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자료

이스라엘의 패망원인

제이비젼 2014. 8. 30. 22:23

 이스라엘의 패망원인

   13:1-16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빛과 소금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사업에 실패를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앙만으로 이 세상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이 더욱 더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신앙을 고집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습니다.

영국의 토인비 박사는 세계의 여러 문명의 흥망 성쇄에 대하여 연구한 뒤 어떤 문명이 망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에 응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신이 신선하지 못하고 썩어버렸기 때문에 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도저히 망하려고 해도 망할 수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과 유다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미 멸망한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비통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호세아 선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험한 선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만 말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비참하게 망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세상 동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어려움 중 하나가 주위에 어느 나라도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신앙은 너무나도 독특해서 도무지 다른 나라와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1,\"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범죄함으로 망하였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겪었던 어려움은 광야 생활하면서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광야 시절에는 그야말로 생존이 문제였습니다.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이 기적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하루 사는 것이 합쳐지니까 무려 사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족속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데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른 족속들은 자기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신앙을 지키면 되지 않는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옛날의 모든 생활은 신이 지배를 했고 신끼리 통하지 않으면 도대체 거래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데도 마찬가지이지만 믿는 사람들끼리만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일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함께 놀러도 가고 함께 음식을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입니다. 그럴 때 어느 정도 그들과 어울려야 하며 어느 정도 동화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술 한 잔까지는 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과도 멋있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을 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마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신부나 수녀는 아예 복장을 따로 해서 평소에도 자신의 신앙이나 신분을 나타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항상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남자들도 가슴에 십자가를 붙이고 살아야 할까요? 아마 그러면 우리는 외단 섬에서 사는 것과 같은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힘을 주셨습니다.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은 주위 나라에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너무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함으로 망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쪽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방인들과 관계하는 데 좀 대담했습니다. 즉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지 않는 짓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알을 섬겨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중 어느 사건을 두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같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바알을 심하게 섬겨서 큰 낭패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엘리 제사장 때 바알을 많이 섬겨서 블레셋 족속들에게 법궤를 빼앗기도 성막이 불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거의 한번 망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이면 엘리야 때 바알신을 심하게 섬겨서 무려 삼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어 죽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지금의 상태에 오기 전에 바알신을 섬겨서 거의 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처지를 세상 나라와 똑같이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른 나라는 혼자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키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서로 상호간에 상호 방위 조약같은 것도 맺었고 무역도 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서로의 신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이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아예 자신들이 나서서 바알을 신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를 굳건게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조건 다른 나라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라고 하지 아니하셔습니다. 어느 정도의 동맹이나 협력관계가 필요했고 또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동맹을 맺거나 같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결론적인 설교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변질될 정도로 이방 나라와 동화된데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무조건 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혼자 고립되어 지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이웃을 사귈 수도 있고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할 정도로 이 세상과 같아지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2,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원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그들에게 말씀이 없어졌기 때문에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형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찾아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만 듣고 가만히 있는 것은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그 송아지의 입에 입을 맞추게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종교의 특징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내 생각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것인데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히나 감정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송아지는 어떻습니까? 무슨 짓을 했든지 입만 한번 맞추면 그만입니다. 골치아프게 율법을 배울 필요도 없고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예배를 한번 드리고는 끝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립되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결국 이 세상 사람들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러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친구들과 보면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취미나 가치관등 모든 것이 달라서 도저히 함께 어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친구들은 다 세상 친구들이기 때문에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이 세상 일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가까워지거나 하나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평행선을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조금씩 힘을 주시는 데 그때 이 세상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도와주면 나의 신앙을 양보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세상과 상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한 것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을 너무 서둘렀다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이 세상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하고 너무 빨리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다보니까 하나님을 잃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무려 네 가지나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3,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같으며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같으리라.\"

여기 네 가지는 모두 의미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것들입니다.뜨거운 여름의 아침구름이 그렇고, 아침 이슬이 그렇고, 곡식 쭉정이가 그렇고,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무리 대단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한번 불어버리시면 한 순간에 다 날아갑니다. 자기딴에는 고생 고생해서 돈을 모아도 한번 큰 사고 터지면 그 뒤치닥거리한다고 모은 손 한 순간에 다 날아가고 고생 고생해서 어느 정도 높은 신분에 올라가도 한번 문제가 터지면 목날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것을 너무 잘 실감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도가 당당했는데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됩니까? 줄줄이 묶여서 교도소로 끌려 들어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한 순간 날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신분을 지키지 못해서 세상에 동화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을 주셨습니까? 이 세상을 지키고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약이 있는데 너무 오래 되어서 약이 변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약부터 먼저 버릴 것입니다.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가 참으로 가치있고 존귀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잘 적응이 되지 않지만 끝가지 평행선을 달리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세상에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세상과 동화되어버려서 세상의 것들에 잔뜩 배가 부른 사람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기독교에 가장 놀라운 것은 예배 한번 드리는 것 말로는 전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송아지 신앙의 특징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를 드려주지 않으면 보채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한번 드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데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 자신을 아침 안개처럼 날라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송아지 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만 드려주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란날이 오면 송아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가장 중요한 것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이었습니다.

4절,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는 다른 백성들의 존재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백성들은 그냥 이 세상에 아무데나 정착해서 사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왕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하 나라였습니다.

주로 이런 주종 관계는 위대한 구원이 있고 난 후 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게 되었는데 어떤 왕이 구원을 해 주었다면 그 후 주종관계를 맺습니다. 그때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언약을 어겼을 때 멸망당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대개 짐승을 죽여 놓고 그 사이를 구원받은 백성들이 지나가는데 그것은 언약을 어기면 죽은 짐승처럼 죽임을 당해서 들짐승의 밥이 되겠다는 것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것은 그냥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상태에 있는 그들을 열 가지 기적과 홍해를 가르는 능력으로 구원하신 후 시내산에서 피를 뿌리는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것은 짐승을 죽이고 그 사이를 행진하는 의식의 약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면 죽임을 당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백성들이요 그 능력으로 붙드시는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해야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가 다른 나라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자연적으로 존재했고 자연적으로 멸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이 없으면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세워졌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되어 있는 한 그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버릴 때에는 그들은 망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꾸 세상으로 떠내려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세상적으로 살면 일시적으로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기를 쓰고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눈에 보이는 편한 길을 버리고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질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5-6,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마른 땅에서 권고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루 세 끼 먹어야 하는 걸 아시고 밤에는 잠을 자야 하며 또 집에서 자야 한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어려울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편할 때는 버리십니까? 그러나 편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한번 잘사는 생활을 맛보았을 때 가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늘 광야에서 살 때처럼 겸손했더라면 그들은 믿음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풍요를 한번 경험해 보니까, 그것이 하나의 전제가 되어버렸습니다.그래,나는 최소한 이 정도 이상은 살아야 돼!\'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잘 살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 세상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빈털털이 인생으로 매 순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면 이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이것보다 더 어려울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데…\'라는 생각을 하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잘 사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는 자들은 반드시 세상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8,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여기에 나타나는 짐승들은 이 당시 여행을 하는 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길가에서 이런 식으로 맹수의 공격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 있는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따라가면 하나님을 원수로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자처럼 혹은 표범이나 새끼를 잃은 암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찢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되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이렇게 찢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찢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자나 표범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새끼 잃은 암콤이 돌아다니는 곳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외면하시니까 꼼짝 못하고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있습니다.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세상을 벗삼기 위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돕는 유일한 도움을 버리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정말 자기를 위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배신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 선심을 쓰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이 세상을 겁내지 마십시요. 어치피 이 세상은 우리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처음 보내실 때부터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살 수 있다고 해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험이라는 것은 머리로는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은 이 세상을 말씀을 붙들고 나가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차라리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적으로 만드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 꾀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와 같아지기 위하여 왕을 요구했습니다. 왕이 없을 때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체제도 없었고 군사도 없었습니다. 적이 쳐들어 오면 그때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하여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이 왕들은 그들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10-11, \"전에 네가 이르기를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하였느니라.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함으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폐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신 것은 기쁨으로 들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로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이들을 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면서 불확실한 것과 확실하고 안정되며 인간적인 것 중에서 불확실한 것을 버리고 안정을 택했지만 그것이 결국 바른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안정을 축복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안정된 삶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언제 집세가 올라서 이사해야 할지 모르고 언제 직장이 부도날지 모르는 상황을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줄 알면서 스스로 안정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안정은 평안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왕은 징계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주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잘못된 왕들 때문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몇 배 더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몇 배 더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돌아갔더라면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욕심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심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이며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욕심으로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을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진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3. 임박한 회개의 요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어떤 봉지에 뭔가 꽉 차서 터지게 된 물건처럼 표현하십니다.

12,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지금까지는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 지나니까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떤 여인이 몰래 아기를 가졌는데 시간이 갈수록 배가 불러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자기 불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욕심을 숨겨 놓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터질 때가 있습니다.

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産門)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자식을 낳는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만삭이 되어서 아이가 나오려고 하는데도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산문에서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번역에는지체되고 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통이 오고 산문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야지요. 옛날 같으면 사람을 보내서 산파를 불러 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미련한 여자는 부끄러운 것만 생각해서 절대로 아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을 놓쳐서 산모와 아이가 다 함께 죽고 마는 경우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었고 갈등이 있으면 빨리 그 사실을 인정하고 위신 체면 다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데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때가 다 되어서 아기가 나오려고 하는데도 한사코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욕을 한번 얻어먹고 창피를 당하더라도 터트려버리면 다시 살 길이 열리는데 끝까지 참고 있어서 나중에는 곪을대로 곪는 바람에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만일 하나님 앞에 만삭(滿朔)한 자같이 죄가 터질 것처럼 되었다고 하더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살 수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에서도 속량하시고 사망의 재앙에서도 건져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놀라운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은 자라 하더라도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그 사람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늦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그의 영혼과 전 삶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있느냐?\'라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5:55-56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결국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아오는 자에게는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지며 죄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쏘는 것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그의 삶에는 힘이 있습니다. 약동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결국 뉘우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한 양심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11:29에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이 없습니다. 그의 부르심과 주시는 구원의 선물도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나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해서 사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질시켜 가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사는 원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살고 말씀때문에 지켜집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버리거나 신앙을 변질시킬 때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송아지가 아닙니다. 무슨 짓이든지 다 하고 한번 와서 그 입에 입맞춤만 하면 다 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을 택하기 위하여 말씀을 버릴 때, 그때는 영혼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혹시라도 잘못되게 형통하면 큰 일입니다.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진노로 왕을 주시고 방백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망할 방백을 주시면 큰 일입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가난했던 영적 상태를 항상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리고 그 분 앞에 겸손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결실할 때에 동풍이 불어 옵니다. 한창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죽이는 아라비아 사막의 마른 돌풍이 불어 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황폐화시켜 버립니다. 근원이 마르고 샘이 마르며 모든 보배 그릇이 약탈됩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침공을 의미하는데 \'여호와의 바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형벌을 당합니다. 얼마나 참혹한지 아이는 부숴뜨려지고 아이밴 여자는 배가 갈리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버린 댓가요, 사람을 친구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만든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때문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변인 범위내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지, 그것이 변질되면서 성공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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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14:1-9  

        참된회개

 

가끔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그 유명한 열차들도 탈선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차가 한번 탈선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다시 복구를 해서 열차선은 회복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차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가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도 탈선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번 탈선하면 어떻게 됩니까? 열차보다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개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가 탈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의 국가이었을 뿐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으로 나갔을 때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는 것은 처음에는 망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종교 행위는 계속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치시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멸망을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오늘 우리 사회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거의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잘 진단이 되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오면 기독교인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철저하게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진 오류였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은 위선적입니다. 겉으로는 타락하지 않은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 두 사람의 경우가 아니고 전체적인 문제가 될 때에는 사회 전체가 날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세상 전체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미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망합니다. 대영박물관의 앗수르관에 가보면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든지 그들의 마음속에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는 생각이 들기만 하면 바로 주저하지 말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고 계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망할 때에는 끝까지 하나님과 겨루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끝까지 겨루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회복되면 자꾸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죄짓는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이제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 정말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나를 위하여 준비된 은혜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회복되기 시작하는데 마치 선물이 준비된 것 같습니다.

 

1. 돌아오라는 초청

 

누구든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말씀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초청해 주셔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꾸 눈물이 흐르고 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집에서 쫓겨나서 집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자식에게 부모가 \'빨리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들어와\'라고 말씀하시지요. 이때 \'내 마음 변하기 전에\'라는 말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전 세게에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이 변덕을 부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들의 불의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불의\'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사람이 아닌 사람을 데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적어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방법을 써서 더 가지게 되면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처음부터 작아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것 너무 좋아요. 그리고 기뻐요\' 이것이 마음 속에 박혀야 합니다.

한번 보십시다. 하나님, 감사해요. 하나님, 좋아요. 그리고 하나님, 기뻐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은 그냥 맨 발로 불쑥 돌아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들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처지에 대하여 애달파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회개에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슬퍼하며 눈물을 몇 방울 더 흘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그 관계를 완전히 청산해야 합니다. 만일 부정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다 돌려주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먹은 만큼 토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회개의 대표적인 예는 세리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았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반이 부정한 것으로 생각해서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회개는 감정적으로 비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 그리고 회개하는 기도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2,\"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라는 것은 이제 새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오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마음에 찔립니다. 제가 이 말씀대로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없으면 제대로 된 회개도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 예를 들면 병들었을 때 민간 요법과 같습니다. 제대로 진단을 해 보지도 않고 여기가 좋지 않겠다 생각되면 자기 마음대로 호박도 삶아먹고 이 약 저 약도 먹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형편과 처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시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은 나를 고치시고 계신 것이며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여기서 모든 불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루어진 삶을 말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죄의 결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보니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첫단추 부터 잘못 꿰어졌다\'고 하는데 단추야 다시 꿰면 되겠지만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때에는 엉만진창이 된 삶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것은 다 거짓되고 엉터리이지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마음 이것만은 진실한데 이 마음을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는 이 입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거창한 예물이나 헌금보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입술을 꼼지락거리면서 기도하는 그 기도보다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없고 그 어려운 가운데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일어서는 그 마음보다 더 귀한 제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상하게 하나님의 율법이 싫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세상 욕심을 따라 가보니까 어떻습니까? 완전히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한 것 같습니다.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듣고 사는 것이 최대의 기쁨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에는 망하려고 해서 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망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아프게 할 때 그냥 넘어가면 안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 세상 욕심 다 포기하고 빈 손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욕심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굶으라 하면 굶고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라고 하면 떠돌아다니겠습니다 라는 각오로 나아오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3,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다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버려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앗수르라는 다른 나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원래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주위에는 모두 강대국들이고 이스라엘은 무슨 힘이나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안했습니다. 마치 주인은 매일 집을 비워내라고 재촉을 하는데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나쁜 제안을 하면서 자기 집에 있으라고 하면 얼마나 귀가 솔깃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늘 불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방법을 쓰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지켜주고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시는 것은 훈련입니다. 언제나 불안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안하게 하실 때 그것을 피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을 안주시면 그냥 있어야 하고 결혼이 안 될 때도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앗수르를 끌어들이면 하나님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실컷 믿음의 연단을 받아 놓고 세상적인 방법에 빠져서 참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고생만 하고 얻는 것은 없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는 말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말을 타지 아니하며\'라는 것은 말과 같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모든 말의 힘줄을 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군사력으로 이 땅을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버려야 할 것은 헛된 우상입니다.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사람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면서도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생각해낸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우리의 손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위기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 자체가 맹수에 에워싸여 있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안정된 힘이나 군사력이나 상상력을 의지한 것이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뭐라고 말씀합니까?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자기들을 \'고아\'라고 부릅니다.\'고아\'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도와주거나 불쌍히 여겨 줄자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블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당장 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고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적인 생각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뭐라고 할까요? 위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완전히 모험입니다.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다행이지만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가면 살 것은 같은데 가만히 앉아서 굶어죽는 것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얼마나 바보스럽고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그대로 하나님 바로 알고 죽어버리자.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가장 어리석은 바보로 알겠지만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 하나만 해도 얼마나 복된 것인가 그래 하나님 한 분 바로 알고 죽어 버리자라고 결심했더니 그 모진 목숨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계시면 우리는 고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고아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고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2. 기질을 고치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4,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희에게서 떠났음이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이 무엇입니까? \'패역\'입니다. 여기서 \'패역\'이라는 것는 반항하는 기질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맞지 않으면 반발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대로 나갔다가 언제나 두들겨 맞고는 돌아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기질을 고치십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원래 우리는 일단 자기가 한번 생각을 하면 가고 싶은데까지 가야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낭비되며 얼마나 많은 물질이 허비가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징계를 받느라고 허비한 정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복받은 사람이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돌이킬 수 있는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남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은 말이라고 생각되면 더 반항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기질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단 맞을 짓을 덜합니다. 왜냐하면 고집스럽게 나가다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멈추어서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봅니다. 은혜를 받은 청년들의 특징이 아무리 자기 생각이나 계획을 세워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인지 자신이 없으면 망설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거저 자기 생각대로 다 해야 직성이 풀리지요. 그러나 나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도우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망설이고 멈칫멈칫합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가 훨씬 적은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한번 겪으면 십년 이상을 허비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한번 멈칫함으로 십년을 버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십니까?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즐거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댓가없이 한없는 사랑을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 두 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쓸데 없는 세상 욕심으로 잔뜩 구하더니 이제는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만큼 까다롭고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좀 사랑하면 온 세상이 자기 것인처럼 까불다가 어려움이 오고 환란이 오면 완전히 절망하고 침체되어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어떻게 됩니까? 기적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축복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은사의 목록중에는 인내도 있고 형제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돈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구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쌓아 놓으면 기분은 좋지만 제대로 써먹을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끌고 오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기질이 고쳐지면 어떻게 됩니까? 맞을 일이 없습니다. 같이 믿어도 징계를 당하지 않고 믿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반항적인 기질을 고침받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축복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5-7,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폭포같이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회복됩니다. 망하기 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풍성한 모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슬같이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조용히 찾아오십니다. 회복되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조용히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데, 회복의 속도가 그렇게 빠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꽃으로 말하면 백합화와 같고 그 안정성은 레바논 백향목의 뿌리와 같습니다. 가지는 감람나무와 같습니다. 가장 무성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곡식처럼 많이 열립니다. 아마 포도주 중에는 레바논 포도주가 가장 진했던 것 같습니다. 레바논 포도주와 같은 향기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비유들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아야 가장 위대하고 가자으 영향력이 있는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면 둘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둘 다 잃어버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보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레바논 백향목처럼 뿌리가 든든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 삶은 반드시 향기가 나게 됩니다. 이 세상도 그 향기로 기쁨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 속담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고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젊었을 때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십시오. 요셉처럼 애굽으로 노예로 끌려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감옥의 노예가 되기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떠나지 않는 길이고 자기도 살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살리는 길입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가 탈선하지 않도록 미리 고난을 주시고 연단을 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특별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연단은 \'전공 필수\' 과목입니다. 아직 노예 자리까지 내려가지 않은 사람은 전공 과목을 이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8, \"에브라임의 말이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할지라. 내가 저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이 다시는 우상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그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일시적으로 정신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적인 만족은 하나님을 잃게 만들었고 그 허망한 욕심이 이방땅에서 견딜 수 없는 고생을 하게 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사실이 아닌 공상들 많이 있습니다. 텔레비젼 드라마도 그렇고 컴퓨터 게임도 그렇고 영화나 예술 가운데도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고시 공부의 환상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빨리 환상을 버리고 실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때부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갈 때 주님이 나의 앞 길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시고 나의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잣나무 같이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여기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 내십니다.결국은 하나님은 많은 연단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옆에 계신 것처럼 믿고 사는 백성을 만들어내는데 사실 모든 것이 그들의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고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말씀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세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완전하게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파멸시킨 가운데 그들을 다시 부르셔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한 두 해의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몇백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실패를 통하여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나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이며 허황된 것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는 늦고 인정받지 못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고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신약시대 우리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더 이상!\'입니다. 이제는 남은 기간을 더 이상 방황하거나 육체의 정욕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종교적인 형식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실제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겠다고 결단한 사람입니다.그런 사람은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십니다. 결국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우며 가장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이후에서 유대인들 다수가 구원에서 제외되고 대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것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호세아 말씀을 결론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애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그 영광을 다른 사람이나 피조물에게 돌아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변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으로 바뀌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변하기까지 우리는 하루라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빨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집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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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유다의 공격

   1:1-21   

 

 

성경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있어서 우리를 흥분시킵니다. 그러나 성경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 사사기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는 통일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사사기의 혼동을 보고서 실패의 역사라고 규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놀라운 정복을 이루게 하셨지만 인간의 죄성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왕이 필요했던 실패의 역사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사기를 부흥의 역사라고 봅니다. 사사기에는 이름도 없는 많은 평신도들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침체에서 건져내었으며 교회를 다시 부흥시킨 반복적인 부흥의 역사들이 나옵니다.

사사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론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뒤를 이어서 가나안 정복을 계속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복이 철저한 정복이 아니고 타협과 공존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을 철저하게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신앙을 닮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되고 변질되어간 것이 서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침체에 빠진 이스라엘을 살리시기 위하여 평신도들인 사사를 사용하신 내용입니다. 사사라고 하는 것은 판관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법적인 권세를 가진 재판장이 아닙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구역장이나 혹은 선교 단체의 간사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왕도 아니요 장군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시킨 장본인들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성령 행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 마지막 부분은 끝까지 부흥하지 못한 두 지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끝 부분에 기록된 것은 주제의 성격 때문에 끝에 기록된 것이기 시기적으로는 상당히 앞 부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가장 먼저 변질되었던 지파는 단 지파였습니다. 단 지파는 처음에 정복을 위한 제비를 뽑을 때 너무 강한 적을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적은 바로 블레셋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옮겨버립니다. 결국 영적인 싸움을 포기한 셈입니다. 단 지파는 영적인 싸움을 포기하면서 미가라는 사람 집에 있던 개인 제사장을 데리고 가는데 이 제사장이 사살 엉터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단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살아남는 지파가 있는데 바로 벤냐민 지파였습니다. 벤냐민 지파는 첩을 데리고 가던 한 레위인을 공격해서 첩을 겁탈하고 죽게 한 동성 연애자들에 대한 잇스라엘 총회의 정당한 치리를 거부하고 내전을 벌림으로 남자 60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몰살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면서 사사기는 생략하고 바로 다윗의 왕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사기 안에도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로\' 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통일된 왕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바로 다윗의 왕정으로 들어갔더라면 이스라엘은 대단히 강력한 통일 왕국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침공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로 나누어져서 지리멸렬하게 가나안 원주민들과 밀고 당기는 줄달리기가 약 사백년 이상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사기의 역사를 실패의 역사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순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이 혼란의 시기보다 더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 교훈이 되는 역사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호수아의 침공이 있고 난 후 바로 다윗의 왕정으로 들어 갔더라면 오늘날 교회는 설 땅을 잃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면 여호수아의 가나안 침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호수아가 기브온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모리 다섯왕의 목을 발로 밟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사탄의 머리를 깨는 것이며 원수의 목을 발로 밟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커다란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원수의 주력 부대들을 부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잔잔한 패잔병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것은 이스라엘 각 지파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맡긴 이 기간은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기보다는 오히려 닮아갔으며 때로는 그들의 지배를 받아서 이스라엘이 거의 죽은 것 같은 때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들을 통하여 다시 믿음으로 일어서서 큰 승리를 거두곤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왕정으로 발전해 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후 복음을 교회에 맡겨 두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처음 오신 후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은 혼란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가 너무 세상을 닮아가서 교회의 등불이 거의 꺼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다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거짓된 우상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또 다시 일으키는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교회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이 사사기야말로 이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다시 믿음으로 승리할 것인지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사들의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울의 왕정이 시작되면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사라는 직분은 여호수아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족장격인 장로들이 있었고 또 장로와 달리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지도해주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부터 바로 이 무명의 사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활약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사들은 결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저 평범한 말씀의 사역자들 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사들을 한 명씩 살펴보면 더 알게 되겠지만 그들 중에는 장애인도 있었고 서자로 출생하여 집에서 쫓겨나 부랑배들과 어울려 산 사람도 있었고 더욱이 여자도 있었습니다. 사사라고 하는 자들은 전혀 전쟁 같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섰고 그 결과 너무나도 놀라운 구원을 이루어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여호수아와 그 후의 사사 시대를 구속사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불과 화염 가운데서 나타난 것부터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율법의 특징이 나무도 없고 물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만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풍성함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깨달은 자였습니다. 가죽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날마다 자기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모습이 율법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죄인들은 풍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시대는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셨지만 결국 므리바 반석에서 분노로 바위를 쳐야 했던 모세의 모습으로 끝을 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애굽의 유월절과 홍해를 건느는 것으로 보여주셨지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가나안의 풍성함으로 표현됩니다. 가나안은 광야 사십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이 안에는 풍성함이 있었고 여러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특징은 조금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아모리 다섯왕의 목을 여호수아가 발로 밟는 것으로 상징되어집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기브온으로 몰려들었지만 태양과 달이 지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히려 엄청난 패배를 경험하는 것이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망시키지 않고 각 지파에게 제비를 뽑게해서 각 지파가 스스로 자기 땅에서 원수를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교회 시대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오늘도 마귀의 주력 부대는 갈보리 산 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은 완전히 멸망당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 무시할 수는 사탄의 세력이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사기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미 여호수아가 패배시킨 도성에 가나안 족속들이 다시 들어와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유다 족속들이 쳐서 취하고 불까지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가나안 족속들은 도로 들어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마치 철거민들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내어쫓아도 쫓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결국 타협해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타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게 됩니다. 불쌍해서 봐주었는데 나중에는 이 철거민들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무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사사기는 바로 교회 시대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은 그대로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도 무엇인가 할 여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는 각 지파가 나름대로 어떻게 원수들을 몰아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안에는 혼란이 있고 무질서가 있었습니다. 차라리 왕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하는 의문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꺼번에 부패하지 않고 무려 사백년 동안이나 버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사실 여러 교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부패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한 교파가 시들해지면 다른 교파가 힘을 내고 또 그 지파가 시들해지면 옆에 있는 교파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서 교회는 그 빛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사기야 말로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함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큰 헌신을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모세 때에는 모세외에는 누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습니까? 여호수아의 일도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정도 하나님이 정하신 자 외에는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북쪽 열지파가 다윗의 집을 배반하고 독립을 하는데 그것은 아직 사사 시대인 줄 착각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사기야말로 출신이나 사회적인 신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큰 일을 할 수 있는 시대요 열린 시대입니다. 바로 지금이 열린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된 자는 엄청난 승리를 남길 수 있는 열려진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달음질하는 자는 상을 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8)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든지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산 것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상급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유다 지파의 진격.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소강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오히려 각자가 자기 맡은 부분을 해 나가면 된텐데 그들은 할 수 있는대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정복해야 할 곳을 거의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시 1,2절을 보면,\"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하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느니라 하신지라\"

사실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하는지 물어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차지할 땅은 정해져 있었고 그들 각자가 자기 땅을 향하여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유다부터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추운 날 누군가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형제들은 아랫목에 앉아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물으면 아버지는 큰아들이 나가서 일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큰 아들은 자기가 장남으로 태어난 것을 불평하면서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장남이 셋이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르우벤 지파가 장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르우벤은 장남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유다 지파가 장남이었고 세상적인 일에는 요셉 지파가 장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침공하는데 있어서 유다를 지목하신 것은 가나안 땅을 침공하는 일이 영적인 사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살수 있는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유다 족속은 자기만 가지 않고 시므온 지파를 끌어 들었습니다.

3,\"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 지파가 자기만 가지고 않고 시므온 지파를 끌어들인 것은 잘한 일일까요 아니면 못한 일일까요? 이것은 결국 잘한 일입니다. 물론 전혀 관심도 없고 생각이 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교 여행을 떠나는데 전혀 선교에 관심이 없고 오직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을 데려가는 것은 결국 그 선교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약간만 어려움이 생겨도 준비가 안된 사람은 불평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전혀 준비가 안된 줄 알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위기를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이 실제로 준비된 사람인 셈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준비된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일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끌어 들이면 큰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유다는 이번 전쟁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4-7,\"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맡기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을 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오디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여기서 \'유다가 올라갔다\' 고 하는 것은 남쪽이 산지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는 북쪽에 산이 많고 남쪽은 평지이지만 팔레스타인은 반대로 북쪽이 평지이고 남쪽은 산지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남쪽을 분할받았기 때문에 산지로 올라갔습니다.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베섹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베섹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베섹 왕은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베섹 왕을 아도니 베섹이라고 불렀는데 사람의 이름은 아니고 직책명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한번 탈출에 성공했지만 다시 붙들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이것은 다시는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손의 엄지손가락을 자르면 무기를 손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발에 엄지 가락을 잘라버리면 힘있게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자르는 것은 다시는 영원히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악당들이 총잡이 주인공을 잡아서 총의 개머리판으로 총을 쏘는 손을 으개어 버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는 총을 잡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다른 손으로 총 쏘는 것은 연습해서 악당을 물리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도니 베섹의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자르니까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그는 예전에 칠십인의 왕을 잡아 가지고 그들의 손과 발의 임지 가락을 자르고 개처럼 자기 상아래서 음식을 주워 먹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한가지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도니 베섹이라는 자가 남부 지방에서는 대단한 실력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려 칠십인의 왕을 자기 상 밑에서 개처럼 음식을 주워먹게 할 정도로 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힘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왕들의 수족의 엄지 가락을 자르고 개처럼 부려먹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칠십명의왕들이 개처럼 그의 상 밑에 엎드려 있고 그는 먹던 갈비 조각이나 고기 덩어리를 상 밑으로 던집니다. 그러면 그 왕들이 개처럼 기어와서 그 먹다 남은 고기를 집어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교만한 것이며 절대로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용납하고 괴롭히는 악한 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철저하게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면 좋은 것이지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을 이토록 미워하시는가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교만하고 악했습니다. 마치 우리 몸에 있는 암세포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도저히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싸움은 거룩한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신 것은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이지 다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남쪽의 중요한 아도니 베섹을 잡아 죽였고 예루살렘을 빼았았습니다.

그리고 남쪽의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 있는 헤브론을 빼았고 거기에 있는 거인 세명을 쳐죽이는 공을 세웁니다.

10절에 보면 유다 족속들이 헤브론에 가서 가나안 사람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아낙의 세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세 사람과 아낙의 세 아들은 같은 사람입니다. 아낙은 거인이었고 아낙 자손들이라고 하면 거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거인들은 좀 머리가 모지라고 어리숙한 것이 특징인데 아낙의 자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아주 악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던 골리앗은 바로 이때 완전히 씨를 없애지 못한 아낙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죄의 씨는 철저하게 뿌리를 뽑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암을 수술할 때 암의 뿌리까지 다 캐내어야 죄가 다시 발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암 수술할 때에는 암 세포 주위만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멀리까지 살을 도려내고 수술을 한 후에도 계속 방사능 치료나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암이 다시 도져서 더 큰 병에 걸리게 됩니다.

 

3. 유다 전쟁의 에프소드.

 

사실 전쟁터에 나가면 사람들이 굉장히 농담이나 음담폐설같은 것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긴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숨막힐 것 같은 긴장 속에 누군가가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번 눈물이 날 정도로 실컷 웃고나면 기분이 좀 풀립니다.

유다 백성들의 전쟁 중에는 아주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갈렙의 딸 악사의 결혼 사건이었습니다. 갈렙은 아주 전략적으로 중요한 드빌이라는 곳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갈렙은 드빌 곧 기럇 세벨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을 공격하는 자에게는 자기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상금을 내 걸었습니다. 이것은 지친 병사들에게는 새로운 청량 음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로 이 여자를 차지하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 갈렙의 아우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빼앗고 악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문제를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과연 결혼을 이런 식으로 전략적으로 사용해도 되느냐 하는 것과 설혹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가까운 근친끼리 결혼을 해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의문으로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당시 사람들이 결혼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이 오늘 우리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창조의 원리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엄청난 신부 대금을 아내 쪽에 지불을 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나쁘게 생각하면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결혼관은 지금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고 아마도 갈렙은 자신의 딸의 결혼이 하나님의 땅을 회복하는데 좋게 사용되기를 바란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유다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뜻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유다 백성들 중에서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이런 식으로 딸을 결혼시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아주 선한 뜻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는 신앙의 순결을 위하여 근친 결혼이 용납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 중에서 근친 결혼이 많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신앙의 순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해석하면 신앙의 순결을 위해서 좀 부족하지만 같은 교회 안에서 결혼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오히려 장려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이 정욕을 이유로 근친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는 근친 상간은 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게 했습니다. 이미 이때만 해도 거룩한 백성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신앙의 순결을 위하여 근친 결혼을 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고 이미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럇 게벨을 빼앗은 옷니엘 보다는 갈렙의 딸이 더 걸작이었습니다.

악사는 옷니엘과 결혼하면서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이 귀한 윗 샘과 아랫샘을 아버지에게 달라고 부탁을 해서 얻어버린 것입니다.

14,15,\"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로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이 동일한 사건은 여호수아 15장에서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사사기 저자가 그것을 자료로 사용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것이 이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에피소드로 받아 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아마 유다 백성들은 딸을 가지고 기럇 세벨을 정복하게 한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그 결혼을 통하여 가장 중요한 샘을 두 개나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가 버린 악사는 아버지보다 더 대담한 여성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부전여전으로 이야기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당시 이 결혼 자체가 전쟁 중에 있던 많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차 대전 중의 독일 병사들의 짐 속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괴테의 책은 언제나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젊은 사람의 순진한 사랑이 다른 곳의 전승보고보다 더 그들에게 시원한 청량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보면 믿음으로 전쟁을 시작한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복된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전쟁을 치루었기 때문에 아도니 베섹같은 악당을 잡아서 죽일 수 있었고 헤브론의 세 명의 거인도 죽였으며 그나마 전쟁 중에 아름다운 사랑의 스토리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도 대단하고 남편도 대단했지만 딸은 더 대단했다 더라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도둑이라면 딸은 더 큰 도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걸어서 기럇 세벨을 정복했다면 딸은 결혼을 걸어서 남쪽에 있는 샘물을 두 곳이나 챙겼습니다. 결국 이 옷니엘이 처음으로 사사 시대의 문을 여는 용사가 됩니다. 옷니엘은 한번은 결혼을 위하여 싸우고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소보다이마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싸움을 합니다.

옷니엘은 이 놀라운 평신도 시대의 문을 여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결혼도 별나게 하더니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해 내고야 맙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용감한 자가 모든 것을 다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인도 차지하고 샘물도 두 곳이나 차지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계속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7,\"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을 호르마라 하니라.\" 호르마라는 말 뜻은 완전히 파괴했다는 뜻입니다. 18절에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유다가 비교적 끝까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시켰습니다. 그 결과 비교적 끝까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절을 보면 유다의 한계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내어 쫓지 못하였으며\"

유다 백성들은 말이나 병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종의 게릴라 전법으로 적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산을 공격해 내려 왔습니다. 그러나 평지에 오면 그들은 병거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빼앗은 땅들은 모두 다 산지에 있는 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기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고 정복할 수 있는 곳부터 정복을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전법이었습니다.

안되는 곳보다는 되는 쪽을 두드리자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거의 한계점까지 내려와서 정복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 만큼 큰 승리를 거둔 지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열악했지만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일등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병거가 없는 것만 불평하고 있었더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사기 시대는 오늘 교회 시대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있고 또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일한 만큼 그는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힘든 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큰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어려운 처지에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에게는 더 함께 하십니다. 유다 지파를 보십시오. 그들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른 지파들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모두 타협했고 너무나도 빈약한 열매를 거둘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그런 쪽으로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썩은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원한 것을 거둘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럇 세벨을 침공하는 자는 가장 멋진 여인과 결혼할 것이며 그것 이상의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신다고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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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이스라엘의 타협

   1:21-36   

 

 

요즘 우리 사회는 한 여자 경찰 서장이 미아리의 창녀촌과 벌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에 대하여 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암적인 두 요소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사창가와 점치는 곳입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사창가나 점치는 곳은 흥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 제가 서울에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산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면 올라가는 길 양쪽에 엄청나게 늘어서 있는 곳이 모두 다 점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육교 바로 밑은 유명한 양동 사창가였습니다. 사실 서울의 심장이라고 볼 수 있는 남산은 점쟁이들과 창녀들의 본산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한때 남산은 바로 이런 사람들로 가득 했습니다. 무당과 창녀 이 두 가지는 바로 사회의 암적 요소들이며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천호 3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곳은 유명한 사창가로 발전했는데 특히 청소년들을 고용해서 윤락 행위를 시키는 아주 질이 나쁜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파출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죄의 뿌리가 너무나도 깊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곳에 근무하는 많은 경찰들이 사창가로부터 정기적인 상납을 받아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경찰이 단속을 나간다고 하면 사창가에서 먼저 알고 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한 경찰서장이 부임하면서 사창가와의 진짜 전쟁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청소년들이 윤락 행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집중적인 단속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사창가에 있는 사람들은 단속이 하루 이틀 형식적으로 하다가 그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경찰 서장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사창가와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의 별 방법으로 단속을 중단시키려고 했습니다. 더 높은 곳에 진정을 넣기도 하고 뇌물을 먹이려고 해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정 안되니까 세금을 내겠다고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서장은 이 포주들을 그곳에서 몰아내었습니다.

대전 근교의 계룡산의 신도안은 마치 신흥 종교의 박물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괴상한 도사들이나 종교인들의 집합촌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거기에 군부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한 군목이 사병에게 무전기를 들리워 가지고 산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무당이나 도사들이 적발되면 바로 군 부대에 연락해서 철거시키는 방법으로 계속 이 도사들과 싸왔다고 합니다. 결국 신도안의 무당들이나 신흥 종교 교주들은 모두 다 토벌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철저하게 몰아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명령을 보고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힘이 없고 가난한 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게 하시지 않고 억지로 다 몰아내게 하시는가?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은 그냥 가나한 원주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도사들이나 창녀들과 같았습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은 창녀들이나 점쟁이들이 득실득실한 예전의 남산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더러운 곳을 청소해서 너무나도 깨끗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 공권력을 가진 자들도 창녀촌을 없애거나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밀집해 있는 곳을 청소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나라의 형태를 갖춘 무당들이요 창녀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마피아와 같은 조직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보다는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길을 택하고 그 결과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후에는 그들의 자녀들은 대개 무당이 되고 그들의 딸들은 창녀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1. 요셉 지파의 실수.

 

요셉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파였습니다. 요셉 지파는 북쪽을 공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벧엘을 공격했습니다. 22,\"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무당과 점치는 자들과 창녀들로 더럽혀져 있는 가나안 땅을 깨끗하게 청소해서 윤리적으로 깨끗하며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가 벧엘을 치러갔을 때 하나님께서 요셉 지파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와 함께 하신다고 해서 요셉 지파와는 함께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누구든지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전 세계의 성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은 너무나도 지엽적이며 우리 자신과 관계되는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한번에 다 보고 계시며 전 세계의 당신의 백성들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요셉 지파가 벧엘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공격할 때와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정탐군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어떤 사람에게 중요한 정보를 물었고 그가 협조를 해 주자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보대로 벧엘을 침공한 후에 그 성을 멸망시키고 그 사람은 약속대로 살려 보내었습니다. 여기 까지는 여리고 성의 작전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3-26,\"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은 놓아 보내매\"

아마도 벧엘은 입구가 보이지 않는 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언젠가는 이런 전쟁이 일어날 줄 알고 입구를 비밀 통로로 해서 자기들만 알게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정탐들은 이 성의 입구를 찾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성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 부탁을 합니다. 이 성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면 선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대하겠다는 것은 책임지는 사랑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순순하게 성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을 쳐서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습니다.

26,\"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가지 그곳 이름이더라\"

이 사람은 가나안 삶의 방식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도 벧엘의 입구를 가르쳐 준 것은 그곳의 죄악된 삶이 싫어서라기 보다는 단지 그곳 사람들이나 그곳이 싫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는 전혀 미신이나 음란한 짓을 버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요셉 지파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뱀의 머리를 놓친 격이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었고 벧엘 없이도 얼마든지 독자적으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요셉 지파가 저지른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목적을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단순히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이 가나안 땅의 미신과 음란을 철저하게 제거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음란과 우상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면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싸웠어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을 자세히 확인해 보지도 않고 너무나도 신사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곳 사람 하나를 매수하여 성을 빼앗고는 그를 편안하게 보낸 것입니다. 무당 중의 두목에 해당되는 사람을 살려둔 것입니다. 그가 벧엘을 배반한 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 독립하기 위해서였고 아마도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 가서 루스라는 간판을 달고 멋지게 새로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간판 밑에는 이스라엘이 후원하는 집이라는 것도 적어 놓았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 지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하여 대충대충 일을 한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경찰이 창녀촌을 습격하기 위하여 한 포주와 협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밀 통로를 알려 주면 너만은 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찰은 그곳의 창녀들이나 포주들을 일망 타진하는 대성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협상을 했던 그 포주는 바로 옆에서 성황리에 새로운 장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경쟁업자들도 제거되었기 때문에 더 장사를 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사창가를 습격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의 업적만 높이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셉 지파의 편의주의는 가장 중요한 범죄인과 타협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들이 좀 힘들게 공격하려고 생각했으면 그런 타협은 필요하지가 않았는데 쉽게 점령하려고 하는 바람에 아주 중요한 원수와 타협하고 그를 보호하는 책임을 떠 안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들을 놓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다른 지파들의 타협.

 

요셉 지파외의 다른 지파들은 아예 요셉 지파의 흉내조차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칼날로 멸망시킨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고 타협을 해서 함께 공존을 하거나 혹은 오히려 밀리기까지 했습니다. 좀 힘이 강한 쪽에는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 사역을 시킬 뿐이었습니다.

21,\"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였더라\"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가 이미 공격을 해서 파괴시킨 곳이었습니다.

8절에 보면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유다 자손들이 공격을 해서 무찌른 곳을 베냐민 족속들은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탄 곳에 다시 여부스 족속들이 들어와서 집을 짓거나 판자촌을 형성해서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칼로 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칼로 치더라도 살아 남은 자는 자기 집터로 돌아와서 다시 집을 짓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서 이미 여호수아가 칼로 멸망을 시켰던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지파들은 이미 이긴 곳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7,28,\"므낫세가 벳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들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들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들과 이블르암과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들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수아 12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쳐서 빼앗은 성에 이 성들의 이름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에 라기스가 있고 12절에 게셀이 있고 16절에 벧엘이 있고 21절에 다아낙과 므깃도가 있고 23절에 돌이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한 것은 그곳의 땅을 빼앗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왕들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죽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심지어는 불로 태운 곳도 다시 들어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가나안 사람들은 왕이 죽었기 때문에 큰 힘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쫓아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철거민 촌에서 이런 일은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철거반이 와서 무허가 건물을 철거시키면 철거민들은 떼를 지어 몰려와서 단속반과 심한 몸싸움을 합니다. 철거반이 집을 다 부수고 가면 어느새 철거민들은 다시 몰려와서 가건물을 만들어 놓고 다시 그것에서 살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가나안 족속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창녀들이나 깡패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서 무려 31명의 왕을 죽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왕이라고 하지만 왕무당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왕은 죽였지만 여전히 가나안 족속들은 없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두 다 \'쫓아내지 못하였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29절에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30절에 스불론 지파는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31절에 아셀 지파는 악고와 시돈등의 거민들을 내어 쫓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단 지파는 아예 아모리 사람들에게 밀려서 평지에는 내려오지도 못하고 산 위로 도로 쫓겨 간 경우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거의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내어쫓지 못하였을까요? 왜 그들은 이긴 싸움에서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타협 도는 양보하여 그들과 공존하려고 했을까요?

우선 첫째는 그들의 생활 환경은 변화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이 지금까지 생활해 온 광야 생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서 주시는 만나만 먹고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그들이 심기만 하면 얼마든지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었고 또 먹는 문제도 그들이 직접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 자동적으로 만나가 내렸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가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는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사람들과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지어왔으면 괜찮은데 그들에게 농사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는 많은 일손이 필요했습니다. 더욱이 가나안 원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지어왔던 사람들이고 농사짓는데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적극적으로 몰아내지 못한 곳이 거의 대부분 북쪽의 평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왜 이들이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알 것입니다.

어떤 한 형제가 오랫 동안 직장이 없었습니다. 그가 할 일은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참으로 단조로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형제가 직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회사에서 자기 힘으로 돈을 버니까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하여 너무나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는 컴퓨터도 새로 배워야만 했습니다. 운전도 배워야만 했습니다. 영어 회화도 잘 해야 승진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일을 배워야만 했고 그에게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직장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는 점점 기도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주일 너무 피곤하여 교회를 빠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이제는 멋도 내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느라 더 이상 옛날 같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직장에서 더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직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자매는 처녀 때 신앙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신앙이 가장 좋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자매는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남자와 사귀면서 자꾸 신앙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아예 신앙과 담을 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자매는 그 남자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너무나 잘 적응하려고 하다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너무 잘 적응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농사를 짓는데도 일등 농사군 소리를 듣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가나안 사람들보다 농사를 못짓는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결국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는데 마음이 다 빼앗겨서 왜 그들이 이 현실에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잘 적응하는데 마음이 빼앗겨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굳이 가나안 사람들을 멸망시킬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을 완전히 내어쫓으려면 보통의 열심을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열정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저를 삼키리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내어쫓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이 밥줄이 걸려 있는 문제이고 더욱이 이미 상당한 권리금같은 것을 지불했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냥 내어쫓길 리가 없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열정적이셨습니다. 사실은 다소의 사울이 바울이 되기 전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내는데 이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별로 좋은 열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열정없이는 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없이도 얼마든지 밥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내어쫓지 않고서도 그들은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진해서 일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일이라면 농사를 짓는 것이나 집을 짓는 등의 일을 말합니다. 죽이는 것보다는 일을 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적인 생각들이 자기 생황에 치우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결국 그들이 틈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가나안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더라면 결국 가나안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그럴만한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이 결심하고 그곳에 거하였더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사는데 아주 결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결사적으로 나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틈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봐 준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일을 해 주면 쫓아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간의 틈을 보였을 때 가나안 족속들은 결사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죄와 싸우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약간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마귀는 결사적으로 덤벼듭니다. 아예 처음부터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욕은 욕대로 다 얻어먹고 손해는 혼자서 다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아무리 족속들은 너무나도 강한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철 병거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지경이 아그랍빔 비탈 바위부터라고 했습니다. 아그랍빔은 전갈이는 뜻인데 당시에는 아주 유명한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적이 너무 강하면 결국 타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비참했던 지파가 단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강한 자를 상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강한 자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단 지파를 위하여 강한 자 삼손이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인 전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기로 결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상황이 악하면 악할수록 하나님은 더 큰 능력을 주십니다.

미리 악의 세력의 외모만 보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사명이 단지 여기서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심판하고 새로운 윤리를 세우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바빠서 죄와 싸우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들대에 가서는 모두 다 가나안 사람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싸움.

 

우리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거나 배우면서 가장 크게 어려움을 겪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로 큰 죄도 짓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다 남김없이 죽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 말시온이라는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구약의 그 잔인한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약 성경에서 철저하게 구약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교회의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원수을 멸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함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보다 사랑이 많은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사랑이 적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이 적어셔도 적어도 우리들보다는 말할 수 없이 은혜로우시며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이 멸망시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그들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은 자세를 오래 전에 버렸고 더 이상 인간으로 살 가치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신 것처럼 생각해서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단지 그들로부터 노력 봉사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들이 하나님 보다 더 자비롭다는 교만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다 더 자비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이 많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마땅히 멸망 받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눈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 지파는 덜컥 그런 자들과 협상을 했고 그들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생활 가운데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느냐 하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통하여 이 세상을 정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정죄라고 하는 것은 무언의 정죄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 미련한 짓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시 사람들의 타락한 방식에 동참하지 않음으로 세상을 정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교 신입생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신입생 환영은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모든 식구들이 조상에서 절을 하는 가운데도 하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혀서는 안되며 마땅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혼전 순결을 버리는 것이 융통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융통성은 없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경영을 하는 것이 예사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그런 탐욕스러운 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게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도 섬기며 세상일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일이 바빠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내가 일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안식해야 합니다. 크리스챤 학생들은 공부벌레가 아닙니다. 일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어려움입니다. 내 혼자 힘으로 해결하라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긴장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썩을 대로 썩은 그곳에 그들을 주셨을 까요?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사는 곳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위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잘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번에 어느 목사님은 집이 어느 절과 붙어 있었는데 주차 문제나 다른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자들과 할 수 있는대로 잘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항상 전쟁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주위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급하다고 해서 돈 빌리러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나 악한 사상은 한 방울도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나의 영역 안에서는 사탄이 보금자리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건물 안에서 누군가가 점을 치고 있다면 모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내어쫓아야 합니다. 만약 그가 계속 점를 치게 내버려 둔다면 결국 내가 악을 키우게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을 내 집에서 뿌리 뽑아야 합니다. 만일 나의 직장 안에서 내가 모르는 가운데 좋지 못한 풍습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결코 그런 것을 하지 못하게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마약이나 도박이 행해지고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불쌍히 여기면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나의 부하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고사를 지낸다면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해도 내어쫓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희생을 하지 않으면 이런 죄스러운 세력을 자신의 영역에서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작년에 텔레비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느꼈겠지만 텔레비젼 프로 중에 유달리도 귀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우리 가정 깊숙한 곳에 귀신의 문화가 파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방송국에 항의 전화나 혹은 방문을 해서 그런 비상식적인 프로를 중단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가정에는 시청이 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물론 집 안에 음란한 책이나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면 아무리 책값이 아깝고 비데오 값이 아까와도 파괴시켜서 나의 영역 안에 악이 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나의 집 아이가 나쁜 친구들에게 빠져 들고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내 아이를 거기에서 빼내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편하고 쉽게 살려고 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서운 올무가 없습니다. 결국 요셉 지파의 타협은 다른 모든 지파의 타협에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어드리려고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오시기 까지 이 세상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와 싸운 자들만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타협하면서 산 사람은 주님와 함께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요셉을 위시해서 타협한 많은 지파는 이 세상에서 죄와 타협한 많은 교회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를 키우기 위하여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진리를 감추어서라도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을 선물을 기뻐한 교회는 결국 힘을 잃게 되고 죄와 싸우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죄와 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다 잃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진리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까? 놀라운 것은 참된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그렇게 많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아예 밀려서 세상에 발을 들여 놓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거룩한 열정을 회복하도록 합시다. 돈을 손해 보고서라도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 죄의 요소를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진정으로 나의 삶에 주인이 되게 하십시다.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살펴 보십시다. 엄연히 나의 집 안에서 우상의 요소가 활개를 치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의 집 안 찬장에 술이 진열되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아이들이 술을 파는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가 보지 말아야 할 책들과 비데오 테이프가 진열되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삶 가운데 오래된 불법의 관행이 받아 들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열정을 가지고 정리하도록 합시다. 대적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사력을 다하여 저항하면 결국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틈을 보여주니까 그들이 자리를 굳히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만 분명하면 어떤 죄의 세력도 결국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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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길갈 세대의 애통

   2:1-10   

 

 

제가 부천의 어느 작은 교회에 부흥회 설교를 할 때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 중에서 어디서 본듯한 자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닮은 사람도 있을까\'하면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저에게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바로 제가 설마하면서 생각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처녀 때 저와 함께 공장에 들어가서 여공들에게 전도를 하던 믿음이 아주 좋은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을 해서 오래 결혼 생활하는 동안에 신앙의 열정이 다 식어버렸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신앙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도저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의 전도를 받아서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제가 부흥회 설교를 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설교를 들으면서 끝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나라에서 한 학생 신앙 운동의 오십년을 결산하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아마도 그 신앙 운동이 시작되게 된 것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이 민족을 다시 살리는 길은 오직 학생들이 신앙으로 바로 서는 길밖에 없다고 해서 몇몇 헌신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머리가 허연 노인들이 되어서 그 모임이 참석을 했습니다. 저는 그 대회를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후 다시 모인 그들이 발견한 사실이 무엇이겠습니까? 처음에 그렇게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했던 그들 중에서 계속 남아서 그들의 신앙이나 제대로 지키는 자들도 너무 적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 후에 결혼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빨리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예수를 믿는 분들은 아마 이런 맛을 잘 모를 것입니다.

젊은 청소년 시절이나 혹은 대학생 때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거나 혹은 수련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크게 받으면 함께 한 친구들이 자신들의 남은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기고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서 문서를 만들어 발행하기도 하고 방을 얻어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하고 혹은 외국에 선교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십년 이십년 지난 후 아마도 그 일을 하느라고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로 어떤 사람은 저런 일로 다 흩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빨리 그 열정이 식어지거나 변질되어서 나중에는 자신의 신앙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열정이 다 식어버린 죽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실의 장벽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열정 하나로 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 속에 뛰어 들어가 보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신앙을 단단한 껍질로 싸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뜨거웠던 때는 길갈에서 할례를 행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 온 후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였던지 적을 눈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적을 눈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당장 적이 쳐들어 와서 죽여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버렸기 때문에 당장 죽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십년 이십년 되면서 옛날의 그 열정은 모두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가나안 땅에 우상과 음란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젊은 열정은 다 사라지고 자신들의 신앙도 겨우 지키지 못할 정도로 믿음이 식어져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현실의 파도가 너무나도 드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뜨거운 열정 하나로 가나안 땅에 들어 왔지만 결코 가나안 땅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았고 결국 처음의 그 헌신과 열정은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길갈의 그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 왔습니다. 보김이라는 곳까지 하나님의 사자는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옛날 그들이 듣던 그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옛날 그들을 감동시키던 그 설교 말씀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장소 이름을 보김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1. 길갈에서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현상은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도와는 달리 점점 가나안 사람들을 닮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삶을 드리겠다고 맹세했던 그 길갈 세대에게서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1,2,\"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쩜이뇨\"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의 정체입니다. 과연 이 분이 누구시냐 하는 것입니다. 가끔 선지자들의 시대에는 무명의 선지지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곤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때는 선지자들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라고 하면 모세가 선지자였고 그 다음 사무엘 때까지 선지자를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여호수아 앞에 칼을 들고 나타났던 바로 그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제이위 하나님이신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직접 보김으로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길갈이 어떤 곳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죽기를 각오하고 모두 할례를 받았던 그 곳입니다. 그러면 보김은 어떤 곳입니까? 보김이 어떤 곳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단지 벧엘이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요셉 지파의 타협이 벧엘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벧엘에 다시 모여서 어떤 우상 숭배의 의식같은 것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찾아오실 때는 그들의 가장 비참한 현장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선지자 아모스가 벧엘까지 찾아가서 그곳에서 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벧엘에는 아주 큰 우상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 말자 가나안화 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가나안 방식에다가 자신들의 신앙을 혼합해서 이 벧엘에서 어떤 건전하지 못한 우상의 의식을 행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그 지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었기 때문에 \'보김\'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김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오래 사용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눈물이 말씀을 들을 그때만 반짝 흘렸을 뿐이지 그들의 신앙은 다시 그 뜨거운 열정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김이라는 지명은 역사에서만 남아 있지 실제로 어디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에 아무 것도 하시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백성들을 위하여 너무나도 많이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는 그들과 함께 계셨고 이번에도 그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되려고 하자 결코 참지 못하고 직접 그들을 찾아 가셔서 말씀을 외치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소극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들에게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라는 말씀은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존재의 그 뿌리를 밝히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탈출한다는 것이 보통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두명도 아닌 민족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신 후 광야에 내팽개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단순히 압제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에 따라는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이 가나안 땅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죄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고 크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을테니까 이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이었습니다.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짐했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때의 열정과 헌신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2,\"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러함이 어쩜이뇨\"

예를 들어서 어렵게 회사에 들어가 보니 회사의 분위기가 술 분위기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거기서 도저히 버티어낼 수 없는 분위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술자리에 빠지면 과장이 욕을 퍼붓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을 절대로 어기지 않겠고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바른 소리를 한번 하면 목이 날아가 버리고 죄를 거부하면 당장 보따리를 사서 집에 가서 아이나 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신앙적으로 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직장 생활을 하거나 사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사사건건 신앙적인 이유로 충돌만 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아마 모든 것을 신앙적인 이유로 거부한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신앙! 신앙!\'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타협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길갈의 그 헌신과 열정은 도저히 찾아 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가 탈옥을 하는 것과 같고 노예가 집단으로 탈출에 성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수로 탈옥을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겠으며 너희와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타협의 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하고 있느냐고 책망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처음 믿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잘 인정하기 못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길갈에서 할례를 하던 그 용기와 열정을 잃어버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에서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처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굶어 죽어도 혼자 죽으니까 상관이 없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컸고 식구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옛날처럼 죽으면 죽으라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현실 속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사실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회사에서 부정한 짓을 시킨다고 해서 당장 사표를 쓰고 나오면 이 어려운 때에 어떻게 먹고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왜 그렇게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을 눈앞에 두고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 미친 짓을 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이 되기를 바랬고 교양이 있기를 바랬으며 예측 가능한 고상한 생활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삶에게 열정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책망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2,3,\"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허라 하였거늘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길갈의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하나의 삶을 방식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사는 길은 오직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듯이 이들은 자기 신들을 믿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도 유익한 부분이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아마 일본에 가 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일본은 모든 것을 귀신이 지배합니다. 신사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사가 하나의 삶의 방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하니까 이런 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살수도 있고 저런 식으로 살수도 있다는 식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자는 어떻게 책망했습니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을 멸절시키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도에 가서 거기서 요가하는 사람들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중국까지 가서 거기에 있는 불교 사원들을 쳐부수라고 명령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한 땅 적어도 거기에서는 어떤 우상도 남아 있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그것마저도 철저히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끼리만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나 열정이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보니 좀 지나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들을 다 적대시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발상입니까?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신앙 하나가 맞지 않다고 해서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버티고 있는 여자를 볼 때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너무 쉽게 안정된 길을 붙들려고 한 것입니다. 길갈의 방식은 어떻게 보면 독선적인 것이고 이 세상에서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말과 같고 사회 생활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차라리 그 백성들이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이상한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고 남들은 쉽게 잘 넘어가는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고민도 하고 갈등도 겪고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살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는 도저히 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게 됩니까? 기도하게 되고 나의 삶에 하나님의 능려을 초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편하게 걸어온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쉽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가나안 땅에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코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는 것은 순전한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 그들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되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처음부터 힘들게 살려고 했다면 그들은 나중에 아주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통하여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한번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무슨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술도 잘 마시고 제사도 잘 지내고 거짓말도 잘 하더니 어느 하루부터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나서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한번 질문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투쟁했더라면 그들의 삶이 어떠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처음부터 형통했을까요 아니면 처음에는 거의 모든 것을 다 잃을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 갔을까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철저하게 투쟁 일변도로 나갔더라면 그들의 가나안 초기 생활은 궁핍과 불안정으로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만나가 내리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안정이 필요했고 안정하려면 서로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망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무엇이 급하다고 그렇게 가나안 땅에서 빨리 정착하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농사를 좀 짓지 못하고 계속 어렵고 힘들게 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할 수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정되게 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들어가자 말자 그들과 협상을 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등한히 하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처음부터 가나안 사람들과 협상하는 바람에 그들이 결국 그들을 답아 당기는 올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세상일은 나 혼자 마음을 잘 먹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만일 어떤 남녀가 서로 사귀다가 한쪽 상대방을 사귀지 않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상대방이 단념을 하지 않는 이상 혼자 정리했다고 해서 정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전화도 내가 수화기를 놓는다고 해서 전화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도 수화기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분명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 주었더라면 가나안 사람들이 단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타협을 해 버렸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이 끝까지 이스라엘을 물고 늘어져서 결국 그들은 더욱 더 그들의 신앙을 몰아내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려고 하면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왜 어제까지는 잘 봐주더니 왜 하필 오늘부터 이렇게 까다롭게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까지는 아무리 우상에게 절을 하고 더러운 짓을 해도 모르는 체 했습니다. 아니 자기들도 함께 어울려서 같이 즐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우상을 몰아내고 그들을 쫓아내려고 해 보십시오. 이미 그들 중에 친한 사람도 생겼고 또 도움도 받은 처지인데 모질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점점 더 이들의 올무에 걸려들어서 신앙적으로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말씀을 들은 길갈 세대의 반응.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가나안 땅에서 신앙의 열정을 다 잃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울었습니다.

4,5,\"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니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소리를 높여서 울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옛날의 그 열정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늘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다시 한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 같이 일어나야 하는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늘 무거운 납덩이처럼 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뜨거운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오셔서 옛날 그들이 그렇게 듣고 은혜 받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단하던 그 말씀을 다시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지금 그들의 모습과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들은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었든지 후손들은 그곳의 이름을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말씀을 듣고 울 수 있었던 것 하나만 보아도 그들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아주 오래된 교회에서 설교할 때 머리가 백발이신 은퇴하신 장로님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인사하러 오는 것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교 말씀을 들으니까 옛날 열정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옛날 한때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쁨 없이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들으니까 옛날의 그 순수한 열정이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울었다고 해서 옛날 길갈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많은 길을 걸어 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가나안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고 이미 많은 식구들을 거느린 자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한번 크게 운다고 해서 옛날의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그 상태에서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붙들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본문 6절 이하는 이 길갈 세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7,\"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9,\"그 세대 사람들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길갈 세대 사람들은 적어도 이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더 이상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은 날 동안 하나님을 섬겼고 비교적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이번의 각성으로 크게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옛날 길갈의 그 순수한 열정과 헌신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첫째는 이 세상의 현실이 그렇게 생각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또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이 세상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 세상는 그렇게 생각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길갈에서의 헌신이 나중에는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이 세상은 교활하고 지혜로우며 강한 힘을 가진 상대였습니다. 순수한 열정 하나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두터운 현실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모두 거의 자신들의 신앙도 팔아먹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나타나는 것이 \'냉소주의\'입니다. 신앙은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험을 싫어하는 신앙이고 절대로 안전제일주의로 나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는 믿지만 실제로 모든 것은 나의 머리로 다 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깊이 병든 신앙입니다. 어쩌면 치료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대개 냉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이 한때는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높은 벽을 느끼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믿음이 고장난 신앙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쉽게 고지를 정복하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말자 신앙의 모순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농사도 지으면서 전쟁도 치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농사도 지으면서 전쟁을 지를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일단 화해부터 해 놓고 농사부터 지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한 것은 하나님보다 더 머리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순되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공부도 하면서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하라고 하십니다. 장사도 열심히 하면서 교회 봉사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요구는 모순되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공부만 하든지 장사만 하든지 그래도 겨우 먹고 살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어떻게 이 세상일도 잘하라고 합니까? 그래서 일단 쉽게 사회에서 안정되고 보는 것입니다. 일단 공부부터 하든지 아니면 장사부터 해서 돈을 벌고 난 후에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교회에 다니기가 더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없어서 나가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교인들과 수준이 맞지 않아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에 나가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돈을 벌면 벌수록 더 신앙 생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결국에는 한 때 원수들앞에서 할례를 행할 정도로 용감했던 그들이 자기 신앙조차 팔아 버리고 우상의 신전에서 절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성공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 세상에서 아예 실패할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도라이\'(?) 노릇을 할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예 세상으로 하여금 나에게 기대를 걸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아예 저런 사람이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혀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재기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월등하게 쉽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처음부터 고생하기를 싫어한다면 그는 한 평생 영적으로 병든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약간 세워 놓으면 다시 쓰러지고 세워 놓으면 쓰러지는 것을 죽을 때까지 반복할 것입니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해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아에 말씀 붙들고 \'도라이\'(?)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생고생 가운데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길갈 세대가 다시 뜨거운 믿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았겠습니까? 저는 그들이 보김에서 크게 울었다고 해서 결코 옛날 길갈로 돌아갔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가나안식으로 많이 걸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길갈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길갈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마음만 있으면 그들은 다시 길갈의 신앙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잘못 걸어 왔으면 다시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준 지위나 재물을 포기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설 수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회복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가 죽었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8,\"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결코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어버리고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동화되지 않고 이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없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한 사람에게 의존하던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신앙을 지켜야 하고 자신의 싸움을 싸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사사들이었습니다. 사사들은 결코 영웅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평범한 평신도 목회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를 이기는 방법으로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옛날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말씀과 기도가 살아 있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절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한때 영웅들은 다 사라져도 교회를 통하여 신실하게 신앙을 지킨 자들은 날마다 그 신앙이 새롭게 자랍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 한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사탄에게 결정타를 가하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화려한 승리에 비하면 사사들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식지 않게 하셨고 녹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는 신비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회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철저한 암흑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평범한 목회자들을 통하여 어떻게 원수를 멸하시며 또 그들을 말씀으로 다스려 나가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보김으로 온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평가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곳이 단순히 한번 우는 보김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다시 길갈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 너무 쉽게 잘 사는 사람은 앞으로 한 평생 올무에 매어 살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올무가 되든지 그의 올무가 되어서 그의 한 평생의 삶이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고집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는 그가 가나안 땅을 자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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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어둠을 밝혔던 사사들

   2:11-23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수련회나 캠프를 하면 중간에 캠프 파이어를 합니다.

이미 태양은 져서 온 세상은 어두움에 덮여 있는데 운동장 중앙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면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 불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노래를 부리기도 하고 혹은 춤을 추기도 합니다. 아마 낮에 그런 일을 하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밤이기 때문에 그 불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밤이기 때문에 더 낭만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불이 꺼져가려고 하면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불꽃이 일어나면서 다시 장작은 타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나라가 어두울 때를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습니다. 관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썩을 대로 썩었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 욕심을 차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진리! 진리!\'를 외치지만 진리를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 바른 정신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고 방식만 바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환한 빛을 보게 됩니다. 어두운 가운데 그의 바른 정신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난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 불빛 아래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런 불빛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내부적인 문제가 갈등으로 혹은 핵심적인 사람의 부패와 타락으로 그 불빛은 빛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온 세상은 또 상당한 시간 어두움 속을 헤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90%를 넘어 섰다고 합니다. 이것은 국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의에 목말라 했으며 그런 바른 정신을 가진 지도자를 갈망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불꽃은 너무 빨리 사그러 들었으며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그런 정신을 사모해서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들도 이제는 뿔뿔이 다 흩어져서 다시 모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불꽃과 하나님의 불꽃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 불꽃은 한번 사그러 들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불꽃은 그 안에 근본적으로 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름부음이 있기만 하면 다시 활활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군한 가나안 땅은 철저히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이 곳이 어두운 이유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 철저하게 양심을 덮고 있기 때문에 생긴 어두움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한 횃불을 들고 가나안 땅으로 쳐들어갔지만 현실적인 필요, 즉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곧 그들의 불꽃도 사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온 세상은 다시 어두움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무려 사백년 동안이나 어두움을 밝혀 온 불꽃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평신도 지도자들인 사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고 내세울 것 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를 억압하던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존귀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1. 가나안 땅의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안아서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들의 행동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라는 신이 있고 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곳 가나안 땅 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길 수가 있습니까?

11-13,\"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들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버리고 주위에 있는 신들을 섬기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주위에 있는 신들을 따라간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서 조상 대대로 가져오던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농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목축을 해 왔습니다. 물론 가끔씩 농사를 짓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본업은 목축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축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날씨나 비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가 와서 풀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곡식이 다 말라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농사라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때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곡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또 거둘 때가 있으며 비가 올 때가 있고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혀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상황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를 배워야만 했고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낸다고 하는 것은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농사는 모든 것이 날짜에 따라서 해야 하는데 날짜에는 음력이 있고 양력이 있으며 또 날짜 하나하나 마다 농사와 관계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도 그런 날짜를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미신과 연결시켜 놓아서 지키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동지는 밤과 낮의 길이가 같기 때문에 농사 지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냥 그렇게 말하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귀신을 내어쫓기 위하여 팥죽을 끓이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목축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환경이 바뀌면서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옛날 조상들의 지혜나 신앙같은 것이 별로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요즘 컴퓨터 시대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경험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자신이 보았던 동학 혁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즘 컴퓨터 시대에 동학하는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인들은 세탁기나 전기 밥솥을 사용하는 방식을 며느리나 손자들에게 배워야 할 입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겼던 것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었고 농사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날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다 내어쫓고 그들의 문화를 철저히 파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사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원하신 것은 처음부터 농사를 잘 지으려고 하지 말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번 나름대로의 농사법을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나안 사람들의 농사법을 배우면 농사를 훨씬 잘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농사에는 사탄의 사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예 농사를 몇 년간은 완전히 망치더라도 처음부터 시작을 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됩니까? 쉽게 잘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어렵게 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차라리 이 세상에서 좀 힘들게 살려고 마음을 먹었더라면 그들은 농사는 잘 짓지 못하더라도 신앙은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대학은 나와서 좋은 직장을 잡고 빨리 결혼을 해서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결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니고 매일 성경이나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 밑 바닦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낙오된 자요 현실에서 도태된 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너무 빨리 잘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처세술 안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술수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좀 고민도 하고 좀 낮아지기도 하고 좀 실패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화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안에 있는 죄의 본성.

 

20-23,\"여호와께서 아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내어 쫓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시험해 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시험해 본다는 것은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그 사람의 생각이나 됨됨이나 실력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번 겪어 보아야 하고 한번 테스트를 해 보아야 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남겨 놓게 하신 것은 무엇을 시험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것을 그냥 억지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억지로 주면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거리가 됩니까?

우선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세련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썩어 있었고 그들의 삶은 부패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의 잘 사는 것 안에 있는 그 정신적인 부패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시험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가나안 사람들의 삶을 보고 \'!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잠시라도 이런 생활을 그리워하고 동경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가?\'하는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런 생활이 좋아져버리면 시험에 불합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정신적인 타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허무함과 그들의 죄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올무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술집에 갔다고 합시다. 술집은 대개 분위기가 화려합니다. 그리고 밤에 여자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온갓 애교를 부리면서 술 시중을 할 것입니다. 술집 여자들 중에서 남자들에게 잘해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차렷 자세로 술만 붓는데 그 집에 계속 올 손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 잘해주는 것이 독입니다. 마음에도 없지만 사랑하는 체 하고 걱정하는 체 하고 딴 짓도 해야 자꾸 술을 마시러 올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유혹이요 시험입니다. 그 진상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빨리 거기서 나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술집에 있는 여자를 진짜 사랑하면 그 집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모든 점에서 여유가 있었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깊은 곳에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순결하다든지 거룩하다든지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내면의 깊은 타락한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돈을 싸가지고 온다고 해도 이런 생활이 싫다고 하였더라면 가나안 땅에 살아도 오오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인간의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비만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것을 줄여서 살을 빼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보십시오. 한번 살이 찌고 나면 살이 살을 부릅니다. 머리로는 더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유명한 영화배우 마론 브란도는 몸무게가 2백 키로에 가깝다고 하는데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냉장고 문을 열쇠로 채워놓으면 문을 부수고서라도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먹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비만을 병으로 봅니다. 비만한 사람은 환자로 보아서 치료하듯이 비만과 싸우지 않으면 절대로 살은 빠지지 않습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서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흡연으로 인하여 폐암에 걸려 죽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담배가 떨어져 버렸으면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절대로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되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은 뼈 속까지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의 무서운 성격을 깨닫고 빨리 하나님께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받고 돌아가는 유대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속에 한 귀신이 들어 있었는데 청소를 해야 되겠으니까 나가라고 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갈 데가 없어서 그 사람을 도로 찾아가니까 방이 비어있고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추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데리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귀신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정욕이고 나쁜 습관입니다. 이 귀신이 일시적으로 나갔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듣고 일시적으로 도덕적인 감화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한 동안 포학한 성격도 없어지고 술도 끊고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주인이 없었고 지속적으로 능력을 주시는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일시적인 도덕적인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과거의 나쁜 삶으로 돌아갈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오면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데 놀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먹고사는 부분에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짓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도 이 정도는 음란하지 않고 이 정도는 추악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비친 가나안 땅은 오늘 남한의 대도시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화려함 속에 들어있는 무서운 도덕적인 타락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그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가구와 좋은 옷을 입고 병든 사랑을 하는 것이 그렇게 많이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텔레비젼이 영혼의 병을 전염시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영화 배우들을 보십시오. 그 중에 못생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도 병든 사랑입니다. 그들이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것을 보면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실제로 건전하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기는 재앙이야. 완전히 모든 것이 썩어 있구먼. 잠시라도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하면서 뒷걸음질치면서 도망을 쳐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것은 17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을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음란하듯 좇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질이 영적인 간음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우상 의식속에는 간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에게 힘을 실어 주려면 추수 감사제 때에 성행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사당에는 여 사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적인 창녀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바알의 사상의 무서운 것은 성적인 방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암적인 요소입니다. 우리 영혼의 발암 물질이 성적인 방종입니다. 이런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지 않으면 결국 같은 병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14-15,\"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단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했을 때 세상은 그들을 압제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화를 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불신에 대하여 매우 가슴아파하시고 또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부족들에게 파셨습니다. 여기서 파셨다고 하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어떤 짓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아무 상관도 하시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요당한 상태에서 신앙 생활하시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의 그 더러운 본성을 깨닫고 아무리 이 세상에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달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는 반드시 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주는 것을 다 잡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려면 이 세상의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유혹을 하고 내 마음이 거기에 끌려도 그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의 은혜로 도망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아주 민감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에 아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록 너무나도 미련해서 중간에 돌이키지 못하고 설사 갈데 까지 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에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있어서 이미 늦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주면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헛된 영광을 남겨 두셨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가나안의 그 영광이 하나님의 율법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그들에게 흘러 넘치게 됩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손을 뻗치기만 하면 잘 살 수도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유명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너무 좋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귀해서 굳이 가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이 세상의 축복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자는 복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귀한 것으로 그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3. 어두움의 시대를 밝혔던 사사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침공했을 때 가나안 땅에는 환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잡아죽인 왕들은 모두 가장 악한 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이 가나안 땅에서는 정의의 사정의 칼날이 번쩍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이 빛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여야 할 자들을 모두 살려 주었고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다시 정의가 실종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둡다\'고 할 때 무엇이 어두운 것입니까? 정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 어두운 것입니다. 정의가 악과 타협해서 도움을 받고 오히려 그들을 살려주는 것이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라고 하는 것 때문에 개혁해야 할 자들을 오히려 다 살려두고 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이 다시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 어두움을 빛으로 밝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무명의 평신도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백성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씀으로 백성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존귀한 자들이며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약속되어 있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그들에게 회복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16-18,\"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음으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사사들이 귀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편한 삶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그 연약한 믿음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빠져서 세상과 타협하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하나님은 능히 그들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에서 그들을 건질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외쳤습니다.

그들은 아무 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 속에 있는 믿음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 말씀 증거의 대가로 엄청난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이 말씀의 세력이 일어나려고 하면 모든 힘을 다 끌어 모아서 그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어려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려움에서 건지기 위하여 살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영적인 전쟁의 태풍의 핵으로 사용되는 것을 배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사들은 아무도 함께 하는 자가 없을 때 혼자 칼을 들어 원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백성들이 사사들의 말로 잘 청종치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씨는 있었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나갈 때 믿음의 불이 하나씩 둘씩 붙기 시작했고 이것은 엄청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사들은 작은 불씨였지만 끝까지 인내할 때 결국 온 이스라엘에 그 부흥의 불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다 사그러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기름을 부어서 다시 힘차게 진리가 불붙어 오를 수 있도록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어두움은 이 이름 없는 사사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두움이 없었더라면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어두움의 시대는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드러내고 더욱 더 그들의 믿음을 찬란하게 비취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골치 아픈 시대에 살아야 하는 것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시대같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어두운 때 빛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을 했다고 해 봐야 나보다 더 성공하고 더 똑똑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것으로는 빛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이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습니다.

제가 사사기를 교회론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사들은 바로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들의 잠자는 영혼은 깨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죄와 싸우기로 결단한 것은 부흥의 역사입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한꺼번에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깨달으며 그 존귀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이 세상 나라의 차이점입니다. 이 세상도 일시적으로 불을 밝힐 때가 있습니다. 주로 어느 때 그런가 하면 정권이 바뀔 때입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불의와 탄압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에게 약간의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부정 부패 일소\'같은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세상의 빛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죄를 사랑하는 것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개혁이 항상 구호로 끝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되기만 하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취기만 하면 자신의 바른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애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통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어두움 속의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작은 불꼿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가나안 땅이라 하더라도 죄가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더욱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무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능력과 축복을 약속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위로를 받고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열심히 살기 위하여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이 교회 안으로 깊숙히 파고들어 왔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가난에서의 자유나 질병에서의 자유가 복음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혹은 교회는 자기 멋대로 해도 사랑하는 곳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 멋대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죄와 싸우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살려내는 곳입니다. 다른 어떤 곳보다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를 철저히 파내어서 죄를 미워하게 하고 죄를 수술하게 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더 환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으시며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붙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직장을 좀 잃으면 어떻습니까?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좀 늦게 결혼하면 어떻습니까? 대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의 무한한 의와 그의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울수록 진리의 등불을 밝힐 사람을 찾습니다. 이 세상이 죄악되면 죄악될수록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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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어둠을 밝혔던사사들

2:11-23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수련회나 캠프를 하면 중간에 캠프 파이어를 합니다.

이미 태양은 져서 온 세상은 어두움에 덮여 있는데 운동장 중앙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면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 불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노래를 부리기도 하고 혹은 춤을 추기도 합니다. 아마 낮에 그런 일을 하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밤이기 때문에 그 불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밤이기 때문에 더 낭만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불이 꺼져가려고 하면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불꽃이 일어나면서 다시 장작은 타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나라가 어두울 때를 보면 모든 것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습니다. 관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썩을 대로 썩었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 욕심을 차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진리! 진리!\'를 외치지만 진리를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 바른 정신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고 방식만 바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환한 빛을 보게 됩니다. 어두운 가운데 그의 바른 정신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난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 불빛 아래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런 불빛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내부적인 문제가 갈등으로 혹은 핵심적인 사람의 부패와 타락으로 그 불빛은 빛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온 세상은 또 상당한 시간 어두움 속을 헤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90%를 넘어 섰다고 합니다. 이것은 국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의에 목말라 했으며 그런 바른 정신을 가진 지도자를 갈망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불꽃은 너무 빨리 사그러 들었으며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그런 정신을 사모해서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들도 이제는 뿔뿔이 다 흩어져서 다시 모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불꽃과 하나님의 불꽃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 불꽃은 한번 사그러 들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불꽃은 그 안에 근본적으로 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름부음이 있기만 하면 다시 활활 타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군한 가나안 땅은 철저히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이 곳이 어두운 이유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 철저하게 양심을 덮고 있기 때문에 생긴 어두움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한 횃불을 들고 가나안 땅으로 쳐들어갔지만 현실적인 필요, 즉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곧 그들의 불꽃도 사그러지고 말았습니다. 온 세상은 다시 어두움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무려 사백년 동안이나 어두움을 밝혀 온 불꽃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평신도 지도자들인 사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고 내세울 것 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를 억압하던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존귀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1. 가나안 땅의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안아서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들의 행동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라는 신이 있고 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곳 가나안 땅 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길 수가 있습니까?

11-13,\"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들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버리고 주위에 있는 신들을 섬기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주위에 있는 신들을 따라간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서 조상 대대로 가져오던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농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로 목축을 해 왔습니다. 물론 가끔씩 농사를 짓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본업은 목축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축업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날씨나 비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비가 와서 풀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곡식이 다 말라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농사라고 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때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곡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또 거둘 때가 있으며 비가 올 때가 있고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혀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상황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를 배워야만 했고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낸다고 하는 것은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농사는 모든 것이 날짜에 따라서 해야 하는데 날짜에는 음력이 있고 양력이 있으며 또 날짜 하나하나 마다 농사와 관계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도 그런 날짜를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미신과 연결시켜 놓아서 지키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동지는 밤과 낮의 길이가 같기 때문에 농사 지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냥 그렇게 말하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귀신을 내어쫓기 위하여 팥죽을 끓이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목축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환경이 바뀌면서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옛날 조상들의 지혜나 신앙같은 것이 별로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요즘 컴퓨터 시대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경험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자신이 보았던 동학 혁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즘 컴퓨터 시대에 동학하는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인들은 세탁기나 전기 밥솥을 사용하는 방식을 며느리나 손자들에게 배워야 할 입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겼던 것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었고 농사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들의 날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다 내어쫓고 그들의 문화를 철저히 파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사는 어떻게 짓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원하신 것은 처음부터 농사를 잘 지으려고 하지 말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번 나름대로의 농사법을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나안 사람들의 농사법을 배우면 농사를 훨씬 잘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농사에는 사탄의 사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예 농사를 몇 년간은 완전히 망치더라도 처음부터 시작을 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됩니까? 쉽게 잘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어렵게 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차라리 이 세상에서 좀 힘들게 살려고 마음을 먹었더라면 그들은 농사는 잘 짓지 못하더라도 신앙은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대학은 나와서 좋은 직장을 잡고 빨리 결혼을 해서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결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니고 매일 성경이나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 밑 바닦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낙오된 자요 현실에서 도태된 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너무 빨리 잘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처세술 안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술수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좀 고민도 하고 좀 낮아지기도 하고 좀 실패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화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안에 있는 죄의 본성.

 

20-23,\"여호와께서 아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내어 쫓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시험해 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시험해 본다는 것은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그 사람의 생각이나 됨됨이나 실력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번 겪어 보아야 하고 한번 테스트를 해 보아야 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남겨 놓게 하신 것은 무엇을 시험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것을 그냥 억지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억지로 주면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거리가 됩니까?

우선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세련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썩어 있었고 그들의 삶은 부패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의 잘 사는 것 안에 있는 그 정신적인 부패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시험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가나안 사람들의 삶을 보고 \'!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잠시라도 이런 생활을 그리워하고 동경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가?\'하는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런 생활이 좋아져버리면 시험에 불합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정신적인 타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허무함과 그들의 죄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올무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술집에 갔다고 합시다. 술집은 대개 분위기가 화려합니다. 그리고 밤에 여자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온갓 애교를 부리면서 술 시중을 할 것입니다. 술집 여자들 중에서 남자들에게 잘해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차렷 자세로 술만 붓는데 그 집에 계속 올 손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 잘해주는 것이 독입니다. 마음에도 없지만 사랑하는 체 하고 걱정하는 체 하고 딴 짓도 해야 자꾸 술을 마시러 올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유혹이요 시험입니다. 그 진상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빨리 거기서 나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술집에 있는 여자를 진짜 사랑하면 그 집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모든 점에서 여유가 있었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깊은 곳에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순결하다든지 거룩하다든지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내면의 깊은 타락한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돈을 싸가지고 온다고 해도 이런 생활이 싫다고 하였더라면 가나안 땅에 살아도 오오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인간의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비만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것을 줄여서 살을 빼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보십시오. 한번 살이 찌고 나면 살이 살을 부릅니다. 머리로는 더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유명한 영화배우 마론 브란도는 몸무게가 2백 키로에 가깝다고 하는데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냉장고 문을 열쇠로 채워놓으면 문을 부수고서라도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먹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비만을 병으로 봅니다. 비만한 사람은 환자로 보아서 치료하듯이 비만과 싸우지 않으면 절대로 살은 빠지지 않습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서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흡연으로 인하여 폐암에 걸려 죽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담배가 떨어져 버렸으면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절대로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되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은 뼈 속까지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의 무서운 성격을 깨닫고 빨리 하나님께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받고 돌아가는 유대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속에 한 귀신이 들어 있었는데 청소를 해야 되겠으니까 나가라고 해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갈 데가 없어서 그 사람을 도로 찾아가니까 방이 비어있고 깨끗하게 소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추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데리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귀신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정욕이고 나쁜 습관입니다. 이 귀신이 일시적으로 나갔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듣고 일시적으로 도덕적인 감화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한 동안 포학한 성격도 없어지고 술도 끊고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주인이 없었고 지속적으로 능력을 주시는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일시적인 도덕적인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과거의 나쁜 삶으로 돌아갈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오면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데 놀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먹고사는 부분에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짓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도 이 정도는 음란하지 않고 이 정도는 추악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비친 가나안 땅은 오늘 남한의 대도시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화려함 속에 들어있는 무서운 도덕적인 타락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그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가구와 좋은 옷을 입고 병든 사랑을 하는 것이 그렇게 많이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텔레비젼이 영혼의 병을 전염시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영화 배우들을 보십시오. 그 중에 못생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도 병든 사랑입니다. 그들이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것을 보면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실제로 건전하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기는 재앙이야. 완전히 모든 것이 썩어 있구먼. 잠시라도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하면서 뒷걸음질치면서 도망을 쳐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것은 17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을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음란하듯 좇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질이 영적인 간음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우상 의식속에는 간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에게 힘을 실어 주려면 추수 감사제 때에 성행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사당에는 여 사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적인 창녀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바알의 사상의 무서운 것은 성적인 방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암적인 요소입니다. 우리 영혼의 발암 물질이 성적인 방종입니다. 이런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지 않으면 결국 같은 병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14-15,\"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단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했을 때 세상은 그들을 압제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화를 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불신에 대하여 매우 가슴아파하시고 또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부족들에게 파셨습니다. 여기서 파셨다고 하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어떤 짓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아무 상관도 하시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요당한 상태에서 신앙 생활하시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의 그 더러운 본성을 깨닫고 아무리 이 세상에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달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는 반드시 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주는 것을 다 잡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려면 이 세상의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유혹을 하고 내 마음이 거기에 끌려도 그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의 은혜로 도망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아주 민감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에 아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록 너무나도 미련해서 중간에 돌이키지 못하고 설사 갈데 까지 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에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있어서 이미 늦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주면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헛된 영광을 남겨 두셨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가나안의 그 영광이 하나님의 율법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그들에게 흘러 넘치게 됩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손을 뻗치기만 하면 잘 살 수도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유명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너무 좋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귀해서 굳이 가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이 세상의 축복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자는 복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귀한 것으로 그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3. 어두움의 시대를 밝혔던 사사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침공했을 때 가나안 땅에는 환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잡아죽인 왕들은 모두 가장 악한 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이 가나안 땅에서는 정의의 사정의 칼날이 번쩍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이 빛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여야 할 자들을 모두 살려 주었고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다시 정의가 실종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어둡다\'고 할 때 무엇이 어두운 것입니까? 정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 어두운 것입니다. 정의가 악과 타협해서 도움을 받고 오히려 그들을 살려주는 것이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라고 하는 것 때문에 개혁해야 할 자들을 오히려 다 살려두고 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이 다시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 어두움을 빛으로 밝힌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무명의 평신도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백성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씀으로 백성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존귀한 자들이며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약속되어 있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그들에게 회복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16-18,\"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음으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사사들이 귀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편한 삶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그 연약한 믿음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빠져서 세상과 타협하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하나님은 능히 그들이 겪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에서 그들을 건질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외쳤습니다.

그들은 아무 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 속에 있는 믿음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 말씀 증거의 대가로 엄청난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이 말씀의 세력이 일어나려고 하면 모든 힘을 다 끌어 모아서 그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어려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려움에서 건지기 위하여 살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영적인 전쟁의 태풍의 핵으로 사용되는 것을 배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사들은 아무도 함께 하는 자가 없을 때 혼자 칼을 들어 원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백성들이 사사들의 말로 잘 청종치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들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씨는 있었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나갈 때 믿음의 불이 하나씩 둘씩 붙기 시작했고 이것은 엄청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사들은 작은 불씨였지만 끝까지 인내할 때 결국 온 이스라엘에 그 부흥의 불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다 사그러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기름을 부어서 다시 힘차게 진리가 불붙어 오를 수 있도록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어두움은 이 이름 없는 사사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두움이 없었더라면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어두움의 시대는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드러내고 더욱 더 그들의 믿음을 찬란하게 비취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골치 아픈 시대에 살아야 하는 것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시대같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어두운 때 빛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을 했다고 해 봐야 나보다 더 성공하고 더 똑똑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것으로는 빛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이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습니다.

제가 사사기를 교회론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사들은 바로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들의 잠자는 영혼은 깨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죄와 싸우기로 결단한 것은 부흥의 역사입니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한꺼번에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깨달으며 그 존귀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이 세상 나라의 차이점입니다. 이 세상도 일시적으로 불을 밝힐 때가 있습니다. 주로 어느 때 그런가 하면 정권이 바뀔 때입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불의와 탄압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에게 약간의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부정 부패 일소\'같은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세상의 빛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죄를 사랑하는 것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개혁이 항상 구호로 끝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되기만 하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취기만 하면 자신의 바른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애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통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어두움 속의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작은 불꼿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가나안 땅이라 하더라도 죄가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더욱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무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능력과 축복을 약속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위로를 받고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열심히 살기 위하여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축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이 교회 안으로 깊숙히 파고들어 왔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가난에서의 자유나 질병에서의 자유가 복음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혹은 교회는 자기 멋대로 해도 사랑하는 곳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 멋대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죄와 싸우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살려내는 곳입니다. 다른 어떤 곳보다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를 철저히 파내어서 죄를 미워하게 하고 죄를 수술하게 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더 환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으시며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붙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직장을 좀 잃으면 어떻습니까?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좀 늦게 결혼하면 어떻습니까? 대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의 무한한 의와 그의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울수록 진리의 등불을 밝힐 사람을 찾습니다. 이 세상이 죄악되면 죄악될수록 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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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고통은 외부에서부터

   3:1-11   

 

 

가끔 영화를 보면 군대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군인들을 훈련시켜 놓았는데 나중에 그들이 범죄 집단과 끈이 닿아서 자신의 기술을 범죄 수단으로 사용하는 줄거리의 영화들이 있습니다. 특히 월남전 이후에 이런 영화들이 많이 나온 것을 보면 월남전이 미국 사람들에게 미친 후유증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는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폭발이나 요인 암살 혹은 침투 등의 훈련을 받은 부대나 대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반드시 그 목적을 위해서만자신의 기술을 사용해야 하고 만일 그 목적이 달성되거나 목적이 쓸모없게 되면 그 부대는 해체되고 대원들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범죄 집단과 손을 잡고 일하게 된다면 그 사람 자체가 사회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옮겨 놓으신 것은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목적은 이른바 \'거룩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악의 세력을 몰아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임무를 잘 수행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임무를 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들게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는 대신 그들과 친구가 되어서 어울려 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악한 자들을 토벌하러 군대를 보내었는데 그들이 악한 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서 잘 지내고 있다면 이것은 원래 자신들을 보낸 목적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적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더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은 가나안 사람들 보다 배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와 싸우는 것이 타협하는 것보다 더 편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싸우기 위하여 일어섰을 때 그들에게는 사십년의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싸울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좀 편하게 지내려고 가나안 사람들과 타협을 했다가 그들은 몇배나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싸울 때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은 싸울 때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

 

1,2,\"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여기서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태어나서 전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세대라는 뜻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가나안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서 가나안 사람들과 싸웠던 이스라엘 세대는 자기들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양식이 없어서 양식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었고 악의 세력을 이 거룩한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모두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혁명이나 구테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완전히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최근의 민족 분쟁이 일어난 곳에서 \'인종 청소\'라는 말을 듣습니다. 보스니아 내란이든지 혹은 라이베리아 내전같은 경우에 민족 끼리의 원한이 너무 깊어서 상대방 족속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겁탈하고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 청소\'라는 말이 이렇게 민족주의적으로 사용될 때 이것 자체가 얼마나 무서운 악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외 다른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회적인 기여와 아무 상관없이 자기와 민족이 다르면 무조건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히틀러 때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인종의 청소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유대인들을 이 세상에서 씨를 말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가나안 전쟁의 성격을 이런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큰 오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단지 택함을 받은 선민들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죽이거나 내어쫓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나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더 이상 두어서는 안되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악했는지는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합니다.

물론 오늘 우리들은 어느 민족도 다른 어느 민족을 청소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악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법으로 해결해야지 종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년 전에 지존파라는 악한 사람들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담력을 키운다고 길에 가는 여자를 연습용으로 죽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납치해서 비닐로 얼굴을 씌워서 죽이게 하고 또 인육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일망타진을 해서 모두 엄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바로 이 \'거룩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도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하거나 어떤 불이익을 주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리 속은 옛날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통해서 나타나는가 하면 영화나 소설같은 것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영웅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일 수가 없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악한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영화는 주인공 이름이 \'터미네이터\'입니다. \'끝장을 낸다\'는 뜻입니다. 관객들은 주인공이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바로 그런 동물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심하면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여서 기분을 풀고 싶은 악한 본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실 갈렙이 죽인 아낙의 세 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는 살인 기계들이었고 일종의 터미네이터들이었습니다. 또 영화에서 성적으로 추악하고 더러운 장면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 호기심을 가지고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안에 이런 동물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문명화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런 동물적인 본성을 보다 고상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명화된 것입니다. 옛날 고대 사회의 특징은 힘이 약한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바로 정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힘이 세면 다른 사람의 아내나 딸들을 끌고 갔습니다. 사실 벤냐민 지파의 씨를 남기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타작마당의 여자들을 납치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였습니다.

옛날과 요즘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이런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가 그대로 무력으로 표현되었는데 비하여 요즘은 이것이 돈이나 영화나 오락같은 평화의 방법으로 바뀐 것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속에 있는 그 동물적인 본성을 정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힘만 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에 맞게 사는 것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린 모두 특수임무를 맡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와 싸우는 동안 우리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죄와 싸우지 않고 죄와 타협한다면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의 마음은 문이 다 떨어져나간 성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쳐들어 와서 차지하기만 하면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지 않은 게임을 하지 않기 위하여 영적인 싸움을 합니까? 청소년들은 좋지 못한 노래나 이야기들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합니까? 청년들이나 어른들은 영혼을 병들게 하는 불건전한 영화나 텔레비젼 드라마로부터 자신이나 자기 자족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을 합니까? 사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눈으로 보는 것이나 머리로 생각하는 것 정도는 전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세대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협.

 

만일 여러분의 집 주위에 지존파같은 악한 자들이 살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경찰에 신고해야 겠지요. 그러나 경찰이 없는 곳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 그들과 잘 지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과 협정을 맺어서 서로 해치지 않게 한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협정을맺었습니다.

5,6,\"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옛날의 결혼은 요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결혼은 아주 중요한 거래 수단이었고 특히 부족간의 전쟁의 예방하기 위한 평화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갈등하고 있는 두 부족이 평화로우려면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 불교와 천주교 사이는 관계가 아주 좋은 것 처럼 보입니다. 법당에 김 수환 추기경이 가서 인사말씀을 하고 또 명당 성당에 법정 스님이 와서 강의를 합니다. 서로 이렇게 해 버리면 그 뒤부터는 싸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 두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내 싸워야 했습니다. 사자도 사냥을 해 봐야 짐승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내내 우리 안에서 자란 사자는야수성이 없어서 늑대가 소리를 지르면 도망을 칩니다. 사자라고 해서 사냥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자도 온갖 힘을 다 해야 노루나 산양을 잡을 수가 있지 전혀 연습하지 않으면 사냥질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혼 관계나 혹은 상대방의 제사에 참석해서 절을 함으로 그들과의 갈등을 없애버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비상벨이 계속 울린다고 해서 비상벨을 꺼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상벨은 귀찮아도 켜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도둑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상벨이 자꾸 울린다고 해서 귀찮아서 꺼버리면 도둑은 마음 놓고 물건을 훔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 크리ㅅ챤 젊은이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투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투의욕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죄를 보면 본능적으로 싸우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유혹을 하려고 하면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전투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재미없는 인생입니까? 그래서 어느 한 순간부터 그런 전투 자세를 풀어버립니다. 그러면 그때 부터는 마음 놓고 마귀가 내 생각이나 나의 삶 속에 둥지를 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까운 적과 화친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생각지도 않은 외부에서 찾아 왔습니다.

7,8,\"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와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

여기의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이라고 했는데 \'구산 리사다임\'은 별명입니다. \'배나 악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메소보다미아 왕이 가나안 사람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서 그들과 협상을 하고 타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곰을 피하려고 하다가 사자를 만난 격이었습니다.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은 가나안 사람들보다 배나 악한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 편하게 살려고 하다가 정말 임자를 만난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편하게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만일 편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아예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짜 임자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싸움터를 찾아서 나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능력있고 안전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옷니엘의 구원.

 

여기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했는데 부르짖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노력한 수고의 결과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간접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나름대로 살기 위하여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렇게 썩 마음에 내킨 것은 아니지만 가나안 사람들과 화해하기 위하여 딸도 주고 그들의 제사에 가서 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전혀 엉뚱한 곳에서 구멍이 뚫린 것입니다. 엉뚱하게 메소보다미아의 왕이 쳐들어 와서 그들의 모든 행복을 다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어려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해서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것은 엄청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이 얼마나 연약하며 얼마나 간사하며 얼마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조용히 기도할 때도 있고 부르짖으면서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부르짖으면서 기도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자신의 미련함과 고집스러움에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자기 힘으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너무나도 자주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 죄에 빠지고 또 실패한 자기 자신을 보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슴이 아플 때가 언제입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에 빠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미련해져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만 잔뜩해버린 것입니다. 그때는 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여러 교회를 돌면서 설교를 해 보면 확실히 IMF 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 때 마다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들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는 이 세상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줄 알고 세상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 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리해고\'입니다. 세상에 속은 것은 그렇게 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다시 흐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아무리 애통한다고 해도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애통이 진정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외부에서 구원자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메소보다미아 보다 더 강한 다른 나라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도와주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한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케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그 능력을 잃어버렸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특별한 일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백성 중 한 사람 옷니엘에게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10,\"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옷니엘에게 부으셨습니다. 옷니엘은 물론 젊었을 때 대단히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기럇 세벨을 쳐서 빼앗음으로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한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아마도 대단히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를 받으면서 묵묵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에게 부어졌을 때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옷니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자같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술입니다. 술은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랑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아주 내성적인 사람도 술을 마시면 소리를 지르면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을 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도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평범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보통 때 너무나도 소심했던 사람도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면 평소에 상상할 수 없었던 결단과 용기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양처럼 조용하고 얌전했던 사람이 성령이 임하시면 사자가 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택하셨을까요? 역시 그는 가나안 전쟁에 참여했던 자로서 가나안 전쟁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초기 가나안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만일 그들의 동기가 바르기만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젊고 패기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미 은퇴한 옷니엘같은 늙은 자를 들어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까? 지금 현역 중에도 동작이 민첩하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왜 예비군을 재기용하시는 것입니까? 역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자꾸 새로운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더 참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악기나 새로운 예배 방식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 은퇴한 옷니엘같은 사람을 통하여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한 것과 옷니엘이 자기 자신의 어떤 이념이나 신념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사람이 성령에 감동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믿는 신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 전쟁에서 싸우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종의 심리전법과 같은 것이지요.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도망을 치다가 군사들이 너무나도 목말라 하니까 군사들에게 저 산만 넘으면 과일밭이 있다고 자극을 주고 군사들로 하여금 산을 섬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을 하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는 것과 자기 신념으로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신념으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것에 통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어느 정도 자극을 받고 정신을 통일시키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신념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나라 경제 전체가 무너질 때에는 신념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신념은 자꾸 최면을 걸어서 일을 벌리게 만듭니다. 하나가 되면 그 다음에 또 같은 방식으로 일을 벌려서 나중에는 배보다 배꼽을 더 커지게 됩니다. 일종의 마약과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소보다미아 군대와 싸운다고 하는 것은 정신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가나안 족속들과도 타협할 정도로 약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한번 순종하니까 상황은 달라지게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 힘이 아닌 힘이 그들을 돕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머리로는 계산이 되지 않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움직일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11,\"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편하게 살려고 할 때에는 단 하루도 편할 때가 없었는데 오히려 옷니엘의 말을 듣고 싸웠더니 그들에게는 놀라운 팡화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무려 사십년 동안이나 태평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전쟁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싸우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전쟁을 치룰 때에만 자신의 삶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투쟁이 싫어서 세상과 타협할 때에는 오히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데서 어려움이 찾아 오는데 \'배나 지독한 것\'이 찾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악한 가치관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동물적인 본성은 이미 이 세상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들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건의 굴레로 스스로를 잡아 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복되게 사는 길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풀어 놓으면 결과는 패망입니다. 경건의 굴레를 잡아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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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장애인 사사 에훗

   3:12-30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 가수 대상을 받은 여자 가수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는 미스 이탈리아로 뽑히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나중까지 그가 맹인인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무대 위에서 그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의 자세가 자연스러운지 아닌지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무대 밑에서 작은 무전기로 알려준다고 합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누군가가 금메달을 따면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애인 올림픽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체적인 장애를 딛고 일어서서 몸이 성한 사람 못지 않게 달리기도 하고 수영도 하며 운동도 하는 장애인 경기가 누가 더 최고냐 하는 것보다 더 값진 열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단순히 신체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에 더 도움을 받아야 하고 관심을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아예 사람 자체가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려 십팔년 동안이나 모압 왕의 지배를 받아왔는데 하나님께서 하루 사이에 놀라운 구원을 베푸셔서 악한 자들을 몰아내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을 베푸시는데 사용한 사람은 한 손을 전혀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1. 신앙의 싸이클.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것이 우연이나 다른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12-14,\"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케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왕 에글론을 십팔년을 섬기니라\"

우리가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싸이클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주기는 주로 몇십년이나 아니면 한 백년에 걸쳐서 신앙이 최고의 지점에서 최조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회복되는 과정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맛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그러나 생활이 좀 편해지고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점차 신앙의 열기를 떨어져서 나중에는 우상을 숭배하고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주위의 다른 민족의 압제하에 두셔서 고생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생 가운데 마음이 가난하여져서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통하여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주기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흔히 본 신앙의 주기는 냉소적인 신앙의 주기입니다. 처음 청년 때 열심히 믿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거나 혹은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고는 신앙이 냉소적이 되어버립니다. 믿기는 하지만 열정이나 뜨거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타협해서 살면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덕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데 그때 보니까 인생의 밑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기는 하지만 이미 나이가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새로운 주기로 바꾸려고 합니다. 즉 젊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융단폭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해라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젊어서 거의 폐인의 상태에 빠질 정도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내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사기에서 보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신앙의 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신앙의 주기입니다. 공동체의 신앙의 주기는 몇십년 혹은 대략 백년에 걸쳐서 최고의 지점에서 최저 바닥 사이를 왕래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대략 백년을 주기로 부흥과 침체의 시기가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영국 교회 사람들은 백년 주기로 부흥이 찾아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처음 복음이 증거되면 사람들은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말씀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편해지고 여유가 있으면 신앙이 간절해지지 않고 신앙은 일종의 여가 선용처럼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벌써 그들의 삶 가운데 세상적인 방식이 마구 파고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싸워도 말씀대로 살 수 있을지 말지인데 여유를 부리면 당연히 세상적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껍데기만 남고 속에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생활을 어렵게 하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시고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서 다시 부흥이 찾아오게 됩니다. 요즘은 바로 그런 부흥의 시기입니다. 옛날에는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회 안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물에 빠졌을 때에는 아무 배나 올라타면 생명은 건진 것입니다. 그러나 배 자체가 가라앉고 있으면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 배가 안전한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모압 왕 에글론은 군사들을 몰고 이스라엘에 쳐들어 와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했습니다. 여기서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하는 것은 여리고를 말합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영원히 심판하는 의미로 처음 멸망시킨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 여리고를 멸망시킨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악한 세력이 그곳에 사령부를 두고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악을 승리한 기념의 장소인 여리고가 다시 악의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구원자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벤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무엇보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으면서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무려 십팔년 동안이나 그들의 입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이 가나안 땅에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없이는 이 악한 세상에서 잠시도 승리 생활할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려 십팔년 동안이나 자기 힘으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비겁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게되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버텨 온 것이 완전히 허세요 고집이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제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은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왼손잡이\'는 의역입니다. 직역을 하면 \'오른손이 묶여 있는\'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오른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을 말합니다. 원래 벤냐민 지파에는 왼손잡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왼손잡이들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더 잘쓰는 왼손잡이들입니다. 그러나 에훗은 오른손을 쓸 수 없어서 왼손잡이가 된 사람이었고 아마 그의 오른손을 표시나게 불구였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냥 달려 있기만 했든지 아니면 조막손 같이 되어 있어서 누구 보아도 장애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에글론이 에훗을 의심하지 않고 혼자서 만났던 것입니다.

벤냐민 사람들은 에훗으로 하여금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들은 모두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훗같은 장애인이 공물을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에훗에게 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에훗에게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에훗은 평소와 다름없이 공물을 준비해서 에글론에게 바쳤습니다. 그 대신 그는 아주 짧은 양날이 선 칼 하나를 준비해서 옷 안에 우편 다리에 잡아 매었습니다. 16,17,\"에훗이 장이 한 규빗되는 좌우에 날 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여기서 \'비둔하다\'고 하는 것은 뚱뚱하게 살이 쪘다는 말도 되지만 엄청나게 거구였다는 뜻도 됩니다. 아마도 에글론은 아주 거구였고 힘에 센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훗은 먼저 조공을 바쳤습니다. 물론 이 조공이 에글론의 마음을 기쁘게 했을 것이며 그의 부하들의 마음도 즐겁게 했을 것입니다.

18,19,\"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를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여기서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이라고 하는 것은 돌을 캐어내는 채석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돌로 새긴 우상의 의미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여기서 돌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전역에 세워져 있는 바알의 우상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만들어져서 공급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곳에는 이런 바알의 돌 우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들에 의하여 정복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창살이었습니다. 한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헌신을 다짐했던 길갈 부근이 이제는 우상을 깍아서 공급하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집에 아직도 남아 있는 술병이나 혹은 음란한 책이나 잡지는 그들의 영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지금 그들의 영혼을 별 것 아닌 것들에 매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훗은 돌아가는 것처럼 하다가 혼자 에글론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모압 왕에서 은밀한 일을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에글론은 전적으로 에훗을 믿고 주위를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아마도 그는 에훗이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인데다 비무장이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단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에훗이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정보를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동태에 보고라든지 혹은 다른 특별한 중요한 정보를 주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그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기 동족을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에글론의 군대는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믿지는 않았을 것이며 에글론 자신에게만 무슨 또 특별한 혜택을 쥐기 위해서 일대일로 만나려고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뭏튼 조금 전에 준 공물이 그들의 경계심을 상당히 풀어 놓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20-22,\"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칼자루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에 엉기었더라\"

성경 본문은 에훗이 어떻게 모압왕 에글론을 죽였는지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한 이유는 에훗이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에훗이 에글론을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아무리 장애인이고 불리한 입장에 있다 하여도 지혜를 잘 사용하고 기회만 잡으면 능히 원수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렇게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훗은 좌우가 다 물러 갔을 때 자기가 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가 무엇을 줄까 기대하고 있을 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나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에글론은 어떤 비밀 정보를 주려고 하나 혹은 다른 무슨 선물을 내어 놓으려고 하나 기대하고 있는데 에훗은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에글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에글론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훗이 자기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돌변하기 때문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선 것입니다. 에훗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왼손으로 오른쪽 다리에 매였던 칼을 빼어서 에글론의 배를 찔렀습니다. 그가 얼마나 세게 찔렀든지 에훗은 두 번 찌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칼 자루가 칼 날을 따라 배안으로 들어가서 칼날이 등 뒤까지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칼이 등 뒤로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파라쉬돈나\' \'그것이 뒤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칼이 등으로 나온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그가 놀라서 항문으로 배설을 한 것을 말하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배설로 보는 것은 뒤에 나중에 신하들이 금방 문을 열지 못한 것과 관계가 있게 됩니다.

에글론 같은 장사가 그것도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의 손에 그것도 단 한번의 칼에 찔려서 몸에 칼이 박혀 있었다는 것은 죽음 이상의 치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높여서 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탄압해서 스스를 즐기는 자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치욕을 안겨다 주십니다.

24,\"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가로되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운다 하고\"

여기서 발을 가린다고 하는 것은 왕에서 사용하는 완곡 표현입니다. 대개 두가지 경우에 발을 가린다고 하는데 하나는 대변을 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낮잠을 자는 경우입니다. 그런 때는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문을 잠그거나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여기서 발을 가리운다고 하는 것은 대변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에글론의 몸에서 나온 변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뒤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가 항문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에훗이 칼로 에글론의 배를 찌를 때 에글론은 너무 놀라기고 하고 또 힘을 쓴 결과 대변이 나왔는데 결국 그 냄새 때문에 신하들이 문을 열지 못하고 밖에서 계속 기다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그렇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군에서는 비행기 공중 충돌도 기적에 속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에서 열가지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비행기 사고는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좋지 못한 우연한 일들이 다 맞아 떨어져야 비행기 공중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에훗이 에글론을 죽이는 것을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그렇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아마 에훗이 말할 때 에글론이 계속 앉아 있었더라면 그렇게 힘껏 찌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묘하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비껴 주었고 심지어는 냄새 까지도 에훗의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힘이 세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도저히 사람의 머리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나의 일처럼 연결되어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3. 다시 일어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에훗으로 하여금 에글론을 제거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26-29,\"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 하니라.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인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 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이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 편 요단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그때에 모압 사람 일만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에훗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저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무려 십팔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아 왔다면 그들은 완전히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다 빼앗아 놓은 예루살렘도 차지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에글론같은 자들을 상대해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죽지나 않고 살면 다행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해서 공물을 바치는 가장 치욕스러운 일을 맡겨 놓았던 에훗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행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 주었을 때 그들은 정말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일어서라\' 그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어 설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의 능력없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 본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훗의 말을 듣고 일어 섰을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 내었습니다. 마치 모압의 장수들은 그물 안에 든 물고기와 같았습니다. 요단강 나룻턱을 지키니까 한 명도 도망가지 못하고 용사들이 일만명이나 잡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적으로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타협했을 때 결국 노예 생활밖에 더 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싸우기록 작정했을 때 무려 일만명이나 되는 모압 용사들을 죽였고 팔십 년 동안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 세상적인 것으로 자기를 무장하려고 하면서 세상을 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의 생명력을 잃고 실컷 하는 것이 남좋은 일 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실컷 농사를 지어서 하는 것이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뼈 빠지게 노력을 했는데도 아무 열매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일에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부르짖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긴 시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비만하고 자신만만한 에글론을 한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에훗의 손에 비참하게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데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볼품없는 장애인이었고 외국인에데 공물이나 바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에훗에게도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그 정신적인 물질적인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에훗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옛날의 시각을 가지고 보면 노예의 자격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비참한 임무를 잘 맡아서 감당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잘 감당했을 때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침체되어 집에 누워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성한 몸을 가지고서 학벌이나 내세우면서 자존심이나 내세우면서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그 비참한 일도 기꺼이 했던 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임무가 주어졌고 그는 결국 감당을 해 내었습니다. 에훗은 알았을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렇게 정확하게 모압 사람들이 다 함께 실수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했으면 냄새까지 에훗의 편이었겠습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연들이 모여서 큰 승리를 이루기도 하고 큰 실패를 이루기도 합니다. 승리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도저히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데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실패한 사람들의 말도 들으보면 어떻게 이렇게 우연의 일치가 일어나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실패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교만했던 에글론은 가장 약한 자의 손에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칼이 꼽힌 채로 몸에는 더러운 오물로 뒤덮인 채로 죽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약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아무도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을 쳐다 보면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할지 몰라도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기적은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이 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홋을 따라 움직였더니 모압 사람들은 그물에 든 고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단 나룻턱만 잡고 있으니까 저절로 일만명의 군사를 사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팔십년 동안이나 교회는 평안했습니다. 타협하는 자는 결국 노예가 될 것입니다. 무리인줄 알면서도 싸우는 자는 오래 오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비웃고 업신 여길지라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에훗 같은 장애인입니다. 에훗도 좋아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것입니다. 지금은 낮아져 있을 때이며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세게 에글론의 배를 찔렀든지 자루까지 칼을 따라서 들어 가버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는 한 순간이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침체되어 있으면 안됩니다. 무려 십팔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만 살아 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영광스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안된다고 하면서 주저 앉아 있다면 일어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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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농부 출신 사사 삼갈

   3:31  

 

 

얼마 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어업 협정을 파기함으로 우리 나라와 외교적인 긴장 상태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과 우리 나라는 오랜 민족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강제 징용 당한 사람들이나 혹은 정신대 문제를 비롯해서 현재 독도 문제에 이르기까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측에서는 독도에 배의 접안 시설을 밀어 뭍이기 식으로 하고 있지만 만일 일본과 우리 나라가 실력으로 맞붙게 된다면 우리 나라의 국력이나 군사력은 일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일본이 아직 군국주의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만일 일본이 이 국력이나 군사력을 가지고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우리 나라는 아주 큰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 한 때 우리 나라의 한 수군 장수가 거의 형편없는 그런 수준의 장비와 군사력을 가지고 일본 왜구들을 침략을 완전히 봉쇄해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가져 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신 장군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과 우리의 싸움은 군사력이나 장비의 대결이전에 정신력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만 한다면 적어도 일본의 침략을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이 이 순신 장군이 우리 의식 속에 남겨 놓은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일본이라고 하면 이길 수 있고 또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언제나 그들의 숨통을 죄고 있는 무서운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적은 바로 블레셋 족속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의 운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대 블레셋 관계의 초기에 삼갈이라고 하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농사를 짓던 중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을 본 것 같습니다. 그는 농사를 짓던 중에 농기구를 들고 가서 그 자리에서 블레셋 사람들 육백 명을 쳐죽여 버렸습니다. 이 한가지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강하고 이스라엘이 또 약하다 하더라도 믿음 하나만 있으면 적어도 블레셋 사람들만큼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젼 프로를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중요한 사건이 터지면 어떻게 합니까? 화면 밑에 있는 자막을 통해서 긴급 뉴스 속보를 알려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캄보디아로 향하던 베트남 항공 소속 여객기가 비행장에 착륙하기 직전에 근처에 있던 논바다에 추락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비행기 안에는 캄보디아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가정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텔레비젼 자막에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프놈펜 부근에서 베트남 항공 소속 여객기 추락. 주위에 있는 농부들이 어린아이 한 명을 구조하였음\"

우리는 사사기에서 이런 뉴스 속보를 접하게 됩니다.

\"에훗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대의 위기 발생. 다수의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어느 동네를 기습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였음. 그런데 현장 주위에서 소로 밭일을 하던 삼갈이라는 농부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기에서 구출하였음. 상세한 보도는 다음 뉴스 시간에 보도하겠음\"

그런데 문제는 다음 뉴스 시간에도 삼갈의 이야기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 이 간단한 자막으로 삼갈의 활동은 끝나고 맙니다. 더 이상 그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갈은 어떤 사람이며 왜 성경 저자는 삼갈의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간단하고 언급하고 마는 것입니까?

 

1.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갈.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1,\"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비록 오늘 본문은 짧은 본문이지만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격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지속적으로 가장 무서운 원수는 블레셋 족속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변의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블레셋 족속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변길로 가려고 하면 이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치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삼손이 등장했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완전히 블레셋의 식민지가 되어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거의 구별없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과 싸우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삼손을 묶어서 넘겨 줄 정도로 블레셋화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는 블레셋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는 큰 패배를 겪었고 실로의 성막이 불타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때에는 블레셋과 싸우다가 사울왕과 두 아들 이렇게 삼부자가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는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겨우 블레셋을 이기게 되는 것은 다윗이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꺾으면서 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이라는 족속들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무서운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삼갈의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블레셋과의 관계는 힘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강력한 적을 삼갈이라는 자는 평범한 농부로서 무기도 아닌 농사짓는 농기구로 육백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기에서 건져내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해내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로 정신력의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는 삼갈이라는 사람의 정체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갈을 아낫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낫의 아들\' 이라고 할 때 \'아낫\'은 가나안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삼갈을 이방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삼갈의 부모가 대단히 이방화하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믿는 집의 아이들 중에서는 예수님의 \'\'자나 하나님의 \'\'자 또는 은혜의 \'\'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그 부모가 신앙이 깊은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고 이 아이는 하나님의 아이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방식으로 이름을 짓겠다는 뜻이 나타나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이름이 \'천룡\'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외할머니는 무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이름을 따서 \'천룡\'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삼갈이 \'아낫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삼갈의 부모는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가나안 종교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아낫 여신에게 바쳤다는 뜻으로 \'아낫의 아들\'이라고 지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아낫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삼갈의 아버지가 아낫이라는 뜻보다는 \'아낫의 아들\'이라는 것 자체가 삼갈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통 신학의 견지에서 본다면 삼갈은 좀 이방적인 색체가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추측이 옳다면 삼갈의 부모는 아낫 여신에게 빠진 자이며 삼갈 자신도 어쩌면 결코 정통 신학으로 무장된 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통신학으로 무장된 자들은 블레셋의 침략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있는 가운데 신앙적인 사생아라고 볼 수 있는 삼갈은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들을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통 신학이 성령을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정통 신학을 가진 자라고 해서 역사하고 신학적인 지식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는 신학적인 정통성이나 지식과는 상관없이 성령을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통 신학을 가지고 신학 논쟁이나 벌이는 자보다는 좀 무식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으시기를 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정통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장로교 보다는 은사를 뜨겁게 사모하는 순복음 교회에 더 큰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질투심\'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으며 얼마나 많은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사탄의 역사를 이기고 승리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가 사용한 무기입니다. 그가 사용한 \'소모는 막대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모는 막대기가 한쪽 끝은 뾰쪽하게 되어 있어서 소 등에 붙어 있는 더러운 것을 긁어주는 막대기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소가 뒤에서 끄는 쟁기의 일종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제가 추측하기에 삼갈은 농사짓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당시에 목축을 하는 사람 중에 소만 전문적으로 키우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소는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를 수십 마리씩 방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삼갈은 소를 사용해서 밭을 갈던 농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가 사용하는 소모는 막대기도 쟁기같은 농기구의 일종로 추측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삼갈은 정식 군인이 아니었고 그가 사용한 무기도 칼이나 창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는 밭을 갈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살육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 같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성령에 충만하여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는데 블레셋 사람들을 육백명이나 죽이는 엄청난 승리는 거두었고 그 후 블레셋 사람들은 삼갈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을 먹을 정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오늘 본문의 기록이 이렇게 짧은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에훗의 구원은 너무나도 상세한 현장 묘사로 약간 기분이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성경 기자는 에훗이 비둔한 에글론의 배를 찌른 사정을 너무나도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갈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한 자막 외에는 전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삼갈의 구원이 이 한번으로 그친 것을 의미합니다. 삼갈은 단 한 번만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기 전 삼갈은 평범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 삼갈은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함을 입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순간 삼갈은 더 이상 이전의 삼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사자로 돌변했습니다. 한 자리에서 육백명의 블레셋 사람을 쳐죽일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후 삼갈은 다시 예전의 평범한 삼갈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는 도대체 자기가 무슨 정신으로 그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삼갈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삼갈은 단회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더 이상 기록한 것이 없어서 이렇게 기록이 간단한 것입니다.

 

2. 예표로서의 삼갈.

 

우리는 성경에 어떤 기록이 있을 때 그것이 아무 이유없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확실히 삼갈의 기록은 간단하지만 무엇인가 앞으로 있을 일에 대비하여 한 예표로서 기록된 것입니다.

삼갈이 블레셋 사람들이 육백명을 죽였다고 하지만 이것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모두 다 몰아 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앞으로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의 좋지 않은 관계의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하나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블레셋과의 싸움은 사람의 수나 무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이기려면 무기나 군사력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반드시 믿음으로 나가야 이긴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만 하면 소모는 막대기만으로도 얼마든지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갈은 이 후에 나타날 구원자 삼손의 예표가 됩니다.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육백명을 죽인 것은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과연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천명을 죽이는 일을 행했습니다. 삼손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삼갈은 평생 성령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 한번 성령의 감동을 받았고 단 한번의 성령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평범한 삼갈로 돌아왔습니다.

삼갈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절로 되어 있지만 이 한 절의 기록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위기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승리의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삼갈의 기록과 같은 아름다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찾아 주신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위기 때마다 승리하게 하는 이정표입니다. 오늘과 옛날의 여건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모든 형편이 과거보다는 나은데 왜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그것은 믿음이 쇠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마음이 은혜로 채워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 어려움 가운데 승리할 수 있게 하시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자기가 그 동안 붙들고 있었던 세상적인 것들을 다 버리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삼갈의 능력은 단회적으로 끝났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삼갈이 그 후에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단지 삼갈은 단 한번 하나님께 사용되고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실입니다. 청교도 시대에 스코틀랜드에 존 리빙스톤이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지만 능력이 있는 설교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강단에 섰을 때 성령이 그를 붙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에는 불이 있었고 확신이 있었으며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단 한번의 설교로 그 교회에는 오백 명의 교인이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존 리빙스톤의 생애에 그런 능력있는 설교는 단 한번으로 끝났습니다. 그 이후 그는 다시 그렇게 능력있는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거저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성령이 어떤 분이시실래 사람을 이토록 놀랍게 사용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 분은 우리가 붙들어 둘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귀한데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나버리시면 그때부터 그는 옛날의 그 연약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바로 성령, 이 분에게로 솔려야 합니다. 성령, 이 분은 한 순간에 사람을 뒤집어 놓는 분이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농사군 삼갈을 엄청난 장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다시 평범한 농삿군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함께만 역사하시느냐 아니면 말씀없이도 역사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씀없이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죄가 생각나서 통곡하면서 기도하게 될 때도 있고 혹은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혀서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게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말씀없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은사 운동이라도 부릅니다. 물론 은사 운동이라고 해서 말씀이나 설교가 전혀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입니다. 대개 이런 은사 운동은 오랫 동안 영적으로 메말랐던 곳에 직접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킵니다. 말씀을 오랫 동안 듣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병들대로 병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인가 직접적인 능력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 계시지 않으냐 하는 것이며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느냐 아니면 미워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병든 자가 벌떡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과연 성경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 운동을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때로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소멸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나타나는 역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말씀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 속에 말씀이 파고 들어가서 죄가 무엇인지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는지 말로 깨닫게 합니다. 병자가 일어난다거나 혹은 어떤 특별한 체험같은 것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능력있게 말씀을 증거하시면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죄의식이 일어나며 온 영혼이 죄로 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할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이며 은사 운동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의 역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의 역사가 비교적 지속적인 것입니다. 은사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운동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삼갈의 구원은 일종의 은사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과 상관없이 일시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기에서 직접 구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회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일 후의 삼갈은 이전의 평범한 삼갈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없이 어떤 특별한 능력과 기사가 나타날 때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대단히 황폐한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거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직접적인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은 일종의 페니실린 효과와 같습니다. 일단 급하게 조치를 해서 죽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나 은사는 말씀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며 곧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3. 블레셋의 정체.

 

오늘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은 어떤 족속이며 왜 블레셋 족속은 이스라엘과 영원토록 원수일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족속은 가나안 원주민 출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크레타 섬에서 이주한 이주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크레타 섬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지만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무식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은 거의 그리스의 도시국가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블레셋은 다섯 도시 국가로 되어 있는데 정치나 외교는 독자적이면서도 종교나 전쟁은 힘을 합쳐서 하는 대단히 근대적인 정치의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자들이었고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요즘 그 그리스의 정신이 살아 남아 있는 것이 올림픽 게임입니다. 올림픽 경기는 올림포스 산에서부터 성화를 채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올림포스 산이 무엇입니까? 그리스의 신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요. 그 신들은 대단히 인간적인 신들입니다. 올림픽은 대단히 인간적인 게임입니다. 요즘은 상업성까지 가세해서 더욱 인본주의적인 게임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돈 버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인간의 위대함을 신앙으로 삼는 나라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다곤이라고 해서 물고기 신을 섬기고 있었지만 결국 그 다곤 제전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운동 경기나 축제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매력이 없는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 때문에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 때문에 전쟁도 제대로 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 저기에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인간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라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단지 죄라면 배우지 못한 것이며 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좋은 여건만 주어지고 힘을 합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었습니다. 신본주의 이스라엘의 가장 무서운 원수는 바로 인본주의 사상이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다른데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도둑질을 한 사람이나 심지어는 더러운 창녀짓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관대합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분노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갈면서 덤벼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본주의 앞에서는 인간은 설 곳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고 죄로 모든 인간들을 묶어 버리는 이런 신앙인들을 보면 증오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시간에 물건이라도 하나 더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할 것이 아니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좌우간 인본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그렇게 아까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상의 차이 때문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영원히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약한 부분을 감싸주고 실패한 부분을 격려해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이 당시 직접 그 곳에 살았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 방식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납득이 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 방식이 하나님에 매여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답답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시며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죄가 단순한 실수나 무지나 부족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며 결국 이 죄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이나 능력을 다 부인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은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안의 어떤 것입니까? 바로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기는 하지만 인간의 능력을 믿는 기독교입니다.

신앙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고 격려해주면서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죄를 설교하고 자기 모든 욕심을 버리라고 설교하면 견디지 못하는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블레셋적인 기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인간의 가능성을 추켜 세워주고 격려해주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미어 터질 정도로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죄를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할 수 있는 자들은 종교의 노예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적인 시각에서는 블레셋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러나 그것으로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감기를 앓듯이 눈물 한번 흘리고 나면 끝나는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모든 것을 다 버려야 겨우 영혼을 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공동체를 말씀으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운동이 바로 이런 공동체 운동이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평범한 것이 얼마나 힘이 있고 중요한지 모릅니다. 더욱이 교회가 보편적인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유별나게 믿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자 만이 오래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언젠가는 크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신실한 신앙의 공동체를 세우고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신화를 버리고 평범한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흘러나오는 샘입니다.

이 세상과의 싸움은 우리의 무기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에 있고 성령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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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주부 출신 사사 드보라

   4:1-10  

 

 

남자들은 군대에 입대하면서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생으로서 그의 무한대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며 살았고 또 이제는 거의 성인의 대열에 끼어서 자신의 의사도 표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에 입대함으로서 그 모든 자유나 특권은 다 상실해 버리고 오직 다른 사람의 명령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위치에 전락하고 맙니다. 그때 가장 혼동되는 것이 과연 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하는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경우에는 이런 정체성의 혼란이 남자보다 더 길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계나 잃고 오직 한 남자에 예속되어 그 남자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결혼한 후 아이를 낳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이 중심으로 모든 삶을 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자에게는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가정 좋은 길이 나름대로의 직장을 가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입도 남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수입을 가지고 자기 할 일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찾는 길이라고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시하고 싶은 질문은 과연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 반드시 그런 것 밖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난 후 찾아 온 최대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북쪽 평지인 하솔에 본부를 두고 있는 하솔 왕 야빈과 그의 군대가 아주 심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야빈은 철 병거 구백승과 또 시스라라고 하는 아주 강한 군대 장관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이 세상에서 멸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의 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최대의 위기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낸 것은 놀랍게도 드보라라고 하는 평범한 주부 출신의 여 사사였습니다. 드보라는 여자라는 점 외에도 다른 사사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사들은 직접 자기 자신이 칼을 빼어 들고 적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여자였기 때문에 직접 나가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으로 잠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웠고 그들로 하여금 나가서 원수들과 싸우게 했습니다. 그 결과는 대승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드보라는 바로 오늘 교회의 목회의 원리는 누구보다 잘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이 어렵다고 해서 돈을 빌려주거나 혹은 그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직접 영어나 수학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울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고 나가서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직접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챤 여성들에게서 기대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자극하여 영적인 전쟁을 싸우게 하는데 크리스챤 자매들의 미덕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고질병.

 

우리는 보통 \'고질병\'이라고 할 때 쉽게 낫지 않어서 그 사람을 두고 두고 괴롭히는 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어서 어떤 사람이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두고 두고 실패하고 넘어지는 문제를 그 사람의 \'고질병\'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1,\"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고질병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성경은 어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목전에 또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이든지 그 사람에게는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술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은 계속 술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름 때문에 집에 큰 손실을 주고서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까지 한 후 또 자기도 모르게 노름에 빠져드는 것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돈을 빌려서 탕진하는 바람에 큰 고생을 한 후에도 또 남의 돈을 빌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자 문제로 큰 난리를 치고 난 후 또 여자 문제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그 사람의 고질병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고질병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요? 무엇인가 같은 문제에 반복해서 빠지는 사람은 그 안에 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점잖은 것처럼 행동을 하지만 그 사람 안에는 전혀 자라지 못한 아주 유지한 본성이 있고 결국 그 유치한 본성 때문에 작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반복적으로 같은 문제에 빠져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유치한 부분을 꺼내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고 그것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공개적으로 싸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고질병은 절대로 치료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고질병이 아니고 교회의 고질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치료받지 않으면 안되는 고질병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랫 동안 말씀을 듣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고질병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어야 영성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없이 믿으면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데 그것이야말로 바로 자기 열심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분노로 그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성은 거칠고 그 안에는 우상이나 미신이 많고 자기의 의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두 다 이스라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역사가 흐름에 따라 정말 말씀의 은혜를 모르고 거저 형식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나타내는 특성이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변화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그 대신 예배 안에 우상적인 요소를 많이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과격하고 거칠 수가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는 자는 말씀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는 도저히 은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이 많이 들어오게 됩니다. 필요하지 않는 장엄한 의식들이 들어오고 건물을 화려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전통과 관습을 만들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 마저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노력은 많이 하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먹힌 담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솔의 야빈 같은 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끈질기게 해야 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자의 양심에 도전해서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일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지없이 똑같은 문제에 빠져 들 곤했습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가장 편안하고 능력있게 사는 길입니다.

 

2. 가나안 왕 야빈.

 

하나님께서는 고질병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솔에 도읍을 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맡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게 하셨습니다.

2,3,\"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여호수아가 북쪽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가장 강력한 적은 하솔왕 야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심히 박해하고 그것도 모지라서 이스라엘을 아예 멸절시키려고 한 왕도 하솔에 도읍을 한 야빈이라는 왕이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야빈이라는 이름 자체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직책명이든지 아니면 지금의 야빈이 옛날 야빈의 후계자를 자처하여 그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야빈이라는 자는 막대한 힘을 가진 자였습니다. 철병거가 구백승이나 있었습니다. 철병거 구백승이라고 하는 것은 변변한 무기 조차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공할만한 무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그들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야빈은 이 무력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심히 학대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이스라엘의 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약한 정도가 대적하는 것입니다. 대적한다고 하는 것은 관계가 좋지 못하고 여차하면 언제든지 전쟁 상태로 돌입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좀 높은 단계가 \'억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억압한다\'고 하는 것은 무력으로 지배해서 공물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압 왕 에글론이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좀 더 높은 것이 \'학대\'하는 것입니다. 야빈과 시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것인데 이것은 수시로 철병거를 끌고 와서 약탈하고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여자도 빼앗아 가고 곡식도 빼앗아 가고 가축들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은 \'멸절\'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한 명도 남겨두지 아니하고 싹쓸이 하려고 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대받는 단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드보라의 말씀을 들고 일어섰을 때 \'멸절\'의 단계에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핍박의 강도에 따라서 기도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을 때에는 기도가 \'유감의 표명\' 정도가 그칩니다. 주위의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유감스럽게 느끼고 기분이 좋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거나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단계는 아닙니다.

단지 약간 긴장하고 있을 뿐이며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주위에 있는 민족들이 억압을 해서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게 하면 그때부터 기도는 \'신세를 한탄\'하는 기도로 바뀌게 됩니다. 기도 모임에 부쩍 사람이 많아지게 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답답하고 억울하니까 하나님께 하소연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민족들이 \'학대\'를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금식을 할 때도 있는데 사실 화가 나서 금식을 하는 것은 옳은 금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금식은 내가 이 어려운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능하고 힘이 없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도움을 간청하는 것이 금식의 원래 의미입니다.

그러나 \'멸절\'의 단계에 가면 정말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됩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다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좀 더 시간을 드리고 끝까지 믿음으로 지켜 보기를 원하십니다. 대개 멸절의 단계에 오면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멸망할 때가 다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빈이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히 학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심한 고통은 그들이 지금까지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의지하며 바라보는 기회가 되게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이들이 부르짖으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화가 나서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신세가 억울해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신앙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언제나 이럴 수밖에 그들의 죄성에 대하여 통곡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개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안에 정말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제목이 바뀌게 됩니다. 처음에는 \'왜 나만 이렇게 어려운가?\'하는데서 나중에는 \'왜 나는 이렇게 믿음이 없는가?\' 혹은 \'왜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이런 죄를 반복해서 지을 수밖에 없는가?\'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시간이 다 된 것입니다.

 

3. 여 사사 드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토록 어려울 때 대비하여 준비한 사람은 평범한 주부 출신 여사사였습니다.

4,5,\"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의 아내였는데 성령이 임함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한 사사가 되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의 아내된 여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되게 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성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은 신약의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것이 좋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자는 무엇이든지 물을 것이 있으면 조용히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묻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없다거나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그렇게 설치게 된 것인 이교들의 영향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이교들의 사원에는 거룩한 여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여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고급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으레 신전이나 사원에 가면 여사제들이 판을 치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 교회에 있는 여성도들도 마치 창녀나 되는 것처럼 함부로 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또 교회 안에서 너무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자매에게 가장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며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남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부인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드보라에게서 오늘 목회의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목회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어려움에 직접 뛰어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개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 있으면 직접 뛰어 들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으면 직접 돈을 빌려 주기도 하고 혹은 공부 때문에 힘들어 하는 학생이 있으면 불러다가 수학이나 영어도 가르쳐 주고 혹은 집을 여러 채 지어서 집 없는 사람에게 빌려주기도 하는 둥 그들의 어려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사사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옷니엘이라든지 에훗은 직접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들과 싸움으로 그들을 직접적으로 그 어려움에서 건져 내었던 사람들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회 현상에 직접 뛰어 들어서 어려운 자들에게 밥을 퍼 주면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인물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주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르치는 것이 삶이 일치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보라 종려나무\'아래서 가난한 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오직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일깨워 그들의 발로 직접 일어서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남이 다 해준 것을 얻어 먹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말씀을 듣고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서서 직접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게 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에 대하여 교회에서 직접적인 해결을 보기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사업으로 돈이 없어서 절쩔매고 있는데 돈이라고 거두어 준다면 너무나도 사랑이 많다고 하면서 감격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신 말씀만 하고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 하면 무책임하고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남이 나를 대신해서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남의 손으로 행복을 얻어먹으려고 합니까? 그러나 자기 발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이제는 자기 머리를 사용해서 믿음의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저절로 입에 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목회의 바른 원리는 말씀을 가르쳐서 본인 각자가 믿음으로 자신의 문제와 싸워서 승리는 쟁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드보라는 직접 싸우는 전사가 아니요 각자로 하여금 싸우게 하는 코취였습니다. 그는 돈도 없었고 싸울 힘도 없었습니다.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였고 아마도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오직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워서 각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존귀함과 풍성함을 되찾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중요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서 납달리와 스불론 사람 일만명을 모아서 야빈의 군대와 싸우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6,7,\"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귀함과 풍성함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락으로 하여금 이들과 싸울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드보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락은 어떠했습니까? 시스라의 철병거 부대가 너무나도 막강해 보였고 도저히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전쟁을 치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조건을 달았습니다.

8,\"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왜 갑자기 바락의 마음이 약해졌을까요? 물론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할 때 이것은 너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드보라가 함께 가야 자기가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드보라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드보라가 있어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더 단결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까 드보라 당신의 권위와 영력을 빌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서 드보라를 끌어들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드보라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9,\"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사람들은 무엇인가 더 큰 권위를 등에 업으면 하나님께서 더 잘 도와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방을 해도 부목사의 심방보다는 담임 목사의 심방을 더 원합니다. 어떤 분은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열번 심방하는 것보다 담임 목사님이 한번 심방해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하고 평신도들이 열번 기도하는 것보다는 목회자가 한번 기도해주는 것이 더 영력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은혜주실 수 있습니다.

바락이 말씀만 붙잡지 못하고 드보라라는 사람을 이 전쟁에 끌어 들였을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상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시스라를 때려죽이는 이 공은 또 다른 한 여자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실컷 전쟁은 치르지만 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지 말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인들의 경향이 말씀만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도 듣지만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고 또 머리에 손을 얹고 한번 \'세게\'(?) 기도를 해 주어야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관심과 친분 관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만 붙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것을 추가시키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만 그 축복이 나의 것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지혜와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무서운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시는데 사용하신 사람은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여선지라고 해서 혼자서 산에 올라 가서 기도하면서 수십년을 보낸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는 아무 힘이 없었지만 그 말씀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이십년의 깊은 잠에서 깨웠습니다. 이십년 동안 추운 겨울만 계속된 이 동토의 나라에 봄이 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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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이방인 여자 야엘의 승리

   4:11-24  

 

 

수년 전에 우리 나라 동해안으로 북한의 잠수정이 침투했다가 해변안에서 좌초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타고 있던 간첩들이 잠수정을 버리고 도망을 치면서 상당한 숫자가 해변 가까운데서 자살을 했습니다. 이것은 위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두 다 죽은 것처럼 해 놓고 실제 공작원들은 시간을 벌어서 북으로 도망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한 여인의 슬기로 도망한 간첩 중 하나가 체포됨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농가에 들어갔는데 여자는 수상한 차림을 보고서도 송이버섯을 따러 왔느냐고 하면서 안심을 시킨 후에 경찰에 연락을 해서 생포하게 했습니다. 그 간첩이 생포됨으로 해서 자살한 자들이 전부가 아니고 진짜 공작원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포위망을 구축해서 나머지 간첩들을 더 추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솔 왕 야빈의 부하 시스라가 철병거 구백승으로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비가 내림으로 상이 범람하게 하셔서 그들의 철병거를 쓸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시스라의 군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살육 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승리는 한 이방인 여자에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모세의 장인 호밥의 후손 부인인 야엘이라는 여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무서운 원수인 시스라를 말뚝으로 머리를 박아 숨지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의 세력에서부터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부터 이미 이방인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1. 모세의 장인 호밥의 후손들.

 

오늘 본문은 갑자기 모세의 장인 호밥 자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1,\"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 근처에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광야를 여행할 때 그들 혼자 여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십년 내내 그들과 동행한 아주 다정한 광야의 벗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겐 족속이었습니다. 원래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제사장이었는데 제대로 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위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게 이끌어 내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사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듣고 그 후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다니면 비록 지꺼기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가면 갈매기들이 계속 따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매기들이 배를 자꾸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를 따라오면 음식 찌꺼기들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갈매기들은 작은 배에 있는 외로운 망망대해에서 친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겐 족속들은 바로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풀 한포기 조차 없는 이 넓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만나를 얻어먹기도 하고 때로는 모세의 율법의 말씀을 얻어듣기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겐족속은 말하자만 복음에 있어서 구걸하는 거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일부라도 얻어듣기 위하여 그 넓은 광야를 계속 따라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을 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6 19절 이하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봅니다. 성경은 이 거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지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불리려고 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 혹은 죄인취급 당하는 자들은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하고 겨우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정규 회원이 되지 못하였고 이 괄시 저 괄시 다 당하면서 은혜의 찌꺼기를 얻어먹기 위하여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규 멤버들이 바리새인들이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 나라에서 쫓아내시고 이 은혜의 구걸자들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된 자들이 나중되고 나중된 자들이 먼저 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정류 멤버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이것이 귀한 줄 모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도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싫어하십니다. 참으로 은혜받은 자들은 더 은혜에 갈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이방인들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얻어먹기 위하여 이 불타는 사막을 끝까지 따라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겐 족속 그 중에서도 특히 여인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 겐 족속들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귀화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은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목민으로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겐 족속들은 도시 생활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변질되는 것을 싫어해서 끝까지 유목민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은 이스라엘을 동경했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맛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했습니다.

 

2. 므깃도의 전쟁.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웠던 므깃도의 전쟁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웠던 전쟁들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생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결판내는 아주 중요한 싸움이었습니다.

12-14,\"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혹이 시스라에게 고하매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구사 곧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는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에서 내려가니\"

여기서 \'다볼산\'이라고 하는 것은 므깃도에 있는 제법 높은 산을 말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 바락이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야빈의 군대를 대적할 정보가 들리기 때문에 시스라의 군대가 진압하기 위하여 기손강 쪽으로 군사를 모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결코 우연한 싸움이 아니며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두고 두고 이 므깃도의 전쟁은 이 세상의 악이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멸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세력을 다 모아서 공격하는 전쟁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6 16절에 보면 사탄이 악한 왕들을 불러모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려고 하는데 그 곳 이름을 \'아마겟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의 \'할 므깃도\'의 헬라식 발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장소는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멸절시키기 위하여 철병거 구백승을 모아 가지고 그들을 대항했던 바로 이곳을 말합니다. 바로 이 다볼산이 이들에게는 아마겟돈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스라의 군대가 철병거 구백승을 끌고 기손강으로 온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항하려고 하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이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이제 그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참으로 힘든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방식으로 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대로 서로 건드리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사정은 괜찮은 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 동원하여 공격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므깃도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에게 생존에 대한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것은 이 불신의 세상에서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의 답변은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 세상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십니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뿌리를 뽑으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을 상대로 싸우시게 됩니다. 오늘 많은 젊은 크리스챤들이 질문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성경대로 살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멸망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겟돈 전쟁이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있는 삼차 대전이나 중동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특별한 한 날을 잡아서 공격하는 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며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어느 교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려고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타협하면 살려주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나 교회는 살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역사에 있었던 가장 큰 아마겟돈 전쟁이 루터를 소환했던 보름스 회의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회의가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를 완전히 멸절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주님을 붙들었고 결코 사탄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회의를 통하여 더욱 더 바로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드보라는 제대로 변변한 무기도 없는 바락에게 시스라를 대항하여 싸우라고 말씀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전쟁을 합니까? 그러나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만약 여기서 물러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의미하고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므깃도의 싸움의 원리.

 

가장 무서운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드보라는 이스라엘 장수 바락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했습니까?

14,\"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 명을 데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기서 드보라는 바락에게 \'일어나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므깃도의 전쟁은 힘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며 하나님과 사탄의 세력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하려고 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지금 이 어려움으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구체적인 과정이나 방법은 모르지만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가장 파괴적인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서 미리 비참한 결과를 예측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있는데 이 세상에 도저히 살 수 없도록 일이 진행될 때 이것은 나의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싸워야 할 전쟁입니다. 이때 마귀가 노리는 것은 무력의 시위를 통하여 우리를 기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현실의 높은 장벽 앞에 너무나도 무력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믿음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이지 못합니다. 단지 침체하게 만들 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고 스스로 비참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계속 눌러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안이나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셨는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5장에 있는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역시 기손간의 범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이 버람했을 때 시스라의 철병거 구백승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작전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아무리 뛰어난 자도 흉내낼 수 없는 지략과 모사의 신이십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폭우가 내리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기손 강에 진을 치고 있던 시스라의 군대는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고 다볼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낚시를 하듯이 시스라의 군대를 섬멸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 우리의 싸움은 이런 칼과 창의 싸움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기도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생사가 달린 어려움인데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때에는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상황이 어렵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미리 나쁜 시나리오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순간에 내가 하나님을 믿고 죽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주위에서 사실대로 말하면 안된다고 위협을 해도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모든 사실을 정직하게 다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악과는 타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의 세력과 협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악의 세력이 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리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전쟁이 따르는 희생의 발생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끝까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내 앞에서 싸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이방인 여자 야엘의 승리.

 

전쟁의 결과는 시스라의 대패배였습니다. 철병거 구백승만 믿고 있던 시스라의 군대는 철병거가 쓸 수 없게 되면서 아주 심한 두려움과 자심감의 상실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원래 힘을 믿는 자들이 자기 힘이 통하지 않으면 대책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시스라는 도보로 도망을 쳐서 마침 그 가까운 곳에 장막을 치고 있던 겐 사람 헤벨의 부인 야엘의 장막으로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17,\"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하솔왕 야빈이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그토록 적대적이었지만 다른 족속들과는 나름대로 괜찮은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겐 족속은 야빈에게 전혀 위협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빈과 겐 족속 사이는 화평한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시스라는 추격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한 것도 있었고 또 설마 겐 족속이 자기를 배반하겠는가 싶어서 안심하고 거기로 들어 갔습니다. 도망쳐 온 시스라를 보고서 야엘은 아주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18-20,\"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 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함배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그가 또 가로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하라 하고\"

시스라는 전혀 야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영접했고 또 그를 극진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외방인에게 여자가 이불을 덮어준다고 하는 것은 극진한 대접입니다. 그리고 목말라하는 그에게 물 대신 젖을 준 것은 그에데 대단한 호의를 베푼 것입니다. 그래서 시스라는 전혀 야엘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문 밖에서 망을 좀 봐달라고 하면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야엘은 우리 나라로 치면 논개와 같은 여자였습니다. 논개는 적장에게 극진하게 대접하여 완전히 자기를 믿게 한 후 강가에 내려와서는 끌어안고 물에 빠졌습니다. 지금도 촉석루 옆의 다리에는 논개가 손가락이 풀리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끼었던 가락지를 상징하는 가락지가 다리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야엘은 가락지로 적장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21,\"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들어가서 말뚝을 그의 살쩍이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유목민의 여자들은 장막을 치는데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야엘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장막 말뚝을 가지고 들어가서 머리에 말뚝을 박아서 확실하게 일을 끝내었습니다. 여자를 절대로 우습게 알아서는 안됩니다. 여자들이 늘 사용하는 기구들을 보면 주로 여러 종류의 식칼이나 가스불 혹은 포크같은 것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은 다듬이 방망이가 있었습니다. 여자들 주위에는 항상 무서운 무기들이 있습니다. 늘 그런 무기들을 평화를 위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인류가 평화로운 것이지 여인들이 분노해서 그가 사용하는 기구들을 무기로 사용하게 될 때에는 아마도 이 세상은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왜 야엘은 평화 관계에 있는 시스라를 죽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야엘은 시스라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에 은혜에 빚진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통하여 은혜의 부스러기를 먹은 자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야빈이 철병거 구백승으로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일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 동족 전체가 야빈의 복수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한 아녀자의 행동으로 자기 집 전체가 가나안 사람들과 원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엘은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바락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엘은 남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이 이 일을 끝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시스라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뚝으로 받아버렸습니다. 특히 머리를 말뚝으로 박아서 영원히 도망치지 못하게 해버렸습니다. 요즘에는 여자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느 신용 금고에 강도가 들었는데 여직원이 매를 맞아 가면서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서 결국 그 강도를 잡게 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준 적이 있습니다.

결국 가장 큰 승리의 상급은 이방 여자 야엘에게 돌아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락처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주저하는 정규 멤버보다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의 찌꺼기로 만족한다 하더라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외면하지 않고 싸우는 이방인들을 얼마나 높이 보시는지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기에서부터 선교의 전략을 짜 놓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말씀을 듣고서도 가만히 있는 너희들보다는 비록 만나도 찌꺼기 만나를 먹고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자들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며 아주 작은 기회가 주어져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는 그들을 축복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십니다.

야엘은 전쟁을 연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열심히 자기 장막의 말뚝을 박았을 뿐입니다. 그는 말뚝을 박으면서 남편을 잘못 만나서 말뚝이나 박으면서 고생한다고 중얼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 말뚝 박는 실력으로 시스라의 머리를 땅에 박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무서운 압제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만히 있는데 주어지지 않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육체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엑스트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자격도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수고하는 자는 반드시 기회가 주어지고 결국 큰 승리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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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의 승리의 노래

   5:1-18    2002-10-05     26

   김서택  

   대구동부교회

 

 

지난 번 월드컵 예선 때 우리나라 대표팀이 일대 영으로 일본에 지고 있다가 후반에서 달아서 두 골을 넣는 바람에 역전승 했을 때 온 국민들의 입에서 환호의 탄성이 터져 왔습니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나 슬픔 또는 놀라움 등이 있을 때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길 줄 알았던 경기에서 이기면 이런 환호를 지르지 않습니다. 그냥 \'잘했다. 나는 벌써 이길 줄 알았다\'하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길 수 없었고 패색이 짙은 게임에서 끝까지 사력을 다해서 뛴 결과 놀라운 역전승을 거두었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고 바로 이런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승리의 순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으며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이며 우리의 삶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나의 적은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믿는 자들이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 현실 가운데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끝까지 무기력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나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살 길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거나 어쩔 수없었거나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어느 한 순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의 절망을 승리로 바꾸셨을 때 그 때 우리 입에서는 승리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드보라의 노래는 바로 이 승리의 노래입니다. 드보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야빈과 시스라의 철병거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더라도 시스라의 철병거 구백승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이십년 동안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환한 자유의 아침이 왔습니다.

이때 터져 나온 찬송이 바로 이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좋은 일이 있으면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은 거의 짐승의 수준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보면 어떻게 세밀하게 그 상황들을 재구성해서 표현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승리를 예배를 통하여 다시 재연하는 드라마요 승리의 축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주신 놀라운 승리를 다시 재연하는 승리의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18절까지는 이번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으로 생각됩니다.

 

1.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

 

1-3,\"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너희 왕들아 들으라. 너의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 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드보라와 바락에게 이 놀라운 승리를 주신 날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싸움이 끝난 후 그들이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서 그들이 이 엄청난 시스라의 군대를 이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이겼지요.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시스라의 철병거 앞에서 너무많이 절망했고 너무 많이 좌절했습니다. 그들과 싸워서 이긴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이겼고 적들은 모두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이 엄청난 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정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은 계속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릴 때 그 일에 대해서 결론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은 이 엄청난 승리가 있은 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찬양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2,\"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아마 여기서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그를 영솔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전쟁을 이끌었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이 없기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는 자는 모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두령들도 자신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고 또 백성들도 기꺼이 전쟁에 뛰어 들어서 싸웠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형적인 싸움의 형태인 것 같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앞장서서 리더할 사람은 리더하고 뒤에서 따라 올 사람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장 선 리더들도 더 잘난 것이 없고 뒤에서 따라오는 자라 하더라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 전쟁에 구경만 하지 않고 참여한 자들,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한 자들은 모두 이 승리의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운 역경에 봉착했을 때 가장 답답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법조차 제대로 써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차라리 남들이 다 써보는 세상적인 방법이라도 써 보았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다가 시간을 다 놓쳐 버려서 이제는 꼼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의 무능에 화가 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믿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저 모양 저 꼴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죽고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형편은 도살당할 양과 같았습니다. 도살당할 양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들의 손을 높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그들의 입에서 말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두렵고 부끄러워서 아무 소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니까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다 당당하게 쏟아 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3절에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이 때 왕도 없었고 장관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위 나라의 왕들입니다. 모두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우습게 알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조롱하고 무시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을 때 이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4,\"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너오시고 에돔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흘렸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길을 걸을 때 캄캄한 밤에서 길을 걷곤 했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어두움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한 어두움 속을 걸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지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았던 장면 중에서 가장 웅장한 장면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동쪽에 해당되는 에돔에서 해 뜨는 장면이었습니다. 동쪽 산 위에서 약간씩 불그스레 해지더니 한 순간에 그 찬란항 태양이 떠오르면서 온 세상은 완전한 환희의 도가니로 바뀌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서 하나님께서 데만에서 나오시며 에돔에서 나타나신다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의 해뜨는 전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웅장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거친 광야에서의 아픔 해 뜨는 장면은 너무나도 웅장합니다. 그동안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두려움과 추위와 모든 염려를 한 순간에 없애 버리고 세상은 한 순간에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드보라는 이것을 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4,\"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들에게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흘렸나이다\"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였습니다.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흘렸나이다\'

그들이 이 철병거를 대상으로 해서 싸운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이 철병거를 두려워해서 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생각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기손 강이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스라의 철병거는 마치 진흙 땅에 빠진 수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드보라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를 사랑하시며 자기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드보라는 쏟아지는 비 가운데서 울고 또 웃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았는데 이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도록 온 몸으로 느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악의 세력 앞에서 나의 믿음이 통하지 않을 때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 앞에서, 혹은 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나의 믿음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악의 세력이 나를 덮쳐서 고통스럽게 해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해주시지 않을 때, 나의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중에서 말도 되지도 않는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사고를 당했는데도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 나의 사업은 망하고 직장에서는 쫓겨나서 생계는 막연한데도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시지 않을 때 바로 이때가 시련의 시기이고 가장 힘들 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버릴 수는 없지만 신앙 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기뻐하라는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내 사정이 되어보지 않아서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하지. 자기도 내 같은 처지가 되어본다면 아마 기뻐하라는 이런 사치스러운 소리를 하지 못할꺼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속은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일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내 신앙이 이론적이며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의 세력을 사용하셔서 내 안에도 이런 교만과 죄의 성향이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깊은 회개를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깊은 회개라고 하는 것은 이제 나는 완전히 죽어버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일이 잘되고 못되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을 안 그 자체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 은혜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 엄청난 어려움들이 한 순간에 축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속도가 도저히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울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감격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3.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

 

이제 갑자기 드보라의 노래는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그 영광스럽고 은혜스러운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무기력하게 살아왔는지 하나님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6,\"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소로 다녔도다\"

삼갈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인 때부터 야엘이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는 이 순간 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로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행인들은 길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비밀 통로를 통하여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로에는 시스라의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탈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7,\"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치고 그쳤다\'는 말을 아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끌어 줄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12절에 보면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라고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소리는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보라가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드보라가 말씀을 들고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너무나도 처참해서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드보라 자신의 마음 속에도 자꾸 주저앉고 싶고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마다 드보라는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드보라여 정신을 차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너는 안일한 생각을 하느냐 죽더라도 말씀으로 결판을 내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드보라는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이처럼 후회되었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집이 너무 어려우면 어떤 자매들은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를 합니다. 자기가 남자였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드보라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8,\"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명 중에서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적이 바로 눈 앞에 쳐 들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사만명 중에서 창이나 방패를 들고 싸우려는 남자가 없었습니다. 더욱 드보라는 실망하게 한 것은 남자들이 힘을 내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신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힘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을 믿었으면 끝까지 하나님을 결판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들면 안됩니다. 영적으로 깨어야 합니다. 춥다고 해서 잠들면 결국 얼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산에서 왜 얼어 죽습니까? 졸리니까 잠을 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온이 떨어져서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졸려도 깨어야 하고 살아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낙심 중에 있는 드보라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9,\"내 마음이 이스라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심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스라엘 지도자들 중에서 드보라의 말씀을 듣고 자원해서 헌신하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강한 지파 출신들도 아니었습니다. 주로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이 드보라의 마음으로 하여금 사모하게 했습니다.

13절도 같은 표현입니다.

\"그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남은 귀인과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와 함께 하셔서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10,11,\"흰 나귀를 탄 자들,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깃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운 일을 칭술하라. 그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아마도 이들은 이번 전쟁과 상관이 없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들은 활 쏘는 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물 곁에서 한가하게 자기 양떼를 먹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구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아무리 구석진 곳에서 되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세상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누가 어떤 시험에 합격하고 어느 대학이 들어갔다더라 하는 것이 큰 뉴스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들은 이야기 거리에도 들지 못합니다. 한 자리에 모여도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임을 피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붙드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어느 한 순간 그를 위하여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온 세상에서 그 사람이 이야기가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보다 더 특별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4. 드보라와 함께 한 자들과 외면한 자들.

 

드보라는 먼저 이 영적인 싸움에 함께 한 자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14,15,\"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벤냐민은 어늬 백성 중에 섞였으며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 왔도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아내려 가니 르우벤의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도다\"

여기에 기록된 자들은 드보라와 함께 싸운 자들입니다. 드보라가 모두 방백이요 대장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 싸움에 기꺼이 동참한 자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역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그들은 아마도 정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아말렉의 피가 섞인 자들인 것 같습니다. 벤냐민은 독자적인 군대를 형성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였습니다. 인원이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길은 므낫세 지파인데 아마 지도자들만 몇 명 참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불론은 그들의 종노릇을 톡톡히 해 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므낫세 사람들은 몇 명 오지도 않으면서 상관 노릇을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볼론 사람들은 전심으로 그들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았다\'는 말은 비서노릇이나 부관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르우벤 지파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15절 끝에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르우벤 사람들은 드보라의 소식을 듣고 시냇가에서 큰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6,\"네가 양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쩜이뇨 르우벤의 시냇가에서 마음이 크게 살핌이 있도다\"

르우벤 지파는 처음에는 분명히 참가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나팔 소리 대신이 양의 피리 부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번 전쟁 보다는 양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엇인가 할 것처럼 큰 소리를 내었는데 곧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17,\"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쩜이뇨 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길르앗 사람들은 길이 멀어서 오지 못하고 단 지파는 배로 무역을 하느라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셀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드보라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를 이 영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18,\"스불론은 죽음을 무릎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결국 이 모든 전쟁의 승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한 스불론과 납달리에게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아니한 르우벤이나 단이나 아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전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르우벤은 두고 두고 길르앗 동편 땅 때문에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단은 블레셋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므낫세는 곧 미디안 사람들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살면 학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 어려움없이 지낸다면 그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 일없이 지낸다면 그것 자체가 정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편안할 때에는 영적으로 싸우고 있을 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렸습니까? 그때가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하면 자꾸 세상으로 떠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는 꼭 싸워야 하는 것도 양을 돌보거나 혹은 무역을 하거나 결혼을 준비하거나 혹은 밭을 사거나 하는 일 때문에 외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비유와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왕이 잔치를 벌려 놓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마다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엑스트라로 밀리게 됩니다. 복음의 요청이 있을 때 개인적인 삶에 손해를 좀 보고 기꺼이 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주연이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악을 허용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죄성을 보게 하시고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잠을 자지 않는 것입니다. 드보라 처럼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잠이 쏟아진다고 해서 그대로 자면 얼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설득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긴 어려움은 다른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이 믿음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입니다. 이것을 외면하면 안됩니다.

르우벤 지파처럼 결단만 하고 결국 양 때문에 주저 앉으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웃음 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두움이 계속되어도 낙심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순간에 아침에 찾아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든 것인 한 순간에 다 뒤집어 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했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나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때 찬송외에는 생활이 정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껏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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