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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교리

제이비젼 2014. 8. 14. 11:30


바른 교리

 

 

 

다음에 게시되는 글은 조승규 목사가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96(2000. 3)에 게재한 것으로, 2000 3 1일 현재 「대한민국 저작권법」(법령 제6134)과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저작권 조약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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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 저작물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발췌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조승규, 「특집 100 한국식 기독교에 대안을 제시한다 - 성경을 믿는 평범한 믿음(성경에 대하여 : 변개된 성경을 버리고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서울 : 말씀보존학회), 통권 96(2000. 3), pp.12,19-24.
  2.
본 저작물의 전체를 인쇄 및 출판하거나, 웹사이트에 게시 및 링크할 경우에는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이 안내 문구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12]

행위로 구원받는다!? - 칼빈주의의 독소 "행위로 구원받는다!?" 

 

조승규 / 말씀보존학회 성경연구원

 

  "과연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그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구원 받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해야 하고, 그 구원의 보장을 위해서도 어떤 행위가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매우 혼란스런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낙담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헛된 일에 열심을 내기도 하며, 그릇된 확신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은 힘겨운 종교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외적인 노력에 자위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자기 위안에 의존하는 실정입니다. 한편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진 나머지 성경에 기록된 다른 시대와 그에 따른 행위의 요소를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무지로 진리를 배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번 특집 글을 통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행위와 믿음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깨닫게 된다면 거짓 교리의 속임수나 허망한 노력, 혼미한 생각이나 갖가지 오류들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과 소망, 또 그 놀라운 말씀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19]

  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여 구원 받으면, 즉시 사탄의 공격이 시작된다. 그 공격은 이제 막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에 패배하여 영적으로 사탄에게 점유 당하면 누구라도 성장하여 주님을 위한 능력 있는 군사가 될 수 없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소위 정통신학의 이름으로, 또 학문의 이름으로 거대한 장벽을 쌓아 놓은 것이 다름아닌 칼빈주의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비교적 잘하다가 믿음에서 떠나면 그가 사실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후에 다시 믿음에서 떠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내보이는 믿음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 받았다고 말씀한다.

 

  칼빈주의의 다섯 번째 강령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구원을 행위로 입증해야 구원 받은 것으로 인정된다.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생활을 잘하고,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을 때에만 그것이 곧 선택된 사람이며 구원 받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생활을 해야 자신이 선택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보장 받게 되는 것이다.( 1)

 

  반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칼빈주의자

 

 

 

[20]
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잘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행한 일들이 불로써 드러나게 된다. 또한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라고 마음으로 믿고 고백했다면, 자신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죄로부터 성별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생활을 통해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거룩한 행실로 인해 구원 받았다면 그러한 행위를 더 이상 지속하지 않는 것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충분한 사유가 되지만,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2:8-9) 행위가 얼마나 거룩한가에 따라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견인해야 한다면"(, 거룩한 행위로 구원을 지켜야 한다면), 견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 얼마나 불경스런 주장인가! 칼빈주의자들의 거짓 교리가 어느 정도인지 그 실상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다음 인용은 반스 박사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2)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누구도 그가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했기 때문에 영원히 안전하다는 생각에 속지 않아야 한다."( 3)

"독자들이여, 만일 당신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것이다."( 4)

"우리가 정말로 구원받았다는 증거들 중 하나는 우리의 생애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견인하는 것이다."( 5)

"점진적인 성화는 중생의 증거이다. 만일 당신이 점진적인 성화에 순종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6)

"죄로부터의 성별이란 몸의 행실을 포함하며...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다."( 7)

"오늘날 죄인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 뒤에 그가 어떻게 살더라도 멸망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저주 받을 이상한 이단이 있다. 그것은 사탄의 거

 

[21]

짓말이며... 혼이 확실히 천국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8)

"생활의 거룩함은 우리 '구원'의 일부이며 하늘의 빛과 영광 안에서 성도의 유업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9)

"우리가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 끝까지 견인할 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안전하다 것을 인식하고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감사하게 하소서."( 10)

"우리는 생활에서의 거룩함이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11)

"선택의 유일한 증거는 거룩함을 만들어내는 효과적인 부르심에 있다. 또한 이 부르심이 진짜라는 것과 우리의 견인의 확실성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선행을 인내로 지속하는 데 있다."( 12)

"우리 생활에서 믿음과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와 같은 선택의 열매들을 나타내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선택한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생활의 거룩함 외에 선택의 확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13)

"거룩함은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확실한 표시가 된다."( 14)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칼빈주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한때 성화된 상태에 있다가 떨어져 나가면 아예 선택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또 돌아오면 진정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편리한 대로 둘러대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되어 구원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경고한 저주 받을 다른 복음이다( 1:6-9). 우리의 구원은 결코 행위에 의하지 않고 은혜의 근거 위에서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4:5-6).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영향이 이 나라 교계에 팽배한 현실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실제로 구원받지 못하고 확신도 없이 헛된 육신의 행위만을 좇는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결과이다.

 

  위에서 제시된 인용문들은 모두 칼빈주의자들의 글이다. 거룩한 생활이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

 

[22]

이 정통 교리처럼 수용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자 비극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주의의 또 다른 면이 알미니안주의(구원을 행위에 따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신학 견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변개된 성경들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뒷받침한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so that by it you may grow up in your salvation)(벧전 2:2, 개역성경/NIV). 하나님의 말씀에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의도적으로 첨가됨으로써 마치 구원이 점진적인 선행에 의해, 즉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변개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성경인 <신세계역본>을 비롯해 변개된 성경들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변개시킨 것이다. 올바른 성경의 베드로전서 2:2은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으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수한 말씀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구원받는 것이나 거듭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십자가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과 거룩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상급으로 보상하시지만 십자가 이전의 행위들은 전혀 무익하며, 오히려 더러운 걸레와 같고 구원받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의 왜곡된 가르침들은 성경적인 구원 교리를 혼란케 하는 것이며, 구원을 가로막는 장벽을 쳐놓는 격이다.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기에 행위로 지켜야 한다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구절들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해석 역시 구원을 행위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관된다. 다음 구절들로 그 실체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첫째, 고린도전서 9:24-27이 대표적인데, 칼빈 자신과 이른바 존경받는 장로교 신학자인 찰스 핫지를 평가해 보기 바란다.

  "그는 가르치고자 했던 것을 다 마쳤다. 이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듭 강조하여 말한다. 그는 그들이 계속해서 정진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함께한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을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목표에 도달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달리기를 시작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22)고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15)

 

  보는 바와 같이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보장을 믿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칼빈주의자들이 범한 오류는 면류관이 주어지는(딤후 4:8, 1:12, 고전 9:25, 벧전 5:4, 살전 2:19) 그리스도의 심판석( 14:10, 고전

 

[23]

3:13-15, 고후 5:10)을 부인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을 구원에만 적용시키는 한 그들은 결코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이 구절에서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면류관으로 대표되는 상이다.

 

  바울은 또한 다음과 같이 강력한 선포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보장된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나 현재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 8:38-39).

 

  두 번째는 디모데전서 4:16인데, 칼빈의 말을 평가해 보기 바란다.

  "그들 자신의 구원과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구원 모두가 그들이 직무를 충실히 행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목사들의 열심은 한층 증가될 것이다."( 16)

 

  여기서 칼빈의 문제점은 "구원받는다"(목숨을 건지다)라는 단어를 늘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으로만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5과 고린도후서 1:6에도 "구원받는다"(save)라는 말이 나오지만 결코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사탄의 위협과 시련, 영향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세 번째는 가장 많이 오해되는 구절인 마태복음 24:13, 역시 칼빈의 해석이 얼마나 억측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본문을 되풀이하시면서 사람이 끝까지 견인하려고 합법적으로 투쟁하지 않는 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17)

 

  그러나 칼빈의 이와 같은 해석과는 달리 이 구절은 미래의 대환란에 관한 것이지 개인의 인생의 종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구원받은 어떤 그리스도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설교의 청중들은 실제적인 유대인이고( 24:1-3), 언급되고 있는 장소는 팔레스타인이다( 24:16). 이들은 안식일 같은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24:15-20), 예루살렘 성전에서 경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24:15). ""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뒤따른다( 24:14,21,29). 그러므로 이 끝은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어느 일정한 기간의 끝이다( 24:14). 그리스도인에게는 끝까지 견디라는 명령이 주어진 적이 없다.

 

   위와 같은 구절들에 대한 칼빈주의의 왜곡된 해석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며, 많은 이들의 믿음을 성장

 

[24]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한다. 이 나라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개신교의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보장을 믿지 않으며, 확신도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만 인정받으려고 힘겨운 종교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판단해 보면, 칼빈주의란 신학의 한 조류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학문적 배경을 갖고 있는 비성경적 망상이며, 이단인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죄인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고, 무지하고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함으로써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거짓 교리이다.

 

  성경은 신약성도의 구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행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복에 관하여 다윗도 말하였으니』( 4:5-6). 칼빈주의자들은 이 놀라운 진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1:16)은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복음에 순종하는 것( 10:16) "믿음으로 순종"( 16:26)하는 것이지 행위가 아니다.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을 행위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순종하는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거룩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는 데 참여해야만 하나 결코 그들의 구원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는 순간 즉시 용서받았고( 1:7; 4:32), 받아들여졌으며( 1:6), 그들의 죄들이 사함을 받았고( 10:43), 구속받았으며( 3:24, 벧전 1:18) 화목케 되었다( 2:16, 고후 5:18).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되었다(3:22; 4:5-6, 고후 5:21).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의롭게 된 근거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구원받았고( 2:8, 딤후 1:9, 3:5),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3:36; 5:24, 요일 5:13).

 

  그리스도인들은 칼빈주의를 믿는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임을 자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비로소 은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진리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고 영원히 안전하지만, 칼빈주의가 가르치는 행위에 의한 구원의 보장은 한낱 헛된 속임수요( 2:8), 허황된 말장난이며(딤전 6:20), 저주받을 다른 복음( 1:8)일 뿐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을 구주로 믿었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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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부 역음, 칼빈주의는 성경적인가?, (말씀본존학회, 1999), p.122.

2) Laurence M. Vance, The Other Side of Calvinism, (Pensacola, Fla.: Vance Publications, 1999, Revised Edition), Chapter 10(pp.555-596).

3) John F. MacArthur,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8), p.98.

4) Arthur W. Pink, Practical Christianity, (Grand Rapids: Guardian Press, 1974), p.16.

5) John M. Otis, Who is the Genuine Christian?, (n.p., n.d.), p.39.

6) Joseph M. Wilson, "Progressive Sanctification, Part ll." The Baptist Examiner, Vol.63:1(January 5, 1991), p.3.

7) Wilson, Ibid., pp.1,2.

8) Iain H. Murray, The Life of Arthur W. Pink.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1), pp.248-249.

9) Arthur W. Pink,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Swengel: Reiner Publications, 1975), p.28.

10)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55), p.155.

11) Pink,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p.28.

12) 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Roman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2), p.292. 이 부분의 인용은 반스 박사의 1991년판 책에서 발췌했음.

13) Loraine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32), p.309.

14) Boettner, Ibid., p.310.

15) John Calvin,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ited by David W. Torrance and Thomas F. Torrance, translated by A.W. Morrison, et al., (Grand Rapids: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59- 1972), Vol.9: 197.

16) Calvin, Ibid., Vol.10:248.

17) Calvin, Ibid., Vol.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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