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성서·

출애굽연대/출12:40,41

제이비젼 2014. 6. 25. 21:49

[º»¹® Çؼ³]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감격적인 날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출애굽의 날일 것이다. 성경은 출애굽의 의미를 여러 각도로 조명해 주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의 구원과 회개의 행위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학자들 사이에는 출애굽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별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 않으나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가깝게 보는 사람은 주전 13세기경으로 주장하기도 하고 멀게는 주전 16세기경의 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중에서 가장 인정받는 견해는 주전 15세기 설이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로는 먼저 성경이 있으며 여리고 유적, 아마르나 서신, 투트모스의 현몽비 등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출애굽 연대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와 주장들, 그리고 비판을 다루고 있으며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ÁÖÁ¦ °­ÇØ]

  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머무른 것조차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존 가르스탱(J. Garstang)과 휘네간(J. Finegan) 등의 학자들이 아마르나 서신들(Amarna Letters)과 텔 에스 술탄(Tell es-Sultan) 유적지 등의 고고학적 자료를 발굴하여 출애굽의 역사성을 밝혔다. 그러나 이 작업의 결과로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출애굽의 연대 문제'이다.


 1. 출애굽 연대의 학설들

 

 1) 이스라엘의 애굽 거주 기간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215년 학설과 430년 학설을 주장한다. 215년 학설은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의 출12:40과 갈3:17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ianus)이 주장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430년 학설은 맛소라 사본의 출12:40과 창15:16, 행7:6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430년 학설을 지지한다.

 

 2) 주전 13세기 학설(후기 연대설)

 이 학설은 고고학자 레프시우스(Lepsius)가 1849년에 처음 주장한 이후 드 루게(de Louge, 1867)와 존 브라이트(J. Bright)등이 계승하였다. 성경적인 근거로는 삼하 5:6-9의 예루살렘이 다윗 왕 때까지 점령되지 못했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고고학적 증거로는 메르넵타 석비(Mernepta stone)를 근거로 이스라엘은 주전 1220년경에 팔레스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3) 주전 14세기 학설

 가르스탱의 여리고 발굴에 불만을 품은 캐드린 케년(Miss Kathleen Kenyon)이 1952-1956년 여리고를 다시 발굴하여 무너진 성벽이 초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판정하여 그 시기를 주전 1300년대로 정하였다. 케년의 여리고 유적 발굴로 내려진 결론은 출애굽이 주전 1440년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여리고 함락 시기를 주전 1350-1300년경으로 여기는 것이며 자연히 출애굽 연대를 주전 1390-1340년경으로 돌린다. 이 학설의 추종자로는 예이빈(S. Yeivin)과 올브라이트(W.F. Albright 1891-1971) 등이 있는데 성경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여리고 성터의 유적의 연대를 유일한 근거로 삼고 있다.


 2. 가장 인정받는 학설-주전 15세기 학설(전기 연대설)

 

 1) 왕상6:1의 증거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 되던 해…솔로몬 왕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이라고 한다. 솔로몬의 즉위는 이스라엘 역사에 의하면 주전 969년이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은 966년에 시작되었고, 여기에 480년을 더하면 출애굽의 연대가 주전 1446년으로 산출된다.


 2) 삿11:26의 증거

 암몬 왕이 길르앗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을 때, "이스라엘이…모든 성읍에 거한 지 300년"이라고 입다가 증언했다. 입다는 사울 왕보다 약 50년 전의 인물이다. 여기에다 사울의 통치 시기인 주전 1050년을 더하면 (300+50+1050)길르앗을 점령한 시기가 주전 1400년으로 산출된다. 여기에다 광야 40년을 더하면 출애굽의 연대는 주전 1440년경으로 추정되어 전기 연대설과 비슷하게 된다.


 3) '텔 에스-술탄'의 여리고 유적

 존 가르스탱이 1930-1936년에 발굴한 여리고의 유적지를 탐색한 결과 지표 아래의 무너진 벽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주전 1400년경이라는 것을 증빙하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출애굽은 광야 40년을 더한 주전 1440년경이 된다.


 4) 아마르나 서신

 1887년 애굽의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에서 농촌 여인의 손에 의해 발견된 설형문자(Cuneiform)로 기록된 378개의 토판이다. 이것이 기록된 시기는 주전 1400년경으로 판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하비루(Hobiru)의 군대가 침입한 것에 대하여 애굽에 군사 원병을 청한 내용이다. 응거(M. F. Unger)는 이 하비루를 히브리인이라고 주장한다. 즉 주전 1400년경 가나안을 침공한 하비루는 여호수아와 함께한 히브리인이고,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는 주전 1440년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3. 전기 연대설에 대한 비판과 대응


 1) 왕상6:1에 대한 비판

 이 구절의 '480년'이라는 햇수는 문자 그대로 480년이 아니고 세대를 나타내는 순환수로서 40년씩 12세대(40×12=480)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브라이트 같은 경우는 한 세대를 25년으로 보아 12세대는 480년이 아니고 실제로는 300년이라고 하며 후기 연대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학설은 주경학적 입장이나 원문의 입장에서 480년이 순환수라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다만 그럴 것이라고 추측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2) 삿11:6에 대한 비판

 전기 연대설은 사사 시대를 335년 정도로 본다. 하지만 후기 연대설은 사사들의 통치 기간을 약 150년 정도로 보기 때문에 출애굽 연대를 주전 13세기로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사들의 실제 통치 기간은 중복되는 경우를 빼고서도 약 400년 가까이 된다고 우드(L. Wood)가 밝힘으로써 역시 무산되었다.


 3) 텔 에스-술탄 여리고 유적에 대한 비판

 가르스탱 박사가 주전 1440년경의 유물이라고 판정했으나 캐드린 케년이 주전 1300년대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어느 것이 분명한가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캐드린의 주장인 출애굽의 연대가 주전 13세기라는 것은 신빙성이 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4) 아마르나 서신에 대한 비판

 후기 연대설을 취하는 학자들도 아마르나 서신이 주전 15세기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내용 중의 '하비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하비루가 히비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하비루는 애굽에 지배를 받는 천민들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의 패거리 들로만 본다. 이런 주장은 전기 연대설자들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러나 주전 15세기에 가나안을 쳐들어간 하비루의 무리 속에 히브리인들이 끼어 있었다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출애굽 당시에는 많은 잡족들이 따라나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출애굽의 연대는 전기 연대설(B.C. 1450-1400)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출애굽의 연대나 출애굽 사건 자체보다도 그 속에 담겨 있는 구속사적인 의미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ÀÚ·á Çؼ³]

  1. 애굽 거주 기간에 대한 두학설


 1) 215년 학설

 첫째,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의 출12:40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430년이라는 기간은 가나안 체류기간과 애굽 체류기간 모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칠십인역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체류 기간을 250년으로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가나안에 이주하고 그 후 25년 만에 이삭을 낳았다. 그리고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이 모든 숫자를 더하면 (25+60+130)215년이 되므로 애굽 거주 기간도 215년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갈3:17의 '미리 정하신 언약'이란 구절도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맺은 언약으로 본다. 그러면 430년이라는 기간은 가나안과 애굽의 체루기간 전부를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 창15:16의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기록에서 한 세대를 100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출6:16-20에 레위에서 모세까지 4대가 기록된 것은 생략법에 의한 것으로 주장하며 430년설을 부정한다.

 2) 430년 학설

 215년 학설을 비판하면서 이 학설의 정당성을 알아보자. 첫째, 출12:40의 기록을 놓고 볼 때, 칠십인역과 맛소라 사본(Masoretic Codex)중에 더 권위있는 사본은 맛소라 사본이다. 출12:40,41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 이라고 기록되었다. 이외에도 수리아역, 벌게이트역, 영역, 한역경도 여기에 준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칠십인역을 고집한다는 것은 사본학상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갈3:17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반드시 아브라함과 맺은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6절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세우신 것"이라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부분은 야곱을 기억하고 언급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창15:16의 4대는 문맥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것을 계산한 것이므로 한 세대당 100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주장이다. 또한 성경의 계보가 가끔 생략법을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출6:16-20에서는 생략법이라기보다는 예언의 정확성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넷째, 행7:6의 "그 씨가…나그네…종을 삼아 400년 동안 괴롭게 하리라"는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종되었던 적이 없으므로, 430년이란 기간은 애굽 체류기간임을 나타낸다. 또한 70명이란 적은 숫자가 약 200만 명 이상으로 성장한 시기가 430년으로 보아도 짧다고 느껴지는데 215년이라면 더 곤란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430년이라는 학설이 합당하다.

 2. 본문 3-5)의 후기 연대설 지지 근거와 비판

 1) 가나안 원주민 문제

 B.C. 1900-1300년경의 요단 동편과 남부 가나안에는 정착민도 없었고 인구 밀도도 희박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과 시혼왕 옥의 저항(민20:14-21; 민21:21-35)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글뤽(Nelson Gluek)이 요단 동편과 아바라 지역을 탐사한 후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하딩(Lancaster Harding) 박사의 집중 탐사 결과 B.C. 1600-1400년경의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므로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2) 하솔의 점령 시기

 후기 연대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고고학적 근거로서 B.C. 1300년 전에는 하솔을 점령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한다. 야딘 (Yigael Yadin) 박사에 의해 발굴된 결과 하솔의 유물은 사사 시대에 파괴된 것이고, 15세기 여호수아에 의해 파괴된 유물은 세번째 지층에서 발굴되었다. 성경에는 하솔이 여호수아(수11:11)와 드보라(삿4장)에 의해 두 번 파괴된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후기 연대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졌다.

 3) 라기스와 드빌의 멸망 시기

 고고학의 근거로 후기 연대설자들은 이 도시들이 B.C. 1239-1200년경에 불로 망했다고 하며, 출애굽 연대는 B.C. 13세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11:13에 의하면 여호수아는 이 산 위의 도시들을 불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불에 탄 흔적은 후대의 전쟁(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B.C. 1234년경에 애굽이 이 지역을 침공한 기록이 있다)에 의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이 증거가 반드시 후기 연대설을 입증한다고는 할 수 없다.

 3. 헬리오 폴리스 신전의 비석

 라암셋의 고대 명칭인 헬리오폴리스에서 투트모스 3세가 라(Ra)신의 신전에 있는 두개의 비석에다가 자신을 '헬리오 폴리스의 주'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라암셋이 왕궁이 아니라 군사기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가 라암셋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 모세와 경쟁자의 위치에 있었던 동시대의 인물)의 재위 기간인 B.C. 1504-1450년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두 비석은 출애굽기 전기 연대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 런던과 뉴욕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고고학적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나안입성 직전기/민22:1  (0) 2014.06.25
광야생활/출15:22  (0) 2014.06.25
출애굽여정/출13:18  (0) 2014.06.25
홍해/출14:29  (0) 2014.06.25
모세/출2:10  (0)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