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의 정착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이후 민족의 영도자들이 죽고나서부터는 민족적 의지를 집결하기 어려웠다. 이스라엘의 정신은 분산되었으며, 잦은 이민족들의 침입 가운데 불안한 세월을 보냈다. 이럴 즈음에 사사들이 등장하여, 왕정 체제로의 과도기에서 민족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미약하였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타락할 기미만 보이면, 하나님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 되어 가나안의 여러 이방 혼합 종교들과 문화들을 거침없이 수용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바알에 대한 신앙이 혼합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적 혼합은 후에 왕정체제 때에도 그 뿌리를 뽑기 힘들 정도로 이스라엘의 구속구석에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멸절하라신 이방 족속들을 잔존시켰기 때문에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주전 14세기초부터 13세기 말엽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이 마무리되고 부족동맹체제가 형성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마르넵타(Marneptah B.C. 1224-1211년경 재위)의 통치 때에 '바다의 백성들'을 격퇴한 후, 애굽은 제19왕조의 붕괴에 뒤이은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그런 와중에 아시아의 영유지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에 굳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애굽은 곧바로 아시아에 대한 권한을 주장하고 나섰으나(제20왕조) 영구적이지 못했으며 곧이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제21왕조).
1. 주전 13-11세기의 국제 정세
1) 국제적인 패권의 흐름
제19왕조의 라메세스 2세 이후 애굽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애굽이 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던 영지들의 지배권을 물려받을 만한 경쟁국가는 없었다. 힛타이트(Hittilte) 제국은 이미 사라졌고, 주전 13세기에 그 세력의 절정에 달했던 앗시리아는 투쿨티 니누르타 1세(Tukulti Ninurat I)의 암살과 더불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 후 디글랏 빌레셀 1세(B.C. 1116-1078년경)의 치하에서 잠시 소생의 기미가 있었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아람족 때문이었는데, 아람족은 시리아와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나안 정착 초기의 이스라엘은 어떠한 위기에 직면해야 했든간에, 강대국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전을 추구할 수 있었다.
2) 팔레스틴의 상황
이 당시 팔레스틴에는 바다 사람들인 블레셋족과 테케르족이 살고 있었다. 팔레스틴의 해안 지대와 에스드라 엘론 평야를 거쳐 요르단 계곡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에는 블레셋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가자,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로 구성되는 5개 도시권을 그 세력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이곳들은 모두 '전제군주'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은 본래 애굽의 봉신이나 용병으로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애굽의 세력이 약화되자 독립된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였다. 이스라엘은 비록 사사 시대의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통제되는 왕국으로서의 체제는 아직 팔레스틴에선 나타나지 않았다.
2.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일반적 지식
1) 가나안의 문화
가나안의 물질 문명은 주목할 만하다. 도시들은 견고한 방어 시설과 배수 시설을 갖추었고, 이들은 농사뿐만 아니라 통상에도 능한 잔들이어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에게해의 도서 지방과도 교역했다. 그리고 이들은 주로 목재, 직물, 염색공업 등이 발달하였는데 가나안인들의 참된 공적은 문자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주전 3000년경부터 애굽의 글자를 본따서 음절문자를 발전시켰는데 이곳에서 사용된 글잔는 후에 페니키아를 통하여 유럽으로 전해져 알파벳의 토대가 되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라스 샤므라(Ras Shamra)에서 나온 문서로 주전 1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는 설형문자형 알파벳으로 기록된 가나안어의 문서들도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히브리 시(詩)와 유사점이 많은 훌륭한 시형으로 된 가나안의 신화와 서사시의 기록으로서 이것은 가나안의 종교와 제의를 살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2) 가나안의 종교
가나안 땅의 종교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알 종교이다. 바알은 'Lord'라고 불렸으며, 농사의 신으로 비를 몰고 오는 신이었다. 그러나 천둥의 신으로 발전하였으며, 생산을 주관하기도 하였고, 나중에는 전쟁의 신으로도 발전하였다. 바알은 부인인 아세라(Asherah)를 거느리고 있는데 아세라는 가나안어로 아낫(Anat0이라고 불리며 겨울 동안 바알을 품고 있다가 봄에 부활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알신의 죽음과 부활이며, 이것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계의 고사와 소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종교에서 흔히 그렇듯이 제의적인 매음, 동성애, 갖가지 주신제식(酒神祭式)등을 포함한 온갖 퇴폐적인 관습이 성행하였다.
3.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공존 문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그들과의 공존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기에 적당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유목민이 정착 생활을 하는 중간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의 농사는 농사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바알 종교는 밀접하게 다가오게 되었으며, 이것은 야훼 유일 신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와 바알 종교는 성소나 동물의 제사, 농사와 관련된 축제 절기(Harvest Festival) 등 유사한 점이 많았다. 또한 '엘'(El)이라는 신의 이름도 공통으로 사용되었다. 호2:16에서는 "나의 남편, 나의 바알(주인)"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바알이라는 이름마저도 공통으로 사용하였음을 보여 주는 예에 속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시기는 사사 시대이며 가나안 원주민과의 공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시기이기도 하다. 정부 형태는 중앙 통제 국가가 아닌 도시 부족국가로 남아 있었고 각 도시는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된 안식(신12:10; 수11:23; 수14:15; 수22:4; 수23:1)은 오지 않았다.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에게 가시로 남아 있었고, 이스라엘은 협력 관계를 이루어 내지 못하였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5:15-17)는 이스라엘 각 부족간에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런 혼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왕정 시대로 가는 길이었다.
1. 열두 지파 종교연합체제의 성립
여호수아는 가나안 점령이라는 숙원을 달성한 후, 각 지파의 대표를 세겜에 모으고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을 행한다(수24장). 이스라엘 12지파의 공식적인 언약의 복종을 들은 여호수아는 큰 돌을 취하고 그것을 성소 곁의 상수리나무에 세우고 이것을 증거로 삼았다(B.C. 1250년경). 이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12지파 연합체제가 달성되었고 이는 부족적 종교동맹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이 중심지가 세겜에서 실로로 옮겨간 것으로 추측되기는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이들 성소는 본래 가나안 족속들의 종교의식에 사용하였던 것을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의 예배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연합체는 각각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중앙 상소를 중심으로 연 1회씩 각 지파가 교대로 제의의 책임을 지는 조직이다.
2. 전쟁을 알지 못하는 새 세대(삿3:1-4)
가나안 정복 전쟁이 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을 때 본래 반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농경민과 수공업자가 되어 사막의 주거인 장막으로부터 벗어나 반영구적인 가옥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의 원주민 들과 섞여 사는 동안 혼인 관계도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의 구원자 야훼 하나님을 잊게 되었다. 더구나 바알 종교는 농경의 풍요와 자손의 번성을 약속한는 생식 숭배의 음란한 제의를 행하는 부도덕한 종교였다. 전쟁 시대가 다 지난 후 전쟁 후 세대는 바알 신앙에 도취되어 안일과 쾌락에 젖어 야훼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조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주위의 나라들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괴롭힘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을 촉발시킨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전쟁이 이용된 대표적인 경우를 사사기에서 볼 수 있다.
3. 단 지파의 이동
사사기 17,18장에 나타나는 단 지파의 지리적 이동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심각한 종교적 변질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에브라임 지파의 미가가 개인 신당을 만들고 그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떠돌아다니는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게 된다. 단 지파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돌다가 미가의 집에 들러 사적인 종교 운영을 보고 매혹당하여 이 레위인을 보고 함께 동행하도록 한다. 이 예화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기본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요소를 담고 있다. 우선 실로만이 성소로 인정되고 있을 때 미가는 자신의 신당을 만들었다. 레위인은 허락된 도시가 분명히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떠돌아다니며 사적인 제사장 직분을 행하였다. 단 지파는 그들에게 할당된 영역을 이동하고 남의 영역을 탈취하였다. 이러한 단 지파의 이동 이야기는 가나안 정착긴의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혼란을 나타내고 있다.
4. 가나안 정착 초기의 애굽의 침입
B.C. 11세기를 전후하여 애굽의 팔레스틴 침공이 2회 있었다. 메르넵타는 재위 5년에 아스글론, 게셀, 야노암(Yanoam, 이곳은 북방 팔레스틴에 있다)을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었지만 메르넵타가 정복한 대상은 주로 가나안 족속들인 것 같다. 또 라메세스 3세에 의한 침입이 있었는데, 이 전투는 블레셋 지역에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테겔과 블레셋'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자랑한다. 적어도 그가 이스라엘 본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남부 지역에 한정된 전투였음을 알수 있다. 비록 요단 골짜기에 있는 벧산에 이르러 건축물을 세운 기록이 있으나, 이스라엘과의 어떤 갈등도 언급되지는 않는다.
5. 아비멜렉의 유혈극(사사기 8장)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평화는 내부적인 요인에 인해 깨어졌다. 세겜에 있던 기드온의 첩에 의해 태어난 아비멜렉은 정권에 대한 욕심을 부려 그의 형제 70인을 모두 살해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막내 요담이 이 참화에서 벗어나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의 의롭지 못함을 고한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 의해 왕관을 수여받았는데, 그들은 자기의 가문에서 왕이 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비멕렉의 방종을 경험한 세겜 사람들은 다시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된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왕정체제로 가는 과정에서의 이스라엘의 혼돈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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