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성서·

모세/출2:10

제이비젼 2014. 6. 25. 21:47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꼽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모세를 지목한다.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가장 큰 하나님의 그릇을 연상케 한다. 그는 갈대 바구니에서 건져냄을 받아 모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그 이름은 애굽 왕들의 호칭들과도 유관한 것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하여 선택된 탁월한 영도자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첫번째 책인 다섯 권의 율법서 저자로도 알려져 왔다. 그만큼 모세의 사역은 출중한 것이었다. 또한 모세는 변화산상에서 예수님과 대화했던 엘리야와 더불어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야의 사역이 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대변했다면, 모세의 사역은 언제나 죄악된 백성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서 끝없는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사역을 대변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출애굽의 지도자요 이스라엘 민족사의 영웅인 모세에 대하여 기독교와 유대교는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도 그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급진적 비평주의에 속하는 학자들은 모세의 역사성과 출애굽 역사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르낭(Renan)과 스타데(Stade)이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모세의 역사성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1. 모세의 출생과 생애


 1) 모세의 출생 배경과 연대

 '모세'(hvm, Moses)는 야곱과 요셉을 우대하던 셈족 계통의 힉소스(Hyksos)왕조가 멸망되고 애굽 내의 이민족들이 학대받던 시대에 태어났다. 힉소스 왕조를 멸망시킨 아모스(Ahmose B.C. 1584-1560)의 손자인 투트모스 1세(Thutmose I)는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이민족의 신생아를 죽이는 잔인한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국고성 비돔(Pithom)과 라암셋(Rameses)을 짓도록 노예로 인력 동원을 하였다. 이처럼 억눌리던 시대에 레위 자손 중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출2:2). 부모는 모두 레위인인 아므람과 요게벳(출6:20)이었다. 학대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조상들과 세운 언약을 기억케 하셔서 이때 태어난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게 하였다. 모세가 태어난 정확한 연대는 출애굽 연대와 그의 생애에 나타난 성경의 나이를 보고 대략 추산할 수 있다. 전기 출애굽 연대설에 의해 계산하면 출애굽 연대는 주전 1446년경이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의 모세의 나이가 80세였으므로(출7:7), 그의 출생 연도는 주전 1526년경이 될 것이다.


 2) 모세의 생애

 모세의 생애는 성경에 의하면 40년씩 3기로 구분되어 있다. 제1기는 모세가 출생한 때부터 미디안으로 도피하던 해까지로 본다. 모세는 출생한지 3개월 만에 나일 강변이 갈대밭에 버려진다. 이때 바로 왕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나왔다가 모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자기의 아들로 삼는다. 그리고 모세의 친어머니인 요게벳을 유모로 삼아 기르게 하다가 왕궁으로 데리고 갔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어 애굽 문화를 모두 배운다. 요세푸스는 이 시기에 모세가 외국과 전쟁을 하던 원정대의 대장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안 모세는 그 동족을 향한 애정이 싹트게 되고 어느날 그들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쳐죽이고 말았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게 되었다. 이때 모세의 나이는 40세였다(행7:22). 제2는 미디안에서 이드로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는 미디안 생활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다시 애굽에 돌아온 시기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에 모세는 별다른 일 없이 양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호렙 산의 가시덤불 속에서 불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소명을 받게 된다. 이때 모세의 나이는 80세였다(출7:7). 제3기는 출애굽을 위한 활동 시기부터 비스가 산에서 죽기까지의 시기이다(신34:1-7). 이 시기의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수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면서 바로와 애굽의 신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징벌하였고, 광야 40년 동안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율법을 받은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에서 죽었다(120세). 모세는 저술 활동도 많이 했는데, 저서로는 모세 오경과 시편 제 90편을 들 수 있다.


 2. 모세의 역사성


 1) '모세'라는 이름의 기원

 모세의 역사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다. 모세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성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먼저 그의 이름의 기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세(Moses)의 이름에 대한 기원설에는 '애굽 기원설'과 '히브리 기원설'이 있다. 애굽 기원설에서 모세(Moses)라는 이름은 애굽 궁중의 왕 이름인 메스모스(Mes-Mos)에서 유래했다. 즉 메스(Mes)나 모스(Mos)는 소위 궁중의 집권자 명칭(House-hold name)으로서 '아이'(chid), '태어나다'(to be born)의 뜻으로 쓰인다. 왕은 신의 아들로 여겨졌으므로 대개가 애굽신의 이름인 라(Ra) 또는 투트(Thuth)의 자손이란 의미로서 그 이름을 따라 불렸다. 예를 들면 아모스(Ahmos), 투트모스(Thutmose), 라메세스(Rameses)등이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모세의 궁중 이름은 'Ramoses'나 'Thutmose'일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히브리 기원설에서 모세(Moses)라는 이름의 기원을 히브리어 hvm(마샤)로 보는 견해이다. '마샤'는 애굽 어원과 유사한 의미로서 '끌어내다'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모세라는 이름의 기원이 주는 의미는 모세가 애굽의 왕실에 속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근거 자료들

 여기에 소개되는 자료들은 모세의 역사성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되지 못하지만 좋은 참고가 된다.  ① 메르넵타(Mernephta) 비석은 후기 연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자료이다. 메르넵타는 주전 1224-1216년에 통치하던 왕인데, 그의 전승 기념비에 "이스라엘의 백성은 멸망하고 그 자손은 없어졌다." 고 기록되어 있다. 후기 출애굽 연대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비문이 출애굽의 사건을 왜곡하여 미화시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② 모세의 출생과 비슷한 설화로, 갈대 상자에 든 아기가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구조되어 성인이 된 이야기는 모세 이전 시대에도 있었다. 가장 유사한 설화는 악카드(Akkad)의 사르곤 1세(Sargon I)의 이야기다. 사르곤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구조되어 후에 악카드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모세의 출생 사건에 대한 약간의 신빙성을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③ 애굽과 이스라엘의 엯 속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있었음이 인정되고 있으며, 애굽의 역사에서는 모세를 기른 바로의 딸이 실재했다는 데서 모세의 역사성을 추정할 수 있다. 모세를 기른 바로의 딸은 투트모스 1세(Thutmose I)의 딸인 핫셉수트(Hatshepsut)로 밝혀져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④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의 결혼의 사실 여부인데 고고학적으로 미디안의 존재와 그들의 성전을 발굴해냄으로써 당시 미디안에 제사장이 있었음을 증명하였다(G. Cornfield의 「성서 고고학」). 그 결과 모세의 존재와 그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사실로 인정되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모세의 출생과 생애 그리고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몇 가지의 고고학적 역사적 자료들도 알아보았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모세에 대한 분명한 고고학적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비그리스도인들까지도 모세의 존재를 알고 인정한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 주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출애굽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승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모세는 신약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만큼 그의 역사적 실존성은 결코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1. 힉소스(Hyksos)왕조

 1) 기원 : 힉소스 왕조의 창시자는 애굽인이 아닌 이민족이었다. A.D. 1세기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힉소스 왕조의 창시자를 이스라엘 사람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는 힉소스족의 근원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단지 셈족 계통의 아시아인이라는 것만 인정하고 있다. 'Hyksos'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Hyk과 sos의 복합어로서 Hyk은 '왕'(King)을 뜻하며 sos는 '목자'(shepherd)를 의미하여 'King-Shepherd'의 뜻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휘네간(J. Finegan)의 견해로 애굽어에서 Hyksos의 원래 의미는 '이방의 통치자'(rulers of foreign lands)를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2) 힉소스의 통치 : 힉소스는 B.C. 1700년경부터 약 150여년간 애굽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민족인 힉소스는 애굽의 종교와 생활을 그대로 수용하는 정책을 사용하여, 오히려 애굽인의 환영을 받기까지 했다. 레온 우드(Leon Wood)에 의하면 이들은 애굽신인 셋(Seth)과 라(Ra)를 섬겼다고 한다. 통치구역은 주로 북애굽(Lower Egypt)이었으며, 수도는 아바리스(Avaris)였다. 이 왕조는 애굽의 18왕조의 강력한 아모스(Ahmose B.C. 1584-1560)에의해 붕괴되었다. 그 후 므깃도에서 애굽에 대항하던 힉소스는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에 의해 완전 섬멸됨으로써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3) 성경과의 관계 : 어떤 학자들은 힉소스 왕조와 요셉을 연결시켜 주장한다. 요셉은 잡범으로서 매 40대를 맞고 재판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의하면 매를 맞거나 재판받은 흔적이 없다. 그리고 특수 감방인 정치범, 장관범이 갇히는 곳에 갇혀 있다가 나오자마자 재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볼 때, 셈족 계통의 힉소스는 같은 셈족인 요셉을 매우 우대하여 재상의 자리에 앉히고 야곱의 가족도 비옥한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출애굽 전기 연대설(B.C. 1446)의 근거

 1) 왕상6:1의 근거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 되던 해…솔로몬 왕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년"이라고 기록된 것에 근거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 의하면 솔로몬왕이 즉위한 시기는 B.C. 969년이다. 따라서 성전 건축은 B.C. 966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다 본문의 480년을 더하면(966+480) B.C. 1446년이 된다.

 2) 삿11:26의 근거 : 암몬이 이스라엘에게 길르앗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때, 사사 입다가 증언한 "이스라엘이…모든 성읍에 거한 지 300년"이라고 대답한 것에 근거한다. 입다는 사울보다 약 50년 전의 인물이다. 그리고 사울은 B.C. 1050년경부터 통치했다. 이 모든 연수를 더하면(300+50+1050)B.C. 1400년경이 되어 전기 연대설(B.C. 1446)과 조화된다.

 3) 여리고 유적발굴 : 가르스탱이 1930-1936년 발굴한 텔에스 술탄(Tell es-sultan)의 고대 여리고 유적을 발굴한 결과, 이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서 B.C. 1400년경에 파괴된 것으로 보고됐다. 이 연대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을 더하면 B.C. 1440년경이 되어 전기 연대설과 비슷하게 된다.


 4) 투트모스 4세의 현몽비 :

 B.C. 1423-1410년에 애굽을 다스린 왕으로서 가신이 왕이 되어야 할 운명과 신탁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꿈에 스핑크스 신이 현몽하여 장차 애굽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그 표시로 발 밑의 모래를 깨끗이 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아멘호텝 2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계승하여 왕이 되기 위한 하나의 표적으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죽은 바로는 B.C. 1448-1423년에 애굽을 다스린 아멘호텝 2세가 되므로 출애굽 시기가 B.C. 1446년 시기와 맞게 된다.


 3. 모세의 전쟁기록

 핫셉수트의 보호 아래 자란 모세는 애굽의 궁중 학문을 다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 중요한 궁중 교육에는 군사학, 역사학, 웅변술 등이 있다. 「유대고대사」를 기록한 요세푸스는 당시 모세가 애굽을 쳐들어온 이디오피아의 침략을 막는 애굽 군대의 장군으로 선발되어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4. 메르넵타 비석

 메르넵타는 B.C. 1224-1216 혹은 B.C. 1238-1228년 기간에 애굽을 통치한 왕으로서 자신이 승리한 전쟁 기록을 비문으로 세웠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란 명칭이 나오고 이스라엘도 황무지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후기 연대설은 이때 출애굽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비견될 만큼 조직이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자료는 출애굽이 B.C. 1200년경보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국가나 그에 비견할 조직체로 성장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도 전기 연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 고고학적 성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나안입성 직전기/민22:1  (0) 2014.06.25
광야생활/출15:22  (0) 2014.06.25
출애굽여정/출13:18  (0) 2014.06.25
홍해/출14:29  (0) 2014.06.25
출애굽연대/출12:40,41  (0)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