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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본래모양은

제이비젼 2014. 8. 30. 17:55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본래모양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주일 예배 때 직접 입으로 고백해야 하는 사도신경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의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서 매주 암송되고 있다. 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사도신경이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간단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게 그 한 가지가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 사도신경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껏 알려진 내용은 거의 없다.

교회 역사학자들은 사도신경이 4세기 이전에 서방교회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느 전승에 따르면, 사도신경을 최초로 만든 인물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밀라노에서 감독을 지냈던 암브로스도 그런 전승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390년 당시 교황으로 있던 시키리우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도신조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4세기 당시의 서방 교회들은 이런 주장을 굳게 믿었다.

 이같은 주장은 중세에도 줄곧 별다른 비판없이 수용되다가 분열을 겪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화해를 꾀할 목적으로 만난 플로렌스 회의(1438년~1445년)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동방교회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사도신조를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 적도 없노라고 주장했다. 르네상스시대의 인문주의자였던 로렌조 발라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사도신경을 만들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 사도신경이 널리 보급되도록 기여한 사람들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의 베네딕트 수도사였던 프리미니우스는 독일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 사용되던 사도신경을 알고 있던 프리미니우스는 자신이 생활하는 수도원에서 일종의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소책자를 선교용으로 편집하였다. 그는 이 소책자에 사도신경을 포함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역시 사도신경의 보급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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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과 이단 판별의 기준

 

박 노 찬

 

 

 

서     론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이단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듣는다.  어떤 이들은 이단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큰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인데 왜 당신은 그것을 예배 시에 암송하지 않는가? 하고 따져 묻곤 한다. 

 

필자는 20여 년 간 장로교인이었다.  필자는 유년주일학교 때 사도신경을 외운 이래 20여 년 간 매 예배 시마다 꼬박꼬박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것을 암송했었다.   예배의 시작과 더불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시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무수히 그것을 반복했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교회는 좀 이상한 교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안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다.  필자는 여러분이 과연 사도신경이 무엇인지 알고서 그것을 여러분의 절대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붙들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필자는 사도신경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과연 사도신경의 내용이 얼마나 성경적 믿음과 일치하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들은 왜 사도신경을 우리의 믿음의 고백으로 인정할 수 없는가?  첫째, 그것이 주장되는 바대로 열 두 사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로마 카톨릭의 산물이요 유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이 참 성도들의 믿음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 사도신경은 주장되는 바대로 실제 열 두 사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믿기로, 12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는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는 예수님 승천 10일째 되는 날에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한 줄씩 직접 쓴 것이다.   그 목적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가르칠 것을 요약해서 정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설은 AD 4세기의 루피너스(Rufinus)가 "사도신조  주석"을 쓰면서 사도신조를 열 두 사도가 한 줄씩 썼다고 주장한데서 기인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사실일 수 있는가?  만일 사도신경이 영감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직접 작성된 것이라면 성경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보존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과 비슷한 신조들이 초기 로마 카톨릭 교회들 내에 다양하게 존재했었다는 점과, 사도신경 자체에도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도들이 직접 썼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교회사가 필립 샤프도 사도신경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The creed which bears this name is undoubtedly a gradual growth."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2. p. 418 참조)

 

 

 

2. 사도신경은 역사적으로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발전되고, 보전되었다.

 

영어단어 "creed"는 "I believe"라는 의미의 라틴어 단어 "credo"에서 유래했다.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의 첫 부분은 바로 이 라틴어 단어 "Credo"(I believe, 내가 … 믿사오며)로 시작된다.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와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는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와 더불어 소위 기독교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 개의 신조들이다.  역사적으로 신조들은 로마의 교회들에서 침례 받을 자들을 위한 기독교 교리의 요약으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로마의 상징"(The Roman Symbol)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조"들보다 앞서서 초기 로마 카톨릭 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규율"(Rule of Faith)이라는 것들이 존재했었다.  그것들의 목적과 그 용도는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교회의 초신자들의 훈련을 위해서였으며, 둘째는 침례 받을 교인들에게 침례문답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고, 셋째는 이단 판정의 기준을 위함이었다. "신앙의 규율"들은 교회마다 조금씩 단어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이레네우스(Irenaeus)에 의해서 기록된 "신앙의 규율"은 다음과 같다.

 

"… 이러한 것들을 믿는 믿음 곧, 전능하사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아버지 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구원의 계획과 세상에 오심과 처녀에게서 나실 것과 고난 당하실 것과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실 것과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승천과 전 인류의 모든 육체를 새롭게 일으키시고 모든 것들을 심판하기 위해 아버지의 영광으로 하늘로부터 장차 나타나실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알리신 성령님을 믿는 믿음 …" (… this faith: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who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s and all the things that are in them; and in one Christ Jesus, the Son of God, who was made flesh for our salvation; and in the Holy Spirit, who made known through the prophets the plan of salvation, and the coming, and the birth from a virgin, and the passion, and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nd the bodily ascension into heaven of the beloved Christ Jesus, our Lord, and his future appearing from heaven in the glory of the Father to sum up all things and to raise anew all flesh of the whole human race … ) (RECORDED BY IRENAEUS)

 

소아시아 서머나에서 출생해서(추정) 후에 리용의 감독이 된 이레네우스(Irenaeus, AD 130-200)는 "신앙의 규율"을 "교회의 우주적 신앙"으로 드높인 인물이었다.  그는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인물로,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설립자이며 그 뒤를 이은 로마의 감독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감독의 계승에 대한 그의 강조는 로마 카톨릭 교회 내의 성직자 계급 정치제도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또한 카톨릭의 성례전(Sacrament)을 "생명의 약"(Medicine of Life)이라고 칭했는데, 이러한 성례전에 대한 그의 존중사상은 후에 로마 카톨릭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를 "둘째 이브"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의 마리아 숭배 사상에 기초를 놓았다.  또한, 그가 주장한 "총괄 갱신설"은  후에 예수님이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아담의 모든 기간의 저주를 회복하셨다는 "생애 반복설"로 발전했고, 그것은 유아세례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의 이단적 가르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이전의 예수님은 하나님과는 별개의 존재이며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가장 높으시고 견줄 만한 이가 아무도 없는"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신 분"과는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패한 믿음을 소유했던 이레네우스가 바로 사도신경의 기원이 된 "신앙의 규율"을 만든 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도신경 자체도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하나는 초기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기의 것이다.  AD 3세기 혹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초기 사도신경은 매우 짧았다.  필립 샤프는 그의 교회사에서 이것이 동방교회로부터 수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혹은 로마에서 발전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의 요점은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 340년경)의 그리스 신조(The Greek creed)와 동일한데, 이 신조는 마르셀루스가 교황 율리우스 1세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보다 좀 더 길이가 길고 현재의 사도신경과 보다 유사한 후기 사도신경은 AD 6세기나 7세기에 가서야 나타나는데, 초기의 사도신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몇 구절이 추가되었다.  즉,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구절이 추가되었고, 교회라는 단어 앞에 "우주적 혹은 카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으며,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를 믿사오며"라는 구절, 그리고 "영원한 생명(the life everlasting)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구절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추가 구절들은 골(Gallican) 지방이나 북아프리카 지방의 역본들로부터 수집되어 추가된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신경은  8세기에 현재와 같은 언어로 확정되었고, 12세기에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인준되었다.  사도신경은 역사적으로 서방교회(Western Church)의 예배에서 사용된 가장 대중적인 신조였다.    사도신경은 참 성도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짓 교회인 로마 카톨릭의 산물이요 유산인 것이다.

 

 

 

3. 사도신경은 참 성도들의 믿음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

 

129개의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있는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THE HEIDELBERG CATECHISM)는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데,  이 교리문답서는 사도신경을 일컬어 "간략히 우리를 가르치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조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Question 22.    What is then necessary for a christian to believe? 

 

Answer.     All things promised us in the gospel, which the articles of our catholic undoubted christian faith briefly teach us.

 

 

Question 23.   What are these articles?

 

Answer.

 

1.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2.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begotten Son, our Lord:

3.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4.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5.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6.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7.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8. I believe in the Holy Ghost:

9. I believe an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10. The forgiveness of sins:

11.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12.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그렇다면 과연 사도신경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이고 확실한 내용을 어느 정도로 요약해서 진술하고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1563년)의 "질문과 대답 #24"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아들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에 대한 것이며, 셋째 부분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대한 것이다.  이 교리문답서가 사도신경을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이고 확실한 믿음의 요약이라고 선언한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최소한의 중요한 모든 것들을 사도신경이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과연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과 내가 믿고 있는 중요한 모든 교리들이 사도신경 안에 요약되어 담겨져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이고 확실한 교리들이 너무나 많이 빠져 있다.

 

첫째, 사도신경에는 "성경"이 어떤 책인지에 대한 아무런 고백도 없다.  사도바울의 정의에 의하면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셨다."(롬15:3-4)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를 요약해 놓은 고백문에는 무엇보다도 앞서서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성경(BIBLE)에 대한 고백이 들어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가?  그것은 카톨릭이 성경을 어떤 책으로 여기는가를 알면 쉽게 알 수 있다. 

 

1994년판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에 의하면 성경과 교회의 전통(여러 시대를 통해서 전수된 가르침들)과 교도권(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증된 해석을 부여하는 작업)이 그 중요성에 있어서 동등하다.  다음은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성전(聖傳)과 성서와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가장 현명하신 계획에 의하여,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또한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계시헌장 10항)"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45 #95]

 

 

즉,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은 기록된 성경말씀 만큼이나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 개의 서로 다른 "최종 권위들"이 서로 상충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교리문답서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계시헌장 10항)  즉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42 #85]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교리문답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책무는 "교회"에 맡겨져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오로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뜻한다는 점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의 또 다른 곳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서 주석자들의 임무는 이 같은 규칙을 따라 성서의 뜻을 더 깊이 깨닫고 설명하여, 예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연구를 통해 교회의 판단이 성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서 주석의 방법에 관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속하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직무를 수행한다.(계시헌장 12항)"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51 #119]

 

 

간단히 말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을 교회의 전통이나 교도권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책으로, 심지어 그 세 개의 권위가 충돌할 때는 무시되어야 할 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최종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카톨릭 교회가 현재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그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증(認證)된 해석"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들의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오류 없는 말씀으로 우리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 최종권위가 되는 초자연적인 책이다."라는 고백을 실수로 빠뜨렸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가?  사도신경이 성경의 최종권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만든 이들이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인가?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의 권위인가?  몰몬경인가?  "파수대"인가?  불경인가?  공자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천지가 없어져도 그대로 남아 있을(마24:35), 살아있고 항상 있는(벧전1:2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가?  당신이 믿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성경이라면 왜 그것을 당신이 매 예배 시마다 고백하고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신앙고백문 안에 끼워 넣지 않는가?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는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매장되신 사실을 순차적으로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분께서 왜 죽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가?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당신과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기 위함이었다.(골1:20-22)  당신과 나의 피와 같이 붉은 죄를 대신 지시고 그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벧전2:24)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

 

당신도 만일 필자가 무지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시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한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신이 확고한 믿음의 고백으로 붙들고 있고, 심지어 이단 판별의 기준으로까지 삼고 있는 사도신경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조항"에는 포함될 필요가 없다.  그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따라서 당신은 매번 예배 시마다 사도신경으로 당신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분께서 왜 죽으셨는지 전혀 고백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분께서 죄가 있어서 죽으셨는지 아니면 무죄하신 분으로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셨는지, 옆집 강아지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지 아니면 당신과 나의 끔찍한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는지, 친구네 집 고양이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자 죽으셨는지 아니면 죄인인 당신과 나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자 죽으셨는지, 사도신경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분께서 왜 죽으셨는지는 당신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인가?  필자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죄인 곧,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고백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귀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감탄스러운 사실이다.  그런데 예배 시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한 그 감사한 고백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for our sins)(롬15:3)라고 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요, 요약 중의 요약으로, 만일 우리가 매 예배 시마다 고백해야만 할 어떤 고백문이 있다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될 내용일 것이다. 

 

셋째,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시는 동안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시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시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사실은 왜 중요한가?  참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29, 벧전1:19, 계5:6, 등)의 예표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유월절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했다.(출12:5)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과연 그분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고 말한다.(벧전1:19)  그분은 깨끗하고 완전하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시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셨다면 그분의 구속사역은 무효가 된다.  그분은 점과 흠이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여느 죄인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이 자신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분하는데 사용하는 신앙고백 진술문에 이토록 중요한 사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삶을 사심으로써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아니면 당신에게 있어서 죄 없는 분으로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사실은 교리적으로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일 뿐인가?

 

넷째, 사도신경에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도신경은 마지막 부분에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 을 믿사옵나이다."(I believe in … the forgiveness of sins)라고 말한다.  당신은 "죄의 용서"를 믿는 것은 기독교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죄의 용서"를 어떻게 받는가이다.  고행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아니면 자선이나 선행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나 기부금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용서는 죄를 없애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주지는 못한다.(트리엔트공의회: DS 1712)  죄에서 다시 일어선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갚음을 '보속'(penance) 이라고 부른다."

 

 "…보속은 기도일 수도 있고, 헌금, 자선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자발적인 절제, 희생이 될 수도 있으며, 특히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인내로 받아들이는 일일 수도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35 #1460]

 

 

혹은 침례(세례)나 유아세례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로마 카톨릭과 켐벨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바대로)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 즉 원죄, 본죄와 죄로 인한 모든 벌까지도 사해진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69 #1263]

 

 

"어린아이들도 원죄로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세례로 새로 나야 하며, 모든 사람이 그곳으로 부름을 받는다.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65-466 #1250] 

 

 

혹은, 성사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13 #1393] 

 

 

혹은, 교회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주장하는 바대로)  

 

 

"아무리 중대한 잘못이라고 해도 거룩한 교회가 사해줄 수 없는 잘못은 없다..."[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72 #982]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73 #986]

 

"주교와 사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주는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30-531 #1448]

 

 

혹은, 신부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주장하는 바대로) 

 

 

"... 실제로 주교와 사제들은 신품성사에 의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35 #1461] 

 

 

아니면 위의 어떤 것들과도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through his blood)(엡1:7) 죄들이 용서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인가?  당신이 만일 죄 사함의 근거가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고 믿는다면 왜 그 내용을 당신의 신앙고백에 포함시키지 않는가?

 

다섯째, 모든 사람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 없다.  성경은 우리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신다.(롬 3:28, 4:5, 5:1, 10:9-10, 갈2:16, 엡2:8-9, 빌3:9)  온갖 기독교 이단들과 세상의 거짓 종교들은 한결같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혹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선행을 많이 하거나, 고행을 하거나, 도를 닦거나, 자선을 베풀거나, 착하게 살거나, 성사를 행하거나, 침례를 받거나 하는 등의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편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거나, 헌금을 많이 하는 등, 끊임없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그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에 행위가 필요하다는 똑같은 주장을 말만 바꾸어서 되풀이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all our righteousensses are as filthy rags)…"(사64:6)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선한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  따라서 그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천국에 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인간의 이런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롬4:5)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선물"(엡2:8, 롬3:23)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러나 사도신경의 어디에도 이러한 신앙고백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은 사도신경의 기원이 로마 카톨릭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당신은 그들이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믿고 가르치는지 점검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오직 교회, 곧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보조 수단인 그리스도의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방법의 모든 충족에 도달할 수 있다…'(일치교령 3항)"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16 #816]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나그네길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카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알면서도, 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끝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교회헌장 14항)"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28 #846]

 

 

그러나 단순히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도 않다.

 

 

"…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는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교회헌장 14항)"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25 #837]

 

 

로마 카톨릭은 또한 침례(세례)를 통한 구원을 가르친다.

 

 

"… 교회는 영원한 행복에 들기 위한 확실한 보증으로 세례 이외의 다른 방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68 #1257]

 

"…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들은 과연 견진성사로 굳건하게 되며…"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55 #1212]

 

"…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와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55 #1213]

 

 

그들은 또한 성사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 즉, 세례성사(Baptism), 견진성사(Confirmation or Chrismation), 성체성사(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병자성사(Anointing of the Sick), 신품성사(Holy Orders), 혼인성사(Matrimony)가 있다.(DS 860; 1310; 1601)…"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21 #1113]

 

"교회는 신약의 성사들이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트리엔트공의회 DS 1604)"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26 #1129]

 

 

만약 구원이 사람의 어떤 행위의 도움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굳게 믿는다면 당신은 왜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없는데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가?  혹시 당신도 사도신경을 만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 즉 구원받기 위해서는 교회에 소속되거나 침례를 받거나 성사들에 참여하는 등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인가?

 

여섯째,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신앙고백이 없다.  성경은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에 관해서 증거 하시는데, 아버지 하나님과(God the Father) 아들 예수님과(God the Son) 성령님께서(God the Holy Spirit) 하나(One)이시라는 것이다.   "하늘에 증거 하시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요일5:7, 흠정역)   당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시에 고백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도신경에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과 성령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고백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사도신경에서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과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그리고 성령님(the Holy Ghost)이 모두 언급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의 초자연적인 탄생, 그분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 하늘에 오르심, 장차 심판주로 오실 것 등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직접적인 고백은 없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동일한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직접적인 고백도 발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왜 그 고백을 보다 분명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성령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왜 그저 "성령을 믿사오며"(I believe in the Holy Ghost)라고 애매하게 말하는가?  도대체 그분이 어떤 분이신 것을 믿는다는 말인가?

 

당신은 이 사실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로, 혹은 개인마다 조금씩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는 데는 과히 중요치 않은 교리로서 무시될 수 있다고 여기는가?  서둘러서 대답하기 전에, 삼위일체의 교리로 인해서 기독교 역사상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존재했었는지 참조해 보는 것이 당신이 이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성싶다.

 

일곱째, 사도신경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분명하고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I believe in  …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혹은 "영원한 생명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은 어디에서 영원히 사는지에 대한 고백을 포함하지 않는다. 

 

 

당신은 부활된 몸으로 어디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가?  천국에서인가? 지옥에서인가?  아니면 연옥을 거쳐서 가는 천국에서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89 #1030]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89 #1031]

 

 

"교회는 연옥에 관한 신앙 교리를 특히 피렌체(Folrence) 공의회와 트리엔트(Trent) 공의회에서 확정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89 #1031]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디에서 영원히 사는지는 당신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그저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사실은 당신의 신앙고백에서 빠져도 상관없는 사소한 주제인가? 

 

 

 

맺 음 말

 

 

 

주후 2세기 경 카톨릭 교회로부터 태동된 "신앙의 규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사도신경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참 성도들을 살해해 왔던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이단 판정의 기준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오늘날 소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들 조차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예배 시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에큐메니즘(천주교가 주도하는 종교통합)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이 마지막 때, 곧 배도의 때에 점점 더 본격화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초림시 로마가 전세계를 지배했듯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점에 다시 로마(로마 카톨릭)가 지배하는 세상이 될 때 이단심문소와 종교재판이 다시 부활되면(중세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암흑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는 수많은 성경신자들이 이단으로 분류되어 종교재판을 통해 살해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낳게 한다.

 

과연 사도신경이 바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분하는 이단 판정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대로 사도신경은 거짓 교회인 로마 카톨릭의 산물로서 참 성도들의 믿음을 온전히 담고 있지 않다.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믿음과 행실의 최종권위로 받아들이는 성경신자들에게 있어서 사도신경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성경적인 독립 침례교회들 치고 사도신경을 예배 시에 고백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사실 필자는 그들 중 여러 크리스천에게 사도신경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게 도데체 뭔데?"라고 되묻곤 했다.  사도신경을 이단 판정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한국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에 의하면 미국의 독립 침례교인들은 모두 이단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독립 침례교인들은 한국의 소위 열심있는 개신교회 교인들보다 많은 점에서 성경적이다.  한국인으로서 인정하기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들의 믿음과 그들의 삶은 한국의 크리스천들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낫다.  당신은 그들이 단지 사도신경을 예배 시에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이단이라고 말하려는가?  가엽은 형제여, 제발 당신이 지금 무슨 어이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지 정신을 차리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종교체제나 교단의 전통에 기댐으로써 안정감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타인들로부터 자신들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형제여, 크리스천의 정통성은 체제나 교단이나 다수결로부터가 아니라 "성경적인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신경은 최소한의 기독교 교리로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나 실속은 없는 진술문이다.  종종 사도신경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그것이 성경적인 믿음을 온전히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면 그들이 주로 대답하는 바는 이렇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바를 일일이 언급한 고백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토록 불충분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사도신경을 예배시간마다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나 그 교회는 이단이라고 주장하는가?

 

소위 기독교 정통 교단 내에서 이단과 정통을 구분 짓는 더없이 중요한 잣대로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  유감스럽지만, 필자는 그 사도신경의 고백 여부가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분별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당치 않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며, 예배 시 그것을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암송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전통이 아닌 성경만을 우리의 믿음과 실천에 있어서 최종권위로 믿는 성경신자로서, 문제의 모든 해답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담겨있음을 믿고 부지런히 그것을 공부하는 성경학도로서, 그리고 독립침례교도로서, 우리의 선배 침례교도들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부     록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 (325 A.D) - ENGLISH VERSION 1549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worlds,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by the Holy Spirit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and was crucified also for us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and was buri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sha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both the quick and the dead, whose kingdom shall have no end. A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eth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oke by the prophets. And we believ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사도신경의 전통적인 영어 본문(TRADITIONAL ENGLISH VERSIO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 (1)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 (2)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 (3)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 (4)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 (5)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 (6)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 (7)

 (or from thence he shall come quick to judge the live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 (8)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 (9)

the forgiveness of sins; - (10)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 (11)

and the life everlasting. - (12)

AMEN.

 

 

현대 영어 본문(MODERN ENGLISH VERSIO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God'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he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한글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영문 사도신경과 몇 군데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영문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ell)라는 구절이 있으나, 한글번역에서는 생략되었다.  둘째, 영문에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아버지"가 생략되었다.  셋째, 영문에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 혹은 "거룩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카톨릭" 혹은 "우주적/보편적"이 생략되었으며, "거룩한 교회" 대신에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다.  공회(公會)는 "공중의 모임"이라는 의미로 "assembly"의 의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KJB에서 단수(church)로 80회, 복수(churches)로 37회 쓰였으며, "영광스런 교회"(a glorious church, 엡5:27), "이방인들의 모든 교회"(all the churches of the Gentiles, 롬16:4), "그리스도의 교회들"(The churches of Christ, 롬16:16), "하나님의 교회들"(the churches of God, 고전11:16, 살전2:14, 살후1:4), "성도들의 모든 교회"(all churches of the saints, 고전14:33), 하나님의 교회 등으로 표현했으나, 단 한 번도 "거룩한 교회"(holy church)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하물며 로마 카톨릭 교회를 "거룩한 교회"로 부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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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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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후, 십자가에 죽으시고 곧 장사되셨음을 거듭하여 구체적으로 고백하는 이유는

 

1.이 부분에 관한 이단이 가장 심각하였고

 

2.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이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한 댓가였고

 

3.주님의 고난이 얼마나 큰지를 알 때, 우리 생명의 값이 귀중함을 알게 된다.

 

 

본 론

 

 

Ⅰ.확실한 죽음

 

 

1.운명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묘사.

 

 

1)(마 27:50)운명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고 묘사.

 

2)(눅15:39)십자가형을 총 지휘하고 집행한 백부장이 예수님의 장엄한 죽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것은 확실한 죽음의 증언이 된다.

 

*예수님은 참 인간인 동시에 참으로 죽었고

 

*그 죽음이 얼마나 장엄한지 원수에게 까지 감명을 주었음을 알 수있다.

 

3)(눅23:46)큰 소리로 하나님을 불러 영혼을 부탁하였다.

 

4)(요19:30)머리를 떨어 뜨리고 영혼이 돌아가셨음을 상세히 묘사한다.

 

이처럼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죽음을 강조한 것은 한 인간의 완전한 죽음이 거짓이나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라 진실된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2.장례 과정

 

 

1)시체가 부패되기 쉬운 기후이기에 곧 장례를 지냈다.

 

2)부자는 시체를 세마포에 싸서 향유를 부어서 돌 무덤에 장례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가족을 위해 장만한 돌 무덤에 예수님을 장례지냈다.

 

3)무덤 입구는 장정 20명이 힘을 모아야 움직일 수 있는 큰 돌로 막았다.

 

4)입봉하고 로마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시체도난, 가사상태, 부활 조작대비)

 

 

 

3.확실한 죽음이 주는 중요성

 

 

1)주님의 고난은 장례식으로 끝나는데 특별히 인간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2)당시 이단에 대한 경계

 

*주님의 생존시에는 ===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심하고(神性)

 

*부활 승천 후에는 ==== 인간되셨던 성육신을 의심했던(人性) 요일 4:에서

 

3)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입증

 

4)장사지냈다는 것은 그 시체로 인하여 더욱 사람되심을 입증한다.

 

(예) 예수(人性) + 그리스도(神性) === 완전한 주님의 호칭

 

 

Ⅱ.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신 예수님

 

 

1.전 생애를 통한 동참

 

 

주님의 인간 경험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한 생애를 통한 인간 곡난의 동참이다. (예) 가끔 공장의 종업원과 식사하는 사장을 향한 두가지 반응

 

잠시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는 것만하여도 감사를 하는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하여 아주 실제적이며 완전한 고난을 겪으신 주님의 은혜는 한이 벗는 것이다.

 

 

2.대화를 위한 주님의 고난

 

치욕의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우리 인간을 대화의 상대로 삼기위하여 자신을 열으신 주님의 자진한 고난의 동참이다. 인간처럼 매장되셨음은 우리 인간과 더욱 친근감을 가져다 준다.

 

 

Ⅲ.참된 축복

 

 

1.부활의 기쁨은 완전한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음과 병듬도 신앙의 재정립을 위한 것이 되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예)나사로의 죽음과 주님의 지체하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죽지 않는 삶보다 죽은 후에 갖는 부활이 더 귀함이 기독교 진리의 진수이다.

 

 

3.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죽은 존재들이다.

 

죄 값으로 죽어야 할 자들을 보혈로 대속함을 받아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에 처한 환경과 조건이 어떠하든지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Ⅳ.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

 

 

1.한국 사도신경에 생략된 부분

 

 

고대 사본에는 없었는데 약 100년후 삽입되어 외국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ぢ지옥에 가시고(in to the hell)っ

 

 

2.Hell(지옥, 음부)에 대한 이헤

 

(히)스올 (헬)하데스

 

죽은 사람이 머무는 장소라기 보다는 죽음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개념이 강하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육체 만의 죽음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완전하게 죽으셨음을 헬라적 사고 구조를 빌려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결 언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장사 지내셨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죄가 장사지낸바 된것을 믿고 정욕과 욕망과 허영, 이런 세상적인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장사되어 버렸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는 부활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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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

 

이정근 / 유니온 교회 목사

 

 

 

 

 

 

 

사도신경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어판 사도신경은 이제 새롭게 번역되어야 할 필요성이 너무나 크다.

 

이런 필요성을 사도신경 재번역 원칙에 대입시켜 보면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 같다: 1) 잘못 번역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2)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예배나 세례문답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외우기 쉽도록 시적 운율이 있어야 한다. 5) 개인고백이면서도 공동고백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 6) 신선한 언어, 미래적 언어를 사용하되 한국말 구조에 맞게 번역되어야 한다.

 

원칙을 이렇게 정하고 달려들었지만, 실제 번역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낱말 하나, 토씨 하나가 철저히 검토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번역초안을 읽을 때마다 번역자는 언제나 반역자(traitor)라는 격언만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사도들의 신앙고백

 

하나님 온힘 아버지 하늘땅 만드신 분을 내가 믿으며

 

성령으로 생겨나서 순네 마리아에게서 나오시고

 

빌라도에게 괴롭힘 받으시고 십자틀에 달리시며

 

죽으시고 묻히시고, 죽음곳에 내려 가셨으나

 

사흘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온힘 아버지 오른자리 앉으셨다가

 

그 곳서 내려오셔 산 사람 죽은 사람 갈라 세우실

 

하나님 외아들 우리 으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과 거룩한 큰 모임과

 

거룩한 무리 하나됨과 허물 가리워 주심과

 

몸 다시 사는 것과 끝없이 살게 됨을 믿습니다. 아멘.

 

 

우선 제목인 사도신경을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풀어놓았다. 이 신앙고백의 이름은 그 발전과정을 살펴볼 때에 신앙규범, 진리규범, 사도전통, 사도설교, 신앙고백 등으로도 불려 왔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사도신경이나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 Symbolum Apostolicum)라 불려지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사도라는 말이 보내지미라는 말로 바뀌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도우미, 지키미 등의 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번역 원칙 가운데 첫째인 잘못된 번역들이 있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앉아 계시다가 등이다. 동사들이 병렬형인데 분사형으로 번역해 놓은 것들이다.

 

현재의 사도신경에는 믿는다가 네 번 있는 것도 잘못된 번역이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골자여서 텍스트에는 믿는다가 세 번 나온다. 그런데도 1) 아버지를 믿사오며, 2)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성령을 믿사오며, 4)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음부에 내려 가시고의 문제도 있다. 이것은 후대 사본에 첨부된 것으로 세계교회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구절인데 한국교회는 이를 제외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영찬송가의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내려가시고(descended)와 올라가시고(ascended)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요약한 초기 신앙고백(빌 2:6-11)의 기본사상, 곧 비하(humiliation)와 승귀(exaltation)를 고려할 때 이 구절은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에서 교통이라는 말은 지금 아예 다른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쉽게 번역하면서 성경적인 에큐메니즘을 살려 거룩한 무리 하나됨과로 했다.

 

 

둘째, 누구나 알기 쉽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 이름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전능, 잉태, 동정녀, 장사, 저리로서, 공회, 교통, 죄를 사하여... 이런 것들이 쉬운 말로 바뀌어야 한다. 신학자들에게는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사도신경이 초등학교 학생들도 읽고 그 진리를 깨닫게 되어야 한다. 쉬운 말로 할 수 있는 것도 일부러 한문 섞인 어려운 말을 사용한 흔적이 너무 많다.

 

위의 번역시안을 읽은 분들은 토속적 언어가 많이 반영된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문 어휘는 자주 바뀌지만 토속어는 오래 가고 계속 살아 남게 된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를테면 전능온힘으로, 동정녀순네로, 고난괴롭힘으로, 심판하다갈라 세우다로, 주(主)으뜸으로 바꾸었다.

 

이것을 읽고 좋다는 이들도 있지만 너무 혁명적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처녀를 동정녀로 해야 하듯이 주님이라는 말도 퇴색해서 새로 번역해야 할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 50년이나 100년 앞을 보고 하는 말이다. 사실은 성령, 십자 두 마디만 한문에서 온 말인데, 이것들도 한국교회 초기문서 용례를 참고해서 숨님네갈래틀로 하고 싶었다.

 

 

셋째, 예배나 세례문답용으로 번역한 점들이 있다. 텍스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나는 믿는다나는 믿노라의 반말 혹은 고른말로 번역했어야 했다. 이 점은 배양서 박사의 주장이 맞는다[이 새로운 번역시안은 성결교회미주신학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공동연구 곧 웍샵을 해서 의견을 수렴했다. 그런 뒤에 미주 『크리스챤 저널』에 발표했다. 이 글을 읽고 배양서 박사(사도신경복원운동본부장, 한양대 및 장로회신대 교수 역임)가 연락해 왔는데, 그는 사도신경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므로 믿사오며 같은 표현이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극구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예배용이기 때문에 믿습니다로 끝맺었다. 제가 믿으오며 제가 믿나이다로 하면 예배용이나 세례문답용으로 사용하기 알맞게 된다. 이는 잘못된 번역이 아니라 텍스트보다는 컨텍스트에 강조점을 두어 적용시킨 것이며 신학에서 말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 작업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넷째, 외우기 쉽도록 시적 운율을 고려하고 극도로 간결하게 번역하도록 했다. 우선 본디오 빌라도에서 본디오를 삭제했다. 죽은 자 가운데서죽음에서로 하고 보니 뜻이 좀 달라진 것 같으나 신학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문을 많이 쓰면 말이 간단해지고 토속언어를 쓰면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시적 운율 유지가 매우 힘에 겨웠다.

 

 

다섯째, 개인고백이면서 공동고백의 정신을 살렸다. 나는을 넣었으며 우리도 살려 놓았다. 사도신경은 열두 사도가 한 구절씩 적어 넣었다는 전통이 비록 신빙성은 부족하나 공동작품이 신앙고백서 작성의 기본 정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

 

 

여섯째 원칙은 이미 위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다. 신선한 언어, 미래의 언어, 한국말 구조에 맞추어 번역했다는 점이다. 가령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는 성경에 있는 말을 사용해서 허물 가리워 주심과로 했다. 특히 믿으며를 신앙고백 세 부분 맨 마지막으로 놓은 것은 일관성이라는 측면도 있고 우리말 구조로 바꾼 사례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월절은 뛰넘절로 해야 신선한 미래의 언어가 된다. 현재 잘 사용되는 언어도 보름달처럼 죽어가는 것과 초승달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음을 유의한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발행하는 성경, 찬송가, 신앙고백, 그리고 여러 문서가 한국인 전체의 문장교본으로 사용될 정도가 되어야 하겠다.

 

이 같은 번역은 사도신경의 틀을 현저하게 바꾼 셈이다. 아마도 한국교회의 보수성을 생각할 때에 이것을 당장 공예배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중용이 중요한 덕목인 한국에서는 아마도 위의 초안 가운데서 일부를 채택하여, 현재의 사도신경을 개정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이라고 본다. 마치 성경 표준새번역이 한국개신교 주류교단에서 공식 채택되지 않자, 개정개역판을 내어 공인을 시도하는 정도랄까. 그래서 긴급히 고쳐야 할 부분만 최소한으로 손질한 다음의 안도 함께 제시해 본다.

 

 

전능하사 하늘땅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으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성령으로 생겨 나사 순네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괴롭힘 받으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에서 산 자 죽은 자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과 거룩한 온 교회와 모든 성도의 하나됨과

 

허물 가리워 주심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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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참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것인가

 

<사도신경 학교>

 

이제는 눈을 감고 입을 열면 주문처럼 외워진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사도신경이 어릴 적엔 왜 그리도 외워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사도신경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외워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도신경을 예배의 형식에 속해 있는 하나의 교리나 외워야만 하는 기도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 학교>의 저자 임영수 목사는 사도신경은 기도문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사도신경이 우리에게 주는 참 의미와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나의 고백, 우리의 고백

사도신경은 고백이다. 종종 회자되듯이 사도신경은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의 신앙 고백을 줄줄 읽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살아 있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사도신경은 초대 교회 세례식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세례 받는 사람들이 지난날에 얽매였던 어두운 삶에서 해방되어 장차 오게 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떠나는 과정에서 털어놓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사도신경은 성문화되었지만, 실제로 믿음의 선조들이 신앙의 과정에서 진실하게 내어놓은 고백이었기에 수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살아 있는 힘을 갖는다.

 

스위스 바젤 신학대학의 로흐만(Jan Milic Lochman) 교수가 쓴 <사도신경 강해>에 깊이 감명 받은 저자는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새로운 의미를 주제로 15회에 걸쳐 설교를 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이제까지 보편적으로 해석해 온 사도신경의 의미를 벗어나 새롭게 의미를 부여함으로 성문화된 사도신경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백으로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도신경을 나 자신의 고백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신앙을 고백하는 주체가 바로 나'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입니다. … 그러나 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서로 나누어야 할 복음이기 때문에 나 이외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가 됩니다."

 

고백하는 주체가 나 자신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결국 사도신경은 진정한 나의 고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는 홀로 된 나가 아닌 하나의 연대감 가운데서의 나이다. 사도신경의 의미를 깨닫고 나의 것으로 고백하는 각각의 나는 결국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나의 신앙 고백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 함께'가 되고 우리'가 된다. 이것이 사도신경이 가진 힘이다.

 

사도신경에 담긴 깊은 의미

또 저자는 사도신경이 나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사도신경의 각 구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성서에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단일한 시각으로 이해함으로 생기는 오해처럼, 사도신경도 문자 그대로 이해해 그 폭넓은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사도신경의 각 구절을 하나하나 짚어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풀어낸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의미를 태초에 만물을 만든 사건으로만 단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이라고 말한다. 사도신경에서 말하고 있는 천지창조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포괄한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또 우리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순수한 인간이 되사 우리 가운데 찾아 오신 것을 믿습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시작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 곧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온 것은 예수가 순수한 인간의 몸을 입고 나셨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사도신경의 각 구절 속에는 깊은 의미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의 신앙 고백은 살아서 숨쉬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시대. 과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참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것인가. 그것은 기독교인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구원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그 진정한 고백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식 세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고, 인간의 역사 전반에 걸쳐 관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중요합니다. … 사도신경은 고백할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내용이 되고는 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주문처럼 고백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임영수 지음/ 홍성사 펴냄/ 221쪽/ 6,500원

 

 

김진아 기자 nebo@c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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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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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게시되는 글은 조승규 목사가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122호(2002. 5)에 게재한 것으로, 2002년 5월 1일 현재 「대한민국 저작권법」(법령 제6134호)과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저작권 조약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그러나 본 저작물을 선한 목적에 따라 활용하고자 다음과 같은 절차를 지킬 경우에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음의 절차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명시된 모든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1. 본 저작물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발췌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조승규, 「특집 122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단 - 로마카톨릭의 신조, 사도신경」,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서울 : 말씀보존학회), 통권 122호(2002. 5), pp.7-12.

  2. 본 저작물의 전체를 인쇄 및 출판하거나, 웹사이트에 게시 및 링크할 경우에는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이 안내 문구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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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단 - 로마카톨릭의 신조, 사도신경

 

조승규 / 펜사콜라성경신학원 교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을 할 때, 교회사가이며 성경 변개자인 필립 샤프와 같이(註 1) 사도신경을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나 '교회의 믿음에 대한 요약'으로 기술하는데,(註 2) 그 이유는 사도신경을 사도들로부터 유래한 "사도의 전통'이나 '믿음의 규율'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성경적 신약교회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서 늘 제시되는 설명은,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문답 교육과 그들의 공개적인 고백을 위해서 믿는 바를 요약한 것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이 점차 정형화된 신조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믿음의 요약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떤 이유에서 침례에 앞서 교리문답을 위한 모범답안이 필요했겠는가?

 

  신약교회사에 따르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마음의 변화 없이 입술로만 고백할 수 있게 하는 신조나 교리문답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식적 종교행위를 위해 어떤 교리 교육도 받지 않고, 또 요약된 신조를 참고하지도 않고 단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간증하거나 성령님께서 드러나게 하심으로써(행 8:37; 10:47-48; 16:30-33) 침례받았으며, 신약 지역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공중의 새들이 와서 거처로 삼는 거짓 교회(마 13:32)가 생성되면서(A.D.325년 이후) 입술로만 고백하는 이교도들과 거짓 신자들이 거짓 교회로 유입되었는데, 이때 그들은 소위 '신앙고백'의 내용을 그대로 답변하거나 반복함으로써 침례를 받고 그 거짓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창녀 교회(계 17:1-18)가 형성된 배경이다. 사탄은 극심한 박해를 통해 복음의 확산을 막고 교회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유화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오염시켰는데, 그것은 이교도들과 믿음 없는 사람들을 소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도구 중 하나가 바로 로마카톨릭의 신조인 사도신경이다. 이것을 신상고백으로 시인하게 하고 침례를 받게함으로써 형식적인 카톨릭 교인을 만든 것이다.(註 3)

 

[8쪽]

로마카톨릭이 만든 신조

  물론 초기 교부들 가운데 일부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믿음의 진수를 간명하게 제시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배교를 가져오는 한 도구가 되었다. 현재와 같은 사도신경이 형성되기 이전에 비슷한 내용의 신조들을 제시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이레내우스(180), 씨프리안(250), 노바티안(250), 오리겐(250), 그레고리 타우마투구스(270), 루시안(300), 싸이릴(350), 에피파니우스(374), 루피누스(390)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조들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차이점들이 많았다. 그 지역에 따라 동방과 서방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첫째는 동방의 신조들로, 이것은 서방의 신조들과 비교하면 일반적으로 길었으며, 서로 다른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많은 교리적 용어들을 담고 있었다. 이 동방 신조들은 결국 니케아 신조(325년, 381년, 451년)로 대체되었다. 둘째, 북아프리카와 고대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지역에 있었던 서방 신조들은 동방 신조들에 비해 짧고 단순하며 형태가 덜 다양하여 비교적 통일된 하나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니케아 신조를 포함해서 이 신조들은 모두 로마신조(the Roman Symbol)와 혼합되었으며, 이 로마신조가 로마카톨릭의 근본적인 신조가 되었다. 이 로마신조가 소위 "사도신경"(Apostles' Creed)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조이다.(註 4) 특히 오늘날 로마신조를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거짓된 기원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명칭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도도 이러한 로마신조의 기원을 형성하고 있지 않았다. 이는 로마카톨릭이 자신들의 신조에 권위를 부여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그런데 소위 개신교인들이 여기에 동참하여 거짓된 로마신조를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반복하여 암송하고 있는 것이다.

 

  본 논의에서 다루고자 하는 사도신경의 기원은 다름 아니라 로마카톨릭 안에서 믿고 있는 로마신조이다. 이 로마신조의 유래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은 "열두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 사도신경인데, "사도들이 보다 높은 영감을 받아 열두 항목을 각각 쓴 것"이라고 오랫 동안 믿어 왔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암브로스와 루피아누스에 의해 처음 주장되었고, 카톨릭백과사전의 집필자인 펫 마이어스(Pet Meyers) 둥에 의해 여전히 옹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된 기원에 대한 설명은 니케아 신조 이전에 다양한 종류의 신조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소위 사도

 

[9쪽]

신경이 수세기를 거쳐 문구들이 첨가되면서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 거짓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B.C.25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칠십 명의 유대인들이 번역했다고 주장되는 칠십인역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A.D.240년 경에 오리겐이 변개시켜 번역한 헬라어 구약성경이 소위 '칠십인역'이듯이, 사도신경 역시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쓴 것이 아니라 로마카톨릭이 문구의 첨가를 반복하여 만든 "로마카톨릭의 신조"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초기 로마신조의 짧은 형태는 마르셀루스(Marcellus, A.D. 340)가 교황 율리우스 1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 기록한 헬라어 신조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註 5)(헬라어는 3세기까지 로마 교회의 지배적인 언어였다), 로마신조의 보다 긴 형태, 즉 현재의 "로마카톨릭 신조"(개신교의 사도신경)는 7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열두 가지 문구 모두를 갖춘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샤프는 7세기에 완성된 사도신경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반박하지는 못하고,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 신조는 의심의 여지없이 점진적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사도신경을 옹호하기 위해 "현재 형태의 사도신경은 사도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사도신경의 내용과 정신은 진정 사도적인 것이다."라고 궁색하게 변명한다.(註 6) 그러나 사도신경은 전혀 사도적이지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

 

  피티 럭크만 박사는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샤프는 니케아공회 당시에 주도적이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어깨에서 반성경적 오류의 짐을 덜어주고 싶어서인지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기원은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기보다는 당시 교회 정신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샤프가 말한 그대로 소위 사도신경이라 불리우는 것은 성경을 거부하는 음녀(계 17:1-8)의 생산품이었던 것이다."(註 7)

 

첨가된 문구들

  다음에 제시되는 사도신경의 본문 중에서 [ ] 안에 진하게 쓴 것이 후대에 첨가된 문구이다. ① - ⑫는 항목 구분을 위해 붙인 것이다.

 

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Maker of heaven and earth)]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②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③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conceived)]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④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10쪽]

을 받으사(suffered),] 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dead),] ⑥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ell) - 이 문구는 한글 사도신경에서 삭제되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Almighty)]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⑦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⑧ 성령을 [믿사오며(I believe),] ⑨ 거룩한 [공회(Catholic)]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the communion of saints),] ⑩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⑪ 몸이 다시 사는 것과, ⑫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I believe...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이와 같은 첨가된 문구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12가지 항목으로 형성되었다. 항목 ①의 "천지를 만드신 분"이라는 문구는 이것과 비슷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650년에 골지방에서 처음 나타났다. 항목 ⑥의 "지옥에 내려가시고"(He descended into hell)는 아리안 신조(360년)와 아퀼레야 신조(390년), 베나티누스 폴투나투스의 신조(590년), 골지방 전례서(650년) 등에서 발견되며, 현재의 사도신경과 같은 최종적인 문구로 나타난 것은 750년이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인간의 죄들을 처리하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인데(엡 4:9,10, 행 2:31), 한국 교계는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한 채 삭제하였다. 이 나라 교계는 변개된 성경뿐만 아니라 오역되고 삭제된 신조를 가지고 자신들의 정통을 부르짖는 수준의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항목 ⑨의 "공회"는 한글 사도신경에서 오역된 부분이다. 마르셀루스의 최초 본문은 단지 "하기안 에클레시안"(????? ????????), 즉 "거룩한 교회"(holy church)였고, 씨프리안과 루피누스, 어거스틴 등도 "거룩한 교회"(sanctam eccleciam)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거룩한 카톨릭 교회"(sanctam eccleciam catholicam)를 믿는다는 문구는 650년의 골지방 전례서에서 등장하여 로마카톨릭 신조인 사도신경에 공식적인 문구가 되었다. 항목 ?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은 650년 이후에야 나타난다. 이러한 일련의 첨가는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사도신경의 기원은 전혀 사도들이 아니며, 로마카톨릭이 그들의 거짓 교리들을 세우면서 형성된 것일 뿐이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단, 로마카톨릭과 그 아류들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중요한 교리들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가장 큰 이단을 말한다면 로마카톨릭이다. 그들이 믿는 바는 무엇인가? 사도신경은 로마카톨릭의 신조이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로 문구 하나하나를 이해해야 본래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 개

 

[11쪽]

신교의 교리로 이해하여 해석하면 본래의 문구가 말하는 바가 왜곡되는 것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절대다수의 개신교 학자들과 목사들, 그리고 교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고 철학적 용어나 개념을 사용해서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 오류이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며, 구원의 방법은 무엇이고, 성도의 교제는 무엇인가?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도신경의 "거룩한 카톨릭 교회"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이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유일한 교회임을 고백한다."(제811항) "먼저, 그 교회는 카톨릭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카톨릭 교회가 있다."(제830항)(註 8) 개신교도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이 아니다. 사도신경이 처음 작성될 때부터 거룩한 교회는 카톨릭 교회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 사도신경에서 오역한 "공회"에 대한 나채운 교수의 주장은 전혀 재고의 가치 없이 틀린 것이다.(註 9)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본래 의미를 "보편적 교회"나 "공교회"로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개신교회가 비성경적인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단인 로마카톨릭의 아류임을 자처하는 것에 불과하다.

 

  죄사함에 관한 로마카톨릭의 교리는 카톨릭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원의 완전한 수단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의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제816항). "카톨릭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세워졌음을 알고서도 그곳에 속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제846항). "구원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성사와(제129항), 많은 부가적인 행위들과 더불어 세례와 같은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제257항).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교회는 세례받은 자들의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제986항). "성직자의 성사로 주교들과 사제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갖는다"(제1461항).(註 10) 이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이단이 아니면 누가 이단인가? 이것이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의 의미이다.

 

성도의 교제는 무슨 뜻인가? "교회는 성체를 통해 죽은 자와의 효과적인 교제

 

[12쪽]

를 하게 된다"(제1689항).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과의 교제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처럼 성자들과의 교제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합류하게 된다"(제957항). "몇몇 신실한 자들을 공인함으로써, 즉 그들이 영웅적인 덕을 실천했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했음을 공포함으로써, 교회는 그들을 믿는 자들에게 본보기와 중보자인 성자들로 제시함으로써 교회 내에 있는 거룩의 영의 힘을 인지하고 성도들의 희망을 유지시켜 준다"(제828항).(註 11) 여기서 말하는 로마카톨릭의 "성자"(saints)란 살아 있을 때 행한 선행으로 사후에 성자로 선언된 소수의 선택된 자들이다. 로마카톨릭의 교리문답에 따르면 성체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성도의 교제"를 믿는 것이 아니다. 카톨릭의 교리문답은 또한 회원들에게, 교회가 "성자"(성도들, saints)로 선언한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보다 앞서 왕국에 들어간 증인들, 특히 그리스도께서 성자로 인정한 사람들은 그들의 모범적인 삶으로 살아 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숙고하고, 그분을 찬양하며,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중보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가장 고귀한 섬김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와 전 세상을 위해 중보해 줄 것을 간청할 수 있으며, 또한 간청해야 한다"(제2683항). 이것이 사도신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이다. [사도신경 각 항목의 신학적, 교리적 오류들에 대해서는 이번호 특집의 두 번째 글로 게재된 윤혁택 목사의 글을 참고하시오.]

 

  이와 같이 로마카톨릭은 성경을 가지고 종교 행위를 하는 가장 거대한 이단이며, 그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로마카톨릭의 신조에 나오는 문구는 그들의 비성경적인 교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개신교회들이 사도신경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로마카톨릭으로부터 항거하여 개신교회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로마카톨릭의 거짓 교리와 실행을 그대로 답습했다. 카톨릭이 그들의 신조, 즉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이교도들과 믿음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성경과 상관없는 이상한 종교집단을 만들었고, 사도신경을 잣대로 사용하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이단이라고 정죄했다. 이와 똑같이 비성경적인 로마카톨릭의 신조를 가지고 개신교회들이 동일하게 이단시비를 하는 것은(註 12) 그들 역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단인 로마카톨릭의 아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註] ---------------------------------------

1)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WM.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Grand Rapids, Mich., 1989), Vol.II, p.529.

2) 나채운, 주기도·사도신경·축도,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5), p.165.

3) 피터 럭크만, 신약교회사, (말씀보존학회, 1997), pp.131-153.

4) "신조"(信條)라는 말은 영어 "크리드"(creed)의 번역인데, "나는 믿는다"(I believe)는 뜻의 라틴어 "크레도"(credo)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은 "신경"(信經)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높이는 것으로 신조가 적합한 번역이다.

5) 마르셀루스의 신조는 라틴어 본문과 헬라어 본문에 차이가 있다. 헬라어 본문에는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문구가 있지만 라틴어 본문에는 없는 상태로 끝난다.

6) Schaff, op. cit, pp.531,533.

7) 피터 럭크만, op. cit., p.174.

8) 릭 존스, 로마 카톨릭의 거짓 교리들, (말씀보존학회, 2000), p.29.

9) 나채운, op. cit., pp.190-195.

10) 릭 존스, op. cit., pp,19,20,22,26,27.

11) 릭 존스, Ibid., pp.61,97,96.

12) 현대종교의 고 탁명환씨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여부를 가지고 이단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와 같은 판단은 한국교계에 팽배해 있다. 탁명환, 기독교 이단연구,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7),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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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나시우스 신경 (The Athanasian Creed)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계교회의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

이 신앙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교회의 신앙이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

인격을 혼동해서도 안되고, 본질을 분리해서도 안된다.

한 분 성부와 또 다른 분 성자와 또 다른 분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과 동등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위엄을 가진다.

성부의 본성이 바로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다.

성부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자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령도 피조되지 않았다.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하다.

성부도 영원하고, 성자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그와 같이, 피조되지 않은 본질이나 무한한 본질도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전능하고, 성자도 전능하고,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주님이고, 성자도 주님이고, 성령도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에게 세분이 각기 신이며 주님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세계교회의 신앙은 우리에게 세 신이나 세 주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한다.

성부는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피조되거나 출생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오로지 성부에 의해 출생되었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가 있으며, 세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이 있으며,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이 있다.

이 삼위일체에서 선후나 대소가 없다. 세 분 모두 다른 분과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다.

따라서, 상술한 대로, 일체가 삼위로, 삼위가 일체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그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

또한, 영원한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신과 인간임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신으로서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출생하였으며, 인간으로서 시간안에서 그 어머니의 본성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그는 완전한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다.

그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등하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성부보다 열등하다.

비록 그가 신과 인간이지만, 그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그의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성이 신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본성의 혼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에 의한 것이다.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가 한 인간인 것처럼, 신과 인간이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어 음부에 내려갔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거기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모든 인간이 자기 육체와 함께 부활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행동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선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삶에, 악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세계교회의 신앙이다. 모두가 그것을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아멘.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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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올바른 이해(1) 

yebon   2002-12-23 14:08:07, 조회 : 245, 추천 : 6

 

 

 

 

 

 

 

 

 

 

 

▶ 서 론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이단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듣는다. 어떤 이들은 이단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큰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인데 왜 당신은 그것을 예배 시에 암송하지 않는가? 하고 따져 묻곤 한다.

 

필자는 20여 년 간 장로교인이었다. 필자는 유년주일학교 때 사도신경을 외운 이래 20여 년 간 매 예배 시마다 꼬박꼬박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것을 암송했다. 예배의 시작과 더불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시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무수히 그것을 반복했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교회는 좀 이상한 교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안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다. 필자는 여러분이 과연 사도신경이 무엇인지 알고서 그것을 여러분의 절대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붙들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필자는 사도신경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과연 사도신경의 내용이 얼마나 성경적 믿음과 일치하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왜 사도신경을 우리의 믿음의 고백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첫째, 그것이 주장되는 바대로 열 두 사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로마 카톨릭의 산물이요 유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이 참 성도들의 믿음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1. 사도신경은 주장되는 바대로 실제 열 두 사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믿기로, 12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는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는 예수님 승천 10일째 되는 날에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한 줄씩 직접 쓴 것이다. 그 목적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가르칠 것을 요약해서 정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설은 AD 4세기의 루피너스(Rufinus)가 "사도신조 주석"을 쓰면서 사도신조를 열 두 사도가 한 줄씩 썼다고 주장한데서 기인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사실일 수 있는가? 만일 사도신경이 영감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직접 작성된 것이라면 성경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보존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과 비슷한 신조들이 초기 로마 카톨릭 교회들 내에 다양하게 존재했었다는 점과, 사도신경 자체에도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도들이 직접 썼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교회사가 필립 샤프도 사도신경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The creed which bears this name is undoubtedly a gradual growth."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2. p. 418 참조)

 

 

▶ 2.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발전되고 보전되었다.

 

영어단어 "creed"는 "I believe"라는 의미의 라틴어 단어 "credo"에서 유래했다.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의 첫 부분은 바로 이 라틴어 단어 "Credo"(I believe, 내가 … 믿사오며)로 시작된다.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와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는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와 더불어 소위 기독교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 개의 신조들이다. 역사적으로 신조들은 로마의 교회들에서 침례 받을 자들을 위한 기독교 교리의 요약으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로마의 상징"(The Roman Symbol)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조"들보다 앞서서 초기 로마 카톨릭 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규율"(Rule of Faith)이라는 것들이 존재했었다. 그것들의 목적과 그 용도는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교회의 초신자들의 훈련을 위해서였으며, 둘째는 침례 받을 교인들에게 침례문답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고, 셋째는 이단 판정의 기준을 위함이었다. "신앙의 규율"들은 교회마다 조금씩 단어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이레네우스(Irenaeus)에 의해서 기록된 "신앙의 규율"은 다음과 같다.

 

"… 이러한 것들을 믿는 믿음 곧, 전능하사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아버지 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구원의 계획과 세상에 오심과 처녀에게서 나실 것과 고난 당하실 것과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실 것과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승천과 전 인류의 모든 육체를 새롭게 일으키시고 모든 것들을 심판하기 위해 아버지의 영광으로 하늘로부터 장차 나타나실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알리신 성령님을 믿는 믿음 …" (… this faith: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who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s and all the things that are in them; and in one Christ Jesus, the Son of God, who was made flesh for our salvation; and in the Holy Spirit, who made known through the prophets the plan of salvation, and the coming, and the birth from a virgin, and the passion, and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nd the bodily ascension into heaven of the beloved Christ Jesus, our Lord, and his future appearing from heaven in the glory of the Father to sum up all things and to raise anew all flesh of the whole human race … ) (RECORDED BY IRENAEUS)

 

소아시아 서머나에서 출생해서(추정) 후에 리용의 감독이 된 이레네우스(Irenaeus, AD 130-200)는 "신앙의 규율"을 "교회의 우주적 신앙"으로 드높인 인물이었다. 그는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인물로,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설립자이며 그 뒤를 이은 로마의 감독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감독의 계승에 대한 그의 강조는 로마 카톨릭 교회 내의 성직자 계급 정치제도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또한 카톨릭의 성례전(Sacrament)을 "생명의 약"(Medicine of Life)이라고 칭했는데, 이러한 성례전에 대한 그의 존중사상은 후에 로마 카톨릭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를 "둘째 이브"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의 마리아 숭배 사상에 기초를 놓았다. 또한, 그가 주장한 "총괄 갱신설"은 후에 예수님이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아담의 모든 기간의 저주를 회복하셨다는 "생애 반복설"로 발전했고, 그것은 유아세례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의 이단적 가르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이전의 예수님은 하나님과는 별개의 존재이며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가장 높으시고 견줄 만한 이가 아무도 없는"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신 분"과는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패한 믿음을 소유했던 이레네우스가 바로 사도신경의 기원이 된 "신앙의 규율"을 만든 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도신경 자체도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하나는 초기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기의 것이다.

AD 3세기 혹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초기 사도신경은 매우 짧았다. 필립 샤프는 그의 교회사에서 이것이 동방교회로부터 수입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혹은 로마에서 발전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의 요점은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 340년경)의 그리스 신조(The Greek creed)와 동일한데, 이 신조는 마르셀루스가 교황 율리우스 1세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보다 좀 더 길이가 길고 현재의 사도신경과 보다 유사한 후기 사도신경은 AD 6세기나 7세기에 가서야 나타나는데, 초기의 사도신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몇 구절이 추가되었다. 즉, "지옥에 내려가셨다가"(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구절이 추가되었고, 교회라는 단어 앞에 "우주적 혹은 카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으며,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를 믿사오며"라는 구절, 그리고 "영원한 생명(the life everlasting)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구절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추가 구절들은 골(Gallican) 지방이나 북아프리카 지방의 역본들로부터 수집되어추가된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신경은 8세기에 현재와 같은 언어로 확정되었고, 12세기에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인준되었다. 사도신경은 역사적으로 서방교회(Western Church)의 예배에서 사용된 가장 대중적인 신조였다. 참고로, 129개의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있는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THE HEIDELBERG CATECHISM)는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데, 이 교리문답서는 사도신경을 일컬어 "간략히 우리를 가르치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조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Question 22. What is then necessary for a christian to believe?

Answer. All things promised us in the gospel, which the articles of our catholic undoubted christian faith briefly teach us.

 

Question 23. What are these articles?

Answer.

1.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2.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begotten Son, our Lord:

3.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4.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5.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6.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7.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8. I believe in the Holy Ghost:

9. I believe an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10. The forgiveness of sins:

11.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12.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 3. 사도신경은 참 성도들의 믿음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신경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이고 확실한 내용을 어느 정도로 요약해서 진술하고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1563년)의 "질문과 대답 #24"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대한 것이고, 둘째 부분은 아들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에 대한 것이며, 셋째 부분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대한 것이다. 이 교리문답서가 사도신경을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이고 확실한 믿음의 요약이라고 선언한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최소한의 중요한 모든 것들을 사도신경이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과연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과 내가 믿고 있는 중요한 모든 교리들이 사도신경 안에 요약되어 담겨져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보편적이고 확실한 교리들이 너무나 많이 빠져 있다.

 

첫째, 사도신경에는 "성경"이 어떤 책인지에 대한 아무런 고백도 없다.

사도바울의 정의에 의하면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셨다."(롬15:3-4)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를 요약해 놓은 고백문에는 무엇보다도 앞서서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성경(BIBLE)에 대한 고백이 들어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가? 그것은 카톨릭이 성경을 어떤 책으로 여기는가를 알면 쉽게 알 수 있다.

 

1994년판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에 의하면 성경과 교회의 전통(여러 시대를 통해서 전수된 가르침들)과 교도권(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증된 해석을 부여하는 작업)이 그 중요성에 있어서 동등하다. 다음은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성전(聖傳)과 성서와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가장 현명하신 계획에 의하여,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또한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여하도록 상호간에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계시헌장 10항)"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45 #95]

 

즉,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은 기록된 성경말씀 만큼이나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 개의 서로 다른 "최종 권위들"이 서로 상충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교리문답서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계시헌장 10항) 즉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42 #85]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교리문답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책무는 "교회"에 맡겨져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오로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뜻한다는 점이다.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의 또 다른 곳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서 주석자들의 임무는 이 같은 규칙을 따라 성서의 뜻을 더 깊이 깨닫고 설명하여, 예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연구를 통해 교회의 판단이 성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서 주석의 방법에 관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속하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직무를 수행한다.(계시헌장 12항)"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51 #119]

 

간단히 말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을 교회의 전통이나 교도권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책으로, 심지어 그 세 개의 권위가 충돌할 때는 무시되어야 할 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최종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카톨릭 교회가 현재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그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증(認證)된 해석"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들의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오류 없는 말씀으로 우리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 최종권위가 되는 초자연적인 책이다."라는 고백을 실수로 빠뜨렸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가? 사도신경이 성경의 최종권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만든 이들이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인가?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의 권위인가? 몰몬경인가? "파수대"인가? 불경인가? 공자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천지가 없어져도 그대로 남아 있을(마24:35), 살아있고 항상 있는(벧전1:2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가? 당신이 믿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 성경이라면 왜 그것을 당신이 매 예배 시마다 고백하고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신앙고백문 안에 끼워 넣지 않는가?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는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매장되신 사실을 순차적으로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분께서 왜 죽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가?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당신과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기 위함이었다.(골1:20-22) 당신과 나의 피와 같이 붉은 죄를 대신 지시고 그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벧전2:24)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

 

당신도 만일 필자가 무지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시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한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신이 확고한 믿음의 고백으로 붙들고 있고, 심지어 이단 판별의 기준으로까지 삼고 있는 사도신경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조항"에는 포함될 필요가 없다. 그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따라서 당신은 매번 예배 시마다 사도신경으로 당신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분께서 왜 죽으셨는지 전혀 고백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분께서 죄가 있어서 죽으셨는지 아니면 무죄하신 분으로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셨는지, 옆집 강아지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지 아니면 당신과 나의 끔찍한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는지, 친구네 집 고양이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자 죽으셨는지 아니면 죄인인 당신과 나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자 죽으셨는지, 사도신경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분께서 왜 죽으셨는지는 당신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인가? 필자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죄인 곧,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고백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귀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감탄스러운 사실이다. 그런데 예배 시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한 그 감사한 고백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for our sins)(롬15:3)라고 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요, 요약 중의 요약으로, 만일 우리가 매 예배 시마다 고백해야만 할 어떤 고백문이 있다면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될 내용일 것이다.

 

셋째,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시는 동안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시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시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사실은 왜 중요한가? 참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29, 벧전1:19, 계5:6, 등)의 예표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유월절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했다.(출12:5)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과연 그분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고 말한다.(벧전1:19) 그분은 깨끗하고 완전하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시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셨다면 그분의 구속사역은 무효가 된다. 그분은 점과 흠이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여느 죄인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이 자신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분하는데 사용하는 신앙고백 진술문에 이토록 중요한 사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삶을 사심으로써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가? 아니면 당신에게 있어서 죄 없는 분으로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사실은 교리적으로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일 뿐인가?

 

넷째, 사도신경에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도신경은 마지막 부분에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 을 믿사옵나이다."(I believe in … the forgiveness of sins)라고 말한다. 당신은 "죄의 용서"를 믿는 것은 기독교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죄의 용서"를 어떻게 받는 가이다. 고행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아니면 자선이나 선행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나 기부금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용서는 죄를 없애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주지는 못한다.(트리엔트공의회: DS 1712) 죄에서 다시 일어선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갚음을 '보속'(penance) 이라고 부른다." "…보속은 기도일 수도 있고, 헌금, 자선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자발적인 절제, 희생이 될 수도 있으며, 특히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인내로 받아들이는 일일 수도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35 #1460]

 

혹은 침례(세례)나 유아세례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로마 카톨릭과 켐벨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바대로)

"세례를 통해서 모든 죄, 즉 원죄, 본죄와 죄로 인한 모든 벌까지도 사해진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69 #1263]

 

"어린아이들도 원죄로 타락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므로,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세례로 새로 나야 하며, 모든 사람이 그곳으로 부름을 받는다. 구원의 은총이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특히 어린이 세례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출생 후 가까운 시일에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와 부모는 그 아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무한한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465-466 #1250]

 

혹은, 성사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대로)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정화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13 #1393]

 

혹은, 교회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주장하는 바대로)

"아무리 중대한 잘못이라고 해도 거룩한 교회가 사해줄 수 없는 잘못은 없다..."[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72 #982]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1편 p.373 #986]

"주교와 사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주는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30-531 #1448]

 

혹은, 신부에 의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인가?(카톨릭이 주장하는 바대로)

"... 실제로 주교와 사제들은 신품성사에 의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게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 교리문답서 제2편 p.535 #1461]

 

아니면 위의 어떤 것들과도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through his blood)(엡1:7) 죄들이 용서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인가? 당신이 만일 죄 사함의 근거가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피에 있다고 믿는다면 왜 그 내용을 당신의 신앙고백에 포함시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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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Amen)으로 완성되는 사도신경

 

이원효 신부·대전 가톨릭대학교

 

 

 

사도신경은 "믿나이다"와 "아멘"이라는 말로 처음과 끝을 구성하고 있다. "아멘"(Amen)이란 단어는 히브리어이며, "믿다"(아만; "Aman")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고, "견고함" "신뢰성" '충실성'을 의미한다. 이 "아멘"은 '확실하다' '견고하다' '든든하다'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파생한 부사이다. 그러므로 "아멘"이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결합됨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말이 "아멘"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지금 고백한 내용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이며, 거기에 자기 자신을 일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아멘"은 공동체의 일치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공동체 안에서 고백하는 이 사도신경은 공동체의 이름으로 바치며, 그 내용에 대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일치를 드러내는 환호성이기에 "아멘"은 하나의 찬미가가 된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이다.

 

결국 사도신경의 시작인 "나는 믿나이다"와 끝인 "아멘"은 사도신경의 거대한 2개의 큰 축과 같다. 여기서 "나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한 내용에 대해 "아멘"은 충만한 사랑과 한없는 충실성이신 하느님께 완전한 믿음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신앙인의 삶은 세례 때 "나는 믿나이다"라고 한 신앙 고백이 "아멘"이라는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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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를 읽은 후 직장·단체 진열대에 꽂아 여럿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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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9:1-7     성령세례        2003. 2. 2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1)사람쯤 되니라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사도가 에베소지역으로 들어가자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빠진듯한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성령이 있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란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치면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볼로와 같은 입장입니다.

 

 

 

사도행전 18:24-25절입니다.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기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자세히 하나님의 도를 전합니다. 무엇을 증거 하였을까요? 바울사도가 에베소 사람들에게 증거 한 것처럼 세례요한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봅니다.

 

 

 

마태복음 3:11-12절을 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의 세례란 자기 뒤에 오실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을 소개할 뿐입니다. 자신은 그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과 성령이란 심판과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즉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알곡처럼 곡간에 들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쭉정이로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세례를 모르는 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무엇을 증거 한 것인지를 다시 증거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 등을 다 증거 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를 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중생하는 것은 저급한 신자이고 예수 믿고서 성령 받아 방언해야 더 고급한 신자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방언과 예언이란 아직 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기 전의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고 난 지금은 예수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가 동일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자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사단의 권세아래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다르게 기록된 곳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선 것을 사도들에게 확인을 시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임하는 것도 또한 확인을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회의에서 이방인도 얼마든지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확정합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의 선택과 긍휼로 불러내신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도신경을 암송하실 것입니다. 무슨 주문처럼 어려서부터 외우고 아는 것이라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릅니다. 알기는 알지만 믿지는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압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압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건이 이미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게 되면 반드시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삶이 이러한 갈등들이 있을 것입니다. 갈등조차 없다면 성령이 임한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자라면 갈등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보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갈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14-17절을 봅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아빠란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버지가 있는 아이는 염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걱정과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나님 아버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자라면 장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늘에 속한 기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 까지는 고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사랑하겠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기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성도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에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롬8:18-25).

 

 

 

그런데 우리가 늘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체의 소욕역시 강합니다. 땅에 것들이 세상의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좀더 즐길 수가 있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계시기에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에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언약의 핵심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입니다.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 믿기 이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신에 노예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초적인 죄가 주가 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 모든 인간은 모두가 다 자기가 최고인줄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나 말고 다른 한 사람을 그것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한 사람을 나의 주님이라고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수를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되거나 그냥 지식으로 주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고서 자기를 위하여주는 예수를 부르면 말로는 주 이지만 내용으로는 종을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주인 된 자리를 예수님께 양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14절을 봅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란 윤리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죄란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는 자기에게는 일체의 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는 이미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도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에 우리의 두려움과 심판의 주가 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이며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바르게 알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 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고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제 다시 묻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성령이 임하자만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한 자만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믿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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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습니다 ( 마가복음 9장 14∼24 )

 

 

 

오늘부터 몇 주일동안 사도신경에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 때부터 전승되어온 신조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이라 불리웁니다.

우리가 매주 공예배시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세계교회 신경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가 받아드리고 고백하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사도시대부터 계승되어온 우리 기독교의 신앙을 압축한 것입니다.

즉,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느냐는 것을 최소한 압축 정리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이를 주일마다 암송함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명백히 알고 이를 확신과 감사로 견지하며 또 믿지 않는 분들이 "당신은 무엇을 믿느냐?"라고 묻는다면 명백히 설명하며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4부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 성부에 대하여

(2) 성자에 대하여

(3) 성령에 대하여

(4) 교회와 교회에 대한 은사등 4부로 나눕니다.

좀 더 자세히 사도신경의 내용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이 12가지의 신조로 되어있습니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2) 그 외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5)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7)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8) 성령을 믿사오며

(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1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와 같이 12신조를 저는 앞으로 10회에 걸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으로 사도신경 맨처음에 나오는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믿습니다"하는 말은 사도신경의 총론과 같은 것으로 이 말은 사도신경의 내용 12신조에 모두 관련되는 중요한 전제입니다.

 

1.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씀에 인칭에 주목해 보십시다.

우리 말 신경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순서입니다만 원문인 라틴어에는 Credo나 헬라어에는 Pisteou. 또 영역에는 I believe나 독역에는 Ich glaube는 모두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이 초두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Credo, Pisteou, I believe, Ich glaube라는 말은 모두 제1인칭 단수로 복수형 우리가 We believe도 아니며 3인칭 저희가 They believe도 아닙니다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다음 조문들을 듣습니다"라는 명백하고도 강한 표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또는 인격적 관계를 명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 구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은 "아비가 신 포도주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지 말라"라고 하였고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경우든 믿음의 경우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아비의 범죄로 자식이 망하지 않고 남의 의로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변화하신후 산하에 내려오셔서 아이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병든 아이를 고치기 전에 그 아버지의 심령의 병을 먼저 고치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비참한 간질병을 고치고 싶은 일념에서 예수께 간구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버지의 반신반의적인 병든 믿음을 책망하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의 결함을 깨닫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어떤 환난과 고통, 병마가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교회적인 공기도에서 "하늘에계신 우리 아버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구원에 관한 근본 문제에 돌아 갈 때에는 하나님은 "내 아버지요" 우리의 고백은 "내가 믿습니다"인 것입니다.

2. "믿습니다"의 뜻을 밝히십니다.

믿음 "Pistis"란 헬라어는 "설득한다"란 말에서 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말한바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을 그리스도의 큰 사랑이 강권하시고 그 강권에 굴복 당해 믿게 된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 믿음은 "Fide"라는 말은 충실, 신념, 신뢰 등을 표시하는 낱말인데 결국 "믿음"이란 "나 자신을 믿음의 대상자의 완전한 지배 아래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은 "이상의 부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하면 믿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며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 삼국지에 나오는 촉한의 유현덕왕이 제갈양을 세 번 찾아간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현덕왕이 죽을 때 제갈양을 불러 유언하기를 "내 아들이 쓸만한 인물이면 그를 도와 촉한 왕을 계승하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당신이 직접왕이 되십시요"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신의" 즉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군신간에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같은 혼란기에 촉한이 건재할 수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국민간에 스승과 제자간에 상인과 구매자간에 모든 이웃간에 믿음이 있을 때 그 사회는 건전하게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은 보다 특수한 것입니다. 독일무이하신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산다싱의 전기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 산중에서 고행을 하는데 어떤이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 손을 들고 내리지 않는 사람, 냉수에 들어가 얼어붙은 사람, 한사람은 동굴에 들어가 동굴문을 돌로 막고 작은 구멍을 통하여 누군가가 식물을 넣어 주면 먹고 없으면 그대로 굶어 6년이나 살아온 불교도를 만나서 이런 고행에서 무엇을 얻었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없고 자기의 마음은 이 동굴 보다 더 어둡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아무 댓가나 행함이 없이 구원 받은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어떤 고행이나 율법이나 의식 같은 외적 조건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마음에서 "내가 믿습니다"라는 믿음에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영원히 현재형으로 "내가 믿습니다"함으로 구원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고 믿는자에게 능치못함이 없는 큰 축복과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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