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1-3)
바리새인에 관해서는 새삼스러운 설명이 따로 필요가 없을 만큼 그들은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원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예수에게 자주 비판받고 책망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날 그들만한 신앙인을 찾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는 진지함의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 했고, 또한 그 진지함을 삶으로 살아내는 열심의 면에서는 더욱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또한 신자 하나를 얻기 위하여 산이나 바다를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열심.
누가 이들의 믿음을 가짜라 할 것이며 누가 이들의 삶을 잘못이라 할 것인가. 이들이 만일 오늘 이 땅의 기독교계로 환생하여 온다면 기독교는 이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과연 예수처럼 그들을 비판하고 책망할 용기가 있을까 아니면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과 더불어 서로서로 영광을 구하며 아름답게 살아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억지 부릴 일은 아니다.
요한복음 본문의 니고데모의 예에서 보듯이 실제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도 아니지만, 설사 그들이 예수를 배척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여전히 믿음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이름도 성도 없는 예수에 대한 자세가 사람의 믿음을 결정했던 게 아니다. 예수는 한낱 목수의 아들로서 인간적으로는 내세울 게 전혀 없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었을 뿐이다(이 목수라는 것도 오늘날 목수의 개념으로 보면 안된다.
당시의 목수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 증거하는 대로 우상을 깎아 만드는 일이 주업이었다.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보다
예수를 앞세울 수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문제는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앞세우고 인간 세상의 영광과 권세로 임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영접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고수하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의 전후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만 매도하는 것은 신앙을 너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입장으로만 끌고 가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 땅에 바리새인을 부활시켜야 하고 니고데모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는 재림한다.
바리새인이 없는 땅, 니고데모가 살지 않는 곳에 예수가 무슨 재미로 오시겠는가.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삶이 흐드러지게 만개하고, 그런 삶의 기준으로 서로 서로 영광을 취하는 곳에 재림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의 그 빛나는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잘 닦여진 인격 속에 감추어진 음모와 술수를 폭로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예수가 가야 할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십자가! 인간의 역사는 절대로 진보하지 않는다. 다만 나타난 세계의 이름을 달리하면서 되풀이될 뿐이다.
옛날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뭐가 엄청나게 다르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바뀐 것이 있다면 그저 여호와라는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율법이라는 외투가 은혜라는 모습으로 변한 정도이다.
옛날 바리새인들이 여호와께 대하여 가졌던 열심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겐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 바뀌었다는 것뿐, 그 열심의 질이나 내용은 변함이 없
으며, 오히려 양적인 면에서는 예전의 바리새인보다 훨씬 못한 것일 수도있다.
이같이 바리새인들과 양적인 면에서 신앙의 경쟁을 하자면 자신이 없으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네용에 있어서는 율법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은혜를 가지고, ?바리새인들은 은혜를 몰랐지만 우리는 은혜 아래 산다?고 자위한다.
이것이 곧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의 실체이다. 이처럼 나타난 기독교 역사는 항상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못하게 된 경우에 속한다.
이제 기독교는 자신에 대한 착각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바리새인의 삶을 배울 일이며 니고데모의 진지함을 따를 일이다. 그래서 오늘 이 땅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바리새인이 늘어나고 니고데모가 많아질 때, 우리의 예수는 강림한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니고데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펴 보기로 하자. 그가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 역시 바리새인의 신앙 행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니고데모의 사람됨은 무엇보다 그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다.
자주 얘기해 온 내용이지만 히브리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이름이란 그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하나의 상징인데, 니고데모란 이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것도, 또 유대인의 관원이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니고데모란 이름 안으로 모두 수렴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니고데모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니고데모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Nikovdhmo?니코데모스ni'ko?니코스, 승리, 이김)와 dh'mo?데모스, 사회적으로 함께 묶인 공중, 대중, 백성)에서 유래. ?백성 중에서 승리하는? ?니고데모?니고데모는 사전의 설명대로 이김이라는 단어와 백성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문제는 이 백성과 이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즉 이김(ni'ko?니코스)의뒤에 오는 백성(dh'mo? 데모스)을 니코스(ni'ko?의 목적어로 볼 것이냐 아니면 주어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 풀어서 말한다면?백성을 이김?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백성이 이김?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사전에서는 전자의 개념으로 보아서 ?백성 중에서 승리하는?의 의미로 설명하였지만 나는 꼭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물론 그 의미가 틀렸다거나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백성들 가운데서 승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니고데모가 백성들 가운데서 승리하는 자 곧 그들의 지도자(유대인의 관원)가 되었다는 결과적인 사실만을 전해줄 뿐 어떻게 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데모스(dh'mo?를 니코스(ni'ko?의 주어로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즉 ?백성들이 이긴다?는 의미로 보면 이 말은 요사이 말로 ?인본주의?라는 의미로도 통하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로도 통한다. 이렇게 되면 니고데모란 이름은 단지 백성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한 사람이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백성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 사람이라는 의미가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또한 이런 사람이 지도자로 높이 서는 사회가 정치적으로 선진화된 사회며 민주화된 사회이다.
민주주의라는 뜻의 데모크라시(democracy) 역시 여기 니고데모라고 할 때의 데모스(dh'mo?와 힘이나 지배를 의미하는 크라토스(kravt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 ?민중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데모크라시나 니고데모나 서로 대동소이한 개념이 되는데, 예민한 사람이라면 벌써 느꼈을 테지만 여기서 한가지 문제는 데모스(dh'mo?의 위치이다. 즉 데모크라시에서는 데모스(dh'mo?가 크라토스(kravto? 앞에 있으면서 ?민중의? 지배가 되었다면(이 경우는 ?민중?이 ?지배?의 주체이다), 니고데모에서는 데모스(dh'mo?가 니코스(ni'ko? 뒤에 있으므로 ?민중을? 이겼다고 보는 것이 ?민중의? 이김이라고 보는 것보다 타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인데, 이런 것이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의 차이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데모크라시나 니고데모라는 말이 생성되는 사회문화적 배경이다. 데모크라시는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통하여 생성되고 발전해온 말이므로 당연히 헬라어의 문법 체계에 맞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니고데모란 말은 그 꼴은 헬라어이지만 그 형태에 담긴 생각은 히브리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같은 단어는 헬라어 문법보다 히브리어 문법으로 읽을 때 그 진의를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히브리어 문법 체계에서 니코스(ni'ko?라는 명사와 데모스(dh'mo?라는 명사가 나란히 겹쳐 나왔다면 이것은 당연히 ?데모스의 니코스? 즉 ?백성의 승리?가 된다. 니고데모가 히브리 사람의 이름이란 것을 무시하고 단지 헬라어로만 본다면야 ?백성 위에 군림하는? 니고데모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이 헬라어는 온전한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 사상을 담은 그릇에 불과하다는사실을 감안한다면
니고데모는 데모크라시와 동의어로서 곧 ?民을 主로 모신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민주주의의 세상에서는 民을 主로 모시는 사람이 곧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니고데모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이며 인격적인 인간일 수 있다.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그의 직책은 그의 이런 이름에 걸맞는 삶이며, 바리새인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니고데모는 요사이 흔하디 흔한 한국의 썩어빠진 정치가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사람이며,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에서 전술한 대로 오늘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종교인들과도 한참 다른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치가였으며, 또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종교인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그는 비록 밤이긴 했지만 사회적인 지위나 가문의 배경이나 어느모로 보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예수를 찾아와 예수를 인정하는 발언을 할 만큼 나름대로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성경의 본문을 보자.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런 글을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니고데모와 예수를 예단(豫斷)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항상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본문의 대화를, 바리새인이라 말이 주는 니고데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빼고 또 예수가 우리의 주라는 사실을 접어두고 읽기로 한다면, 우리는 니고데모에게서는 성숙한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겸손과 또한 모든 면에서 여유롭게 산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부드러움을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에게서는 오히려 자기만이 진리라고 하는 독선과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을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교만을본다. 만일 우리가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심정적인 동정을 느낄 것인가.
아마도 예수에게서는 앞뒤가 콱 막힌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니고데모에게서는 인생을 관조하는 부자의 너그러움을느낄 것이다. 사실 니고데모의 말이 어떤 내용인가. 그게 과연 ?거듭나라?는 응답을 들을 만큼 한심한 말이었던가.
그는 그가 보고 느낀 대로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것뿐이다. 그것도 예수를 비난하거나 충고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꽤 비중이 나가는 사람이 갈릴리의 촌사람인 예수에게 와서 ?선생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세상에 누가 당신이 행한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감탄과 감격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을 멀쩡하니 앞에 앉혀놓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운운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니고데모의 평가가 모두 쓸데 없는 소리라는 뜻이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한 당신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일갈이다.
예수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렇게 니고데모의 단 두 마디 말만 듣고 그가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 있었으며, 설사 그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니고데모같은 거물 앞에서 상대방의 자존심을 이처럼 팍 구겨버리는 발언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예수의 모습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니고데모로서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다.다른 바리새인이야 어
떨지 몰라도 자기가 보기엔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임에 틀림없다
싶어 공사다망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만사를 제치고 예수 앞에 왔던 것인데,그런 자신에게 다짜고짜 하는 말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니. 예수가 아무리 잘났기로서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며, 인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니고데모가 예수 앞에 와서 고백한 말도 결국은 예수를 찬양하는 말이었고 예수의 능력에 감격하는 말이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어찌하여 ?거듭나지 않으면?이라는 말로 분위기를 서먹하게 만드시는가. 만일 우리가 예수를 만나 그 예수를 찬양하고 높였더니 예수의 반응이라는 것이 우리더러 ?거듭나라?는 것이었다면 우리 안색은 어떻게 변했을까.
요사이 사람들은 흔히 예수 앞에 나아가 예수의 능력을 찬양하고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고백을 하면 그것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지만,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늘 본문의 니고데모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의 칭찬에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니고데모의 그런 판단을 책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니고데모의 판단 ─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우리의 선생이다 ─
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그 판단은 옳았지만 예수를 밤에 찾아온 것이 문제인가.
도대체 예수는 니고데모의 무엇을 보고 그가 거듭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 열매로 나무를 알듯이 사람은 그 말로 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 말로 인하여 심문을 받으리라던 예수의 말씀(마12:36-37)은 참으로 옳다. 예수는 니고데모의 짧은 말을 통하여 이미 니고데모의 인간됨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가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다는 것은 니고데모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의 지엽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니고데모가 환한 대낮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내용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대낮에 찾아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공개적인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고 밤을 도와 예수를 찾아갔다는 것은, 그가 아직은 예수보다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 더 예민하다는 증거이고, 혹시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하는 정치가적인 기질의 발로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니고데모 자신의 말이다.
우리는 앞에서 니고데모란 이름의 의미를 살펴 보았지만 이제 그의 말을 자세히 생각하면 여기서도 그의 이름이 과연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 이다.
니고데모는 무엇을 가지고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판단했는가. 예수를 향하여 칭찬을 늘어놓느냐 아니면 욕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나중문제이다. 보다 본질적이면서도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근거」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예수 「편」이냐 아니냐 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 「편」이 되어 주기만 하면 마냥 좋았던 게 아니다. 예수의 관심은 ?도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선생인 줄 알았느냐?에 있다.
니고데모의 고백에서 보듯이 니고데모가 예수를 판단한 근거는
?예수가 행한 표적?에 있다. 니고데모가 자랑스럽게 고백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란 말이 사실은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차원의 한계였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수준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보편적인 신앙인의 일반적인 기준이기도 하다. 불치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물 위를 걷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능력. 보
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나 남기시며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거짓말같은 기적.
오늘날 신자들은 이들 표적 가운데 단 한 가지만이라도 똑똑하게 목겼했다면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받들어 모시는 데 별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일러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으로 자칭하는 사람들도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이런 표적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런 표적을 좋아하며 이런 기적을 만들어내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 경외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경외심이야말로 모든 종교행위의 기본이
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육신적인 차원으로 끄집어 내리는 것이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이 ?백성의 이김?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이김?에 상대되는 말이며, 데모크라시에서 본 ?민중의 지배?는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에 상대되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제시하고자 했던 뜻은 ?십자가의 삶?이었지,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맨손으로 로마를 쳐부수는 ?기적?이 아니었다. 이런 기적은 인간들의 원함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자신의 원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적인 소망을 이루어주는 사람을만나면 그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 앞에 와서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니고데모의 생각이 그만큼 인간적이고 육신적이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니고데모가 본 예수의 능력은 백성의 원함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었으며, 따라서 예수를 정치적인 동반자나 후원자로 삼았을 때 자기 앞에 전개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그의 관심사였다. 심하게 말하면 니고데모의 고백은 일종의 정치적인 흥정인 셈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다수 신자들의 예수에 대한 찬양 역시 일종의 정치적인 흥정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예수가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그냥 거듭나라고 할 수밖에. 육신 세계의 표적을 통하여 예수의 예수됨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니고데모의 후예쯤 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인간의 육신적인 필요에 관심이 많으며, 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많은 노력도 기울인다. 그러니 기독교인 국회의원인들 대수겠으며, 장로 대통령인들 불가능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원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사람들은 인간들의 육신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오히려 매정하리만치 단호하다.
육신의 병이란 것은 고쳐도 죽는 것이며 못 고쳐도 죽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잘 먹어도 기껏 하루 세 끼 먹는 것이고, 못 먹어도 그저 하루 세 끼 먹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앞에 나아와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하는 입에서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이래서 관념과 삶은 다른 것이며,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삶인 것이다.
예수가 복음서에서 행하신 표적들이 하나도 육신적인 표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그 많은 표적을 행하신 예수께서 오히려 ?내가 보여줄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뜻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예수를 밤중에 찾아와 ?당신이야말로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니고데모의 고백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시간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따라가는 삶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그 속에서 ?사람들?이 그를 이길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은 니코데모스(Nikovdhmo?가 아니다.
오직 니코데오스(Nikovqeo? 즉 ?하나님(qeo?의 이김?이다.
거듭남이란 니코데모스(Nikovdhmo?가 니코데오스(Nikovqeo?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예수가 할 말이라고는 ?거듭나라?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턱이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