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에도 많은 사람이 그분의 하프로 자기네의 노래를 연주하려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참으로 역겨운 모습의 기독교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소수의 선택받은 자가 있어 그분의 노래를 연주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분의 영원한 기쁨의 노래,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겸손의 노래, 그분의 슬픔의 노래, 갈보리의 노래, 그분의 부활과 승천의 노래를! 그대의 몸으로 그분의 노래를 연주하라!

-리차드 범브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