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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를 정복하여 한참 기세가 올라 있던 이스라엘에게 있어 다음으로 맞닥뜨리게 된 상대 세력은 아이와 벧엘이었다. 성경의 증거대로라면 이 성읍들은 매우 규모가 작아서 쉽게 정복할 만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이 성으로부터 첫 패배를 맛보았으며 군대의 사기면에 있어서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아간의 죄과를 해결한 이스라엘은 심기일전하여 아이 성을 쳤고 이때 아이는 벧엘과 함께 멸망하였다. 이처럼 정복 시대의 한 장을 제공하였던 아이와 벧엘은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통해서도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런데 벧엘을 제외한 아이 성의 발굴 작업을 통해 드러난 결론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어떤 학자는 아이 성의 유적이 성경의 사실을 그대로 증거해 준다고 보는 반면 어떤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는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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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성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유일하게 격파한 성읍이다. 그러나 두번째 공격시에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벧엘은 이스라엘의 전쟁기사에 거의 없거나 겨우 이름만 거론될 정도이다. 여리고와 더불어 아이와 벧엘은 가나안 중부지역의 방어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곳을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부 가나안을 손에 넣어야만 북부와 남부 가나안까지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학자들간에 아이가 여호수아에게 무너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벧엘에 관해서도 여호수아 시대에 점령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본 연구에서는 관련자료를 통하여 아이와 벧엘의 역사성과 파괴 연대 등에 대핸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아이와 벧엘의 위치
1) 아이(Ai) 성의 위치
'아이'는 히브리어로 정관사가 붙은 y[h(하아이, Hai)로 표기되는데, 그 의미는 '폐허', '무더기'이다. 아이 성의 위치는 여리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21㎞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벧엘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3.2㎞ 정도 떨어진 곳이다. 현재는 엣 텔(et-Tell)을 고대의 아이 성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여리고보다 약 1㎞높은 고지대에 위친한다.
2) 벧엘(Bethel)성의 위치
'벧엘'은 본명이 '루스'(창28:19, 창35:6)였으나, 여호수아는 벧엘로 부른다. 히브리어 latyb(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위치는 아이 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3㎞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이곳의 현재 지명은 텔 베이틴(Tell-Beitin)이다.
2. 아이와 벧엘의 멸망
1) 성경적 배경
성경적 배경에서 아이와 벧엘의 멸망 원인을 살펴보려면, 여호수아 8장을 읽어야 한다. 이에 의하면 아이 성에 대한 이스라엘의 첫 공격이 실패한 후 두 성이 연합적전을 폈다(수8:17). 그러나 여호수아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불살라지고 무더기가 되어 버렸다(수8:28).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벧엘을 불살랐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수12:16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멸한 지명과 왕을 언급할 때 벧엘 왕이 나온다는 기록뿐이다.
2) 고고학적 배경
이 부분에서의 중요점은 멸망당한 방법보다는 멸망의 시기일 것이다. 과연 여호수아 시대에 파괴되었는가에 대한 답변이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자.
① 아이 성에 대한 배경 : 아이 성 정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성경의 시기와 판이하게 다르다. 멸망 방법은 늘 방화와 파괴에 의한 것이므로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멸망 시기에 관해 성경의 시기에 동의하는 학자는 가르스탱(J. Garstang) 뿐이다. 가르스탱은 왕상6:1에 근거를 두어 멸망 시기를 주전 1400년경으로 주장한다. 반면 출애굽의 후기 연대를 지지하는 올브라이트(albright)는 근처의 벧엘이 후기 청동기 시대(B.C. 1600-1200)에 파괴된 듯하다는 자료들과 연관시켜서 아이 성도 그 시기인 주전 3000년 중엽에 파괴된 후에는 점령되거나 파괴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일치점에 대해 혹자는 아이 성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② 벧엘 성에 대한 배경 : 벧엘에 대한 성경의 점령 기사는 희박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크다. 켈소(J. L. Kelso)에 의하면 엄청난 대화재와 파괴로 멸망되었으며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처참한 파괴를 당했다고 한다. 파괴 시기에 대해서는, 가르스탱은 주전 1400년경 아이와 더불어 멸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켈소 등은 주전 13세기로 추정한다.
3. 아이와 벧엘의 고고학적 발굴
1) 아이 성의 발굴
최초의 발굴은 가르스탱이 올브라이트와 함께 1928년에 시도하였다. 그리고 크라우제 마르퀘트(Krause-Marquet)가 1933-1935년에 걸쳐 세 번의 탐사를 했다. 다음으로는 칼라웨이 (J. A. Kallaway)가 탐사팀을 이끌고 1964-1972년에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에 의하면, 가르스탱은 후기 청동기 시대의 도기조각을 통해 멸망 시기를 여리고 성과 동시대인 주전 1400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크라우제 마르퀘트와 칼라웨이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나 유뮬이 아이 성에서 전혀 없다고 단정지었다.
2) 벧엘 성의 발굴
최초의 발굴은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이 13세기 초엽에 현재의 '베이틴'을 벧엘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후 올브라이트와 켈소(W. F. Al-bright & J. L. Kelso)에 의해 미국 동양조사연구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와 피츠버그의 크세니아 신학교(Pittsburgh-Xenia Theological Seminary)의 합동 탐사반이 1934년에 발굴하였다. 그 후에는 켈소가 단독으로 1954년과 1957년에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 후기 청동기 시대 제2기인 주전 14-13세기(B.C. 1399-1200)의 성읍과 가옥, 하수구 시설과 기름짜는 틀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여호수아 정복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갈라진 성벽과 불에 탄 재, 약 1.7m 두께로 쌓인 무너진 벽돌더미와 파괴된 가옥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벧엘은 아이 성처럼 고지대에 속하는 데도 군사학상으로 요충지는 아니지만 샘들이 많이 있어서 정착 성읍이 생기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밝혀졌다.
아이와 벧엘의 멸망 시기는 학자들간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정확하게 단정하기 어렵다. 심지어 아이 성의 파괴는 후대의 사사 시대나 왕국 시대의 파괴 사건을 여호수아의 것으로 소급시켰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파괴 시기가 대략적이지만 주전 1400-1200년경으로 추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면 출애굽 연대는 전기설을 지지하든, 후기설을 지지하든 출애굽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이와 벧엘 두 성읍의 파괴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출애굽 연대를 전기 연대(B.C. 1440년경)로 지지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두 성읍이 여호수아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믿는다. 이는 비록 고고학적 발견물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전기 출애굽 연대를 지지하는 많은 자료들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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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 성에 관한 문제점
1) 현재 위치에 대한 문제와 대응
아이 성의 현재 위치는 일반적으로 '엣 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자들 중의 몇몇은 여러 문제점들로 인해 다른 장소를 제시한다. 그 장소들은 무크마스(Mukhmas)의 남동쪽에 위치한 키르벳 하이(Khirbet Hai)와 엣 텔의 동쪽으로 약 2㎞ 지점에 있는 키르벳 쿠드리야(Khirbet Khudriya), 그리고 현재의 데이르 디브완(Deir Dibwan) 남쪽 끝에 위치한 키르벳 하이얀(Khirbet haiyan) 등이 거론되었다. '엣텔'을 아이 성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크라우제 마르퀘트와 칼라웨이가 발굴한 결과, 즉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거론된 세 지역이 1964-1969년 사이의 발굴 작업으로 칼라웨이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 세곳에서는 B.C. 1200년대 이전의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단지 비잔틴과 헬레니즘 이후 시대의 유적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유력한 아이성의 후보지는 B.C. 1200년 초기경의 철기 시대 유적을 지닌 '엣텔'이 가장 유력하다.
2) 아이 성 멸망에 대한 문제와 대응
몇몇 학자들은 아이 성의 멸망 기사는 여호수아를 찬양하기 위해 각색된 것이거나 전대의 사건을 여호수아 시대에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폐허, 무더기'라는 데서 기인한다. 성읍 자체가 폐허이고 무더기인데 어떻게 싸울 수 있었느냐는 주장이다.
둘째, 삽입기사로 보는 것은 벧엘의 발굴 결과 엄청난 파괴의 잔해가 발견되었는데 이 사건과 더불어 아이 성도 같이 여호수아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삽입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아이 성이 B.C. 2000년경에 아모리인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 폐허를 보고 벧엘과 함께 멸망했다고 삽입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없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이'라는 명칭이 파괴되고 난 후에 붙여졌다고 보아도 된다는 견해에 의해 어느 정도 풀릴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은 분명히 사건 발생보다 후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브라이트는 아이의 본래 명칭을 벧아웬(Beth Aven, 현재의 Bethon)으로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아이 성 자체가 이미 B.C. 2000년경에 파괴된 폐허 위에 건축되었으므로 '아이'란 명칭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굳이 이름의 의미로만 아이 성 멸망의 역사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두번째의 삽입 기사는 가르스탱에 의해 후기 청동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근거가 주장되었으므로 역시 아이성 사건을 각색이나 삽입으로 단정짓기 어렵다.
2. 벧엘에 관한 문제점
1) 멸망 시기에 관한 이의
첫째, 수8:17의 근거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 갑작스럽게 벧엘이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칠십인역(LXX)은 '벧엘'이란 단어를 삭제해서 기록하였고, 노트(Noth)는 후대의 삽입으로 보았다. 그리고 조긴(Soggin)은 난해 구절로 이해한다. 이 주장에 대한 또 하나의 성경적인 근거는 삿1:22에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점령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여호수아 8장에서 아이 성은 불타고 그 왕은 죽임을 당했는데, 벧엘 성과 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도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벧엘은 여호수아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사사 시대에 멸망당한 것을 여호수아를 찬양하기 위해 여호수아서에 각색하여 삽입한 것으로 본다.
2) 이의에 대한 대응
벧엘이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여호수아 8장에는 아이 성과 왕에 대한 기사만 언급되어 있다(28,29절). 그러나 벧엘이 아이 성과 함께 점령되었다는 것은 수12:16에 의해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멸한 왕들의 명칭중에 벧엘 왕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벧엘이 성읍은 파괴되지 않은 채 점령되고, 전쟁에 참여했던 왕은 죽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지형적인 위치도 아이와 3㎞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소도시인 벧엘이 혼자서는 이스라엘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아이성과 연합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아이가 이스라엘을 한 번 이겼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수7장)과 여호수아가 매복을 두군데에 세운 사실(수8:3-12)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3만 명의 매복은 아이 성을 뒤에서 공격하고, 5천 명은 벧엘에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배후의 적을 경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벧엘은 아이와 연합작전을 편 것이 확실시된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주장은 당시의 벧엘이 아이의 속국으로서 군사지원을 했다고 보는 견해인데,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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