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성서·

헤스본/수13:17

제이비젼 2014. 6. 2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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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리인의 수도였던 헤스본은 실제로 존재했던 도시였는가? 아니면 성경상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도시였는가? 현대의 지명 가운데에는 헤스본이라는 도시가 없다. 이것을 이유로 하여 헤스본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성경의 기록과 고고학적인 발굴 과정 및 자료를 제시하여 헤스본에 대한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곧 성경의 무오설을 증명하는 귀중한 작업이다. 헤스본은 성경에서 구약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발견된 유물 가운데에는 모세 시대의 것들이 없다는 애석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지명을 오늘날의 지명들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매우 무의미한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와 명칭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황 속에 성경을 맞추려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탈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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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헤스본이란 지명을 아모리 왕 시혼과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지명 가운데는 그와 동일한 지명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을 이유로 하여 헤스본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가공의 성읍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의 발굴 업적으로 나타난 사실들은 그들의 견해와 사뭇 다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헤스본에 대한 성서의 기록과 헤스본의 역사성은 물론 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1. 헤스본의 역사


 1) 구약 시대

 아모리인 시혼 왕은 모압과 아르논 강에 이르는 전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헤스본은 그 영토의 수도였다. 이스라엘이 시혼 왕을 죽이고 그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이 땅은 기업 분배의 과정에서 르우벤 지파에게 주어졌고, 후에는 갓 지파에게로 넘어갔다(민21장, 32장; 수13:17; 수21:39;대상6:18).

 한편으로 이곳은 주변국들과 이스라엘간의 장기간에 걸친 분쟁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때 이곳은 모압의 에글론 왕이 차지하였으나(삿3:12) 사사들에 의해 수복되었다(삼상12:9). 주전 600년경에는 암몬 사람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다(삿11:26). 그러던 것이 아합 왕 사후에는 모압이 이스라엘의 세력을 그곳에서 장기간 몰아내게 된다. 헬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바네테아의 소유가 되었다가 유대 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로마의 관할 지역인 시리아에 합병되었다.


 2) 신약 시대

 학자들은 마카비 시대 헤스본에서 동전제조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실제로 헤스본의 동전제조 권리는 주후 3세기에 와서야 부여 되어졌는데 이것은 1973년에 실시될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동전들에 근거한다.

 비잔틴 시대에는 헤스본이 '에스부스'(Esbus)라 지칭되었는데 그곳은 기독교 감독의 교구였으며, 이슬람 시대에는 벨카(Belqa)의 수도가 되어 주후 14-1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오늘날 헤스본의 어느 언덕에서는 저수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저수지는 아마도 아7:4에서 언급되고 있는 '헤스본의 못'인 듯하다.

 

 2. 헤스본의 발굴


 1) 발굴 과정

 헤스본의 고고학적 탐사는 1968년부터 시작되었으며 8년 동안 4회에 걸친 발굴 결과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칼빈 신학교의 엘드렌(B. van Elderen) 교수와 그의 조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유적지를 A지구에서 D지구까지 분류하여 발굴한 결과 여러 지충을 발굴하고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특히 2-4지층에서는 이슬람식의 목욕실이 나왔으며 이것은 동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뜨거운 물을 공급하기 위한 두 개의 물통과 그곳으로부터 욕실로 연결된 2.25×85m 규모의 도로가 있었다.


 2) 헤스본의 유물

 헤스본에서 발굴된 유적 가운데는 비잔틴 시대를 증거하는 교회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둥의 기초석과 모자이크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교회로 인도되어지는 돌길이 발견되고 주변의 집터들도 발견되었다. 그뿐 아니라 로마와 비잔틴의 무덤들에서는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질그릇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무덤은 입구를 막는 굴혈식 무덤이었다. 특히 그곳에서 출토된 동전들은 헤스본이 동전을 제조하던 성읍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헤스본에서 여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성읍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 오랫동안 존속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3. 헤스본 발굴의 의의


 1) 철기 시대 이전

 1968년에 시작한 헤스본의 발굴에서 철기 시대 이전의 유물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철기 시대 이전 시혼 왕의 성읍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위치하였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 근처의 얄룰(Jalul)이라는 곳에서 청동기 시대의 도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그곳이 헤스본일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그것은 이스라엘이 헤스본을 점령한 후에 보다 살기 좋고 안전한 곳인 얄룰이 나타나자 그곳으로 옮긴 후 명칭을, 그들이 이전에 살았던 헤스본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철기 시대 이휴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 유물들은 헤스본이 철기 시대 이후에도 존재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증거로는 다듬지 않은 견고한 둥근 돌들로 구축한 성벽 건물들과 회칠한 큰 저수조를 들 수 있다. 특히 저수조에 퇴적된 침식물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철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 파편들이 있었다. 

 이 도기 가운데는 현재의 암만(Amman) 주위에서 발굴된 암몬 사람들이 도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 지역에 암몬 사람들이 거주하였거나 그들과 관계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드러난 발굴의 결과 이곳은 주전 6-3세기까지는 폐허로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없었으며, 주전 2세기에 마카비가(家)가 여기에 다시 거주했음이 드러났다. 결국 이런 고고학적 유물들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헤스본의 역사를 주변 국가와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지명을 오늘날의 지명들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매우 무의미한 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의 언어와 명칭들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 성경을 짜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취할 태도는 성서의 그 시대 그 환경으로 돌아가 성서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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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혼(Sihon)


 아르논 강과 얍복 강 중간에 있는 지방에 살던 아모리인 왕(민2:21; 신1:4)으로 그 수도 헤스본의 또 다른 이름인 시혼을 따서 '헤스본 왕 시혼'이라 불리웠다. (신2:30; 민21:26,28). 그는 모세에게 패배하기 이전까지는 매우 강력한 왕으로서 모압을 정복하고 아르논까지의 땅을 점령했으며(민21:26-30), 미디안의 5명의 귀족을 그밑에 거느리고 있었다(수13:21). 이렇게 강대했기 때문인지 모세가 이스라엘을 왕의 대로로 통과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시혼은 이를 거절하고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그 땅이 약속의 땅, 곧 가나안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쟁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에서 시혼은 피살되고 영토는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말았다(민21:21-32; 신2:26).

 2. 메사(Me놈)

 메사는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에게 정복되어 이스라엘의 속신이 된 모압의 왕이다(왕하3:4). 모압 석비에 의하면 그를 '멜렉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며 '양을 치는 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메사는 아합의 통치 후기에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독립한 일도 있었으나 아합의 사후 요람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유대와 에돔의 원조를 얻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싸워 큰 손해를 입었다(왕하3:22-24).

 3. 모압의 석비

 모압 영내에서 발견된 석비이다. 이 석비는 모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A.D. 1868년 독일의 클라인(Dlein) 목사에 의해 고대 모압 사람의 도성 디반(Diban)에서 발견됐다. 이것은 높이 115㎝의 흑색 현무암 돌판이다. 상부와 밑부분은 둥근데, 거의 반원에 가깝다. 비문은 34행의 횡서이며 히브리어에 가까운 말이다. 이 석비에는 모압 왕 메사가 메드바, 느보, 야하스와 가사 사람이 살던 아다롯을 탈환하고, 주민을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 바쳐 남쪽의 호로나임까지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승리의 원정은 왕하3:4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과 유사하다.

 4. 마카비우스(Maccabeus)

 마카비우스는 유대의 영웅 유다 벤 맛다디아스(Judas ben Mattathias)의 희랍어 별명에서 유래하였는데(마카비1서 2:4) 이는 '망치로 금속을 두드려서 만든 자'를 의미한다. 랍비 문헌에서 그의 가족은 하스모니 안가로 불리고 있다. B.C. 2세기 초반 헬라 왕국의 양대 진영인 시리아(셀류커스 왕가)와 이집트(프톨레미 왕가) 사이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받으며 그 제국들에 종속되어 있던 유대를 강압적으로 통치하기에 이른다. 그는 유대의 대제사장직을 경매하고 이교 신앙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마카비 일가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의 중심 인물은 '마카비우스'로 불리는 제사장 맛다디아스의 아들 유다였다. 그는 시리아의 강압으로 부터 유대와 예루살렘을 구원하였고, 이교 신앙을 몰아내는 데 힘쓰다가 전사하였다. 그 후 그의 형제들이 그의 뒤를 이어 반란의 지도자로 떠오르는데 후에 유대를 통치하는 하스모니안 왕가를 이룬다.

 5. 헤스본의 발굴

 철기 시대 제2기 초기(B.C.9-8세기)의 도기가 이 구릉지 두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뚜껑이 없는 저수조로서 길이가 4.5m, 넓이가 1.2m, 깊이사 4.5m 나 된다. 이것은 아7:4에 언급된 여러 저수조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에는 철기 시대 제2기 후기(B.C. 7세기경)의 모습은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여러 유물들과 함께 B.C. 7-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패각도 발견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암몬 사람들의 방언과 글자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텔 헤스반이란 곳은 B.C. 6-3세기까지는 버려졌던 거주지로 추측되며 B.C. 2세기에 마카비가 이곳에 발견된 가장 뛰어난 유적으로는 로마 시대의 것으로 성벽, 탑, 돌로 포장된 낭하, 성채 그리고 큰 건물과 계단들이다. 이 건물은 A.D. 3세기에 에스부스에서 주조된 동전의 뒷면에서 묘사된 것으로 중앙에 여신이 위치해 있고 주위에 네 기둥이 있는 신전이다. 그 밖에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가장 뛰어난 유적은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 건물로 A.D.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 때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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