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한국 기독인들은 '궁극적인 복'보다 '작은 복'인 창대에만 매달려
[질문] 교회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기독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복
한 사람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해야 할 때, 저는 그 사람이 자주 쓰는 말이 무엇인지 살핍니다. 자주 쓰는 말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세계관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단체의 특징을 파악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교우 중에는 교사가 많습니다. 이들은 간혹 모임을 마칠 때, 무심코 "목사님 종례하시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교사라고 밝히지 않아도 '종례'라는 말 한마디로 교사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기독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아마도 '복'이지
않을까요. 예배 시간에 '복'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지를 살펴보면 놀랄 정도입니다. 특히
설교와 기도 중에 '복'이라는 말을 빼면 앞뒤 연결이 잘
안 될 정도로 기독인들은 '복'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합니다.
성경에도 복에 관한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정점인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 1:28)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창 12:1~3)으로
살 것을 명령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산상 수훈은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산상 수훈의 시작도 '복(8복)'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말세에 대한 예언(預言)이자,
말세에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받을 7가지 '복'에 관한 기록(계 1:3,
14:13, 16:15, 19:9, 20:6, 22:7, 22:14)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복은 성경의 주요 주제입니다.
문제는 기독인이 사용하는 '복'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의 차이
기독인이 사용하는 복에 대한 정의와 이해는 성경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인이
원하는 복의 내용은 국어사전의 정의에 가깝습니다.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복의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입니다. 한마디로 풍족한 삶을 말합니다. 사실 멋있게 표현해서 '풍족한 삶'이지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대박, 출세, 합격, 만사형통, 부자
되기'와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정의하고 있는 복은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주신 복은 땅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문화 명령'입니다. 즉 사람이 청지기로서 에덴동산을 돌보고, 삶에 필요한 경작을 해 나아감으로 문화적 발전(톨레돗)을 시키는 임무를 맡은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후손)를 통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창
22:18) 그래서 사도행전 3장 25절은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복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줍니다. 출세한 사람, 권력자, 대학자, 부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계 1:3)가 복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창대의 복과 진정한 복
물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복에는 분명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으로 가나안에 왔지만, "창대케 하리라"(창 12:2)는 약속에 따라 사병 380명을 소유할 만큼 부하게 되었고(창 14:14), "하늘에 별만큼 자손을 주시리라"(창 15:5)는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창 21:3)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창대의 복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받은 창대의 복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하신 복에 비하면 작은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 기독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복'보다 '작은 복'인 창대에만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득 담긴 큰 복, 복의
근원이 되는 복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물질적인 복, 가시적인
복을 추구함으로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사회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휴암 스님은 1987년에 출간된 <한국
불교의 새 얼굴>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했습니다. "복에
환장한 한국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느냐? 나는 오늘의 불교인들의 생리에 저항하고 싶다. 설령 불교가 오늘의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신자가 1,300만
명에서 130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여지없이 타락된 물질주의 복 사상을 철폐하는 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복에 환장한 불교 신자들아!" 이 말이 과연
불교에만 해당되는 말이겠습니까.
교회에서 복에 대한 정의가 분명해지면, 많은 기독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말은 많은 기독인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보다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 출석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기독인은 '자기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신앙'과
그것을 '부추기는 목회'에 대해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땅을 하나님 뜻대로 지키는
청지기로서의 복', '모든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복', '내면적인
성숙과 이타적인 삶의 복',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복'을
누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행복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정성규/ 부천 예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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