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관련

찬양이란 무엇인가?

제이비젼 2016. 5. 8. 17:20



찬양이란 무엇인가? 



1.찬양의 어원적인 뜻 
찬양의 의미로 쓰이는 히브리어는 서너 가지가 있는데 성경에서 이들 단어들은 정확하게 다른 것과 구분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며 찬송, 찬양, 송축 등으로 해석됩니다. 


송축 
바락(BARAK,    )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께 기원한다. 축복을 받거나 축복을 기원해 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 단어는 히필형으로 쓰일 때 낙타의 무릎을 꿇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는 것, 타인에게 축복을 빌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 바로 이런 것이 송축이다. 
                 


찬송 
자마르[ZAMAR,] 손가락을 퉁기다. 연주하면서 시를 읊는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것이다. 


야댜[YADAH,] 던지다. 고백하다. 찬양하다. 
구약에서 고백은 찬양의 성격을 가진다.  

찬양할 때 감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내신 은혜를 밝히 말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고백, 감사, 찬양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능하신 구원에 대한 인정은 필연적으로 죄 의 고백과 긴밀한 연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으로 신자는 하나님께 다시 찬양을 드리며 즐거운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셔어[SHIIR] ~의 명예를 노래하다. (항상 대격이 따라 온다. ) 노래 하듯 말하다.  큰 소리로 낭독하다. 


경배 
샤캬[SHCHAH,]몸을 굽히다. 절하다. 숭배하다. 손을 내밀다. 

전치사 와 함께 쓰여서 언제나 방향을 가지고 쓰이는 단어로 찬양의 대상을 향하여 경배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프로스케오[PROSKUNEO,]는 신약에서 경배의 의미를 갖는 단어로 쓴다. 

이도 마찬가지로 방향을 전재로 하여 엎드린다, 절한다, 손에 입 맞춘다는 의미을 가지고 있다. 


2.예배의 고찰 
예배를 규정하는 단어는 히브리어의"아보다이"헬라어의 "라트레이아"로 이들은 노예나 고용된 종의 노동과 관계 있는 단어들입니다.  
노예나 종들은 몸을 숙이고 주인에게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 일상의 노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종류의 단어로 예배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예배의 성격상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요 놀라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갖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고용으로 되는 종과 주인의 관계와 같지 않습니다. 

온전히 믿음으로 되는 관계입니다.  
찬양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과 같이 찬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때 그것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체험된 하나님을 정화된 언어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참된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며 알아 가는 것은 찬양의 깊이를 더 깊고 넓게 해주는 것입니다.  


Ⅱ 찬양의 역사적 고찰 
사람은 원래 예배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원시 역사는 모든 사람이 어떤 대상을 예배하였다고 암시합니다. 

예컨대 애굽의 피라미드와 인도의 초기 베다 경(經)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개명된 인간의 가장 오래된 기념물 안에 종교적 확신, 영감 및 예배의 원시적 실행은 흔히 자연 숭배의 형식을 취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을 신으로 만드는 다신교이거나 자연의 만물을 신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범신론입니다.  
원시 예배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악령을 몰아내고 노한 신을 달래기 위한 제물과 미신적인 제사로 구성되었습니다. 

원시 예배는 인간의 선천적인 요구에서 자극 받았습니다. 

이런 예배의 대상은 인간의 요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이 창조한 신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것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아무 신을 섬기든지 사람은 항상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이르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에도 어떤 형태로든 있게 마련입니다. 

찬양의 어원적 뜻은 "손을 내민다" "찬성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은 어떤 명제에 대하여 긍정적 의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이 찬성이라고 표현되지 않는 것은 그 찬성의 대상이 하나님에게 한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헬라어의 (찬미)같은 단어는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인간에게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중세기의 초기 음악은 대 그레고리 황제 재직 기간동안에 편찬한 고도로 조직화된 성가는 일 천년 동안 교회의 유일한 예배 음악이었습니다. 

11세기까지는 노래를 제창(齊唱)으로 불렀습니다. 
이 무렵에 나타났던 파트 별로 노래 부르기는 다소의 발전을 거쳐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음악(1525~1594)에서 완숙하게 되었습니다. 

1600년을 전후해서 오페라 음악과 기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 음악의 새로운 형태를 낳았는데, 음의 조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루터는 종교 개혁 기간에 회중적인 노래를 부흥시키려 애썼습니다.  그는 이것을 기쁨의 원천으로는 물론 교회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의 회중들은 시편을 운율적(韻律的)으로 번역하여 노래 불렀습니다. 

"비록 엘리자베스 여왕이 '제네바 지즈곡'이라고 명명했던 이 대중의 노래를 자신이 싫어하였지만, 그녀의 통치 기간에 노래부름은 거의 열광적이었거나 유흥에 가까웠습니다, 

교회에서 뿐 아니라 모든 길거리에서 시편을 "큰 소리로 외쳐"불렀습니다. 

이 세기에 음악의 두 거장(巨匠)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헨델(George Frederick Handel, 1685~1759)이 나타났습니다. 

이 발전은 특출한 찬송 작가들이 나올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아이삭 왓츠, 촬스 웨슬리, 존 뉴우튼, 존 니일이 있었습니다.  


Ⅲ 찬양의 이유 


1.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43:21) 

이사야서가 밝히는 것과 같이 시편의 많은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찬양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할레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 찌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편148:1~5) 

창조의 사역은 주권자의 고유 권한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이사야64:8) 

하나님께서 토기장이로 비유 되셨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흙을 만지는 자로, 진흙과 같이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이사야29:16) 
동양적 사고로는 부모가 자식을 낳은 것만으로도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유교 정치의 근간을 이루어 왔던 군사부일체(軍士父一體) 사상은 성경적 사고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군사부일체란 임금과 선생과 부모가 각각 다른 지체를 가졌으나 같은 격을 갖는 경외의 대상들이라는 것이고, 성경은 주와 선생과 아버지로 한 몸을 가지신 하나님을 경외(敬畏)의 대상으로 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자에 의하여 존재하는 목적이 주어집니다.  
장로교 소요리 문답 제 1 번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입니다. 
다음의 몇 가지는 소요리 문답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인 바, 인간의 모든 삶과 행위에 있어서 그것이 그의 지고한 선과 행복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것을 사모하고 찾기 위하여 뜻을 두고 계획하며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지고한 자리에 모시고 그를 확신하며 그에게 강한 애정을 표시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20) 
인생들은 외부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내시는 계시에 따라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입술로써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감사로(원문에는 찬양으로 나와 있음)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은 자원하는 심령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 갈지어다"(시 116:7) 


2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시편에서 할렐루야로 시작하거나 끝맺음을 하는 시는 24편이나 됩니다. 

이 뜻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회당 예배에서 할렐루야 시편은 큰 비중을 차지했었습니다. 

시편 113~118편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수전절에 불려졌고, 시편 135, 138편은 안식일에, 대 할렐루야 시편은(145~150)은 시편 145편과 더불어 아침 예배에 불려졌습니다. 

할렐루야는 시의 머리말로 때로는 후렴구로, 찬양에의 부름으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쓰였습니다. 

당신이 찬양의 이유를 묻는다면 하늘과 땅 또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이 이 땅에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 감사함으로... 
감사찬송은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여 찬양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잊은 사람을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은 감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감사는 히브리어로 TODAH(    )인데 아래의 성경에서 쓰임을 보면 감사와 찬양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    )로 제사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시 50:23) 
"...감사찬송(    )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느 12:31) 
감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큰 동기 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하심도 놀랍고 또 하나님의 명령도 지엄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은 감사해서 드리는 찬양입니다. 

감사가 없이 드리는 찬양은 의무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의무로 드리는 찬양은 이스라엘이 전에 드렸던 짐승의 제사와 같습니다. 

진실로 회개함 없이도 좋은 짐승만 가져오면 제사장에게 신임받고 더불어 하나님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구약의 사람들 처럼 외식과 가증스러움의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리 없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해야 하는 이유로 감사를 나열하라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이 많다고 감사의 행위까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다. 
모세오경을 읽노라면 나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근동의 문화에서 발견되지않는 인간 존중의 사상입니다.  
노예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와 여인들에 대한 율법은 당시 근동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전에 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것들로부터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른 이에게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함께 나누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10가지 말씀 앞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의무를 지우지 아니하십니다.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 감사의 깊이가 더하면 더 할수록 순종의 깊이가 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하나님이 없는 사회나 개인은 고통을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하나님이 부재한 삶입니다.  
당신은 땅에 붙은 인생을 아십니까? 사람이 흙인지 흙이 사람인지 알수 없도록 허리를 구푸려야 살수 있는 인생들 말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돕기 위하여 정치가들도 나서고 운동권도 나서고 배운이들도 나서 봤지만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문제를 문제로 남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유일한 문제의 해결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토에 구푸려진 인생을 들어서 방백중의 한 사람과 같게 높이시고 명예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은혜를 너무나도 쉽게 잊습니다. 
열왕기상 16:2~3에 보면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의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나의 노를 격동 하였은 즉...." 
우리가 은혜를 그렇게 쉽게 잊을 것이면 하나님께서 또다른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넘치도록 임하는 것입니다. 
       
Ⅳ 찬양의 대상  


인간들은 찬양의 대상을 바꾸는 누를 자주 범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첫 번째로 입을 열어 말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향하여 즐거이 노래를 지어 부른 것입니다.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인 여인으로 인하여 아담은 죄를 짓게 됩니다.  

마땅히 시조 아담은 하나님을 찬양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을 돕는 자[Help Mate]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이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이는 곳 그의 시험 꺼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에 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 찬양하는 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많은 찬양 사역자들이 빠지는 오류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질문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이라는 고지를 향하여 달려들고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끈질긴 유혹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누가 내게 가르쳐 준 입에 닳아빠진 그런 류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애절함으로, 그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한 갈증으로, 세상의 죄악과 투쟁하는 분기충천함으로, 사랑으로, 기쁨으로,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찬양의 대상을 올곧게 세우려 한다면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의 무릎 앞에 있게 말아야 합니다. 


Ⅴ찬양의 형태 


1 춤추며 찬양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의 긴 찬양 시와 이에 화답하는 회중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홍해를 무사히 건너게 하신 하나님, 애굽의 군대를 무찌르신 하나님께 드려진 이 찬양은 430년의 노예 생활을 마감하는 환희로 가득차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면 모두 참석해야 하는 이 기쁨의 찬양 대열에 남녀 할 것 없이 노래와 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론의 누이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그들이 화답하여 가로되....,,"  이렇게 춤을 추며 찬양하는 형태는 절기나 축제 때 회중과 함께 부를 수 있는 민속춤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듯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힌네마 토브 마 나임"으로 시작하는 시편의 찬양 같은 것들은 추수감사절에 이스라엘이 총회로 모여 즐거이 부를 수 있는 찬양들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는데 이는 찬양에 춤이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는 단편적 증거입니다. 


2 찬양을 위한 전문직 종사자를 두고 있었다. 
다윗은 주전 1050년경 레위 사람들을 찬양에 관계된 일에 임명하여 예배 음악을 마련토록 하였습니다.  
두목을 임명(역대상16:5) 
성가대를 임명(역대상25장) 
24반차로 나누고 제비를 뽑아 찬양에 종사하게 했다. 

288명의 전문적인 찬양 종사자를 두고 있었다. 찬양의 사역은 명예로운 직분으로 가업으로 이어 내려왔다. 
찬양에 종사하는 자들의 임무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 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두목 아삽과 그 밑에 스가랴, 여이엘, 스미라못, 여히엘, 맛디디, 엘리압, 브나야, 오벧에돔, 여이엘이를 두고 날마다 그 앞에서 정한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다. 
"너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에게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가사를 말할지어다(묵상하라) 그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즐거울 지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역대상 16장 8~11절)위의 내용들이 다윗에 의하여 임명된 찬양단의 일상적 임무였다.   


3. 합창과기악 (역대하5장11~14절)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나팔 부는 제사장 일 백이십인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시편150편에는 다양한 찬양의 도구들이 소개되고 있다. 

큰소리 와 높은 소리로 최대의 힘을 드려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찬양에 특별히 제한을 받은 악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모든 악기들이 찬양에 동참을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Ⅵ 찬양의 도구 


1 신체를 이용한 찬양 
찬양의 도구로는 제일 먼저 우리 신체를 이용한 찬양입니다. 

손뼉을 치며, 손을 들고, 발을 구르며, 목소리로 찬양합니다.

손을 들거나 손뼉을 치는 행위는 상대에게 자신의 선한 감정을 들어낼 수 있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서양 인사의 예에서 그 의미들을 찾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손을 들거나 손뼉을 치는 행위는 상대가 찬사나 경배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과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2 모든 악기로 찬양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 찌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시 150편 中)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모든 악기들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찬양에 제한된 악기는 없습니다. 


3 목소리로 
"내가 나의 거룩히 구별한 자에게 명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를 풀게 하였느니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많은 백성의 소리 같으니 곧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 무리가 먼 나라에서, 하늘가에서 왔음이여 곧 여호와 그 진노의 병기라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다."(사 13:3~5) 

크게 떠드는 소리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무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뵈옵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여호와를 자랑하는 것이며, 마귀를 대적하는 강한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로 찬양한다는 것은 당신이 평소에 내는 수다스런 말이라도 찬양의 범주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인생의 즐거움으로 먹고 마시는 것 보다 더한 것이 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잠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잠15:13)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시23:~)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왕의 상에서 즐거이 먹고 마시며 기쁨의 언어들을 주고받는 것은 원수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간담을 녹이는 칼과 같은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쁨을 이야기하고 눌림 중에 자유를 이야기하며 병든 중에 나음을 이야기하고 무소유 중에 참 소유를 이야기하고 어두움 중에 빛을, 부폐한 중에 소금을 이야기하는 당신의 입술은 어두운 바다를 향해 힘차게 빛을 발하는 등대와 같은 것이며, 당신의 목을 죄고 있는 그 어떤 악의 세력이라도 이기고 남는 힘이며, 찬양입니다. 

목소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악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야고보는 작은 혀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목소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여야 합니다. 


4 새 노래로 
어제 드려졌던 찬양을 가지고 오늘 드린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되겠습니까?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꾸짖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은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제 드렸던 찬양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살아서 역사 하셨지만 오늘도 역사 하십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분은 살아서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아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입술은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시편 40:3의 말씀에는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로 보건대 당신이 드리는 새 노래는 만방으로 두렵게 합니다. 

새 노래는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만남에서 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한 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새로운 것이기에 우리가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처럼 새 노래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당신의 입술에 새 노래가 떠나지 않는 다면 당신의 삶 역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배워서 하는 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 하시기에 그분이 당신의 삶에 들어 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살고 그분을 위하여 살고 그래서 나의 삶이 하나님이 언어로, 나의 행위가 하나님의 그림으로 나타내어져야 합니다.  그런 삶에 어찌 감동이 없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을 경험한 고백이 없겠습니까? 

그것이 노래가 되고 그것이 당신의 입술을 빌어 고백이 되어진다면 어떻게 어제의 고백으로만 만족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새로운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5.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엡 5:19, 골 3:16) 


  시 
시는 '팔모이스'[ψαλμοιs]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음악의 형식을 빌어 시를 읊게 되므로 시의 더욱 풍부한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시는 찬양의 소재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편은 후기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에서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절에서 모일(예배) 때 찬송시를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113~118편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수전절에 불려졌고, 시편135, 138편은 안식일에, 대 할렐루야 시편인 145-150편은 시편 145편과 더불어 아침 예배에 불려졌습니다. 

시는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마 26:26~30  주의 만찬 뒤에 불려짐 엡 5:14, 요한복음 1:1~5, 10~14, 18 로마서5:12~21, 6:3~11, 8:31~38, 13:11~14 빌립보서 2:5~11, 베드로전서 3:18~22, 디모데전서 3:16, 6:1~2, 디모데후서1:9~10, 2:11~13, 디도서2:11~14, 3:4~7,계시록 15:3~4 바울 서신의 앞부분에 있는 송영(DOXOLOGY)은 초대교회가 공예배에서 시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찬미(엡5:19, 골3:16) 
쯔빙글리 교회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의 해석을 단순히 시라고 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라며 교회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교회의 예배를 대단히 메마르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적으로 쯔빙글리가 탈 카톨릭을 주창하기 위하여 카톨릭이 음악에 갖는 지나친 관심에 대한 반동으로 그렇게 주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N.I.V성경은 "Speak to one another with psalm, hymns and spirittual songs."(엡5:19) 
       ψ                               = Psalm = Hymn,        =Hymn (행 3:9) 
   psalm, hymn을 시와 찬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음률시인(音律詩人)이었던 것처럼 많은 시편의 기자들은 시와 음악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시와 음악을 떼어놓고 생각 하기는 힘듭니다. 

또한 시를 이용한 노래들은 서로 주고받는 형태를 취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찬미는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3:11"찬송가로 서로 화답하며" 
   엡 5: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찬미는 서로간에 나눔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나눔이요. 감사를 나누는 것이요 자신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누는 것이며 그분에 대한 놀라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같은 경험의 고백(시편, 찬송가 복음성가)은 함께 노래하며 개인적인 고백은 서로 화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령한 노래  (대상 25:1) 
.신령한(nabaa ) 노래는 구약적 의미로 어떤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어떤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찬양한다기보다는 성령에 이끌리어 찬양하는 것 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찬양하는 예로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을 문안했을 때 일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어찌된 일인고....(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눅 1:39~36)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쉽게 포기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찬양 사역에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중에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일정으로 악화된 체력, 허스키 해진 목청, 지체들과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반응 없는 회중, 이런 조건들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힘든 과정이 늘 있습니다. 

때로는 찬양 사역자들이 노래하는 기계쯤으로 취급되기가 쉽습니다. 

더욱 찬양 사역자들을 괴롭게하는 것은 노래를 잘하니까 노래방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찬양을하는 사역자들의 수고는 찬양을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찬양이 되게 합니다. 

저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성령의 도우심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신령한 찬양이 꼭 엑스타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할 수 있는 조건이 다 주어진 후 찬양한다면 그런 류의 찬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찬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6 침묵으로 
침묵은 단순히 가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놀라움이기도 하고 묵상이기도 합니다.  


  .놀라움의 표현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찬양의 SHACHAH(   )라는 단어는 종이 주인 앞에서 경외와 놀라움의 행위를 
하는 노동과 관계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손뼉을 치고 두 손을 들며 절하는 것은 상징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요 노동인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1:11절에 이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이것은 느헤미야의 걱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하가 왕 앞에서 먼저 말을 꺼낼 수 없고 또 근심이 있어서 얼굴에 나타내면 왕을 불충하게 섬긴다는 죄목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니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왕 이 느헤미야에게서 수색을 발견하고 이것을 지적하자 느헤미야의 놀라는 표정은 마치 사진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신하가 왕 앞에서 좋은 얼  굴을 하는 것은 신하의 기분과 관계없이 신하가 왕 앞에서 해야 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아닥사스다 앞에 이러한 경외심을 나타냈는데 하나님의 출현 앞에 그의 종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찌니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묵상으로 
다윗이 성전에서 찬양을 하는 찬양지기들에게 준 의무 중에 한 가지가 묵상입니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SHIACHU =원문에는 묵상으로 나와 있다. 대상 16:9 ) 
묵상은 찬양 사역자들에게 중요한 일과가 되어야 합니다. 

작곡이다 연습이다 이벤트 기획이다 하며 바쁘게 일과를 보내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묵상을 하지 않는다면 듣지 않는 노래를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묵상이 빠진 찬양은 찬양해야 할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며 찬양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 잘 연주했으니까 오늘도 무사히 지나치겠지 하는 생각은 공연불같은 것입니다. 


Ⅶ.찬양의 쓰임 


1.하나 됨을 위하여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 133편은 지금이라도 곡을 부쳐 함께 부름으로 형제애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들은 이스라엘의 절기 때마다 모여서 함께 부름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하고 또한 이스라엘은 야곱의 아들들로 구성된 12부족 연합체의 국가임을 확인하고는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문화와 같은 하나님, 같은 율법, 같은 제사 제도, 같은 문화와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같은 민족임을 확인했습니다.  
문화에 대한 동질성의 확인에는 찬양이 가장 쉽고 확실한 수단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가 하나의 찬송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문화 속에 동화됨으로 우리가 각각 다른 경험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구약적인 의미로 예배에 임하시는 하나님은 회중을 하나로 하는 한 개인에게 임재 하십니다.  

따라서 개인의 죄는 전체의 죄다(민수기 16:22). 

아간과 아이성의 예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한 개인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은 회중 전체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인 것이 회중인 것입니다. 

이는 예배에 임하는 회중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찬양이 바로 이일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 인도자는 선곡에 있어서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2.성전을 향하여 
구약의 예배자들은 예배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매주일 올라올 수 없었습니다.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한번 나오는 것조차 일년중 가장 큰 행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배는 회당에서 드렸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곳 즉 먹기 위한 짐승을 잡는 곳(일정한 곳을 정해 놓아야 했다)이 예배의 처소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언약궤가 머무는 곳이 예배의 처소였습니다. 

실로와 예루살렘은 예배의 처소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순례자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길고도 험한 여행을 거쳐야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목숨을 빼앗길 염려도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외진 길목을 지키는 도둑들이 많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떠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당신이 시편을 주의 깊게 읽으신다면 이런 염려로 가득차있는 순례자들의 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 졸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 졸지도 아니하시고 (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아니하며(  )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 121편) 
순례자는 불안함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121편의 시는 히브리어 AL(  )과 LO(  )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부정을 나타내는 이 두 개의 단어가 특별히 다른 뜻을 가지고 쓰이는 것은 아니나 이 시의 경우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으로 뜻을 구분하여 본다면 AL은 한시적인 부정을 나타내고 LO는 영원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순례자에게 어려움이 더하면 더 할수록 그의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성전을 사모하는(산=    =언덕들, 시온의 낮은 산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음이 깊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순례자의 어려움은 아주 많습니다. 

도적뿐만 아니라 머리를 녹일 듯 이글거리는 태양, 밤의 공포, 죄의 유혹 이런 것들이 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여 있습니다.  

순례자가 이처럼 어려운 순례의 길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어떤 고백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했을까?  

그가 드리는 찬양은 언어 이상의 것입니다. 

신령하게 드리고 진정으로 드리고 약속으로 드리고 안도감으로 드리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려움은 감소했는지 모르지만 유혹의 위협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너무나 많아져서 무엇이 죄의 유혹인지 알 수 가 없을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하심에로, 발을 디디십시오! 
그제서야 당신을 둘러 있는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고난도 없습니다.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는 것은 당신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니고요 당신은 이 땅에 한 번 지나가는 순례자에 불과 합니다. 

여행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맘껏 챙길 수는 없습니다. 

먼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짐이 될 테니까요. 당신이 지나오는 길에 예쁜 나비를 만났다고 그것을 마냥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내일을 위하여 잠시 쉬어 가는 하룻밤의 안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자리를 털고 더 크고 좋은 터가 있는 성을 향하여 발을 내 디디십시오 이것이 순례자의 정신이며 마라나타의 정신입니다. 
   
3.예배를 위하여 
예배의 중요한 예전으로 찬양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찬양을 통하여 찬양의 예배,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예배, 말씀을 통하여 말씀의 예배, 봉헌을 통하여 봉헌의 예배가 되며 각 예전들이 모여 하나의 예배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찬양은 그 자체로 예배이어야 합니다. 

차제(此際)에 찬양이 예배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송 
예배에의 부름이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 찌니라" (하박국 2:20) 

하나님 앞에서 차려 자세로 서도록 모든 회중을 부르는 것이다. 

예배를 위하여 자신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엄숙한 시간이다. 

따라서 성가대원들은 부산한 움직임을 보여서는 안된다. 

흔히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때를 타서 이동하려고 하는데 이는 예배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행위이다. 


  .송영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 앞에 모두가 일어서서 응답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죄인된 나를 거룩한 존전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불러 주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찬양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도송 
이 찬양은 목회기도 또는 중보기도의 후속으로 불려진다.  

찬양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도의 주요 내용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는 회개의 기도와 회중의 필요를 하나님께 간구 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이때 사용되는 찬양은 용서에 대한 감사와 간구에 대한 확신의 내용을 담고 있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말씀 봉독 후 찬양 
이때 불려지는 찬양은 예배의 수준을 가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말이 꼭 옳은 표현은 아닐지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성가대의 찬양 수준은 그 교회의 전체적인 영적 수준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에 만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원리적으로 이 찬양은 말씀 봉독에 대한 회중의 반응이다.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만난 듯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듯 "주여 오늘 오시옵소서" 

기다리던 중에 말씀으로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드리는 찬양이다. 

이 찬양의 내용은 감사,헌신,기쁨등 온 회중을 대표하여 드리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중세 카톨릭 미사는 음악이 예배를 대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사교 정식 미사(pontificial high mass)  한 명 또는 몇 명의 사제의 도움을 받아 한 사교가 노래 부르는 미사, 

*.정식 미사(high mass) 한 사제와 집사들의 협조 아래 노래부르는 미사, 

*.독창 미사(low mass)협조자 없이 한 사제가 노래하는 미사, 

*.미사시카 성찬 없이 독창만 하는 미사 이밖에도 사적인 미사들이 많이 있었고 매 미사마다 잘 훈련된 성가대가 필요하였다. 

미사곡들은 규범화된 6개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베네딕뚜, 상뚜스, 아뉴스데이) 

노래하는 미사는 회중으로 듣게 만 하는 것이었다는 것과 가사가 라틴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근에 와서야 자국어로 번역하여 부르는 시도를 하는데 그만큼 회중에 대한 고려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중세의 카톨릭이 음악에 쏟았던 정열만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예배에 음악을 수용하기를 꺼렸다.

이것이 종교개혁 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음악이라는 좋은 도구를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가 되었다. 

들려주는 음악은 듣기는 좋을는지 모르나 회중으로 예배에 방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말씀 선포 후 찬양 
이 찬양은 말씀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다.  

따라서 찬양의 내용은 감사, 헌신, 파송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4.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은 즐거움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 즐거움은 찬양을 통하여 표현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즐거움의 회복을 위해서다. 

하나님의 백성과 피조계에 기쁨과 찬양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를 통하여 미리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찬양을 통하여 즐거움을 미리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찬양이 의무로써 정해지기도 하는 것은 찬양이 감정이나 기분 또는 주변의 상황에 의존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욥1:21)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시 받은 일인 것이다.("...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 
거워할찌니라"신11:7) 
초대 교인들은 계속해서 성전 예배에 참석하며 기쁨을 표현하였다.("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 하니라"눅 24:45)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경험한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찬양으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하였다. 

치료와 정결케하는 능력을 경험하고 목격한 이들은 기쁨이 넘쳐서 찬미를 터뜨렸다.("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사도행전3:7~8) 

초대 교회에 이런 찬양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때로 지체들에게 "즐겁게 사십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즐겁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로서의 특권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무미건조한 삶을 산다면 도대체 예수를 믿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위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면서 그것을 몰랐을 때와 한가지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슨 유익이겠습니까?  

찬양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됨(The tension of aleady and yet) 속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이루워 주신 구원, 승리, 부활, 
병고침, 죄사함, 천국, 구하는 대로 주심을 미리 바라보는 믿음으로 믿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속에 있습니다. 

여전히 싸워야 할 문제가 있고 치료해야 할 병이 있으며 
지옥과 같은 삶의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바라보는 믿음으로 호전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미래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찬양은 이런 일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찬양은 현재의 어려움에 우리를 묶어 두지 아니합니다. 

바라보이는 회복을 미리 맛보아 찬양한다면 악마라도 우리를 놓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모일 때마다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삶에 즐거움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까지라도 곧 회복시킬 것입니다. 


Ⅷ.찬양의 능력 


찬양은 주문(呪文)이 아닙니다. 노래 자체도 아닙니다. 
찬양은 그 어떤 능력을 갖는 그런 것입니다. 

찬양이 주문이라면 오래된 것일수록 좋겠지요 마치 헬라인들이 고어(古語)인 히브리어나 율법 문을 토기에 새겨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처럼 말입니다.  
찬양은 이와는 다르게 새로워질수록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40:3) 

또 찬양을 노래라고 도식화 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음악가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별명이 붙어야 하겠군요 우리는 때로 누가 더 새로운 곡을 얼마나 알고 있나? 

얼마나 잘 연주하는가? 목청은 어떤가?  

그런 것들로 찬양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찬양에 아름다움이 풍부하도록 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몫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최고라는 식은 부당합니다.  

교회에서 성탄 축하의 노래로 성대가 모짜르트의 대관 미사곡이나 헨델의 메시야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또 성가대가 그런 곡을 소화했다는 긍지도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가끔 문제가 되는 것은 성가대가 노래를 위한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휘자나 피아노 연주자나 관현악 욕심을 가지면 끊임없이 채워야만 하는 그 필요들! 

소수이지만 전업 지휘자들 중에는 일정한 래파토리를 가지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50:23절에서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노래라 할지라도 감사가 빠져 있는 찬양은 하나님을 속이는 화살과 같습니다.(호 7:16)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같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죄악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 말입니다. 

화려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 같으나 실상은 다른 것을 위하여 노래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찬양의 대상을 바꾸는 누를 범하고는 합니다.  


1.찬양은 두 날 가진 검 
찬양이 올곧게 드려진다면 분명 성도의 찬양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히브리서는 좌우의 날선 검으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합니다.(히 4:12) 
시편 149:5~6에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찌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찬미, 높임)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도의 찬양은 두 날 가진 검이요 군대들의 함성입니다.(계19:14) 

그래서 성도의 찬양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능히 이김을 얻게 합니다. 
악한 영들은 성도들에게 질병과 낙심과 투쟁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성도의 입에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존영(   )이 있다면 악한 영들은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2.찬양은 문제를 풀어 줍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하나님께 나와 아뢰면 해결의 방법이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나 근심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겠지요 이렇게 약해질 때 우리에게 흥정해 오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방법은 정말 현실적이고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문제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당신은 날마다 책속에 있는 사람으로 사람사는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안다는 것이요 당신은 이런 일에 있어서 말할 자격이 없소"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보다야 편안하게 살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의 어떤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려운 문제를 많이 만났고 그 때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깨닫게 된  가장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신뢰 회복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임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찬양은 회복의 약속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에 즐거움을 회복하실 날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미리 느끼는 것입니다. 

구한 것을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즐거운 회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회복, 보복)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찬양은 옥문을 엽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했습니다.  

그들의 처지가 행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고난받음이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묶임을 풀어 버리고 옥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내가 소년원에서 선도 봉사를 하고 있을 때에 함께 큐티를 나누던 형제들에게 가끔  "형제의 소망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원생들은 "우선 이곳을 나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괜한 질문을 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질문은 참으로 자유로운 것이 무엇일까? 에 대하여 말을 하고 싶어서 던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과 헤어져서 정문을 나설 때면 "정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누눌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1년 정도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곳에서 근무하는 교도원은 정말 오랫동안 철장 안에 있습니다. 

더불어 나도 수년 동안 그 철장을 드나들었던 것입니다. 

나의 말은 갇힌 것이 참된 부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놓인 것이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찬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는 바울과 실라의 경우처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채찍으로 맞는 피의 흔적을 갖고라도 예수의 증인으로 남는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Ⅸ.찬양에의 부름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진흙을 만지는 분이시지만 사람들에게 진흙과 같은 취급받기를 거부하십니다.(사 29:16) 

만일 이 땅에 하나님을 찬양할 자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높아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심판만이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니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사 3310~11)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내 입이 높이지 아니하면 어찌하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높이우시면 어찌하나?! 

당신을 찬양의 사역자로 삼으신 하나님께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누가 하는가? 누가 찬양에 부름을 받고 있는가? 

화려한 미사 어구를 사용하기에 능숙한 수사가인가!? 아니면 음악가인가!? 

그러나 찬양에 초청되고 있는 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토(아파르)와 같은 자에서부터 부한 자와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초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찬양의 조건이나 찬양에 초청될 자격이 소유나 명예나 권력에 의하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토기장이 하나님께서 아파르를 찬양에 부르심 
시편 113편은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의 이름이 찬양 받아야 할 것을 선포하면서 낮의 해가 내리 쬐는 그 아래 먼지와 같이 살아가는 가난한 자 거름더미와 같이 살아가는 궁핍한 자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과 같은 자들의 삶을 고치셔서 찬양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일을 하여도 끝이 없는 이 노동,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다 보면 흙이 사람인지 사람이 흙인지 모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의 허리를 누가 펴 주며 안식의 시간은 누가 줍니까? 세상에는 어떤 것도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치 진흙과 같을 지라도 들어서 방백 중의 한 사람과 같게 입히시고 명예를 주십니다.  

"학대받는 자로 부끄러이 돌아 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시74"21) 

오늘도 이와 같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 분은 흙을 만지시는 토기장이로 우리의 삶의 일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진토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찬양에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          )께서 의인들을 찬양에 부르심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라"(시 33:1) 
   
.전능하신 하나님(      )께서 권능 있는 자들을 찬양에 부르심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시 29:1) 
(                   베니 엘림은 신의 자손, 영웅의 자손, 강한 자의 자손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하나님 
께서 찬양에 부르십니다. ) 


.견고한 망대이신 하나님께서 피할 자를 찬양에 부르심(잠언 18:10)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즐거이 부르자"(시95편~) 48:1~3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엘로힘 하나님(     )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충만한 것들을 찬양에 부르심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 
할 찌로다"(시 96:1~12) 


.성전에 계신 하나님(        )께서 여호와의 집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찬양에 부르심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너희야 여호와를 찬송하 
라" (시편 134, 135편) 


.아도나이의 하나님(    )께서 여호와의 종들을 찬양에 부르심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 하라" (시 113편:1)


.만군의 하나님(         )께서 주의 군사를 찬양에 부르심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를 세우리니..." (시 20:5) 


.지존하신 하나님(        )께서 만민을 찬양에 부르심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시 47:1~2) 
시편 150편은 가장 광대하게 찬양의 종들을 부르는 장입니다.  

여기에는 사람만 초청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유가 찬양에 초청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좋은 매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한들 하나님의 광대한 창조의 뜰을 다 채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소리 높여 외쳐도 찌끼와 같이 가라앉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라도 찬양에 동참 시켜야 합니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떼까지" 

이는 시간적으로 우리가 일할 전부의 시간입니다. 

공간적으로는 세계 만방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은 너무나 느립니다.  서둘러 일하십시오! 


Ⅹ.찬양 사역자들을 위한 조언 


1.의욕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 
찬양 사역자들은 작곡, 편곡, 연주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되는데 이때 예배에 실험적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재의 빈곤에서 또는 새로운 것에 대한 탐닉이 원인이 되고는 하는데 의욕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적합한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번 길들여진 음악은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와 같다. 


2.교회가 갖고있는 음악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무시하지 말라 
찬양 사역자들이 교회의 세속화에 앞장선다면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을 찬양으로 인하여 범죄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오늘날 음악가들의 일반적 견해는 다음과 같다,  

"예배식(禮拜式)의 정신을 보존하고 있는 음악은 감각주의나, 감상주의 모든 세속주의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그 질이 고상하고 조심성 있는 특징을 지을 것이다." 

예배에 알맞는 곡을 고르고 또 그것을 잘 부르는 것은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직접적 목적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합당하게 노래하는 것은 음악의 궁극적 목적이다. 


3.예배에 좋은 봉사자로 있어라 
찬양 사역자들은 예배의 주인이 아니다. 

예배에서 다른 예전을 맡은 사람도 그 예배의 주인은 아니다. 
각기 예배의 봉사자로 있어야 한다. 

음악이 너무 음악적이려고 할 때 음악은 예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신이 올겐을 연주하거나 지휘를 한다고 해서 회중이 악보와 다르게 부르거나 곡 해석을 자신과 다르게 하고 있다고 예배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일반 회중들은 일반적으로 호흡이 짧고 청음과 발성이 잘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때문에 그들은 불합리하게 노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예배를 중단시키고 교육을 실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의 음악적 수준은 회중이 찬양에 갖는 관심의 척도가 되므로 성가대나 교사 직원들을 상대로 꾸준히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4.유급 연주자에 대하여 신중하라 
교회 음악의 수준을 향상 시키기 위해서는 성가대를 잘 교육하여야 한다. 

잘 훈련받은 성가대는 예배드릴 때 회중을 인도하는 하나의 큰 보배가 된다.  

이것이 성가대의 첫 기능이다. 

그러나 성가대의 질을 위하여 유급 성가대원을 두는 것은 그리 적합하지 않다. 

성가대는 회중을 선도하지만 지나치게 앞장서 가는 것도 좋지 않다. 

좋은 연주자는 예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찬양의 품위를 높여 준다. 



찬양 사역자들이 늘 받는 유혹 중에 

.찬양 사역자들은 서로 경쟁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자들간에 알력은 항상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는 경쟁하듯 하라. 그리고 다른 것을 위한 경쟁은 삼가라. 
.찬양의 대상을 바꾸지 말라. (예: 이 노래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다. 생일 축하로 드립니다.  노래 잘하는 누구 정말 훌륭합니다. 등등) 
.찬양을 드리기 전에 가능하면 화해를 하라.  마태복음 5:23의 말씀을 기억하라. 
.찬양에도 순서가 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이다.  

제사 제도를 주의 깊게 연구하라. 그러면 처음부터 번제 
를 드릴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찬양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이다.  

화목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형제들과 나누어 먹는다. 

찬양도 교제를 위한 찬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담대하라. 
언제나 강하고 담대하라. 찬양에 함께 하는 자가 많거나 적거나 언제든지 힘차게 하라. 
찬양은 연주 실력이 아니다. 
to로 들어오는 신입 회원들을 잘 교육하라 찬양에 임하는 태도를 한 번 무너뜨리면 회복하기 힘들다.  


.기도하라. 
어떤이는 찬양단원은 하고 싶어도 기도하는 것이 부담되어 찬양단원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 시간은 묵상의 시간이다. 
왜 찬양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감사의 조건들은 헤아려 보는 시간이다. 

지체들 간에 화해를 도모하는 시간이다. 

정결함을 구하는 시간이다. 
   기도회의 리더는 찬양을 위하여 일하고 찬양을 위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속 가득 생동하는 찬양의 동기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잘 안 된다고만 하지 말라. 

그 일은 당신에게 부여된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곧 임재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다.   
    
.연습하라. 
연습은 준비하는 것이다.  

마치 맛있는 음식이라도 식거나 물은 것은 먹기 싫은 법이다. 

아주 간단한 음식이라도 정성껏 준비한 것이 좋은 것처럼 연습은 매일 아침 새 반죽으로 제사 드리는 소제나 같을 것이다. 

찬양은 소제이다. 

소제는 향기로 드리는 제사인데 그 종류만 해도 13가지가 넘는다. 

소제를 준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운 가루를 만드는 일이다. 

고운 가루 즉 소레스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이것을 조금 소개하면 
    .나락 털기=디샤 
    .껍질 날리기=조레 
    .손바닥으로 문지르기=쉐파 
    .주먹으로 치기=베타 
    .껍질 벗기기=맷돌질하여 굵은 가루인 케마흐를 만든다 
    .채질 하기=굵은 채에서부터 가는 채까지 이용하여 소레스를 만든다.  

뿐만 아니라 소제에 쓰이는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소제의 소레스를 준비하는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로 보건대 우리가 입으로 드리는 찬양이라 해서 쉽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옷을 단정히 입어라. 
찬양 인도자들은 만나는 회중과 초면인 경우가 많다. 

충분한 교감이 있던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더딘데 당신의 옷차림이 회중의 마음 문을 잠그는 자물쇠가 된다면 되겠는가?  

인도자들이 아무리 찬양의 원리에 충실하여도 열매 없는 행사로 끝나게 하는 것이다. 


.확실한 목표를 제시하라. 
찬양 집회의 성패는 인도자들에게 달려 있다.  

집회의 책임을 회중이 지지 않는다. 

회중은 인도자의 확신만큼 고백하고 손을 들며 손뼉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자가 제시하는 목표가 흐릿하고 확신 없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손을 들며 손뼉을 치겠는가? 


.잡음을 내지 말라. 
마이크를 빼거나 자바라를 구부려야 할 경우 꼭 스위치를 내리고 하라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다. 


.찬양 전에 모든 것을 튜닝하라. 
일단 튜닝된 상태에서 모니터 요원을 믿어라 자신의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기계 앞에 서성거리는 것은 볼 
상사납다. 


.연주자들은 넘치게 하지 말라. 
예를들면 기타가 에드립으로 나가다가 박자를 잃어버리거나 변주를 시도 하다가 자기 코드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드럼은 소리가 제일 큰 악기이다.  

드럼이 악보에서 돌변적으로 나타나는 다른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셈 여림에 적절히 대처 하지 못하면 전체 연주를 망치게 된다. 

키 보드가 사전에 약속되어 있지 않은 키를 잡는다면 전체적은 조화를 깨뜨리는 원인이 된다. 

리듬악기(피아노, 드럼, 탬버린, 베이스)와 멜로디악기(바이올린, 클라리넷, 플롯, 기타)와 화음악기(키보드 올겐)의 영역을 될 수 있으면 구별하는 것이 좋다. 

어울리지 않는 음악은 소음에 불과하다. 


.목적에 맞게 선곡하라. 
흔히 연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같은 키로 구성된 노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 경우 연주자들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선곡의 원리를 무시하게 되는 때가 많다.     
목회자가 예배를 계획하면 찬양 사역자는 선곡에 조언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각각의 찬양은 일정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또 그것은 신학적으로 건전한가? 경건한가? 회중이 부르기에 적합한가? 미리 세심한 검토를 하여야 한다. 


.찬양 사역자들은 회중에 대한 몇 가지 의무를 갖는다. 
회중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예배하도록 하여야 한다. 
회중 전체를 감화하여 예배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특별한 음악을  준비하여야 한다. 
교회 전체가 더 훌륭한 음악을 감상하고 더  풍부한 예배 경험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흔히 찬양 사역자들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때로 찬양 사역자들이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남의 귀만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으로 인식 될 때가 있습니다. 

찬양이 곧 노래라면 당연히 그래야 지요 그러나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배로써의 음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음악이 너무 음악적이려고 할 때 음악은 예전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음악이 예배의 시녀만은 아닙니다. 

예배를 풍부한 경험으로 가득 차게 하는 예배의 봉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