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박해와 이단에 대한 교회의 대처/계2:10

제이비젼 2017. 5. 16. 20:49





  갓 태어난 기독교에는 다가오는 세상의 시련은 가혹했다. 

기독교는 그 자체의 비타협적 신앙관 때문에 아무리 관용적인 종교나 사상이라도 수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용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 내부적으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많은 이단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초기의 기독교가 그 교리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가오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며, 오히려 기독교는 이러한 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면서 변증학교 교리가 정립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박해와 환난이 심할수록 오히려 그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후에 기독교의 박해가 종식되고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자 기독교는 급속도로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교회가 급속히 부흥 성장하자 곧 그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외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탄압정책과, 내적으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초심자들이 초대교회에 들어옴으로 발생한 교회의 메시지 본질을 위협하는 이단 사상이었다.


1. 로마의 기독교 박해


 원래 로마는 종교에 있어서 혼합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종교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국의 지도층 인사들은 대부분 헬라의 스토아 철학도로서 다신교적인 대중종교에 멸시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철학적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신앙적인 원인도 있지만, 불합리한 오해 때문에 오는 것도 많았다.


 1) 황제숭배 거부

 기독교인들은 로마 정부의 황제숭배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는 우상 숭배였기 때문이다. 황제숭배의 거부는 기독교인들이 비애국적이며, 반제국적인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받게 했다.


 2) 예배의식의 오해

 기독교인들은 매주 '사랑의 향연'(Love feast)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서로를 '형제'나 '자매'로 불렀는데 배우자끼리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이를 오해하여 기독교인들의 예배란 신자들이 비밀리에 한데 모여 방탕하며 혼음을 행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성찬식을 잘못 생각하여 유아를 빵 속에 넣고 잘라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3) 지식층의 오해

 학식있는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은 무식한 대중으로서 이들의 교리가 지혜의 허울을 쓰고는 있으나 결국 어리석고 자기 모순에 가득 차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부활의 교리는 비합리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았다.


 4) 신자들의 비사회성

 신자들은 당시 대부분의 사회 활동이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을 반사회적인 자들로 보이도록 했다.


2. 주요 박해


 1) 네로(Nero 64년)

 이것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네로는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다. 이때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2) 도미티안(Domitian 약90-96년)

 로마와 소아시아 지방에서 발생했다. 박해의 이유는 황제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로마의 클레멘트가 순교했고, 사도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했다.


 3) 트라얀(Trajan 98-117년)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애국심에 대해 의심받던 다른 단체들과 함께 수난을 당했다. 그들은 발견되기만 하면 형을 집행당했다. 이 시대에 이그나티우스와 시므온, 소시무스, 루푸스가 순교했다. 


 4) 하드리안(Hadrian 117-138년)

 트라얀 황제의 정책이 고수되었다. 기독교인에 대해서 거짓 증거를 해도 처형을 당했다. 이때 텔레스포루스가 순교하였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년)

 황제는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반대하였다. 또 자연재해의 원인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때 저스틴과 포티누스, 블랜디나 등이 순교하였다.


 6)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202-211)

 기독교인으로서의 개종이 금지된 시기였다. 레오니다스와 이레니우스, 페르페투아 등이 순교하였다.


 7) 막시미누스(Maximinus 235-236년)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암살당했던 전(前) 황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박해하여 기독교 성직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르술라와 히폴리투스가 이 시대의 순교자였다.


 8) 데키우스(Decius 249-251년)

 박해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황제신 외의 다른 신에 대한 경배가 금지되었고 기독교를 완전히 박멸하려고 대대적인 처벌이 시행되었다. 이 시기에 파비아누스와 예루살렘의 알렉산더가 순교하였다.


 9) 발레리안(Valerian 257-260년)

 기독교인의 재산이 압수되고 집회 또한 금지되었다. 오리겐과 키프리안, 식스투스 2세가 순교하였다.


 10)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Diocletian Galerius 303-311년)

 최악의 박해시기로 교회들은 무너지고 성경이 불태워졌다. 모든 기독교인의 권리가 정지되고 기독교인은 이교신에 대한 희생제물이 되었다.


3.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1) 영지주의(Gnosticism)

 영지주의는 헬라철학과 동양철학, 기독교 교리를 합하여 생성된 혼합철학이다. 이들의 주요 교리는 이원론과 가현설, 유출설, 영지로 인한 구원 등이 있다.


 2) 말시온주의(Marcionism)

 말시온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구약과 신약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는 물질을 죄악시함으로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독론은 가현설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죽은 자의 부활도 없다고 하였다. 한편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는 장차 오실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교회는 헬라철학에 빠지는 경향과 구약을 중시하여 율법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말시온은 철학과 율법을 배척하고 복음만 주장하였다. 그의 의도는 좋았으나 영지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기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3) 몬타누스파(Montanims)

 몬타누스 운동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고, 몬타누스와 다른 두 여인을 통하여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신비주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치우쳤으며 말세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현실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회사상 장기간의 박해는 무수한 순교자를 낳았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말대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였다. 교회는 안팎의 도전을 맞으면서 점점 성숙해 갔던 것이다.

 



 1. 영지주의

 그리스도 이전, 즉 기독교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하였던 사상이다. 혼합절충주의적인 성격을 띤 이 사상은 초자연적인 신비한 지혜(영지)를 전수받은 사람만이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주는 높고 선한 신이 아니라 열등하고 불완전한 하위신(下位神), 데미우르고스(Demiurgos)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고 전능(至高全能)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존재였다. 


그러한 계시를 받을 만한 모든 영적 인간들은 그 계시에 의해서 한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세계가 약하므로 그리스도가 실제로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현(假現)으로, 또는 그림자로, 또는 인간 예수 안에 일시적으로 깃든 것으로, 또는 물질적인 본질을 가지지 않고 성처녀의 몸에서 출생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구원의 지식은 사도들이 아주 절친한 그들의 제자에게만 전수한 비밀의 가르침으로써 완전한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이 구원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도 영지주의자가 아니었으나 영지주의자들은 그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취하였다. 영지주의는 많은 분파로 분리되어 다양한 형태를 보여 주나 선한 신을 때때로 플레로마(Pleroma)라고 불리기도 하는, 영적인 광명계의 우두머리에 두는 것은 어떤 형태에서도 예외가 없다.


2. 말시온(Marcion)

 말시온은 최초의 교회 개혁자라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존재이다. 그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충격을 받아 이 세상의 신과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자비의 신을 대립시키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유대교와 율법주의를 그 형태 여하를 막론하고 공격하였으며 바울만이 복음을 신앙적으로 이해했던 유일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


 말시온은 기독교적 생활에 대한 그의 사상을 형성함에 있어서도 영지주의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을 따랐다. 물질 세계는 악하기 때문에 금욕생활에 들어가야 하며 육식이나 성교는 창조신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다. 말시온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와 바울의 복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대로 로마 교회를 끌어들이려다가 144년경을 교회로부터 출교되고 말았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다른 교회를 세웠으며 바울의 10개 서신(목회서신 제외)과 누가복음 등의 성경을 모아 정경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인정했거나 구약의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는 구절들은 전부 삭제하였다. 성육신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구약과 그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은 율법주의에 대한 항거를 명분으로 하여 행해졌으므로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교회는 널리 퍼져갔다. 특히 동방에서는 5세기경까지 잔존하였다. 말시온 자신의 후기 사적(史蹟)은 남아 있지 않다.


3. 몬타누스파(Montanism)

 영지주의와는 달리 몬타니즘은 분명히 기독교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의 조속한 재림을 기대했던 초대의 희망이 대부분의 교회 안에서 점차 희미했던 2세기에 일어났다. 2세기 신자들은 성령이 성부, 성자와 특별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풍요한 모습으로 오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새롭게 폭발한 예언자적 열정과 결합되어 형성된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사상과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 등이 몬타니즘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은 교회에 작용하는 세속적인 영향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으로 몬타누스(Montanus)에 의해 주도되었다. 개심 전에 시벨레(Cybele)의 승려였던 그는 156년경 자신을 가리켜 성령이 말씀하실 때 사용하는 수동적인 도구라고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약속이 이미 실현되었으며 성령의 섭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기 위해서 독신, 금식, 일체의 육신으로부터의 절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의 실행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엄격한 태도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증대되고 있던 세속주의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응이 있었다.


 그래서 단시일에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의 권위에 위협을 느낀 소아시아의 감독들은 160년 직후에 회의를 열었다. 이 공회에서 몬타누스는 정죄되었다.

 카르타고(Carthago)에서는 200년경 터툴리안(Tertullian)이 이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곧 가장 뛰어난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추종자들은 어거스틴 시대까지도 그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몬타니즘이 제시한 금욕적 요구는 금욕주의의 보편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써 이 운동이 가르친 것과 같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후세의 수도원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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