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불붙은 신학!
나는 이번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1899-1981)의 저서와 설교집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20대 중반에 이미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의 왕립의학협회회원이 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얻고 싶어 하는 그런 좋은 조건들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나, 또는 그 유명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30년 동안 설교자로 봉직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를 둘러싼 이런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같이 평범한 설교자들에게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조금만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평소에 소극적인 설교를 주창하던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그가 보여준 설교의 적극성이 놀랍다. 

설교란 무엇입니까? 불붙는 논리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성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 진리와 관련된 이성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신학입니다. <중략>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 감정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단에 설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므로 강단에 서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로이드 존스, 설교와 설교자, 복있는 사람, 151쪽. 이하 ‘설교’)

설교가 불붙은 신학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 감정 없이 설교하는 사람은 강단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니, 웬 날벼락인가? 물론 그의 주장을 설교자가 사명감에 불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는 지금 훨씬 근원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불붙는다고 해서 “성령의 불을 받아라!” 하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감정을 실어야 한다고 해서 울고불고 하는 식으로 설교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설교자의 주관적인 감정에 치우친 설교의 위험성을 자주 경고했다.(마틴 로이드 존스: 베스트 설교, 138쪽. 이하 ‘베스트’). 로이드 존스가 표면적으로는 열정적인 설교를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며, 그의 설교는 듣기에 따라서 매우 냉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붙은 신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이해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인간 자신에게서 발현하는 자기 확신이나 주관적인 열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복음의 고유한 세계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떤 영적인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 놀라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흡사 물에 빠진 사람이나 화염에 휩싸인 사람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모든 영적인 에너지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자신도 없고, 세상도 없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전적으로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설교할 수 있겠는가?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불길에 휩싸여 자신의 전존재를 그것에 걸어두고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의 외침을 다시 들어보자. 

제 눈은 천국과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얼마나 정결합니까! 얼마나 거룩합니까!(진정한 기독교, 복있는 사람, 169쪽. 이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이하 ‘핵심’). 

아마 많은 설교자들이 “나도 하나님만을 설교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한국에도 로이드 존스를 흉내 내는 설교자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무늬는 실체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이 설교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설교는 흔하지 않다. 이게 바로 우리 설교의 위기이며, 더 나아가 교회의 위기이다. 

하나님 중심의 설교가 무엇인지 한수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숙독하시라. 그의 설교는 공중곡예 비행사처럼 어느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성서 텍스트를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과 그의 구원행위에 집중하고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하고, 하나님을 설교하지 않는 설교의 특징을 먼저 짚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야만 복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에 불붙은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보여주는 특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종교 버라이어티 쇼
하나님 중심의 설교와 반대되는 설교는 사람 중심의 설교다. 너무나 당연해서 시시하게 들릴지도 모를 이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바르트의 신학명제처럼 매우 엄정한 사태를 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줄타기하는 사람처럼 중심을 잘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청중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구원 행위를 선포하는 걸 설교라고 생각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은 도구적으로 이용될 뿐이고, 실제로는 사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는 주제를 설교한다고 하자. 우리는 어디에 중심을 놓고 설교하는가? “하나님”인가, “당신”인가? 아마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설교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거의 “당신”이다. 그 당신을 어떤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만이 설교자의 유일한 관심으로 작동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찬송이 한국교회에서 각광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의 문제점으로 제기하고 있는 요소들을 살펴보면 이런 미묘한 맥락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에 기울어져 있는 오늘의 교회가 예배를 종교적 오락으로 끌어간다고 지적했다. 종교방송을 다룬 어떤 티브이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서 그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러니까 시청자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들이 알고 이해하며 감상할 만한 내용을 제시해 주면서 오락적인 요소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코미디와 새로운 음악을 곁들인 25분짜리 종교 버라이어티 쇼입니다.” 재미있는 장면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일종의 종교적 오락이 제공되는 것입니다.(승리하는 기독교, 465 쪽. 이하 ‘승리’). 

로이드 존스의 이런 지적 앞에서 청중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급급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오늘 우리의 예배와 설교가 얼마나 심각하게 오락 프로그램처럼 변질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청중들에게 종교적 만족감을 주기 위한 이벤트들이 교회 안에서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교회는 문화센터나 상담소,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소명과 임무는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며, 그들을 마비시키는 원인을 찾아내 치료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지성이나 감성이나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에 있습니다. 영혼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며 삶의 중심입니다.”(진정한 361). 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영적인 현실들이 아닌 것들을 완벽하게 제거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간증을 종교적 오락이라고 일갈한다.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설교 26). 

교회가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럽고, ‘적극적인 사고방식’ 역시 단순히 심리치료에 불과하다.(설교 92). 물론 은사체험 같은 것들도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는 심지어 설교 후에 청중들을 강단 앞으로 나와 결단하도록 초청하는 것도 역시 작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이 인간의 필요에 호소하는 설교방식은 사교(邪敎)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싶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영광의 기독교, 98쪽. 이하 ‘영광’).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로이드 존스의 주장이 결벽증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는 그가 설교 행위에서 인간적 요소를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여기서 인간적인 요소라는 말은 설교행위에서 인간학(anthropology)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의학도인 로이즈 존스가 그렇게 생각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상황을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설교자다. 그의 주장은 일종의 대중추수주의(populism)에 대한 경고이다. 요즘 일부 설교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수요자 중심의 설교에 대한 경고라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설교와 예배를 위해서 그는 우리나라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는 온정주의도 배격한다. 청중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청중 개개인의 삶을 설교에서 거의 배려하지 않는다.  


필자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읽으면서 여러 번 놀랐다. 한 번은 앞에서 말한 대로 그가 보여준 설교의 적극성이며, 두 번째는 지금까지 필자가 작업한 ‘설교비평’의 대부분이 그의 입장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들뜬 기분으로 한 마디 한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 


세 번째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설교는 대중적인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나는 사람의 기분을 맞추거나 자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만을 고집스럽게 설교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한 로이드 존스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 저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강해설교와 조직신학 
나는 이번에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강해설교의 위력을 톡톡히 경험했다. 물론 한국에도 강해설교자로 정평이 난 목사들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허점이 많았다. 그들은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깊이를 충분하게 찾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서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의 일관성도 자주 흔들렸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기상 2004년 12월, 2005년 4월, 9월)를 참조하라.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가 그와 유사한 한국의 여러 강해설교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확보한 이유는 놀랍게도, 아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설교가 철저하게 신학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나는 ‘설교는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라는 것을 일반 명제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서로 관련이 없는 본문을 각기 따로 설교할 때에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합니다. 설교자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런 상황을 피하고 각 설교 유형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신학에 토대를 둔 설교를 해야 합니다.(설교 101). 

로이드 존스에게 신학은 구체적으로 조직신학을 가리킨다. 조직신학이 설교에서 왜 중요한가 하는 점은 필자도 여러 번 밝힌 적이 있는데, 로이드 존스는 역시 설교 대가답게 설교와 조직신학의 관계를 필자보다 훨씬 명료하게 설명한다. “성경에서 끌어낸 진리의 총체인 조직신학이 언제나 설교의 배경을 이루면서 중심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설교 103). 옳은 말이다.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전체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의 부분에 치우치다가 결국 전체의 중심을 놓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분들은 로이드 존스의 이런 주장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대충 그러려니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는 신학교 시절에 배웠던 조직신학이 설교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경험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한편으로는 조직신학에 대한 오해와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다. 조직신학에 대한 오해는 조직신학을 단지 기독교 도그마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분과(分科)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오해도 없다. 조직신학은 자기의 현학적 논의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영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예컨대 의로움에 관한 논의인 칭의론은 단지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관계에 관한 해명이다. 이런 영적인 관계를 실제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설교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라 할 영적인 현실(spitual reality)에 직면할 수 있다. 설교 행위에서 이런 영적인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에 대한 오해는 설교를 단지 종교적 훈화의 차원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이 은혜받기를 원한다. 매우 당연한 듯이 보이는 이런 논리에는 근본적인 함정이 있다. 우선 설교자는 기본적으로 은혜의 원천과 그 결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물론 은혜 받은 사람은 예배 출석을 잘하고, 헌금을 잘 드리고,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고, 조금 더 나가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런 걸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은혜가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경우가 있지만 이게 곧 정답은 아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은혜인지는, 또는 그에게 그 은혜가 어떤 결실로 맺어질는지는 설교자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헤아리는 성령만이 아신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이런 성령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뿐이지 그 은혜의 결과까지 결정해줄 수는 없다. 많은 설교자들이 일종의 신앙 방법을 은혜의 결과와 일치하는 것처럼 설교하는데, 이런 방식이 곧 훈화적 설교의 특징이다. 조직신학은 이런 데 봉사하지 않는다. 조직신학은 은혜 받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데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의 조직신학적 토대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치우쳐 있는 방법론적 설교 공부와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조직신학적인 설교와 방법론적인 설교가 얼마나 상반적인지 평자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대신 로이드 존스의 뜨거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설교 184) 그는 근본적으로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훈련받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비디오로 녹화해 놓고 자신의 몸짓이나 그 밖의 요소들을 살펴보는 식의 현대적인 개선책도 저는 아주 싫어합니다. 이른바 ‘강단 처신법’이나 ‘텔레비전 처신법’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할 말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순전한 매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설교 185). 

매춘행위라! 설교자도 매춘부로 전락할 수 있다는 로이드 존스의 이런 독설이 우리의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지만, 옳은 걸 어쩌겠나. 오늘 우리의 설교공부는 거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심리학에 치우쳐 있다. 스토리텔링이나 귀납법적 설교를 배우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다채로운 설교 자료를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 모든 노력들이 청중들의 마음을 붙들려는 하나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의 설교행위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에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았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 통치에 대한 인식론적 통로라 할 조직신학적 통찰이 없는 설교는 결국 청중의 마음을 사려는 데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반면에 성서의 총괄이라 할 조직신학적 사유 안에서 영적인 현실성들을 또렷하게 확보할 수 있다면 매순간 예민한 영감으로 빼어난 시를 창조해내는 시인처럼 훨씬 풍부한 설교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 무용론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특히 조직신학이 버린 자식 취급을 당하는 우리의 목회와 설교 현장에서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가르침을 전달한 것만으로도 이번 글쓰기의 수고는 헛되지 않은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실
내가 보기에 로이드 존스는 조직신학적 강해설교라는 고유한 설교세계를 개척한 사람이다. 누구나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으며, 더 나아가 비슷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로이드 존스처럼 설교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다른 설교자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대중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웅변가다운 연설솜씨가 여기에 한몫 톡톡히 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로이드 존스만의 독특한 수사학이 훨씬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것은 곧 “변증법적 접근방식”이다. 그는 어떤 명제를 제시한 다음에 그것을 무조건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되는 질문을 불러들임으로써, 청중들을 자신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청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의 영적인 시야에 나타나는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산헤드린 연설 마지막 대목에서 강조한 순종의 필요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설교를 이어갔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 좋습니다. 저도 당신들의 복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종교에 관심이 있지요. 그래서 다른 종교에 대한 책들도 읽고, 기독교에 대한 책들도 읽습니다. 또 이 종교의 내용과 저 종교의 내용을 비교 평가하기를 즐기지요. ... ” 아닙니다. 복음은 이처럼 견해만 표명하고 넘길 대상이 아닙니다.(승리 263). 

그의 설교는 대체로 이렇듯 ‘정반합’의 구도로 진행된다. 한 군데만 더 인용하자. 이방인인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혹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합시다.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오래 전의 역사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겁니까? 가난과 다툼과 고통과 슬픔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차라리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주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습니까? ... ” <중략>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합니까?(영광의 기독교, 96쪽. 이하 ‘영광’). 

드라마틱한 휴먼 스토리나 배꼽 잡는 우스갯소리도 없고, 그렇다고 귀신 쫓아내는 카리스마도 없는, 거꾸로 조직신학적인 토대에서 전개되고 있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청중들을 향해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청중들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사람은 궁금해질 때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로이드 존스 설교의 강점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도그마에 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다. 단지 호기심이 아니라 영적인 심층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그는 청중들에게 성서와 신학의 놀라운 세계를 활짝 열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노파심으로 다시 말하거니와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결코 방법론이 아니다. 평자가 그의 설교에 이름붙인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그의 설교행위에서 발생한 훨씬 근원적인 사태에 의한 결과이지 기술이 결코 아니다. 이 근원적인 사태야말로 청중들을 성서 텍스트와 기독교의 진리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결정적인 요체인데, 그것은 곧 그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이 실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붙든다면, 여러분의 경험과 삶 전체가 바뀔 것입니다.”(담대한 기독교, 420쪽. 이하 ‘담대한’). 여기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실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우선 바둑을 모르는 분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여기 조훈현 씨와 이창호 씨가 둔 바둑 기보(棋譜)가 있다고 하자. 이 기보를 표면적으로만 보면 혼란스럽게 나열된 흑백의 일련번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둑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이 기보 안에 숨어 있는 무한한 길(道)이 들어온다. 그런데 바둑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길, 또는 수도 역시 보는 사람의 기력에 따라서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성서 텍스트는 일종의 기보와 같다. 설교자는 청중들을 이 기보 안에 숨어 있는 수많은 길로 끌어들이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리얼’한 그 세계로 말이다. 


로이드 존스가 사도행전 7:1-29절을 본문으로 물경 500쪽이 넘는 설교를 끌어갈 수 있었다거나, 심지어 딤전 1:12절, 한 절을 본문으로 열 한번이나 설교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 안에 무한하게 숨어 있는 복음의 길들이 그의 영적인 시야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이런 방식의 연속 강해설교가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지 텍스트의 영적인 심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은, 그래서 영적인 현실들을 포착해낼 수 있는 능력은 설교자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축자영감설 
필자는 조직신학적 토대와 깊은 성서읽기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꿰뚫고 있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을 읽는 동안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대부라 할 칼 바르트의 신학서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 두 사람 모두 어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설교와 신학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교의 조직신학적 토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신학적(교리적)이라는 것은 당연하며, 또한 소위 ‘말씀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바르트의 글이 설교와 진배없다는 사실은 그의 초기 작품인 <로마서>만이 아니라 말년의 <복음주의신학 입문>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많은 신학생들은 바르트의 글이 설교인지, 신학인지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바르트보다 10 여년 후에 태어난 로이드 존스가 칼 바르트의 신학적 착상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높다. 설령 그런 계기가 구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간학적 구도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관점은 두 사람에게 거의 비슷한 무게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인간의 윤리, 계몽, 종교성에 신앙의 무게를 둔 19세기의 문화 개신교주의, 또는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 성서, 계시 중심인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로이드 존스는 바르트를 자기와 같은 복음주의 계열 안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를 훌륭하게 비판한 까닭에 참된 복음주의자로 평가를 받았습니다만, 물론 그는 한 번도 복음주의자인 적이 없었습니다.(복음주의란 무엇인가, 36쪽. 이하 ‘복음’).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복음의 차원에서 다를 게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가 바르트를 “한 번도 복음주의자인 적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불가사의이다. 설교의 세계적 거장에게도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적 한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가 주장하는 복음주의, 나에게는 매우 배타적으로 보이는 복음주의가 무엇이기에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이드 존스가 빌리 그레이엄을 비판하고(복음 33), 존 스토트와도 결별할 정도로 분리주의적 태도를 보인다는 말인가?   


세 번에 걸쳐 행한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에서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를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핵심은 소위 “성서축자영감설”이다. 그는 성서가 문자의 차원에서 완전하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며,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모든 명제는 진리이고, 초자연적인 보도도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진화론과 고등비평은 배격되어야 한다.(복음 16). 나는 여기서 축자영감설 논쟁을 본격적으로 재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축자영감설의 교리사적 배경에 대해 한 마디만 지적하겠다.  


정통주의가 축자영감설을 도그마화한 이유는 마틴 루터의 “오직 성서” 슬로건과 칼빈의 “성령의 내적 조명” 개념이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루터와 칼빈의 성서관에 따라서 축자영감설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오해한 결과이다. 루터는 성서만이 아니라 교회가 신앙의 기준이 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오직 성서를 내세웠으며, 칼빈은 성서 해석이 사제와 교황에게만 주어졌다는 주장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그 해석의 주체를 성령에게 돌린 것이다. 루터와 칼빈이 처한 이러한 “삶의 자리”를 전제한다면 그들의 신학에서 축자영감설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엄청난 왜곡이다.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문서라고 혹평을 할 정도로 성서에 대해서 열려 있었다.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가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여러 말을 할 생각이 없다. 그가 내 꿈에라도 나타난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본격적인 논쟁은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훗날을 기약해야겠다. (하늘나라에서도 신학논쟁이 가능하려나?). 대신 여기서는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끼친 두 가지 오류만 제기하겠다. 하나는 그가 오늘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학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로이드 존스가 아담으로부터 예수까지의 역사를 4천년으로 본다는 것은(영광 253) 축자영감설이 불러온 비극이다.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그는 사도행전 1:10,11절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분은 가실 때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육체를 가지고, 볼 수 있도록, 하늘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진정한 33).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명제이다. 물론 각각의 명제는 옳다. 그러나 하나로 묶이면 우스운 그림이 된다. 만약 예수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대체 몇 명이나 그 사건을 알아보겠는가? 이런 보도는 우리에게 은폐된 전혀 다른 생명 세계를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서 시작될 새로운 세계는 이런 방식으로밖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묵시사상의 표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절대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은폐되어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책임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2천 년 전 성서기자들에게 이해된 그 영적인 세계를 그들이 처한 삶의 지평에서 풀어내야 한다. 구름, 천사, 하늘이 그 당시에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무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인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 

“나쁜 세상”
로이드 존스가 계몽이후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알고 있을만한 초보적인 문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대주의적 사고방식인 4천년 역사와 (뜬)구름 이야기를 자신 있게 전하는 건 아니다. 의학도인 그가 이처럼 반과학적인 진술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축자영감설 이전에 “나쁜 세상”에 대한 경험이 로이드 존스의 신학을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문제를 단정적으로 언급할 입장은 못 된다. 로이드 존스를 연구하고 있을 후학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지 로이드 존스의 위대한 설교가 결국 분파적이며 소종파적인 기질을 보인 이유가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세계를 향한 적대감의 결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바로 이 대목이 내가 존경할 뿐만 아니라 배울 게 많은 분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로이드 존스와 더 이상 함께 길을 갈 수 없는 한계선이다. 소박한 마음으로, 혹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축자영감설을 신봉하는 것까지는 좋다. 내 딸들이 어렸을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제로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딸들과 나의 대화에서 문제가 아니었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그가 이 세상을 악하게 보는 데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이 온통 썩었다. “주변 세상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주일에 단 한 번의 설교로 끝내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진정한 19). 그는 교회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상이 밉다고 한다. 그래서 설교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과격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리건대, 저는 살아있을 때는 예배당을 한 번도 찾지 않다가 자신의 장례식에서는 찬송가를 불러주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신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거부합니다.”(진정한 227). 그는 현대적인 모든 것들과 투쟁한다. 철학은 물론이고 거듭남의 교리를 부정하는 현대신학도 용납될 수 없다.(진정한 211). 휴머니스트들도 예수와 상관없으면 예수를 대적하는 것이다.(진정한 95).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도착행위를 눈감아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합법화시켜준다.(승리 23). 

성경이 현세의 삶에 관해 어떻게 묘사하는지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육욕과 정욕의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이러한 삶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성으로 그 안에 있고, 그 안에서 태어나며, 그것을 유업으로 물려받습니다. <중략> 그것은 육욕과 정욕과 자랑이 지배하는 삶입니다.(영광 155). 

내가 보기에 로이드 존스가 이 세상을 이렇게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1,2차에 걸친 세계대전을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 세상을 향한 비관적 관점은 이미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충분히 거론된 것이며, 신학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의 위기를 지적한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이미 충분하게 걸러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비판은 역사 낙관주의에 대한 경계일 뿐이지 세상 자체에 대한 부정은 결코 아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매우 정확하게 주장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관점은 부분에 치우쳐 버리고 말았다. 내 판단이 옳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독자들에게 인내심을 구하면서 필자는 아무래도 여기서 두 가지 조직신학적 질문을 제시해야겠다. 하나는 성서가 인간과 세상의 죄를 단정적으로, 또는 숙명주의적으로 규정하는가,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그런 죄를 실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상당히 힘든 수고를 거쳐야 하는데, 여기서는 평자의 생각을 짧게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성서가 인간의 죄를 매우 준열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숙명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만약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한 하나님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사실 창조론과 죄론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가 놓여 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 신학이 원죄와 타락한 천사를 언급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다른 항목도 그렇지만 여기에도 역시 아직 완전한 대답이 주어진 건 아니다. 설교와 연관해서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방향을 잡는다면 우리는 최소한 죄론의 오류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신뢰하는 설교자는 죄의 일반화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론과 연관된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신학적 착상에 기대서 칭의가 법(法)적인 차원이며, 칼빈에 기대서 전가(轉嫁)의 차원이지 실제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인정받을 뿐이며, 예수의 의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 행위를 다루는 성화도 역시 이런 구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칭의를 실질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교인들이 된다면 전쟁의 가능성도 없고 대기 오염의 문제도 없을 것이며, 경제적 착취나 정치적 독재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알콜 중독이나 성범죄나 불경한 자나 이혼이나 기타 일체의 끔찍한 일들이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복음의 핵심 58). 

독자 여러분은 로이드 존스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시는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로이드 존스가 부정하고 있는 행위들을 떨쳐낼 수는 없다. 외람되게 한 마디 더 한다면, 세상에 복음이 가득해도 세상이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으며, 표면적으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죽어야 죄로부터 해방된다.(롬 6:7).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온갖 죄악들이 사라진다니, 얼마나 ‘나이브’한 생각인가. 물론 로이드 존스는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교인”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이런 단서 자체도 얼마나 낭만적인지 모르겠다. 신약공동체가 모든 점에서 완벽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는 17세기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 세상이 깨끗해 졌으며, 18세기의 웨슬레 형제를 중심으로 한 감리교도들에 의해서 영국이 새로워졌고, “미국의 자유”가 곧 17,18세기 신앙인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걸 보면(담대한 36) 그는 그런 유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신약성서적인 교인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연 그의 생각이 옳을까? 청교도의 후예인 미국의 자유가 어떻게 세계의 자유를 훼손하고 있는지 로이드 존스가 가장 왕성하게 설교하던 1960년대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가 보다. 

작은 부정, 큰 긍정
설교자들은 이 세상의 죄 문제와 연관해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 맥락을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조직신학의 각 항목은 독립적으로 폐쇄된 이론 체제가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성 안에서 실제적으로 발효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해명이다. 설교자가 이 유기적 관계를 놓치게 되면 기독교의 복음은 그 순간에 말 그대로 도그마로 전락한다. 이 관계를 우리 주제와 연관해서 설명한다면, 기독교는 이미 창세기가 타락의 비극보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앞에 놓고 있듯이 은총과 창조의 빛에서만 죄를 바라본다. “복음을 듣기에 앞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은 죄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입니다.”(승리 266)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조직신학 항목 사이의 유기적 관계성을 충분하게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은총과 창조의 빛에서 죄를 본다는 말은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큰 긍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롬 5:20)라는 바울의 고백에 비추어본다고 하더라도 이 긍정은 부정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죄를 모른 척 해도 된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은 이 대목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죄는 은총의 빛에서만 소극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죄는 작은 부정이며, 은총은 큰 긍정이다. 죄까지 은총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이런 복음의 신비를 설교자들이 직시하지 못하면 기독교 구원론은 독단으로, 심지어는 패권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평자가 설교의 길에서 로이드 존스와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서로의 길이 다른 것을 어쩌겠나. 해가 지지 않았던 대영제국의 아들인 그는 죄가 가득한 세상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적극적으로 외치고 있는 반면에, 동방의 조용한 나라의 아들인 평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상 옆에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귀를 기울이자”고 소극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뿜어내는 열정이 부럽기는 하지만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렇게 소극적으로 설교하게 될 것이다. 존재의 신비인 하나님 앞에 직면하면 할수록 현기증이 심해지는 영혼의 병을 앓는 사람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설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내가 간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과 멸망을 교통 정리하듯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 믿으며 뭐 하러 설교하는가, 전국 복음화와 세계 선교는 어쩌자는 건가, 하고 묻지는 마시라. 내가 소극적이어야만 생명의 영인 성령이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나는 예수에게서 배웠다. 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큰 긍정에 내 현재와 미래를, 내 운명을 맡기련다. <정용섭, 기독교사상,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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