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어기스틴과 펠라기우스/롬13:14

제이비젼 2017. 5. 16. 23:17





  어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모두 천재적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학 노선은 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타고난 천재성으로 자신의 죄악된 과거를 심도있게 반성함과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집요한 고민 끝에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그의 자유스러운 기질과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관을 통하여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두 사람의 사상은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대결은 숙명적이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신학 대결에서 어거스틴이 승리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장 정밀하게 이해했던 사도 바울의 복음을 후대에 전수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신학사상은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하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현저한 타락에 대한 처방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방 교회는 주지적(主知的) 성향이 강해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반면에 서방 교회는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성향이 강해서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 죄와 구원의 문제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의 중심 주제였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력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마지막 인물이면서 또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역사철학과 은총교리는 각각 중세와 종교개혁의 사상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의 중요성은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들이 그들의 사상적 근원을 어거스틴에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 어거스틴

  

 1) 생애

 어거스틴(Aurellius Augustinus 354-430)은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의 신앙적인 감화 속에서 자랐다. 그는 라틴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카르타고에 가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품행이 좋지 않아서 이때 어떤 여자와 동거하면서 372년에 사생아인 아데오타투스(Adeotatus, 하나님의 선물)를 낳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그는 심한 영적 갈등을 겪다가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거쳐 마니교(Manichaeism)에 입문하여 8년 동안 '듣는 자'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심취했다가 383년 로마와 밀라노로 여행하다가 암브로스를 만나 감화를 받았다. 그는 심한 영적 고민을 하던중 담 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펴서 읽어라'(tolle lege)라는 음성을 듣고 성경을 펴서 롬13:11-14을 읽고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387년에 세례를 받고 392년에 힙포(Hippo)의 장로가, 395년에는 감독이 되었다. 그는 도나투스(Donatus), 펠라기우스(Pelagius) 등과 논쟁하였고, 「참회록」(Confession),  「신의 도성」(Civitas Dei), 「엔키리디온 라우렌티움」(Enkiridion Laulentium : 교리개요) 등을 저술했다.


 2) 사상

 어거스틴은 라틴 신학을 집대성했다. 그의 사상은 포용하는 바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모순되는 부분도 많았다. 또한 신플라톤주의나 마니교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었다. 어거스틴의 사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론에 있어서 그는 삼위일체와 예정을 믿었고 하나님을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체험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 사상은 중세 신비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② 인간론에 있어서 그는 원죄와 의지의 부패, 무능력 그리고 영혼유전설(Traducianism)을 믿었다. 한편 그는 마니교적 이원론의 영향과 그르이 개인적 체험으로 결혼이나 출산 등을 정죄했다. ③ 기독론에 있어서 그는 신인양성, 대속적 죽음 그리고 유일한 중보자 되심을 믿었다. ④ 구원론에 있어서 그는 은총에 의한 구원, 행위 구원의 부정, 불가항력적 은총을 주장했다. ⑤ 교회론은 도나투스와의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교회를 가견 교회와 불가견 교회로 나누었고, 카톨릭 신자됨을 구원의 요건으로 보았다. 또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했고 교회의 권위도 크게 강조했다. 


2. 펠라기우스


 1) 생애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는 영국 출신의 수도사로서 성품이 온유하며 품행이 단정했다. 그는 매우 명석하고 학식이 많았는데 바울 서신에 대한 라틴어 주석을 쓸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자유스러운 면도 있었다. 어거스틴도 그의 인물됨을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믿었으며 헬라 신학적 사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5세기초에 로마로 와서 도덕적 부패를 본 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힘썼다. 그는 그러한 부패의 원인이 은혜에만 매달리고 하나님이 주신 선(善)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아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행 능력을 강조했다.


 2) 사상

 그의 사상은 그의 감화로 신자가 된 켈레스티우스(Cellestius)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그는 아담의 범죄는 후손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오늘날의 인류는 범죄 이전의 야담과 같은 상태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아담의 범죄를 흉내냄으로써 범죄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부패와 무능력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마니교에 양보하는 것이라고 보고 인간의 노력과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3)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이들은 펠라기우스처럼 인류의 죄악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이들은 어거스틴의 주장을 따라 원죄와 은혜에 의한 구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고 각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은혜의 수납여부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캇시아누스(Cassianus)와 파우스투스(Faustus)가 그 대표적인 주장자이다.


3.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영과 율법에 관하여」(on the spirit and letter), 「자연과 은혜에 관하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주장했다. 그는 팔레스틴의 지방 대회에(415) 자신의 견해를 제출했으나 거부당하고, 416년의 북아프리카 지방 대회에서도 거부당했다. 431년 에베소 회의는 네스토리우스설을 거부하면서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한편 529년의 오렌지 지방 대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펠라기우스는 원죄와 그것의 유전을 부인했으나 어거스틴은 인정했다. ②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결과로 보았으나 어거스틴은 죄의 결과로 보았다. ③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 능력을 인정했으나 어거스틴은 그것을 부인하고 은총에 근거한 구원을 주장했다. ④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어거스틴은 불가항력적이라고 하였다. ⑤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라면 어거스틴의 주장은 하나님 중심의 정통주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대신학자의 모습과 경건한 평신도의 모습을 함께 발견한다. 그는 동방의 주지주의적 성향과 서방의 실천주의적 성향을 종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굳게 세운 '은총론'이다. 그는 그때까지 무시되었던 바울의 은총론을 다시 발견했고 그것은 루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이런 귀한 유산을 잘 보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매달려 삶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삶 가운데 그 은혜받은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 마니교(敎)


 1) 기원과 주요 내용

 마니교는 3세기초 바빌로니아 사람 '마니'(Manes)가 조로아스터교의 기초 위에 기독교·바빌로니아의 고대 종교·그리스의 신비철학 그리고 인도의 종교 사상 등을 혼합해서 만들어낸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선악이원론, 즉 세계는 선신(善神) 아후라마즈다와 악신(惡神) 아흐리만과의 대립이라고 생각하는데, 궁극적으로는 선신 아후라마즈다에 의한 인간 구제를 믿는다.

 그러나 마니교는 이와 달리 철저한 선악이원론, 다시 말해서 선악 두 신의 영원한 대립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선악의 투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 욕망을 극복,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신도들에게 철저한 불살생계(不殺生戒)의 실천을 요구한다. 그 밖에 인도 문화의 영향으로 윤회사상이 나타난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마니교는 박해를 당하였고, 이를 피해 국외로 도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2) 발전

 마니교는 적용성이 풍부해서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종교와 타협했으므로 아시아·아프리카·유럽까지 전파되었다.

 또한 694년에는 마니교가 중국으로 전해졌다. 도교의 경전과 비슷한 한역경전을 만들어 선전했기 때문에 많은 신자를 얻을 수 있었다. 현종(玄宗)의 치세(712-756) 때부터 이미 사교(邪敎)라 하여 법률적으로 금지되었던 마니교는 중국에서는 서역인이나 위구르족(8세기 중엽 마니교 전파됨) 등에 의해 교세를 유지해 나갔다.


 3) 평가

 마니교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마니교는 교리(敎理)와 철저한 조직·제도의 일관성으로 통일성과 독특한 성격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세계적인 종교들 중의 하나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니교는 하나의 교회였으며 신도들은 그들 자신을 '거룩한 종교' 또는 '거룩한 교회'라고 일컬었다.


2. 「신의 도성」(The City of God)

 어거스틴은 신의 예정 속에서의 로마 제국의 자리를 재평가할 목적으로 413-427년의 기간동안 「신의 도성」을 집필하였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이때 변화를 겪는데, 그 중요한 요인은 어거스틴이 인간의 삶 속에서와 모든 세속제도들 가운데서 죄의 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속의 필요성, 인간의 은총의 필요성 등에 큰 강조를 하게 된 것이다.

 「신의 도성」에서의 국가는 로마 제국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성경의 구속사의 큰 범주들에 따라 자신의 국가관을 다시 정리한 후에 그 국가를 구속사의 시각에서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사상들은 로마의 여러 황제들에 의해 기독교가 채택된 이후인 4세기 동안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던 로마 제국에 대한 견해들을 거부한 것으로 파악될 경우에만 이해될 수 있다.

 베르길리우스 시대 이후 영원히 지속될 국가로 표현되어 온로마 제국은 종말시까지 계속될 것이며, 구원의 가능성과 결부된 역사 속에서 신적 목적을 이행할 필수적인 도구라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은 당시의 일반화된 국가관에서 이탈된 사상을 갖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통하여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영원히 계속될 운명을 허락받지 못하게 되었고, 구속사의 영역에서 제거되었다.


3. 도나투스주의와의 논쟁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규율(discipline) 문제로 인해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최초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도나투스주의는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에서의 이단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에 대해서 그가 그리스도를 분열시키려 했듯이 도나투스는 자기 자신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에 의해 갈라져 나갔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원래 수년 동안 정통교회에서 먼 한 분열주의자로 마니교에 심취했던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면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 도나투스주의로 오염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도나투스주의의 본질을 분석할 수 있었다.

 어거스틴은 393년 「Abecedarium」이란 글을 썼다. 이것은 운문(韻文)으로 이루어졌으며, 알파벳의 숫자와 상용하는 각 행(行)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내용은 도나투스주의의 역사와 과오 그리고 도나투스파에 대한 카톨릭측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자들을 그물(교회)을 찢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교만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면서 제단을 거스려 제단을 세우고 이 꼴로 분열을 자행하네 배교에 대하여 싸운다 하면서 자기를 악마에게 넘겨 주네"

 어거스틴의 명성은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 얻어졌고, 설교·서한·찬미가들은 정교한 저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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