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아담의 가정에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아들을 주셨는데 그가 곧 셋이다. 셋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다. 그가 언약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대체로 믿음의 가계(家係)를 이어가며 경건하게 생활했다.
온 인류가 죄악으로 타락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갔던 에녹이나, 온갖 비방을 무릅쓰며 방주를 지어 다가올 심판을 대비하였던 노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건성은 결코 인간의 의지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셋의 후손들이 살아 갔던 세대의 현상은 오늘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니 더욱 괴악하고 패역한 세대에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이 사특한 세상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악한 사람이 행악된 자손을 낳는다는 법칙은 없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계승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가인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하여 믿음의 가계(家系)를 유지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 세 번째 아들 셋을 생산토록 하셨다. 그러면 셋의 후손들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1.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셋
1)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에서 아벨의 제사만 흠향하신 하나님은 가인이 믿음의 대를 이을 합당한 인물이 아님을 아시고 셋을 선택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의 혈통, 즉 구속사의 역사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자가 아닌 적자의 선택인 이삭, 장자가 아닌 차자의 선택인 야곱,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의 선택 등에서 구속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는 혈통적, 육체적, 행위적, 상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 의지 속에서의 선택이다.
2) 절대적인 은총에 의한 선택
하나님은 셋이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보지 않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셋을 선택하셨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상대적이 아니다. 즉 지위에 의한 선택도, 학식에 의한 선택도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내용과 형태, 조건을 능가하는 섭리에 의한 선택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모든 것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은총에 의한 선택이다. 인간은 누구를 선택할 때 외모나, 학식, 혈통 등으로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기이하고, 인간의 의사를 초월하기에 절대적인 은총인 것이다.
2. 셋의 후손들
1) 장수의 축복을 누림
성경에서 노년까지 삶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경건의 보상, 계명을 잘 지킨 자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언급된다(욥5:26). 구약시대 초기의 인물들은 현재의 인류에 비하여 수백 년의 삶을 더 영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그들의 장수한 삶은 상당한 논쟁거리이지만(욥5:26) 구약시대 초기 그러한 논쟁에 대한 옹호적인 답변은 설득력이 없다. 주석가 베이커(Baker)는 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구약 초기 사회의 장수는 오늘날과 다른 특수한 기후와 건강한 신체 덕분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장수는 세계에 인구를 퍼뜨리는 공헌을 하였으며 타락과 부패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놀라운 생명을 유지했던 인류는 타락과 부패로 인한 죄악으로 나이가 점차 줄어들어 현재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2) 경건한 후손들
인류의 타락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경건의 모습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영적이나 윤리적으로 타락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왔던 그들이 에노스 시대에는 하나님을 인지하는 단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에녹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의롭게 살다가 승천(昇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고 표현한다(히11:5). 므두셀라와 라멕 등 셋의 후손들은 타락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갔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셋 이후 인류의 타락
1) 타락하는 인류
인간의 수명이 수백년을 살게 됨으로써 인류는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 타락과 죄악의 심각한 양상은 노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덕적·윤리적 위기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恨歎)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라고 표현함으로써 타락의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이 타락을 멈추게 되는 것은 생명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느낄 때 비로소 가능하며 경건한 삶을 유지하게 된다. 타락이 극대화되고 인생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심판에의 불감증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셋 후손을 제외하고는 날이 갈수록 타락이 심화되어 갔다.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할 정도라면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범죄하는 인류
자신의 타락은 남을 상해하고 탈취하는 범죄적인 행위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셋의 자손들은 믿음을 지켜 나갔으나 그외의 사람들은 구제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구약성서의 초기 시대에 있어 노아의 홍수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 등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타락함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사랑으로 인내하고, 권고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심판은 어느날 갑자기 매우 엄격하게 집행된다. 만약 셈의 후손들이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타락과 범죄를 쉬지 않았다면 그들은 도덕적 불감증과 더불어 양심이 화인맞아 선악을 구별지을 수 없는 단계에 있었을 것이다. 범죄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자신의 행위를 구분짓는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우상숭배를 비롯한 각종 죄악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하나님이 가인을 택하지 않으시고 셋을 선택하여 믿음의 가계를 전승시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가인을 택하여 훈계하고 인도하여 새로운 길로 이끌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종종 이런 기이한 양태를 보여준다. 셋과 더불어 그 후손들이 믿음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이런 전통적인 사역 안에서만 가능했다. 수많은 타락하고 범죄한 인생 속에서 믿음의 정결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기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기독교인을 위한 지상명령이다. 그러므로 후손들처럼 죄악된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정체(identity)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해야 하겠다.
1. 가인과 셋의 족보 대조
창4,5장의 족보는 첫째로 인종 발달에 대하여 알려 주는 동시에 둘째로 구속 운동을 최소한도로 보여 주고 있다.
1) 가인 계통에서 실현되는 신속한 죄악의 발달을 보여줌
가인 계통에서는 물질 문명이 발달하게된다. 그것은 역시 자연 은총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연 은총이 아담의 범죄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오용되어 죄악 발달을 증가시켰다. 다시 말해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회개치 않고 아벨을 죽였고, 그 죄책은 지지 않고 죄악으로 인한 징벌만 걱정하였다.
그 후 가인의 아들 에녹은 자신을 위하여 성을 쌓았고 그의 7대손에 이르러 목축, 음악,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들 문화의 발달은 자연 은총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라멕은 검가(劍歌) 곧 살인의 노래를 불렀으며(창4:23,24) 일부일처주의를 변경시켜 일부다처주의로 바꾸었다.
2). 셋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
창4:25-5:32은 자연의 문화 발달에 대한 언급은 없고 하나님의 구속 운동에 관하여만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어떤 민족을 사용하셔서 문화를 발달시키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민족들을 종교면으로 사용하시는 현상이다. 후대에도 헬라인들은 예술을 발달시켰고, 로마인들은 법률과 정치를 발달시켰으며, 가인의 민족들은 모두 문화 방면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앙과 종교면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이들 계통의 인물들과도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가인과 아벨이 대조되어 있음과 같이, 가인의 아들 에녹(창4:17)과 셋의 아들 에노스(창4:26)가 서로 대조되었다. 그리고 7대에 이르러 이 대조사실이 정점적(頂点的)으로 나타났으니, 셋의 자손 에녹(창5:21-24)과 가인의 자손 라멕(창4:23,24)과의 대조를 이룬다. 셋의 자손 에녹의 생애에 나타난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면 죽음에서 구원받는다는 계시(啓示)이다.
그리고 셋의 자손 라멕이 노아의 출생을 보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5:29)고 하였는데 그것은 저주에서 구속됨을 원하는 사상이다. 이것은 가인 계통의 사람들의 사상과 대조되는데, 가인 계통의 사람들은 '저주'란 것을 느낄 줄 모르고 다만 문화 발달로 위안을 얻으려고 한 것과 대조된다.
2. 두 계보에 대한 비평
1) 가인의 후손
에발드(Ewald)와 벨하우젠(Wellha-usen)은 가인이란 이론을 내놓았다. 그들의 이론 근거로서는 창4:14이하에 말한 대로 가인이 땅에 유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캔족은 일정한 지역에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유목생활을 한 민족이기 때문에 가인의 후대 족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학설을 용납하지 않는다. 창 4,5장은 가인의 자손들은 유목민족이 아니고 도시 건설과 공업과 음악에도 종사하였다고한 고등 비평가 스키너(John Skinner)는 위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2) 셋의 후손
본 라드(Von Rad)는 창5:4-29에 있는 셋의 자손 열 사람의 족보 기사가 바벨론 태고 시대 왕들의 족보와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양자가 꼭 같지는 않으나 바벨론 족보 기사에도 제7대손은 에녹처럼 신(神)들의 세계에 끌려갔다고 하였고, 또 제10대손은 노아처럼 홍수 기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론 내리기를 창세기 족보가 바벨론 족보에 비하여 신화적(神話的)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고등비평가들의 의견을 추종하여 창5:4-29의 족보는 포로 후 시대에 소위 제사문서(P) 기자가 썼다고 한 것은 큰 잘못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여기 셋 자손들의 족보와 앞 장의 가인 계통의 족보를 본래 동일한 족보에 대한 두 기자(소위 여호와 문서 기자와 소위 제사 문서 기자)의 기록이라고 함으로 고등 비평의 과오를 범한 것이다.
3. 셋의 위치
야훼 기자(J)의 계보 속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창4:25)이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 제사문서 기자(P)의 계보에 의하면 셋은 아담의 맏아들이었음을 추측해 낼 수도 있다(창5:3-8; 대상1:1; 눅5:3-8). 그러나 J설화 속에서 셋은 살해된 아벨의 보상으로 하나님이 이브에게 주신 은혜로운 선물로 나타나 있다. 즉 이브는 그를 셋(sgeth)이라고 명명하였는데, "하나님이 네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에서 '주셨다'라는 동사는 'sheth'이다. 따라서 형제 아벨 대신에 태어났기 때문에 셋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어원학상 이러한 설명은 부적절하면 문법적인 문제들을 야기시키기도 하고 원래 단순한 유사음에 의존했을 수도 있다. 몇몇 신학자들은 셋이란 이름은(민24:17) 이집트의 자료와 설형 문자의 자료를 따르면 B.C 2000년대에 농민들을 괴롭혔던 아람유목민들인 스티(suti)와 관련지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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