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씨프리안과 레오1세/마23:9

제이비젼 2017. 5. 16. 23:14





  씨프리안과 레오 1세는 교황권의 강화에 지침을 세운 사람들이다. 씨프리안은 순수한 신학자였으나, 마16:18을 임의로 해석함으로써 로마 감독의 우위권을 인정하였다. 레오 1세는 로마의 감독으로서 처음으로 'Pope'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도 씨프리안처럼 마16:18의 자의적 해석을 근거로 로마의 감독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감독은 공교회의 교황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결론은 결코 그들 자신만의 결과물은 아니었다. 당시 교회의 신학은 여러 분열상이 초래되는 교회의 여건과 세속 권력과의 견제의 필요성 속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가시적인 권좌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복음의 본질은 역사 속에서 결코 변질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보이는 교회의 보여지는 '영적 아버지'로 군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명백한 이단이다. 

 


  교황을 가리키는 용어인 '포프'(Pope)는 '파파'(papa)에서 온 것으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원래 이 명칭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에게 처음으로 붙여졌다가 모든 감독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이것이 공문서(公文書)에서 직명(職名)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의 시리키우스(Siricius 384-398) 감독에게서부터이다. 이것이 로마 감독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렝 1세에게서부터이고, 로마 감독에게만 사용된 것은 그레고리 1세부터이다. 그래서 그레고리 1세를 초대 교황으로 부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말기에 있어서 교황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것은 씨프리안과 레오 1세였다.


1. 씨프리안


 1) 생애

 씨프리안(T.C.Cyprian)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문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수사학 교사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246년 45세의 나이로 개종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248년 카르타고 시민들의 추천으로 감독이 되었다. 그는 250년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로 사막에 피신하여 서신으로 교인들을 지도하다가 박해 후 귀환하여 목회와 저술에 힘썼다. 그는 노바투스(Novatus)와 논쟁하면서 그의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발레리안(Valerian) 황제의 박해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터톨리안(Tertullianus) 다음가는 카르타고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2) 사상

 씨프리안의 사상은 더툴리안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노바투스와의 논쟁을 통해 특유의 교회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노바투스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성년이 되어 개종했으며, 고위직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데시우스 박해 때 순교한 파비안(Fabian) 감독의 비어 있는 자리를 약 1년간 대리했다. 그는 박해 기간 동안 배교한 자들(lapsed)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는데, 그로 인하여 로마 감독 피선에서 떨어지고 온건파인 코넬리우스(Cornelius)가 선출되었다. 노바투스는 교회에 사죄권이 없기 때문에 배교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주장했고 코넬리우스는 감독에게 사죄권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바투스의 입장에 대해 씨프리안은 「배교자들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 어느 인간도 배교 행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리는 없으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배교자들을 거절할 권리가 감독에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교회가 평화를 찾자 입장을 약간 바꾸어 감독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므로 고백자들(Confessors)의 자문에 따라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교회의 통일성에 관하여」라는 저술을 통하여 감독과 장로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교회일치의 기준을 감독에게 두었다. 그는 감독직의 사도적 전승을 강조했으나 로마 감독의 우위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마16:18에 근거하여 교인의 자격을 감독에게 복종하는 데 두었다. 이러한 노바투스와 씨프리안의 논쟁은 교회의 순수성과 용서하는 사랑 중 어느 것이 교회의 우선적인 특징인가 하는 문제로, 공교회는 용서하는 사랑(씨프리안의 입장)을 선택했던 것이다. 


2. 레오 1세


 1) 생애

 레오 1세(Leo I=Leo the Great 390-461)는 440-461년까지 로마 감독으로 재직했다. 그는 로마 출신으로 집사직에 이르기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는 웅변가요 설교가이며 문학과 정치에 뛰어났다. 그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기회들을 이용하여 로마의 교권을 확장시키고 그 근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2) 사상

 레오는 220년에 로마 감독이었던 칼릭스투스(Calixtus)가 마16:18-19을 사용하여 로마의 권위를 주장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터툴리안의 반대로 인정하지 못했었다. 한편 이 주장은 레오 이전의 다마수스(Damasus) 감독도 주장하던 것이다. 레오는 로마 감독이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권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신성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위한 것이요, 이 나라의 수도에 수사도(首使徒)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편지, 칙서, 설교 등에서 의도적으로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 글을 쓰는 것처럼 했다. 한편 에베소, 칼케돈 회의는 이러한 레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방의 아클레이야, 라벤나, 밀라노의 감독, 북아프리카 감독들도 모두 그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훈족(Huns)의 침입과 반달족의 침입 등을 외교회담을 통해 불리치는 등의 활약을 하면서 결국 발레시안(Valesian Ⅲ) 황제의 로마 감독 옹호칙령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레오의 주장은 씨프리안의 그것보다 더 발전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씨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한 반면, 레오는 교회의 통솔권에 대해 로마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3. 교황권 강화 과정


 1) 교황 이전

 로마의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2세기에 박해에 대처하면서 감독직의 사도적 계승설을 주장했다. 그 뒤를 이어 씨프리안은 베드로가 세운 로마 교회는 카톨릭 교회의 모(母)교회임과 감독에 의해 정통성이 보장받는다는 주장을 했다. 계속되어진 일련의 회의들을 통하여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325년 니케아), 콘스탄티노플(381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예루살렘(451년 칼케돈)의 감독에게 '대감독'의 칭호가 붙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로마와 그외의 도시들을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양대 감독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2) 교황권 강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로마의 감독이 교황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즉 제국의 수도에 위치함, 로마 황제의 후원,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 레오의 활약, 발렌시아 3세의 칙령, 로마 감독의 연할 증대, 여러 사업의 주도적인 역할 감당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 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①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전의 소산물이며 편의와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② 성경적인 권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권위를 가져다주었으며, 정치·종교적 타락을 가져왔다. ③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황제의 권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황 제도가 성경(마23:9)에 배치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에 의해서 세워지는 직책의 권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권위, 말씀의 권위가 주장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1. 시리키우스(Siriclus) 

 384-398년까지 다마수스의 뒤를 이은 로마의 주교. 그의 행적 가운데 하나는 분명한 진정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교황교령(papal Decretals)을 최초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 교령은 385년 2월 11일에 반포되었다. 교령 조항들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 항목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① 교회로 전향하는 아리우스파들은 재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② 성인들에게는 세례가 부활절과 오순절에만 베풀어져야 한다. ③ 배교자, 이전의 생활로 돌아간 용서받은 죄인들, 간음죄가 있는 수사들과 수녀들은 참회 생활을 계속해야 하며 임종시에나 용서받을 수 있다. ④ 그 누구도 다른 사람과 약혼했던 처녀에게 장가들지 못한다. ⑤ 사제들과 부제들은 서품되기 이전에 결혼한 아내나 그 밖의 여자들과의 육체적 관계가 금지된다. ⑥ 두 번 결혼한 사람, 과부와 결혼한 사람, 참회 기간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서품될 수 없다. ⑦ 수사들은 만일 그럴 만한 훌륭한 동기가 있다면 서품될 수 있다.


2.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

 황제 데시우스의 통치 기간(A.D.249-251)은 로마 연대기에서 가장 짧은 것 중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로마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옛 로마인의 엄격한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 또 그것을 시인해 줄 옛 종교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꼈다. 이에 기독교를 진압하기 위해 제국 전역의 치안관들에게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자들이 그들 조상의 종교로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무거운 형벌을 내려 압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박해는 그 어떤 박해보다도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로마의 주교 파비아누스가 최초의 순교자들 중에 속했다. 이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였으며 고문당했다. 반면 신앙을 변절한 배교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고트족의 침입으로 박해의 기간은 짧았다. 한편 데시우스 박해의 여파가 남긴 직접적인 결과는 미적지근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말끔히 제거해 주었고, 발레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닥칠 더 가혹한 투쟁을 위해 그 시련을 거쳐 연단된 사람들을 남겨 놓았다.


3. 배교자(背敎者, lapsed)

 초대교회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에 따라 개인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에 성경을 버린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다. 박해에 뒤이어 일어난 카톨릭과 도나투스파간의 논쟁은 도나투스파가 카르타고의 주교인 카이킬리아누스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이유는 카이킬리아누스가 배교자들에 의해 서품되었다는 것이었다.


4.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

 라틴 교부들 중 최초의 사람이며 전문적인 기독교 라틴어를 창조해낸 사람이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출생하였으며,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40세 즈음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터툴리안의 신학적 이론은 모두 다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일종의 변증 신학이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취득시효'(praescriptio) 이론을 체계화시켰고, 삼위일체 이론과 기독론을 확립시켰다. 또한 그는 원죄의 유전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이론으로서 영혼의 유전설(traucianism)을 강조하였다. 라틴신학의 아버지로서 터툴리안은 기독교의 신학화의 길잡이로서 당시의 교회들에게보다 후대의 교회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5. 감독직의 사도적 전승

 감독직 또는 3종류의 교회 직제로 구성된 교회의 통치 체제를 가리키는 용어인 감독 제도는 '사도적인 계승'이라는 사상과 직결되어 있다. 이 말은 감독들의 직무는 예수의 제자들(사도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 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2세기의 감독들이 하는 일은 자기 회중의 영적인 문제를 돌보고 전례를 침례하는 임무와 세례, 성찬식, 안수, 사면, 교회재정 관리, 논쟁과 송사에 대한 해결 등의 무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4세기에 교회가 국가로부터 인준을 받자 감독은 교회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세속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지닌 인물이 되었다. 이후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감독으로 하여금 한 교구를 통치하게 하였고, 그 아래 장로, 집사를 두었다. 이에 다라 감독은 교회의 회원을 확증하는 일과 사제 임명 그리고 다른 감독의 취임을 인정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6. 칼릭스투스(G.Calixtus)

 17세기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멜란히톤 신학의 계승자이며 당시 독일 '혼합주의'의 대변자. 그는 일생 동안 유지하고 있었던 평화주의적 사상 경향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사상의 중심은 신학이란 그 첫째 목적이 순전한 교회를 찾는 데 있다기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고취되어있다. 이에 그는 특수 신학 분야인 신학적 윤리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신학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또한 모든 기독교 신조들을 합일시키려고 열망했으며, 분석적 방법을 도입한 과학적 교의학으로도 유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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