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관련

찬양에 관한 묵상2

제이비젼 2014. 5. 26. 16:51

[총구를 움직인 찬송]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생키라는 사람이 델라웨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증기선을 타고 여행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노래를 청했고, 생키는 '목자의 노래'를 불렀다. 그 찬송이 끝난 후 어떤 거칠고 햇볕에 탄 얼굴의 사나이가 그를 찾아왔다.

"혹시 남북 전쟁 때 북군의 용사로 참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랬지요."

그의 물음에 생키가 대답했다.

"그러면 1862년, 달이 밝았던 날 밤 보초병으로 서셨던 것을 기억하시겠습니까?"

"네!"

생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대답했다.

"저도 보초병이었지요, 같은 날 밤에, 하지만 저는 남군이었습니다. 전 당신이 보초를 서고 있는 걸 보고 결심했지요. 오늘밤, 이 자는 내 손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저는 당신을 향해 총을 겨냥했지요. 환한 달빛 아래 서있는 당신을 컴컴한 가운데 숨어있는 제가 해치운다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까처럼 당신은 눈을 하늘로 향하고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빼고는 당신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요. '이 놈은 언제든 죽일 수 있어. 내 총알이 빗나갈 리는 없지'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이 바로 조금 전에 부르신 그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돌봐주시고,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합소서' 찬송이 끝났을 때, 저는 당신을 향해 총을 겨눌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당신의 모습은 적대감으로 꽉 차 있던 제 마음을 서서히 움직였습니다. 그때 저 사람을 늘 인도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나도 꼭 만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저의 팔은 옆으로 힘없이 떨구어졌습니다."

이처럼 한 그리스도인의 진실된 찬양은 강퍅한 영혼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찬양을 죄인들을 향한 사랑의 화살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56:4).

-브리안 캐버나우


[한결같은 감사의 찬양]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 박사의 일화이다.

어느 날 박사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서 쓸만한 것은 몽땅 쓸어갔다. 이튿날 이 소식을 알게 된 성도들이 위로차 방문했을 때 헨리 박사는 책상에 앉아 찬송을 부르며 공부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물었다.

"이런 때에 찬송이 나옵니까?"

그때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이는 두번 도둑맞았는데 한번 당한 것을 감사하고, 제일 필요한 책상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무엇보다 강도가 물건만 가져가고 내 몸은 무사해서 계속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헨리 박사는 가장 귀중한 보물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양이 우리의 형편이나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이런 마음의 찬양이 아니겠는가?

-로이드 코리


[산골 마을 깊숙이에도]

고요하기만하던 강원도 한 산골 마을에 어느 날부터 새벽 여섯 시와 저녁 다섯 시면 어김없이 복음성가가 고요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을 채워라. 계속 타게…"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이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한 젊은 전도사가 틀어놓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더니 2∼3일 후 어떤 젊은이가 찾아와서 '예수 노래' 그만하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는 정중히 사과하고 조금 낮은 소리로 복음성가를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작은 소리로 나가는 복음성가가 더욱 은은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전도사가 정확하게 시간에 맞추어 성가를 내보내니 마을의 아낙네들은 그 성가에 맞추어 조반을 짓고 저녁을 지었습니다.

성가는 마을 사람들의 심중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모두에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앰프가 고장이 나서 성가를 내보내지 못하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우선 아낙네들이 야단이었고 동리 젊은이들이 성가를 못 들으니 답답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전도사는 그렇다면 모두 모여서 성가를 불러보자고 했고 작은 시골 교회는 오랫만에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처음나온 사람들이 많았으나 성가는 모두 익숙하게 불렀습니다. 이 젊은 전도것부터 시작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찬양을 통해 잠들어 있는 심령을 깨우십니다. 우리 자신을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 찬양의 도구로 사용합시다!

-이호열


[찬양할 특권]

독일의 학자 클라오스 베스테르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은 글로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심한 핍박과 굶주림, 추위 속에서도 함께 찬양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겪는 일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회중 전체에게 일어난 일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강제로 옮겨지게 되었어도 그들은 찬양을 드림으로 늘 무장했고, 혼자가 아니라 회중과 함께 있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비록, 사형 선고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 찬양할 특권이 있었고, 찬양으로 인해서 결국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찬양은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난에 넘어지지 않도록 힘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찬양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놀라운 찬양의 힘을 얼마나 발휘하며 또 누리고 있습니까?

-마이어즈


[자연의 목소리]

영국의 시인이며 화가이기도 한 브레이크(William Blake)는 어느 날 해안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막 수평선상 위로 얼굴을 내미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나머지 황홀해져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보세요. 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옆에 있던 남자는 대답했다.

"예, 마치 황금덩어리 같군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예,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이 한 목소리로 그분을 찬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것은 세상을, 돈을, 나를 담고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중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그 아름다운 모습 속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되리라.

-E.C. 맥켄지


[삶 속에서 동일하게]

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안 되는 한 젊은 여인이 말로만 듣던 찬양 모임에 참석하기로 해 마음이 제법 흥분되어 있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은 만원이었고 그는 보조 의자를 구해 앉게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면서 기뻐했다. '찬양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은 완전히 찬양소리에 압도당했고 회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그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찬양했다. 그때 그 앞에 있는 한 자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너무도 기뻐하며 손뼉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드리는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여인은 생각했다.

'저 자매는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을 드릴까?'

그런데 얼마 후 늦게 오신 한 아주머니가 자리가 없어 기웃거리다가 마침 그 자매 옆 자리가 비어있음을 보고 말했다.

"저, 조금만 비켜 주실래요."

그때 손을 들고 찬양하던 그 자매는 방해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뱉더니, 아주머니를 본 체 만 체하고 계속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찬양 모임이 끝났다. 그러나 여인은 그 자매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입술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작은 친절조차 외면한 외식적인 그 모습을….

제 딴엔 교회 출석도 오래 한 것 같은데 말이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기뻐받으시는 찬양은 어떤 모습일까? 주님은 분명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드려지는 삶의 고백으로서의 찬양을 원하시지 않을까?

-조지 스위팅


[맹인의 하모니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맹인 청년이 지하철 운행중 가장 한가로울 시간대인 정오의 전철을 타고 서울과 인천을 하모니카로 찬송가를 불면서 매일 한번씩 왕복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하모니카를 불었습니다. 입술에 대고 그저 소리만 나게 부는 것이 아니라 입에 깊이 물고 곡조에 맞추어 베이스를 넣어가면서 애틋하게 또는 힘차게 불었습니다.

그는 다른 맹인들 같이 동냥그릇을 갖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동냥을 목적으로 하모니카를 부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떤 승객은 그의 윗 옷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불던 하모니카를 잠깐 멈추고 감사하다는 듯이 입가에 웃음을 띄우고는 했습니다.

자주 지하철에서 그를 본 교회집사 한 분이 그에게 동냥그릇을 갖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릇이 없기에 돈을 주기가 불편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돈을 구걸하고자 하모니카를 부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릴 때 고향인 시골집에서 눈을 다쳐 실명했습니다. 철이 들고부터 불구라는 사실에 말을 잃고 우울한 생활로 가족들의 근심을 샀습니다. 사춘기 때는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맹인이라 그것 역시 여의치 않고 미수에 그쳤습니다.

가족들이 그의 교육을 위하여 서울로 이사왔을 때 그의 집 옆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로부터 수시로 찬송가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찬송가 소리가 좋았습니다. 자연히 찬송 소리에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예배 중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맑게 하는 광명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새롭게 들려오는 기쁨으로 가득찬 교회생활로 그의 우울했던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한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은혜, 감사함, 기쁨으로 목이 메이면서 넘쳐나오는 찬송소리. 험한 세파에서 살면서도 오직 이 곳만이 청청한 온실 속의 삶 같아 그의 가슴은 찬송을 부르면 늘 가슴이 싸아해져 오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찬송가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낮 시간을 이용하여 전철에서 찬송가를 하모니카로 부르는 것입니다. 기타도 배우는 중이며, 곧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찬송을 할 계획이라고도 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자신의 맹인됨에 좌절치 않고, 도리어 아름다운 선율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하고자 하는 그의 신앙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는, 자기 혼자 그것에 도취되어 있기 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찬양은 혼자만의 감격은 아닙니까?

-최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