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란 무엇인가? /한경직
종교의 필요성
기독교란 어떠한 종교인가? 하는 이 문제를 특별히 기독교를 아시지 못하는 여러 동포를 위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종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과학시대인데, 종교시대는 이미 다 지나가고 과학시대가 되었는데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각 방면에 진보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없지 않아 있을 줄 압니다. 혹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여러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도 하고, 그렇게 되어 이 세계가 진보하면 그냥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온 세계 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터이고, 참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과학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산산이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여러분,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20시게의 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전 세계를 휩쓴
세계 제1차 대전 후 얼마가지 못하여서 전 세계 인류의 참회를 가져온 2차
대전, 그리고 이곳 저곳의 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냥 계속되는 냉전, 과학이 제일 발전되었다고 하는 이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세계인류는 언제 이 원자탄이 우리 도시, 아니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아니할까 하는 염려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가져온 세계의 결국은, 첫째 피비린내 나는 세계, 둘째 전 인류를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한 세계를 가져왔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포 여러분, 과학은 물론 필요합니다.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밥을 짓는데도 쓰고, 방을 뜨겁게 하는 데도 씁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 불을 쓰는 사람이 바로 써야지 잘못 쓰면 오히려 인류에게 큰 피해와 화를 가져오고 맙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은 올바르게 써야지 이것을 사람이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오고 맙니다.
물론,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원자탄 수소탄도 역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을 과학이 만들지 못합니다.
이 썩고 악한 사람의 근성을 바로 잡을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바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공허감
어떤 이는 흔히 말하기를, 우리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 문제가 아닌가? 빵을
달라고 대중은 부르짖습니다.
"나를 따라만 오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네게 빵을 주리라"고 어떤 지도자들은 외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도 옳습니다. 과연 "의·식·주"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정말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할 것은, 이 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과연 그 생활에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공산국가에서는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습니다.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그 독재 아래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까?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유를 우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나라는 아마 제 생각에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은 참된 민주주의 정책 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미국 삶에게는 참된 만족이
다 있을 줄 압니까? 바로 오늘 아침에 제가 어떤 책을 들쳐보니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껴서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육신 만이라 할 것 같으면, 아마 밥만 먹고
옷만 잘 입으면 만족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상한 불길,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조건이 만족한다고 할 지라도, 이 사람에게 다른 조건, 이 영적 조건이 없으면 그는 언제든지 텅 빈 느낌, 공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떡만 먹으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 같이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 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탐구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고야 합니다.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갑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오펜하워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이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 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 들어 공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 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아마 어떤 빌어먹는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 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그 때에, 쇼오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어? 아 내가 그걸 알면 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장례식 주례를 맡아 갔었습니다.
그때 한 오십 세 되는 여자 교우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방금
출관(出棺)을 하려는 직전에 만주에 가 있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이 아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관을 출관 못하게 그냥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부짖는 말이,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인생이 다 산후에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사고(四苦)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옵니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대단히 등한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참된 종교의 신앙심이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죽음은 초막에나 궁궐에나 다같이 옵니다. 노인에게나 청년에게나
같이 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란 이름 아래 별별 것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누렇다고 다 황금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합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인간 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지금 기독교 하면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예수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교파를 따라서"장로교"니 "감리교"니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첫 이름, 처음에는 우리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그 첫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제일 쉬운 줄 알아서 첫 이름을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첫 이름
첫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복음'(福音)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우리 기독교 성경을 읽어보신 이가 계신지 모르지마는, 성경 가운데는 구약과 신약 두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의 신약이 우리 기독교의 내용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펼쳐보면 거기 처음 네 책은 전부'복음'이라고 하는 말로 씌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 복음이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또 마가복음 1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기 전에 '복음'이라고 불렀는데, 여러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론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 말로 하면, 그저 '기쁜 소식', 지금은 '소식'이란 말을 영어로 그냥 써서 '뉴스(news)'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말로 표현하면 '좋은 뉴스'입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부를 때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전에 아테네 사람들이 흔히 새 것을 듣기 좋아해서, 언제나 뉴스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누구나 뉴스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게 될 때 뉴스 시간을 좋아해서 누구나 뉴스 시간을 제일 많이 듣습니다. 또 우리가 신문을 왜 사서 늘 읽습니까? 그 가운데 뉴스가 있는 까닭입니다.
벌써 45년이 거의 됐습니다마는, 그 때에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올 때,그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어떤 이는 기뻐서 날뛰다가 뇌출혈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큰 뉴스도 있고 작은 뉴스도 있고, 흔히 언론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가령 금년에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다고.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혹 이런 생각을 더러 해보셨는지요.
이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에 제일 큰 뉴스가 과연 어떤 뉴스였던가 말입니다. 가령 역사적으로 '동양'하면 동양에서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던가?
징기스칸(成吉思汗)이 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뉴스, 물론 굉장했을 것입니다.혹은 서양으로 말하면, 나폴레옹(Napoleon)이 온 유럽을 지배하는 그 뉴스였던가? 혹, 컬럼버스(Columbus)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처음으로 새 대륙을 발견한 그러한 뉴스였던가?
다 굉장한 뉴스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신라의 반도 통일,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뉴스, 신문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큰 뉴스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뉴스 가운데는 크다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여기 1950년의 6·25사면, 물론 전세계를 통해서 큰 뉴스입니다. 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큰
뉴스라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일 큰 뉴스가 될뿐더러 제일 좋은 뉴스, 그런 뉴스가 무슨 뉴tm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 아무리 좋은 뉴스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 가령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참 좋은 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 삶들에게야 그것이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슬픈 뉴스이겠지요.
어떤 뉴스는 크고 좋은 뉴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만 좋은 뉴스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못 되는 뉴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또 제일 기쁘고, 또 제일 좋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요,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국가에게나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좋은 뉴스가 무엇인가?
이제 그런 뉴스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주 최대의 뉴스
여러분, 기독교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큰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들은 모든 뉴스가운데 제일 좋은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어떤 민족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저 북빙양(北氷洋) 근방에 사는 에스키모에게나, 남양군도에 사는 흑인들에게도,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물론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그냥 옛날에는 '좋은 뉴스'라고 그랬습니다.
자, 이제 좋은 뉴스의 내용을 간단히 여기서 말하고 또 이 앞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 볼까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좋은 뉴스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쓴 말씀이 우리
성경(聖經)에 한 절 있습니다. 혹
예수를 믿는 이는 어느 성경구절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뉴스는 누구로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을 본래 지으시고, 인간의 운명을 주장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섭리하시는, 유일무이하신 대 주재 하나님께서 하신 일, 이런 우주적 뉴스를 전에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과연 큰 뉴스입니다. 제일 큰 뉴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랑
"이 세상"은
세계란 말입니다. 물론 세계라 하면 온 지구를 가리킨 말입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금수도 있고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사랑하셨습니다. 세계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마는 특별히 세계 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을 잠깐만 생각해 보세요, 민족과 민족이 서로 미워해 싸우고, 서로 죽이고 하는 이런 세상입니다. 슬픔 많고, 미움 많고, 고통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즉,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귀한 것을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아마 우리의 자녀일 것입니다. 자녀 가운데 외아들이 있다면, 외아들처럼 귀한 것이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단 말입니다. 무엇 하려고 이런 사람을 도와주시고, 이런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 이거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과연 천지가 진동할 만한 뉴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물론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만 잠깐 생각하여도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독생자 그리스도의 종교요, 믿음의 종교요,영생의 종교입니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가장 쉽게 말하면, 제일 큰 뉴스라고, 제일 좋은 뉴스라고, 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를 단순히 복음이라고 일컬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또, 뉴스의
내용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경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말씀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이 뉴스를 좀 더 해설해야 되겠습니다.
이 뉴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뉴스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믿어 왔습니다. 또, 우리 한국 사람뿐 아니고, 서양 사람들도 동양 사람들도 거의 다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날에도 혹 어떤 사람들, 또 특별히 근자에 와서는 공산주의를 신봉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득이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잠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신론의 우매(愚昧)
여러분, 잘 생각해 보셨는지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대단히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기가 심히 곤란한 이론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론, 곧 유신론에 대한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그렇지만 무신론에 대한 논증, 곧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하는 논증은 사실 전 우주와 전 우주의 역사를 탐색해서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쉽게 예를 들면, 우리 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있는데, 갈매기라는 새가 있다는 그런 논증은 만일 어떤 바닷가에서 그 갈매기가 남긴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이것을 보니까 갈매기가 한국에 있지 아니하냐고 이렇게 논증하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없다고 논증하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천 지방에 만일 갈매기가 없다는 것을 다 증명한다 할 지라도 부산 근방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목포 근방에 있는지, 38선 이북의 원산 근방에 있는지, 진남포 근방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갈매기가 사실 한국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면, 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답사해서 증명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면, 우선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모든 다른 별, 유성과 항성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가서 증명하여야 되겠고, 또 지금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없지만 옛날에 계셨던 증거가 있어도 안 될 터이니까, 전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될 것입니다.그러기 전에는 무신론의 논증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자(全知全能者)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가지고 70년도 못사는 사람이 함부로 이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생각해
보세요.
가령 무신론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주와 시간을 만든 이는 없습니다. 이 우주와
우리 인간의 두뇌의 고안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두뇌라는 것도 한갓 물질분자의 우연한 배합으로
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물질문자들이 그저 우연히 모여서 된 그런 두뇌의 사색작용(思索作用)을 우리가
과연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두뇌에서 나오는 무신론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무신론 혹은 유신론은 무신론 자체가 그 무신론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과 당착을 모르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셋째로, 또 생각해 보세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인 이론입니다. 부정적 이론입니다. 여기 어떤 관념 가운데, 가령 어둡다고 하든지, 거짓되다고 하든지, 구부러졌다고 하든지 하는 이런 관념들은 다 부정적 관념입니다. 이 부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긍정적 관념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긴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빛이 없으면 어둡다고 하는 말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또, 거짓이라는 것도 참이 있기에 거기에 대한 부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참이 없으면 거짓이란 말도 없을 것입니다. 또, 구부러졌다는 것도 공은 것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구부러졌다는 말도 생기고,그런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어둡다고 하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빛이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거짓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부러졌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바른 것이 있는 증거입니다.
사실 무신론이라고 하는 그런 부정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지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 시편 14편 1절에 어떻게 말씀했는지 아십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어리석은 이는 별로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 어리석은
것은 여러분께서 잘 계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1956년 1월 10일호 타임(TIME)잡지 종교 난에, 미국의 여론조사로 유명한 갤럽(Gallup)박사가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을 발표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시민들 중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왜 믿느냐?"를 물어 보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국 시민 가운데 96%다시 말하면 100명에 96명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또,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제일 많은 이유부터 열거해 보면,
첫째로, 우주의 질서와 그 위대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라는 대답이 제일 많고.
둘째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하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을 보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넷째로, 내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으실 때 혹은 이런 대답, 혹은 저런 이유로써 하나님을 믿으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
지금까지 논술한 것으로, 기독교는 좋은 뉴스, 즉 복음(福音)이란 말씀과, 또 이 뉴스는 하나님에 대한 뉴스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도 있기 때문에 이 무신론이라는 이론이 이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몇 가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 이유를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장 19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음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첫째로,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 우주를 바라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시간에 우리 속에 보여 주신 그 하나님의 자체를 잠깐 찾아볼까 합니다.
인생의 종교 본능
첫째는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료가 있습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그렇고, 서양에도 그렇고, 아프리카에도 그렇고, 또 현재 남양군도에도 그렇고, 또 현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사회 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데는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이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믿지 아니하는 형제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도무지 하지 않지만 몇 해 전에 38선을 몰래 넘어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괴뢰군(傀儡軍)에 억지로 붙들려 나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괴뢰군과 함께 몰려서 유엔군이 북진하여 올라갈 때, 저 삼각산 어떤 골짜기에 숨었는데 유엔군 비행기들이 대 편대를 지어 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 소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저 공산당들과 정치보위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랍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은 불치(不治)병적(病的)으로 종교적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교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습니다.
가령 눈을 보면, 눈이 필요하게 쓸만한 빛이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눈이 소용이 없습니다.우리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가 들을만한 소리가 있습니다.
또, 우리 사람의 육체를 가만히 보면 감각이 있습니다. 가령 감각하는 기관, 눈이든지 코든지 하는 감관(感官)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냄새가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우리 사람에게 눈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속에 못이 혹 있는 수가 있는데, 그런 못 가운데 사는 고기는 다른 것은 다 있지만 눈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캄캄한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감관이 있는 것은 벌써 대상이 있는 까닭에 감관이 생긴 줄 압니다. 빛이 있어서 눈이 생겼고,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긴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고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는 영혼으로써 동경하는 이런 마음, 부인하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욕망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입니다.
왜 몸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위에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仰望)하고 동경합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환자입니다.
우리는 다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소경은 빛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 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성
다음에 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둘째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아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 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허지만 아주 마비는 안 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 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길을 갈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할 때는 칭찬해 주고, 잘못할 때는 책망해 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양심은 교양의 산물이다." 또는, "환경의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 요소를 다 제해 부리고도 그 속에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생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법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 법칙과의 관계와 우리 사람과 도덕적 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되었음으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혹은 아침 일찍이 깨어서 고요히 자기를 살펴볼 때는 누구나 이 양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 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우주의 원인
그리고, 지금은 로마서 1장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곧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대로 안되면 과학이 성립 못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은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 이렇게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밖에 없는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고, 요새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의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 전체가 몇 해 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그것을 측정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라늄 원소의 그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 보고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33억 5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 전체의 연령은 약 백억 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한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는가?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느냐?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식물도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신입니다. 하나님이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수학을 좀 공부해 보신 분은 무궁대(無窮大) 또는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입니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무한대로 같습니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경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 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믿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고안(考案)
또,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살펴보면 되는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꼭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의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 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성군(星群:별무리) 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 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 하여 빙빙 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습니다.
또, 보십시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나?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게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랐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 갔다 하지요.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저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갔다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데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 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지요. 햇빛에 쪼여서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 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 온 다음의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 위의 먼지를 누가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 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막에 떨어져서는 풀이 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은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깨끗이 소재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 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 거기 호수 옆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으로 만들었더군요.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바늘이
돌아갑니다. 꽃시계입니다. 이 꽃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안 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액나스티즘 즉 불가지론(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穹蒼)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總察)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를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서도 순천(順天)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 신앙을 전파하여 우리 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예수 님의 신성(神性)
지금은, 예수는
누구이시며, 그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물으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각각 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엘리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예래미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세례 요한, 또는 선지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더이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일어나며 하는 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 곧 구주라는 말입니다.
이 대답은 모든 제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답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그 당시의 사람들처럼 전지자 중의 하나, 다시 말하면 성자
중의 하나, 혹은 위대한 종교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실상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닙니다. 또, 그와 같은 의견은
이론적으로 성립도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도덕적 사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위대한 종교가 가운데 한 분이란 것도 틀림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는 과연 성인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이 산상보훈을 보든지 그의 순결 무흠(無欠)한 생활을 볼 때에 누가 예수 님을 성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산상보훈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씀도 가르친 것이 많습니다. 가령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노라, 내가 죄를 사하여줄 권세가
있노라."
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직접 사하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는,
"내가 장차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이요 3일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
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실 살아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이가 바로
승천하시기 전에 말세에는 자기가 다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본 사람은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보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입니까? 또는,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를 도덕적 인물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기자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정신병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님에 대하여 감히 이런 생각이라도 하여 볼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인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면 그는 정녕 사람 이상입니다. 사람만은 아닙니다. 과연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는 만 유의 주로 만 왕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도덕적 위대한 종교가로만 믿고 그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은 도무지 성립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요, 곧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제 그의 하신 일을 간단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하신 일을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하나님이 경륜이 어떠하신 것이며, 우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가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진리를 우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실제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생활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이 뜻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물론 제일 크신 일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만인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일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실인 십자가의 뜻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었습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옳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서 이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결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사랑으로써 세상에 보내시고 만민의 무거운 죄의 짐을 그의 어깨에 지우셨습니다. 그는 만민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갚았습니다.
십자가의 속죄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죄는 주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단순히 그 다음부터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은 자기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는 회개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지었습니다. 죄대로 갚으면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말씀은,
"네가 죄를 지었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죄를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너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가 있는데, 네가 네 죄를 대속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정죄(定罪)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살 때에 무슨 죄를 지어서만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받을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길을 내가 거역하고 나는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를 믿지 않는 까닭으로써 결국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지 않는 까닭으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을 제가 읽을 때 직접 들으세요.
요한복음 3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만 그
심판 아래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36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느니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고 안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지금 어떠한지, 과거 어떻게 많은 죄를 지었던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은 이미 크게 열렸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 곧 좋은 뉴스인데, 뉴스의 골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이 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 생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으라고 하였는데, 영생이란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보통으로 영생하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생의 한 부분이요, 전체는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은 지금 현재, 당장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를 영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현재에 소유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요한 1서 5장 12절을 읽으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곧,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이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뜻을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곧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영접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영생을 그 마음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 불멸의 생명인 까닭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마음에 계시게 되면, 그 사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과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없어지고 영적으로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 변화를 가리켜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곧, 새로운 새 사람, 다시 말하면 새 마음, 새 생각, 새 사랑,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은 '신생' 혹은 '새로이 안다', 또는 '중생',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령 쉽게 말하면, 어린애가 어두운 모태 속에 있다가 광명 한 세상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육의 세계에 있다가 영의 세계로 옮겨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이렇게 나옴으로 세상에 옵니다. 다른 방법으로 올 수 없습니다. 출생함으로 옵니다. 역시 이 신생, 거듭나는 것도, 영적 세계에 낳는 것도 거듭 영으로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천국은 그저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생 하여야,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낳는 사살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에게는 산고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그 자체는 즉각적으로 되는 것과 같이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으려고 할 때에 특별한 영적 고민도 있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고,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와 애통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영접하는 중생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은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 누구든지 참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 이 시간이라도 영접하면 즉각으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양이 아닙니다.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진리를 깨달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빈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마치 곤충 세계를 관찰해 보면 유충이 변하여 성충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온전한 변화가 있습니다. 유충으로 있을 때, 즉 벌레로 있을 때는 땅을 좋아하고 햇빛에 나왔다가도 땅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벌레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한번 변화하여 나비나 또는 벌 같은 것이 될 것 같으면 땅속에는 살 수 없습니다. 땅 밖에 나와야 합니다. 햇빛을 보아야 합니다. 날아 다녀야 합니다.
중생자의 변화
중생한 사람의 경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에 육에 속해서 땅에 속해 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특색이었지만, 한번
주님을 영접한 후, 성신으로 거듭나게 되면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 특성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중생한 사람은 자기도 중생 한 줄
알고 또한 다른 이도 알게 됩니다.
요한 1서 5장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이라."
중생이 있으면, 이미
중생 한 후에는 내게 영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중생 한 것을 아십니까?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중생 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함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고 한다면, 그 가족으로 출생해야
합니다. 태어나야 실상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유산,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온 천지 만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지금도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지금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하십니까?
마음 문을 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신학도 있습니다. 신조도 물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위대한 도덕적 교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 기독교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최대의 뉴스입니다. 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 기쁜 뉴스를 다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한두 시간에 이 기쁜 뉴스를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이 뉴스를 좀더 아시고, 기독교의 진리를 좀 배우려고 원하시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 이웃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둘째는, 성경을 읽으십시오. 특별히 신약전서를 읽으십시오. 그와 같이 하면 여러분은 이 뉴스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끝
'K·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뢰아 귀신론의 비판 (0) | 2016.03.29 |
---|---|
루터95개조항 (0) | 2014.09.02 |
교회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0) | 2014.09.02 |
교회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0) | 2014.09.02 |
현대 교회 은사주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 (0) | 2014.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