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성서·

바산과 골란/수12:5

제이비젼 2014. 6. 2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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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산과 골란은 종종 성경의 기록 가운데 언급되어지고 있다. 바산은 옥이 다스리던 나라로 비옥한 토양을 가진 고원지대였다. 그러므로 목축지로 적합하였으며 결실이 풍성한 곳이었다. 골란은 이스라엘의 도피성 중의 하나로 비(非)고의적 살인범들이 피하는 곳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지역의 역사적 전래와 발굴의 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바산은 옥 왕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이스라엘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지방은 여호수아의 땅 분배 과정에서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신약에 와서 바산은 헤롯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빌립과 아그립바 2세의 영토가 되었다. 골란은 6개의 도피성 가운데 하나로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구제하는 구원의 땅이었다. 이는 요단 동편에 위치하였는데, 골란의 고고학적 발굴로 말미암아 당시의 골란에 대한 역사성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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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산(Bashan)은 종종 성서의 기록 가운데 언급되어지고 있다. 특히 민수기와 신명기는 이스라엘과 대항한 기록 가운데 바산 지역을 언급하였고 아모스, 이사야서에서는 영적인 비유에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산을 언급한 성서 기자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바산의 지형적 특성과 역사를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살펴봄이 유익할 것이다.


 1. 바산 지역


 1) 바산의 경계와 골란

 바산은 높은 고원지대로서 해발 500-900m에 달한다. 북으로는 헤르몬 산, 서로는 갈릴리 바다와 요단 강 상류, 남으로는 야르묵 강, 동으로는 하우란(Hauran)과 닿아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을 갖춘 바산은 길르앗과 헤르몬 산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기에 성경은 바산 왕 옥이 헤르몬 산을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수12:5;수13:11) 실제로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그리고 바산은 지리적으로 살펴볼 때 살르가(Salecah)와 에드레이(Edrei)를 동남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수12:5, 수13:11에서는 이곳을 그술과 마아가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골란(Golan)이 바산 지역에 속해 있다면 바산은 요단 강의 근원지도 아니고 요단 강의 동쪽도 아닌 요단 계곡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이 된다(신4:43).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바산 지역에는 아르곱(신3:4), 골란(신4:43), 아스다롯(신1:4), 에드레이(신3:1)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헬라와 로마 시대의 바산의 명칭은 바타네아(Batanea)였으며 아라비아어 명칭은 '엘 바다니에'(el-Bathaniyeh)였다.


 2) 바산의 특성

 바산은 비옥한 토양을 가진 고대지대이기에 목축지도 적합하였다(시22:12; 겔39:18). 그리고 그 지역을 상징하는 나무는 상수리 나무로서(사2:13; 겔27:6) 오늘날까지도 산비탈에 남아 있다. 또한 성서에서 바산은 레바논, 사론, 갈멜과 함께 비옥한 곳으로 대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땅의 족속들은 부패한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로 쇠약해지고 말았다(나1:4).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후대에 교훈이 될 만하다.


 2. 골란의 고고학적 발굴


 1) 19세기 후반의 발굴

 골란에 대한 고고학 발굴은 당시의 골란에 대한 역사성을 증명하기에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골란의 발굴은 1884년 독일의 고고학자 슈마허(G.Schmacher)가 골란의 지도를 제작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지도 작업을 위하여 수많은 탐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탐사의 많은 부분이 긴네렛 호숫가에서 남서쪽으로 위치한 골란에 대한 것이었다. 그중 휙(Fig)이라는 지역은 왕상20:26에서 아멕으로 언급되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데 그곳에서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가 발견되었다. 1885년에는 올리판트(L. Oliphant)가 키르렛 카니프(Khirbat Kanif)의 회당에서 아람어가 기록된 상인들의 방을 발굴하였다. 그곳에는 "하난(Hanan)의 아들이요 할후(Halfu)의 아들 선한 요세(Yose)를 기억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2) 20세기의 발굴

 1932년에 수케닉(E. L. sukenik)은 골란의 함맛 가더(Hammat Gader)를 발굴하던중에 모자이크로 장식된 방들이 있는 회당의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1967년 6월의 이스라엘 탐사에서 100여 개의 유적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골란에서는 조각된 돌과 헬라와 히브리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1970년에는 한 유적지가 데일 쿠브(Deir Kurb)라는 마을 근처에 있는 와디 알 다리야(Wadi-al-Daliya)의 산맥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조직적인 발굴은 1971년에 와서야 시작되었으며 발굴 결과, 그곳에는 18m×15.4m 규모의 회당과 고대 건물들이 발견되었다.


 3. 바산과 골란의 역사


 1) 바산의 역사

 바산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기까지는 옥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모리인 옥 왕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그들은 멸망하였고 바산은 이스라엘로 넘어가게 되었다(민21:33-35). 후에 이 땅은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가 차지하게 되었다(수13:30).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그 땅을 빼앗기고 후대에 여로보암 2세 때에 이르러서야 회복한다. 그 후 바산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앗수르에 통합되고(왕하15:29) 주전 2세기경에는 나바테야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산은 신약에 와서 헤롯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빌립과 아그립바 2세(Agrippa II)의 영토가 되었다.


 2) 도피성 골란

 고대 근동에는 범죄자들이 피할 수 있고 체포되지 않는 특별한 성역에 대한 오랜 관습이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에서도 레위 지파 영역에 여섯 개의 성읍을 정하고 부지중에 죄를 지은 죄인들을 보호해 주는 도피 성읍이 있었다. 이 여섯 개의 성읍 가운데 요단 동편에 세 개의 성읍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골란이다. 도피성 제도에 대해 부연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였을 경우 그의 가족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간섭하여 그 진상을 파악하고 고의가 아니었음이 확인 되면 그를 도피성으로 인도하였다. 이런 도피성 제도는 이방의 관습과는 차이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차이는 성서의 도피성 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고의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데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그 시대의 문화만 아니라 지형적 특성도 이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의 지리적 특성과 사람들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형적 특성에 맞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래서 강남의 부촌에도 달동네의 빈촌에도 하나님은 그 특성에 맞게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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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술(Geshur)


 그술 지방은 북요단강의 동부지방으로서 그중에 수리아 지역의 땅과 마아갓 족속의 땅은 므낫세 아들 야일에게 준 땅이다(신13:14). 이 경계 지역에 대해서는 수12:5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이 이곳까지 영토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그술 족속이란  말이 여호수아 1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까지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그술 족속은 야일과 다른 지역을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적이 있다(대상2:23)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압살롬은 다윗 왕과 그술 왕 달매의 딸인 마아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삼하3:3; 대상3:2). 그래서 압살롬은 자기의 이복형 암몬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하여 달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삼하13:37,38).

 2. 디글랏 빌레셀(Tiglath Phileser)

 디글랏 빌레셀은 앗수르의 왕으로서 그의 통치 시대에 대한 기록은 앗수르의 역사서와 니므롯의 서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첫 원정은 바벨론에 대한 아람족의 압력을 물리치기 위한 출전이었다. 이 출전에서 그는 아람의 많은 영토를 빼앗아 자기 관할인 아라파(Arrapha) 지방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은 자기에게 있어 최대의 적인 우라르투(Urartu)를 토벌하기 위해 북방 정책을 강행하고 헷 연합군과의 전쟁을 통해 서방 지역까지를 정복하였다. 또한 그는 지방행정 기구를 확대하여 모든 점령지를 관리하고 조공을 받았다. 이런 일을 담당하는 관리는 이 일만 아니라 정보 요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그 지역 주민을 외딴 지방으로 추방하는 권한도 행사하였다.

 3. 바산 왕 옥

 옥 왕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신의 이름인 듯하다. 그는 바산의 왕으로 얍복강부터 야르묵 강까지의 북부 길르앗과 야르묵 강으로부터 헤르몬 산까지의 바산 지역을 통치했다. 여기에는 두개의 큰 성이 있었는데 에드레이(Edrei)와 아스다롯이다(수13:12). 이두 성읍은 두 구역을 갖고 그 안에는 60개의 강력하게 요새화된 작은 성읍이 있었다(신3:4). 그는 아모리 족속으로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로 불리워진다. 유대 전승은 옥 왕이 거인이었다고 해석하는데 이 견해는 그가 장이 아홉 규빗, 광이 네 규빗인 철침상을 사용했다는 기록에 근거한 듯하다(신3:11). 그가 이스라엘과 싸운 기사는 민21:33-35과 신3:1,2)에 기록되어 있다. 그 싸움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을 격파한 전열이 정비되기 전에 기습한 것이었으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그 나라의 에드레 근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4. 나바테아인(Nabataens)

 나비테아인은 신약 시대에 아라비아의 북서쪽 지방과 요단 건너편을 정복하였던 민족이었는데 신구약에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진 스타키(Jean Starcky)라는 학자는 성경의 느바욧(창25:13; 대상1:29)과 앗수르 역대기이 나바얏(Nabayat)이 나바테아인과 동일시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자료들과 고고학적 자료들은 A.D. 1세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서 나바테아인이 근동의 중요한 정치적 세력이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나바테아인은 보통 사해 남동쪽 요새지인 페트라(petra)의 유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세력 범위는 때때로 서쪽으로는 네게브(Negev)까지 북쪽으로는 다메섹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나바테아인은 고대 에돔의 영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그 지역과 비옥한 초생달 지대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지배한 듯하다.

 5. 골란(Golan)

 므낫세 지파에 속한 성읍 중 하나로 바산에 위치한다. 모세는 이곳을 요단 강 동편에 있는 세 도피성 중의 하나로 선택했고(신4:43; 수20:8)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골란은 오늘날의 야울란(Jaulan)과 동일시되는데 서쪽으로는 요단강,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 북동쪽으로는 헤르몬 산과 각각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골란은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에 의해서도 언급되는데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대규모 거주지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골란은 고지대에 위치하였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비옥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골란은 이스라엘의 군사 전략상 매우 긴요한 지점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분쟁의 원인이 되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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