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믿음을 겉으로 드러내야한다. 성경에도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이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약2:17) 그렇지만 신앙행위는 근사하지만 그 속에 믿음이 들어있지 않다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다. 이들은 자신들이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율법에서 정한 신앙행위에 덧붙여 자신들의 드높은 종교심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킴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2번의 금식에다 하루 3번의 기도, 그리고 내다 팔 목적이 아니라 텃밭에서 기르는 채소까지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행위를 차디찬 시선으로 외면하셨다. 그 이유는 희생적인 신앙행위 안에 의로움과 사랑, 믿음이 빠졌기 때문이다.(마23:23)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이같이 알맹이가 빠진 신앙행위를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원칙은 불변하기에, 이 뜻에 맞지 않다면 그동안 힘들여 행했던 수많은 신앙행위들은 하늘나라에 쌓이지 않고 허망하게 잊혀질 것이다.
예배행위
우리나라 교회처럼 예배를 자주 드리는 나라도 별로 없다. 주일에도 두 번의 예배는 기본이고, 수요예배에 금요철야예배, 구역예배 심지어는 새벽기도회도 예배를 빼놓지 않는다. 아마 예배를 드리는 횟수로 천국에 간다면 천국은 아마 우리나라 교인들로 빼곡할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예배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배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주요한 신앙예식이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말씀, 헌금행위가 아우러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위가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예배를 정성껏 드린다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는 믿음의 척도가 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로 이를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일성수로 대표되는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을 끔찍하게 여긴다. 부득이한 일로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면 새벽예배나 저녁예배라도 참석하려고 애쓰며, 타지에 가서도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 이처럼 예배를 빼먹지 않고 드리려는 노력은 실로 가상하다. 어쩔 수 없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죄책감으로 마음이 어두우며 목회자 앞에 얼굴을 못 들기 일쑤이다. 특히 장로나 권사, 집사처럼 교회의 중직을 맡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주일예배뿐 아니라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배에 의무적인 참석을 암묵적으로 종용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예배의식은 성경에 고정된 의식은 아니었다.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던 구약시대의 제사법이 바뀌어 신약시대에는 성찬식과 세례식을 근간으로 하는 예배로 대신하게 되었으며, 중세를 거치면서 기도와 찬양, 헌금시간이 자리 잡게 되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근세로 흐르면서 설교시간이 예배의식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즉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예배의식인,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치는 예배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게된 것이다.
교회에서 예배행위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 폐단도 적지 않다. 예배만 성실하게 참석하게 되면 신앙의무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의 정규적인 예배를 빠짐 없이 참석한다면 아주 견고한 믿음을 지닌 교인으로 간주하게 되어, 목회자들의 칭송의 대상이 되며 그렇지 못한 다른 교인들의 부러움을 산다. 예배행위를 어떤 태도를 참석하든 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만으로 신앙의 척도를 재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배의 대상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예배에 참석한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태도의 유무를 지켜보고 계신다. 즉 예배의식인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예물을 드리고 말씀을 듣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뻐하는 시간이 되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배에 참석해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잡념에 싸여있거나 심지어 꾸벅꾸벅 조는 일도 다반사이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마음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잦은 예배에 마음이 무뎌져서인지, 마치 결혼식의 주례사를 듣는 일처럼 마음을 집중하기보다, 자리에는 앉아있지만 생각은 콩밭에 가 있는 일이 흔하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기보다 의무적으로 늘 하던 행사를 무사히 마친 자신의 신앙행위에 만족해하며, 기다리던 TV드라마를 보고 싶어 집으로 빨리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처럼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예배행위는 감동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그래서 예배를 성실하게 참석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배는 아닌 셈이다. 진정한 예배란 순서나 내용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는,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식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제사법은 양이나 소를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넘겨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다음은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가족을 벗기고 내장을 빼어내고 뼈를 꺾어 불에 태우는 것이 그 당시의 제사였다. 일반사람들은 우두커니 서서, 자신이 가져온 짐승이 번제로 불에 태워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짐승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징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약에 들어와 구약의 제사법을 폐지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교회에 번제로 드릴 짐승을 가져오지 않는다. 대신 성경은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석해서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이 전부이다. 현장의 삶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고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다. 큰돈을 얻을 수 있다면 불법과 불의에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행위도 마다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를 떠나 현장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면 교회에서 정성껏 드린 예배행위도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 그분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지, 다만 종교행사에 참석해서 희생적인 신앙행위만을 보이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타성에 젖은 우리의 몸은 아무런 감동이 없이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예배행위에 길들여져 있으며,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산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며,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거룩한 모습으로 교회에 들어선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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